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첫 승리 02
“어떻게 할까요?”
질문을 던진 사람은 블렛소 투수 코치였다.
“킴의 교체 말인가?”
“그렇습니다.”
“얼마나 던졌나?”
블렛소 투수 코치가 노트를 보며 대답했다.
“78개입니다. 투구 수만 보면 아직 교체할 때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7회 말도 맡기도록 하게.”
“그래도 교체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첫 등판에 7이닝 이상은…….”
블렛소 투수 코치는 김민이 레드처럼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반 감독은 고개를 흔들었다.
“킴은 레드와 달라 완벽하게 던지지 않았어. 그리고 난 킴의 한계 투구 수를 알고 싶어.”
팀의 에이스라면 당연히 200이닝을 책임지던 시절.
이 시기 투수들의 한계 투구 수는 100개를 훌쩍 넘겼다.
“알겠습니다. 킴을 올려보내겠습니다.”
7회 말.
따악!
김민은 첫 타자 말론에게 시작부터 안타를 맞았다.
“말론! 나이스 배팅!”
“역전 가자! 역전!”
홈팬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김민을 압박했다.
하지만 그들의 압박은 통하지 않았다.
집중한 김민에게 관중들의 함성은 들리지 않았다.
‘행크는 어퍼 스윙을 하니까. 스플리터는 던지지 않는 게 좋겠어.’
그는 사인을 낸 뒤 빠르게 초구를 던졌다.
탁!
배트 끝에 빗맞은 공이 유격수에게 향했다.
“2루!”
“맡겨 줘!”
유격수 유칼리스와 2루수 칼튼의 멋진 콤비 플레이.
미네소타는 다시 한번 기회를 날리고 말았다.
“병살타야!”
“하필 여기서! 더블이라니!”
행크의 병살타는 미네소타의 추격 의지를 크게 꺾었다.
잘만 감독은 오늘 경기가 힘들 것 같다고 직감했다.
“위기관리 능력이 뛰어난 건지. 운이 좋은 건지 모르겠군.”
“그러고 보니 오늘 병살타만 3개입니다.”
“안 되는 날이란 소리군.”
김민은 포수 피어리에게 다시 안타를 맞았지만, 다음 타자 스펜서를 삼진으로 처리한 뒤 이닝을 마쳤다.
7이닝 5피안타 1볼넷 1실점.
완벽하진 않았지만, 뛰어난 피칭이었다.
홀먼 단장은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는 김민을 보면서 박수를 쳤다.
“훌륭해! 아주 훌륭해!”
물론 스카이 박스에서 홀로 친 박수였기 때문에 미네소타 팬들은 그의 박수와 환호를 들을 수 없었다.
구단주 빈스도 플로리다에서 그 광경을 TV로 지켜보았다.
“역시 대단해! 저 친구는 물건이라고!”
그는 오른손에 든 위스키 잔을 높이 들었다.
“미래의 에이스를 위해서 건배!”
8회 말.
김민은 다시 한번 마운드에 올랐다.
투구 수는 90개.
블렛소 투수 코치는 마운드로 향하는 김민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자가 나가면 바로 교체될 거야.”
다음 투수가 준비되었으니 전력으로 던져도 좋다는 말이었다.
김민은 고개를 끄덕인 뒤 마운드에 섰다.
‘첫 선발에게 8회를 맡기는군. 지금 야구는 내가 코치였던 시절과 정말 많이 달라.’
2010년대를 지나면서 투수들의 평균 이닝은 크게 줄어들었다.
250이닝을 던진 투수는 멸종했고, 200이닝을 넘게 던진 투수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은 아니었다.
아메리칸 리그만 해도 200이닝을 던진 투수가 16명에 5명의 투수가 220이닝을 넘겼다.
길게 던지는 것이 미덕.
이 시기는 그랬다.
김민은 어깨에 오른손을 가져갔다.
- 안쪽 패스트볼.
경기 초반과는 정반대의 볼 배합이었다.
슉!
빠른 공이 들어온 순간 타자가 움찔했다.
“스트라이크!”
전광판에 표시된 구속은 93마일(150km).
잘만 감독은 백기를 들었다.
“힘들겠어. 저 친구, 8회에도 구속이 떨어지지 않는군.”
김민은 8회 말 단 한 명의 주자도 내보내지 않은 채 이닝을 마쳤다.
“킴이 개막전에서 대단한 피칭을 보여 줍니다!”
“정말 루키가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동료들은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김민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나이스 피칭.”
“훌륭했어.”
김민은 그들과 주먹을 마주한 뒤 라커룸으로 향했다.
탁.
문이 닫힌 순간 오른팔이 떨리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린 건가?’
그는 왼팔로 오른팔을 잡고는 긴 숨을 내쉬었다.
“후…….”
트레이너가 다가오며 말했다.
“긴장이 풀린 모양이군.”
김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같은 유형의 투수들이 몇 명 있지. 물론 자네처럼 다 잘 던지는 건 아니지만.”
트레이너는 말을 마치곤 얼음통을 열었다.
