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보스턴 레드삭스 01
탬파베이 원정 1, 2차전을 모두 승리한 보스턴 레드삭스.
“이참에 스윕하자고, 스윕! 4연승! 좋잖아!”
“그러면 탬파가 너무 불쌍해질 텐데? 녀석들 개막전에서 이기고 한 경기도 이기지 못했잖아.”
“지금 탬파 걱정할 때야? 우리 상대는 양키스라고.”
“넬슨 말이 맞아. 양키스를 이기기 위해서는 잡을 수 있는 경기는 확실하게 잡아야 해.”
레드삭스는 코칭 스탭들의 표정도 밝았다.
“괜찮은 시즌 스타트군.”
“부르스가 등판한 첫 경기를 잡은 게 주요했습니다.”
“내일 경기는 루키라지?”
“킴이라고 하는데 개막전에서 미네소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영건입니다.”
보스턴 감독 호이스는 미네소타의 전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미네소타를 상대로 호투한 건 빼자고, 중부지구 꼴찌 팀이 아닌가? 적어도 토론토나 볼티모어 정도는 돼야 데이터로 쓸모가 있지.”
반헬 투수 코치는 그래도 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력분석팀에서 올린 보고서입니다.”
호이스 감독은 반헬 투수 코치가 내민 보고서를 보곤 미간을 좁혔다.
“과감한 안쪽 승부가 돋보이는 투수라고? 이건 미네소타 타선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야. 우리 팀 타자들을 상대로 안쪽 패스트볼을 던졌다가는 그대로 펜스를 넘겨 버릴걸?”
그는 탬파베이나 미네소타는 안중에도 없었다.
타릭 타격 코치도 마찬가지였다.
“반헬, 깔끔하게 이기고 홈으로 돌아가자고. 탬파베이는 우리 상대가 안 돼.”
반헬 투수 코치는 할 수 없이 어깨를 으쓱하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다들 승리에 취한 건가? 오늘 경기는 이기긴 했지만 박빙이었다고.”
2차전 최종 스코어는 5-3 보스턴 레드삭스의 2점 차이 승리.
우리 쪽의 실책 하나 또는 상대 팀의 파인 플레이 하나면 승패가 뒤바뀔 수 있는 스코어였다.
‘1차전 대승. 2차전은 박빙…… 점점 격차가 줄어들고 있다.’
그는 전력분석팀에서 작성한 보고서를 다시 체크하기 시작했다.
* * *
“좋은 아침.”
김민의 인사에 칼튼이 고개를 돌렸다.
“킴, 일찍 출근했군.”
“선발이니까.”
김민은 유니폼을 갈아입곤 그라운드로 향했다.
칼튼은 그 모습을 보곤 그레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킴은 밝아서 좋아.”
그레이 역시 밝아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다.
“부르스와는 확실히 다르군.”
“부르스는 선발 등판하는 날은 말도 못 붙이게 했지?”
“그는 예민하니까.”
메이저리그 투수 중에는 부르스처럼 예민한 성격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선발 등판이 예정되어 있는 투수들에게 말을 붙이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딸깍.
김민이 불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블렛소 투수 코치가 보였다.
“블렛소, 좋은 아침입니다.”
블렛소 코치는 설리반과 함께 투구폼을 교정하고 있었다.
“킴, 일찍 왔군.”
“설리반은 아침부터 무슨 일이죠?”
“더 나은 투구를 위한 노력이지.”
설리반은 김민의 개막전 승리에 상당히 자극을 받은 상태였다.
“킴, 이번 시즌은 무리지만, 다음 시즌은 나도 선발 로테이션에 이름을 올릴 거야.”
김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받았다.
“설리반, 꼭 그렇게 되길 바랄게.”
그는 팀메이트들과 두루 친했다.
이반 감독은 김민이 불펜에서 블렛소 코치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곤 코스타 타격 코치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 친구는 친화력이 대단하군. 아시아 출신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야.”
“밝은 성격의 투수는 라커룸 리더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죠.”
“흐흠, 킴이 라커룸 리더 후보란 소린가?”
“라커룸 리더는 아니더라도 투수조 쪽은 맡아 줬으면 합니다.”
“예민해서 다루기 힘든 투수들을 킴에게 맡기려는 건가?”
이반 감독의 물음에 코스타 타격 코치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주면 고맙지요.”
두 사람은 김민에 대한 이야기를 마친 뒤 보스턴 라인업을 살폈다.
“흐…… 한숨이 나오는 라인업이군.”
“페이롤에서 너무 차이가 납니다. 우리 팀도 라파엘 같은 선수를 데려올 수 있다면…….”
“적어도 꼴찌는 안 하겠지.”
대표적인 스몰마켓 탬파베이와 전통의 강호이자 빅마켓인 보스턴은 쓸 수 있는 돈에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페드로를 피했다는 사실이야.”
“페드로를 쉬게 하고 대체 선발을 올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보스턴의 선수층을 말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선발은 발렌타인이지?”
“예.”
발렌타인은 대체 선발이었지만, 지난 시즌 6승을 거둔 수준급 투수였다.
