53화 보스턴 레드삭스 02
“포크볼이 아니라 스플리터입니다.”
반헬 투수 코치의 한마디에 호이스 감독이 미간을 좁혔다.
“스플리터라. 우리 팀과 상성이 좋지 않은 공이군.”
한때 보스턴의 영웅이었던 로저 클레멘스.
그는 뉴욕 양키스로 유니폼을 갈아입은 뒤 스플리터를 앞세워 보스턴을 침몰시켰다.
호이스 감독이 상성이 좋지 않다고 말한 것은 로저 클레멘스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 때문이었다.
김민은 배터 박스에 들어선 타자를 보곤 모자를 고쳐 썼다.
‘라파엘. 괴물의 등장이군.’
신화에 나오는 영웅들은 괴물을 퇴치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전설의 무기를 준비하는가 하면 미인이나 보물을 미끼로 사용하기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어떤 영웅은 스스로 미끼가 되는 위험마저 감수했다.
김민은 라파엘이라는 괴물을 퇴치하기 위한 무기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진 구종으로는 라파엘을 누를 수 없어.’
라파엘을 잡으려면 적어도 랜디 존슨의 알고도 칠 수 없는 패스트볼이나 페드로 마르티네스의 마법처럼 떨어지는 써클체인지업이 필요했다.
하지만 김민에게는 그런 구종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미끼를 던지기로 했다.
- 가운데 패스트볼.
초구 사인에 록튼이 멈칫했다.
‘가운데 패스트볼이라니! 킴, 절대 무리야.’
그는 다시 한번 사인을 확인해 달라는 사인을 보냈다.
그러나 김민은 볼 배합을 바꾸지 않았다.
- 가운데 패스트볼.
그는 가운데 패스트볼을 고집했다.
록튼은 당장이라도 마운드로 달려 나가고 싶었다.
‘무슨 생각인 거야! 상대는 라파엘이라고!’
그는 재차 사인을 내려고 했지만, 두 번 연속 투수의 사인을 거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했다.
‘하아…… 그대로 가는 수밖에 없는 건가? 젠장, 초구에 홈런이 나올지도 모르겠어.’
라파엘이라는 괴물을 상대로 가운데 스트라이크를 던진다는 것은 절벽에서 번지 점프를 시도하는 것 이상으로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김민은 과감하게 그것을 선택했다.
‘존에서 빠지는 공으로는 라파엘을 유혹할 수 없어. 적어도 존에는 들어가야 해.’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이 포수 미트를 향해 날아갔다.
슉!
라파엘은 가운데로 날아오는 공을 똑똑히 보았다.
‘한가운데 패스트볼? 아니야. 살짝 낮은 코스야.’
그가 대기 타석에서 본 김민은 제구력이 뛰어난 투수였다.
‘낮다고 해도 한가운데라니, 실투인가? 아니, 그럴 리 없어. 놈은 좌우 로케이션을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제구력을 가지고 있다.’
라파엘은 이 공이 가운데에서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스플리터.’
그는 히팅 포인트를 평소보다 조금 낮게 잡았다.
이것은 떨어지는 공을 퍼 올리기 위한 준비였다.
따악!
배트에 맞은 공이 높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라파엘은 혀를 찼다.
‘속았군. 떨어지기는커녕 떠올랐어.’
손끝에서 전해진 감각 역시 좋지 못했다.
공이 멀리 날아갔지만, 아마도 펜스를 넘지 못할 것이다.
“라파엘! 초구를 공략했습니다! 타구가 높이 떠오릅니다. 이것은 큽니다!”
“중견수가 뒤로 가는군요. 워닝 트랙을 지났습니다. 잡을 수 있을까요?”
중견수 머레이는 워닝 트랙을 확인하고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제발, 넘어가지만 마라.’
그의 뛰어난 수비는 지난 경기에서도 김민을 여러 차례 도와준 적이 있었다.
높이 떠올랐던 공이 빠르게 떨어졌다.
‘온다!’
머레이는 펜스를 등진 채 글러브를 들었다.
퍽.
글러브에 들어온 공이 좋은 소리를 냈다.
‘잡았어!’
머레이는 글러브를 번쩍 들었다.
“중견수 플라이 아웃!”