“아이싱 괜찮나?”
“괜찮습니다.”
“투수 코치들은 몰라도 투수 중에는 아이싱을 반기지 않는 선수들도 있어.”
2010년대에도 아이싱을 하지 않는 투수들이 존재했다.
김민은 그들이 아이싱을 하지 않는 것은 타고난 철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평범한 육체를 가지고 태어났다면 아이싱은 필수야.’
라커룸에 TV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김민은 아이싱을 하면서 경기를 관전할 수 있었다.
9회 초.
레드가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끝까지 던지는 건가?’
그는 첫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웠으나 다음 타자에게 2루타를 맞았다.
‘구속이 떨어졌어. 투구 수도 너무 많아.’
김민은 노리 투수 코치가 무리한 투수 운영을 한다고 생각했다.
‘레드처럼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는 100개, 아니 90개에서 끊어 주는 게 좋아.’
투수 코치 시절 그는 빠른 투수 교체를 선호하는 타입이었다.
트레이너가 랩을 꺼내며 말했다.
“킴, 걱정하지 말게. 우리 팀의 마무리는 수준급이니까.”
탬파베이의 클로저 로버트는 지난 시즌 32세이브를 올린 특급 마무리였다.
“로버트를 의심하진 않습니다.”
레드는 고전 끝에 다시 한 점을 내주고는 오늘 피칭을 마무리했다.
9이닝 4피안타 4실점.
10분 뒤, 레드는 여기에 한 가지 기록을 추가했다.
- 패전.
탬파베이 클로저 로버트는 개막전에서 첫 세이브를 올렸고, 김민은 루키로서 개막전 승리를 따내는 위업을 달성했다.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가 2001 시즌 개막전을 승리로 장식합니다!”
“오늘 승리의 주역은 누가 뭐라고 해도 킴입니다. 정말 환상적인 투구였습니다.”
김민은 경기가 끝난 직후, 더그아웃 앞에서 TV 카메라와 마주 섰다.
미녀 리포터는 덤.
“킴 선수, 오늘 대단한 피칭을 보여 주었는데요. 개막전이라 긴장하지 않았나요?”
김민은 마이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긴장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지 못할 정도로 떨리지는 않았습니다.”
리포터가 미소를 지으며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오늘 많은 삼진을 잡았습니다. 삼진에 자신이 있는 건가요?”
“전 삼진을 잡기 위한 투구를 하지 않습니다. 다만 오늘은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마지막으로 첫 승에 대한 소감 한 말씀 해 주시죠.”
김민은 볼 배합과 경기 운영을 완벽하게 준비했지만, 인터뷰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첫 승에 대한 소감인가?’
그는 잠시 말을 쉬었다.
그러나 망설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에게는 10년 동안 승리 인터뷰를 지켜본 경험이 있었다.
“우선 절 개막전 선발로 선택해 주신 감독님과 코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앞으로 절 응원해 주실 탬파베이 팬들께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향에서 절 응원해 주신 팬들께 이 영광을 돌립니다.”
승리 투수 인터뷰는 여기에서 끝났다.
“킴 선수, 감사합니다.”
라커룸으로 돌아오자 블렛소 투수 코치가 다가왔다.
“킴, 인터뷰룸으로 가세.”
“승리 투수 인터뷰가 또 있는 겁니까?”
“물론이지. 자네는 오늘의 히어로 아닌가?”
메이저리그 개막전 승리.
김민은 빈스의 예상대로 모두의 주목을 받는 선수가 되었다.
* * *
“킴, 첫 승 축하드립니다.”
김민에게 전화를 건 사내는 엘린이었다.
“아, 엘린, 몇 시지?”
“9시입니다.”
“일어나야지.”
그는 몸을 일으키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어제는 늦게까지 안 주무신 모양이죠?”
“숙소에 돌아오니까. 재방송하고 있더라고.”
“승리 파티가 아니라 어제 경기를 다시 본 겁니까?”
“그래.”
숙소로 돌아온 김민은 귀신에 홀린 것처럼 TV를 켰고, 새벽까지 자신의 등판 경기를 시청했다.
“오늘 전화를 한 건 다름이 아니라 콜업 보너스가 입금되었다는 것을 알려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콜업 보너스? 20만 달러(2억5천만 원)였나?”
“그렇죠.”
김민이 물을 따르며 말했다.
“내 통장에는 반만 넣고 나머지는 회사 운영 비용으로 쓰도록 해.”
“그래도 될까요?”
“지금은 회사에 투자해야 하는 시기야. 그리고 지난번에 말한 그 선수들 영입은 어떻게 된 거야?”
김민은 자신이 알고 있는 스타 유망주 다섯 명을 뽑아 엘린에게 영입을 맡겼다.
이들은 아직 드래프트 되지 않는 선수들이었기에 영입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다섯 명 중 두 명과 계약했습니다.”
“두 명?”
“세 명은 각자 에이전트가 있었습니다.”
‘에이전트들이 발 빠르게 움직이는군.’