“설마 발렌타인에게 묶이지는 않겠지?”
“오늘은 잘 해낼 겁니다.”
이반 감독은 라인업을 보면 볼수록 두 팀의 격차가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 * *
경기 시작 10분 전.
4연패의 여파인지 트로피나카 필드 곳곳에 빈자리가 보였다.
“킴, 오늘은 어때?”
“준비 만전이지.”
김민은 록튼과 불펜에서 몸을 풀며 경기를 준비했다.
팡! 팡!
“보스턴은 미네소타보다 타선이 한 수 위야. 승부구를 던질 때 조심해야 해.”
“한 수면 다행이게? 라파엘이 이끄는 타선은 지난 시즌 챔피언 양키스와 비교할 수 있을 정도야.”
라파엘은 2001시즌 보스턴이 야심 차게 영입한 4번 타자였다.
그는 최근 3년 동안 42개의 홈런과 144타점, 3할 타율, OPS 1할을 평균으로 찍었다.
“보스턴이 클리블랜드에서 괴물을 데려왔어.”
록튼은 벤치에서 라파엘의 위용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는 1, 2차전에서 홈런 1개와 4타점 그리고 5개의 안타를 때려내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트로피카나 필드 팬들에게 과시했다.
“그래서 킴은 어떻게 라파엘을 상대할 거야? 준비한 결정구가 있는 건가?”
“난 거르려고.”
김민답지 않은 대답이었다.
“킴!”
록튼이 놀라 목소리를 높이자 김민에 글러브를 오므리며 말했다.
“농담이야.”
“그런 농담하는 거 아니야.”
“솔직히 말해서 거르고 싶어.”
록튼이 공을 건네며 말했다.
“킴답지 않은 말이군.”
김민은 공을 받은 뒤 한숨을 내쉬었다.
‘라파엘, 그 친구는 약물로 만들어진 괴물이라고.’
그는 시범 경기에서 약물의 상징인 마크 맥과이어를 잡아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마크 맥과이어와 라파엘을 같은 선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었다.
마크 맥과이어는 지는 해고, 라파엘은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는 타자였다.
‘약물을 안 하고도 30홈런 100타점을 올릴 수 있는 타자. 그런 타자가 약물까지 했으니, 괴물이 되는 게 당연하지.’
그는 오늘 경기에서 홈런 1, 2개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킴, 록튼, 경기 시작 5분 전이야.”
“오케이.”
“나갑니다!”
김민과 탬파베이 선수들은 그라운드로 향했다.
짧은 식전 행사가 끝나고 주심이 목소리를 높였다.
“플레이볼!”
1회 초.
보스턴 레드삭스의 공격으로 시리즈 마지막 경기가 시작되었다.
‘1번 타자 노라, 데릭 지터와 함께 3대 유격수로 불렸던 선수. 말년은 별로였지만, 지금은 20대 중반의 전성기. 피하고 싶은 타자군.’
이 시기 보스턴 레드삭스는 누구 하나 쉬운 타자가 없었다.
‘약물의 시대,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에서 마운드에 오른다는 건 이런 느낌이군.’
그는 그립을 꾹 쥐었다.
잠시 뒤, 김민은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슉!
빠른 공이 바깥쪽 코너를 노리고 날았다.
‘구속은 80마일 후반대인가? 흔한 패스트볼이군.’
노라는 바깥쪽 패스트볼을 그냥 두지 않았다.
딱!
날카로운 타구가 1루 더그아웃을 강타했다.
“아아앗!”
깜짝 놀란 선수들이 호들갑을 떠는 사이 1루심이 파울을 선언했다.
“파울!”
노라는 김민이 던진 초구가 포심 패스트볼이 아닌 커터라는 것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패스트볼이 아니라 커터라. 흔한 패스트볼이란 말은 취소하지.’
블렛소 투수 코치는 김민이 초구로 패스트볼이 아닌 커터를 던지는 것을 처음 보았다.
‘킴은 연습 경기는 물론 시범 경기 때도 선두 타자만큼은 포심 패스트볼을 던졌어. 1회 선두 타자에 커터는 처음이야. 볼 배합 하나만 봐도 킴의 고심이 느껴지는군.’
김민은 노라의 스윙을 확인하곤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윙이 빠르면서도 정확해. 3대 유격수라는 말은 그냥 나온 게 아니야.’
그는 록튼과 사인을 주고받은 뒤 2구를 던졌다.
슉!
빠른 공이 다시 한번 바깥쪽을 향했다.
‘또 바깥쪽인가?’
노라는 반사적으로 배트를 냈지만, 공이 들어오기 직전 배트를 멈추는 데 성공했다.
팡!
록튼의 미트에 들어온 공은 존에서 살짝 벗어난 볼이었다.
록튼은 노라의 선구안에 혀를 찰 뿐이었다.
‘노라, 역시 대단해. 이걸 참아 낸 타자는 처음이야.’
카운트 1-1.
호이스 감독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노라를 상대로 바깥쪽 투구는 통하지 않아.”