라파엘의 타구는 120m가 넘는 비거리를 기록했지만, 끝내 펜스를 넘지 못했다.
“머레이! 좋은 수비입니다!”
“빠르고 과감한 판단이 돋보이는 수비였습니다.”
김민은 글러브를 들어 머레이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머레이 파인 플레이야. 그건 그렇고…… 미끼를 제대로 물었다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멀리 가다니, 괴물은 괴물이군.’
그는 물론 록튼도 라파엘의 파워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록튼이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며 김민에게 물었다.
“제대로 맞지 않은 거 맞지?”
김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빗맞은 타구였어.”
“그런데도 저기까지 날아가는 건가?”
“정타로 맞았으면 아마 전광판을 때렸을 거야.”
록튼이 마스크를 벗으며 말했다.
“무시무시한 파워군.”
김민은 그 파워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 스테로이드.
그는 라파엘과 같은 타자들이 악마의 힘을 빌린 괴물들이라고 생각했다.
이반 감독은 김민의 투구에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1회 초를 잘 막아 냈군.”
“라파엘을 상대할 때는 위험했습니다.”
“난 과감한 승부였다고 생각하는데? 아닌가?”
“보통 투수라면 저렇게 던지지 않습니다.”
블렛소 투수 코치는 살짝 불안한 느낌을 받았다.
‘라파엘에게 던진 공…… 가운데로 들어가는 패스트볼이었어. 설마 라파엘에 대한 압박감 때문에 제구가 흔들린 것은 아니겠지?’
그는 김민의 시그니처가 바깥쪽과 안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로케이션이라고 생각했다.
‘킴, 제구를 바로잡지 못하면 보스턴을 넘어설 수 없다.’
1회 말.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는 그들답지 않게 빠른 득점에 성공했다.
“노라가 이번 시즌 첫 에러를 기록합니다!”
“이번 실책은 인조잔디의 바운드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해 발생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탬파베이의 과감한 베이스 러닝도 칭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상대 실책이 나온 직후 바로 홈으로 파고들어 득점에 성공했습니다.”
트로피나카 필드의 인조 잔디는 원정팀 내야수들에게 불규칙 바운드라는 불쾌한 선물을 선사하곤 했다.
“미안, 내 잘못이야.”
노라는 글러브를 들어 발렌타인에게 미안함을 표시했다.
“괜찮아.”
발렌타인은 경험 많은 투수답게 고개를 끄덕인 뒤 투구에 집중했다.
“스윙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삼구삼진.
발렌타인은 실책과 실점에서 완벽하게 회복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다음 타석에서 지명타자로 나선 티노에게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를 맞고 말았다.
“적시타가 터졌습니다! 주자 모두 홈에 들어옵니다!”
“티노, 싱커를 제대로 노렸습니다.”
보스턴에게 티노의 적시타는 예상하지 못한 일격이었다.
“허! 1회 말 3점인가?”
“오늘 경기를 너무 쉽게 생각했습니다.”
스윕(시리즈 완승)을 노린 보스턴이었지만, 탬파베이의 반격은 매서웠다.
1회에만 3실점.
김민은 오랜만에 타선의 지원을 등에 업고 마운드에 오를 수 있었다.
‘3점이라. 1회부터 든든한 지원이군.’
그는 고개를 돌려 전광판을 확인했다.
‘이번 회에 상대해야하는 타순은 4, 5, 6번…… 모두 장타력이 있는 타자들이군.’
라파엘만큼 위협적이진 않았지만, 보스턴의 4, 5, 6번은 무시할 수 없는 타자들이었다.
딱!
날카로운 타격음과 함께 타구가 2와 3루 사이를 빠져나갔다.
“그란데! 카운트 2-2에서 멋진 안타를 뽑아냅니다.”
“지난해 3할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습니다. 훌륭한 배트 컨트롤입니다.”
김민은 선두 타자에게 안타를 맞은 뒤 로진백을 만졌다.
‘빠져나가는 슬라이더를 완전히 잡아당겼어. 3할을 치는 4번 타자 괴물이나 다름이 없군.’
그는 보스턴 타선이 산 넘어 산이라고 생각했다.
“킴, 괜찮을까요?”