김민이 물을 마시곤 말했다.
“두 명도 괜찮아.”
그가 지목한 다섯 명은 한 명만 계약해도 크게 남는 선수들이었다.
“아, 그리고 다음 경기가 결정되었어.”
“킴, 로테이션에 확실히 들어가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상대는 보스턴 레드삭스야. 데이터를 뽑아 줘.”
엘린은 보스턴 레드삭스란 구단명을 듣자마자 목소리가 낮아졌다.
“하필 보스턴이군요.”
“양키스보다는 낫잖아.”
악의 제국 뉴욕 양키스와 그 라이벌 보스턴 레드삭스.
이 두 팀은 탬파베이 투수들이 가장 많이 만나는 동부지구에 속해 있었다.
“알겠습니다. 자료를 뽑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김민은 전화를 끊고는 두 손을 앞으로 폈다.
“메이저리그는 좋군. 최고급 호텔에 1인실이라.”
마이너리그 시절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호사였다.
* * *
탬파베이 운영팀 부팀장 레이너는 마케팅팀에서 작성한 주문표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30번 유니폼 1만 장이라고?”
1만 장은 지난 시즌 탬파베이의 어느 선수도 넘지 못한 숫자였다.
“이렇게 많은 유니폼을 어디서 주문한 거야?”
그는 급히 마케팅팀에 전화를 걸었다.
“찰리.”
“아, 레이너.”
“유니폼 주문, 숫자가 잘못된 것 아니야? 1천 장도 아니고 1만 장이라니.”
마케팅 수석 팀원 찰리가 대답했다.
“맞아. 1만 장이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 거야?”
레이너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단 한 경기 출전한 루키의 유니폼이 1만 장이나 주문이 들어왔다고? 말도 안 돼!’
찰리가 주문 내역을 보며 대답했다.
“가장 큰 주문은 동아시아 지역의 7천 장이야.”
“7천 장이라고?”
“우리 쪽 구단 숍도 적진 않지. 1천 장이거든. 그리고 탬파베이 각 지역 숍에서 1천 장. 나머지는 이곳저곳이군. 개막전 승리 임팩트가 컸던 모양이야.”
1만 장 주문의 주인공은 바로 김민이었다.
레이너는 김민이 유니폼 옵션을 크게 걸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속으로 혀를 찼다.
‘킴과 에이전트는 일이 이렇게 될 걸 예상하고 있었던 건가?’
그는 두 사람에게 한 방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는 개막전에서 기분 좋은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좋았던 것은 개막전뿐이었다.
미네소타 트윈스는 이후 두 경기에서 개막전 패배를 두 배로 갚아 주었다.
“11-3 패배, 7-4 패배. 개막전을 빼고는 매 경기 7실점 이상이군.”
“믿었던 투수진이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킴이 아니었다면 리그 꼴찌였을 거야.”
탬파베이로 돌아온 선수단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바이슨 수석 코치는 공항에서 선수단을 해산했다.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정각에 출근하도록. 이번 상대는 보스턴 레드삭스다.”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는 홈 개막전을 위해 에이스 부르스를 아껴두었다.
코칭 스탭은 다른 경기는 몰라도 첫 경기만큼은 잡고자 했다.
“킴, 숙소까지 태워다 줄까?”
김민에게 손을 내민 선수는 불펜의 고참 투수 에두아르도였다.
에두아르도는 머리가 오이처럼 길쭉해서 피클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김민이 오른손을 들며 말했다.
“오늘은 룩튼과 식사 약속이 있어서 말이죠.”
“오, 룩튼과 데이트인가?”
룩튼이 뒤에서 걸어오며 말했다.
“칙칙한 사내끼리 데이트는 사양하고 싶지만…… 장소가 좋거든요.”
“어디로 가는 거야?”
“크라운 플라자입니다.”
에두아르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은 곳에 가는군.”
오늘 식사는 김민이 룩튼에게 내는 승리 턱이었다.
두 사람은 아직 차가 없었기 때문에 크라운 플라자까지 택시를 이용하고자 했다.
두 사람이 택시에 오르자 택시 기사가 고개를 돌렸다.
“혹시 킴 선수입니까?”
택시 기사의 물음에 김민이 멈칫했다.
“어떻게 아셨죠?”
대머리 택시 기사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데블 레이스의 영웅을 모를 수가 있나요? 제 택시에 영웅을 태우게 돼서 영광입니다. 혹시 기록을 남겨도 괜찮을까요?”
“기록을 남긴다면 어떤 식으로 남기시는 겁니까?”
“대시 보드에 사인을 해 주십시오. 그럼 그걸 그대로 음각할 겁니다.”
김민은 팬을 꺼내 대시 보드에 길게 사인을 남겼다.
“이러면 된 겁니까?”
택시 기사가 엑셀을 밟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오늘 택시 요금은 무료입니다!”
김민이 유명해진 것은 개막전 승리의 임팩트도 있었지만, 프런트에서 연일 언론에 보도 자료를 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탬파베이를 대표하는 스타로 키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