그러나 김민은 3구도 바깥쪽을 고집했다.
슉!
‘또 패스트볼인가?’
노라는 조금 전 공보다 더 빨라진 패스트볼에 살짝 놀랐다.
‘2구보다 빨라!’
탁!
배트를 스친 공이 그대로 백네트에 꽂혔다.
“파울!”
호이스 감독은 노라답지 않은 스윙이라고 생각했다.
“94마일(151km) 패스트볼에 왜 타이밍이 맞지 않은 거야?”
김민은 세 번째 공을 커트해 낸 노라를 보곤 속으로 혀를 찼다.
‘쳇, 전설은 전설이군. 이번 공은 자신이 있었는데.’
그는 이번 공으로 외야 플라이를 노렸다.
그러나 노라는 노련한 배트 컨트롤로 외야 플라이가 아닌 파울을 만들어 냈다.
“카운트 1-2, 투수에게 살짝 유리한 카운트입니다.”
“킴은 오늘도 바깥쪽에 집중한 투구를 펼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노라를 상대로 바깥쪽만으로는 힘들 겁니다.”
노라는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뛰어난 패스트볼에 미간을 좁혔다.
‘마지막 순간 공이 꿈틀거렸어. 무브먼트가 보통이 아니야.’
그는 배트를 3cm 정도 짧게 잡았다.
이것은 더욱 정확한 타격을 위한 준비였다.
‘자, 와라!’
만반의 대비를 한 노라.
그를 상대로 김민이 꺼낸 카드는 안쪽 승부였다.
슉!
빠른 공이 안쪽 스트라이크존을 향해 날았다.
‘여기서 안쪽 패스트볼이라고?’
그는 김민이 던진 바깥쪽 공 3개가 이번 공을 위한 연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
‘타이밍은 맞출 수 있지만, 이대로는 히팅 포인트가…….’
탁!
예상대로 공은 배트 안쪽에 맞고 말았다.
“3루!”
느린 땅볼.
‘타구 속도가 죽었어.’
노라는 3루수 안데르센이 공을 더듬는다면, 1루에서 승부를 걸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데르센이 항상 수비에서 실책을 범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침착하게 공을 잡은 뒤 빠르게 송구했다.
팡!
“아웃!”
1루심의 선언과 함께 호이스 감독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쳇, 세이프라고!”
그는 아직 김민의 투구를 인정하지 않았다.
중계진은 다소 낮은 목소리로 노라의 아웃을 전했다.
“노라 3루 땅볼에 그칩니다. 마이크, 첫 타자와의 승부 어떻게 보십니까?”
“바깥쪽과 안쪽 로케이션, 제가 말씀드린 투구가 바로 이겁니다.”
해설인 마이크의 로케이션 설명이 길게 이어졌다.
잠시 뒤, 2번 타자 클리어가 타석에 들어섰다.
“다음 타자는 2번 타자 클리어입니다.”
“킴에게 클리어는 아주 중요한 타자입니다.”
클리어는 보스턴에서 유일하게 해 볼 만한 타자였다.
그는 지난 시즌 0.255의 타율과 9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여기서 클리어를 잡으면 주자 없이 라파엘과 맞설 수 있다. 하지만 클리어를 출루시킨다면……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해진다.’
지난 경기 4번을 쳤던 라파엘은 오늘 3번으로 전진배치 되었다.
이와 같은 전진배치는 대량 득점을 위한 라인업 조정이었다.
타릭 타격 코치는 라인업을 짤 때 득점에 너무 욕심을 낸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여기서 클리어가 죽어 버리면 주자 없이 라파엘이군. 그런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어.’
슉!
빠른 공이 바깥쪽 코스를 노렸다.
클리어는 타격이 뛰어난 타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큰 약점이 있는 타자도 아니었다.
90마일 초반대 패스트볼이라면 충분히 공략할 수 있었다.
‘존에 들어오는 공!’
탁!
배트 끝에 맞은 공이 1루 관중석으로 향했다.
“파울!”
두 번째 공도 파울이었다.
“또 관중석입니다.”
이반 감독은 잇달아 파울이 나오자 미간을 좁혔다.
“오늘 따라 헛스윙이 나오지 않는군.”
블렛소 투수 코치도 헛스윙 없이 파울만 나오는 것을 주시하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보스턴 타자들의 배트 스피드가 빠릅니다.”
“킴이 버티지 못하면 5연패야.”
“오늘만큼은 버텨 줄 겁니다.”
김민은 연속해서 파울이 나왔지만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그래, 이 정도는 해 줘야 레드삭스지.’
그는 공을 꾹 쥐고는 다음 공을 던졌다.
슉!
한가운데로 날아오던 공이 홈플레이트 앞에서 급격하게 떨어졌다.
‘패스트볼이 아니잖아!’
클리어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공이었다.
“스윙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오늘 경기 첫 스윙과 첫 삼진.
호이스 감독이 낮게 신음을 내뱉었다.
“으음…… 방금 던진 공은 포크볼인가?”
그는 김민이 노모처럼 포크볼을 던진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