설리반의 물음에 에두아르도가 대답했다.
“보스턴을 상대로 괜찮은 투수가 몇이나 있겠어. 6이닝 4실점. 그것만 해 주면 괜찮은 투구야.”
이반 감독도 에두아르도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킴에게 완봉을 바라는 것은 무리겠지. 그가 적당히 버티는 동안 발렌타인을 강판시키면 우리가 이길 수 있어.’
그는 적어도 6, 7점은 뽑아야 오늘 경기를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다음 타자는 닉입니다! 그는 지난 시즌 0.283의 타율과 22개의 홈런, 89타점을 기록한 준수한 타자입니다.”
“닉은 이번 시즌도 좋습니다. 주간 타율이 0.331이나 됩니다.”
“킴에게는 또 하나의 관문이군요.”
“그렇습니다.”
닉의 성적은 탬파베이 4번 타자 그레이를 압도했다.
‘하위권 팀에 가면 3, 4번을 칠 수 있는 5번이군.’
김민은 초구 사인을 낸 뒤 그립을 고쳐 잡았다.
‘이번에는 바깥쪽으로 간다.’
슉!
94마일(151km) 패스트볼이 바깥쪽 낮은 코너를 노렸다.
닉은 그 공을 가볍게 1루 방향으로 밀었다.
탁!
“파울!”
닉은 1루 라인을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타구를 보곤 아쉬움에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아. 10cm만 안으로 들어갔으면 페어인데 말이야.”
김민에게 이번 타구는 위험천만한 타구였다.
‘코너로 완벽하게 들어갔는데 그걸 쳐 내다니…… 뭐, 이런 타선이 다 있어. 마치 지뢰밭을 걷고 있는 느낌이군.’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공을 넘겨받았다.
탬파베이의 1선발 부르스와 2선발 렉터는 나란히 앉아 김민의 투구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 친구 얼마나 버틸 것 같아?”
“첫 실점 말인가?”
“그래.”
렉터가 망설일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이번 회지.”
“그렇게 보이나?”
“1회는 운이 좋았을 뿐이야. 부르스도 봤잖아. 라파엘의 타구가 펜스 앞까지 날아가는 것 말이야.”
부르스가 타자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래도 우리 팀 투수인데 이번 회 실점은 박한 평가 아닌가?”
“평가를 할 때는 냉정하게. 그게 내 철칙이야.”
그들은 보스턴 타선을 가장 최근에 상대한 투수들이었다. 덕분에 그들은 보스턴 타선이 얼마나 강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딱!
두 번째 타구도 날카로웠다.
“파울!”
닉은 타구가 잇달아 1루 라인 근처에 떨어지자 혀를 찼다.
‘젠장,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아.’
하나도 아니고 둘.
그것도 모두 라인에 떨어지는 아슬아슬한 파울볼.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힘들었다.
‘놈이 날 가지고 노는 건가?’
그는 김민이 두 번의 파울을 의도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민은 의도적으로 파울볼을 만들 수 있는 능력자가 아니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바깥쪽 코너에 패스트볼을 꽂아 넣었을 뿐이었다.
‘코너를 찌른 공을 모두 때려냈군. 코너에 넣는 것만으로는 이 괴물을 잡아낼 수가 없겠어.’
김민은 1번 타자 노라에게 사용했던 볼 배합을 들고 나왔다.
슉!
안쪽을 깊이 찌르는 94마일(151km) 패스트볼.
닉은 미간을 좁혔다.
‘바깥쪽으로 붙인 다음에 안쪽! 로케이션 승부인가? 그 승부 받아 주지!’
그는 몸을 움츠리면서 안쪽 공을 향해 배트를 내밀었다.
‘힘을 빼고, 가볍게 당긴다.’
록튼은 닉의 타격 기술을 보곤 혀를 찼다.
‘배트가 나가면서 몸의 중심이 이동하고 있어. 이게 가능한 건가?’
닉의 타격 기술은 마이너리그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탁!
배트 안쪽에 맞은 공이 그 자리에서 떠올랐다.
닉은 자신의 스윙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 문제가 아니야. 마지막 순간에 공이 떠올랐어.’
그의 눈은 정확했다.
이번 패스트볼은 김민이 오늘 던진 공 중 그 움직임이 가장 좋았다.
록튼이 미트를 앞으로 내밀자 공이 그 안에 떨어졌다.
팡!
“닉, 포수 파울 플라이 아웃입니다.”
“로케이션 승부에 완전히 말렸군요. 킴, 지난 경기에 이어 좋은 볼 배합을 가져가고 있습니다.”
김민은 첫 번째 아웃 카운트를 잡곤 땀을 닦았다.
‘아웃 카운트를 하나밖에 못 잡았는데, 1이닝을 끝까지 던진 느낌이군.’
이반 감독은 김민이 아웃 카운트를 잡아내자 가볍게 박수를 쳤다.
“나이스 피칭.”
평범한 포수 파울 플라이 같았지만, 그는 이 하나의 아웃 카운트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공격의 맥을 끊지 못했다면, 보스턴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렸을지도 모른다.’
호이스 감독은 반대로 페이스를 살리지 못했다며 진한 아쉬움을 표현했다.
“반헬, 저 친구 스플리터를 던지는 게 확실한가?”
“스카우트 리포터에 따르면 확실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번 회에는 하나도 던지지 않는 건가?”
“그,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김민은 2회 초 패스트볼과 커터 두 가지 구종만을 던지고 있었다.
“다음 타자는 6번 타자 헬리오입니다.”
헬리오는 발이 빠르고 타격 센스가 좋은 선수였다.
“리그 중상위권를 노릴 수 있는 타율, 중심 타선에 설 수 있는 장타력, 그리고 언제든 20도루를 노릴 수 있는 발. 헬리오스는 보스턴에서 밸런스가 가장 좋아.”
그를 높게 평가한 인물은 부르스였다.
2선발 렉터가 그의 말을 받았다.
“나도 저 친구는 상대하는 게 꽤 까다롭더라고. 특히 휘어져 나가는 공에 강해.”
헬리오는 지난 두 경기에서 두 투수를 상대로 6타수 3안타 타율 5할을 기록했다.
“킴도 쉽지 않을 거야.”
“하긴 주무기 중 하나가 커터지?”
김민은 철저히 바깥쪽으로 투구했다.
초구로 패스트볼, 두 번째도 패스트볼. 세 번째는 떨어지는 스플리터.
그는 헬리오의 장점을 알고 있다는 듯 횡으로 변하는 커터나 슬라이더를 던지지 않았다.
“킴이 로케이션을 사용하지 않는군.”
“흠, 닉이나 노라와는 다르다는 건가?”
김민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헬리오가 좋은 타자지만 두 타자에 비하면 클래스가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바깥쪽만으로도 잡을 수 있어.’
그는 고집스럽게 바깥쪽으로 공을 던졌고, 다섯 번째 공으로 삼진을 잡아낼 수 있었다.
“스윙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바깥쪽 높은 코스를 공략한 93마일(148km) 패스트볼에 삼진.
헬리오는 배트를 강하게 내리쳤다.
“젠장!”
보스턴에게 그나마 다행인 것은 헬리오가 삼진을 당하는 순간 1루 주자 그란델이 2루 도루에 성공했다는 사실이었다.
“투 아웃 주자 2루입니다.”
“보스턴으로서는 어떻게든 이 기회를 살려야 합니다.”
안타 하나면 득점.
렉터는 여기서 안타가 나올 것 같다고 생각했다.
“큰 산을 두 개 넘고, 작은 산 하나. 대부분의 투수가 여기서 방심하게 되지. 킴도 다르지 않을 거야.”
그러나 김민에게 방심은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다. 그는 집중력 있는 투구로 7번 타자 넬슨을 잡아냈다.
“넬슨! 3루 땅볼로 아웃됩니다.”
“킴! 첫 번째 위기를 실점 없이 막아 내는군요.”
이반 감독은 김민이 더그아웃으로 들어오자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했다.
“좋은 피칭이었네.”
김민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그 모습을 본 부르스가 렉터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네가 졌군.”
렉터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내기를 한 건 아니잖아.”
“그래도 진 건 진 거야.”
김민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생각했다.
‘보스턴 레드삭스, 악의 제국이라 불리는 양키스에 필적할만한 강팀이야.’
그는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불타오르는 투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