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스프링 캠프 04
미첼이 벤치로 돌아온 데이빗에게 글러브를 건넸다.
“데이빗,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간 것 아니야? 초구부터 타이밍이 맞지 않던데?”
데이빗이 글러브를 받으며 대답했다.
“실투인줄 알았는데 실투가 아니더군.”
“한가운데 공 아니었어?”
“한가운데는 무슨…… 스플리터였어.”
미첼은 그제야 바운드 볼이 나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흐흠, 초구부터 스플리터를 던졌단 말이지?”
“괴상한 볼 배합이었어.”
데이빗이 고개를 내저으며 외야로 향했다.
1회 말
A팀의 공격.
A팀 선발 라인업은 경험이 부족한 더블A 선수들과 몸이 덜 풀린 메이저리그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의 공격은 투박하고 서툴렀다.
그 때문에 A팀의 첫 공격은 5분을 채 넘기지 못했다.
이반 감독은 양 팀의 공격이 모두 삼자범퇴로 끝나자 미간을 좁혔다.
“연습 경기라 긴장감이 없는 건가? 아무리 스프링 캠프라고 해도 이런 식이면 곤란해.”
불펜 코치가 감독을 달래듯 말했다.
“오늘 첫 탈락자가 나오면 선수들의 눈빛이 달라질 겁니다.”
이반 감독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랬으면 좋겠군.”
김민은 타자들의 성급한 공격 덕분에 휴식다운 휴식을 하지 못한 채 마운드로 향해야 했다.
록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장비를 벗기 무섭게 다시 착용해야 했다.
“쉴 틈이 없군. 다들 공을 보기나 하는 거야?”
그는 불만을 토로하곤 홈플레이트로 향했다.
팡! 팡!
김민은 가볍게 연습 투구를 한 뒤 B팀의 4번 타자와 마주섰다.
‘4번 타자 클리어. 파워와 컨택을 모두 갖춘 클린업.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트리플A에 한정되어 있다. 메이저리그에서 보여 준 모습은 타율 0.211에 2홈런 8타점이 전부.’
트리플A까지는 통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서는 통하지 않는 선수.
트리플A 팀에는 이런 선수가 팀마다 몇 명씩 있었다.
‘클리어를 넘지 못하면 아직 메이저리그급이 아니라는 소리겠지.’
김민은 오른손 검지를 뻗어 왼쪽 어깨에 가져갔다.
- 바깥쪽 패스트볼.
록튼은 사인을 받은 뒤 고개를 갸웃했다.
‘또 바깥쪽 패스트볼인가? 킴은 지독할 정도로 바깥쪽을 고집하는군.’
그는 김민의 정체성이 바깥쪽 패스트볼에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타선에 선 클리어가 록튼에게 물었다.
“록튼, 이번 공은 뭐야?”
동료 간의 트레쉬 토크.
록튼이 어깨를 으쓱하며 클리어의 말을 받았다.
“빠른 공 아니면 느린 공이겠지.”
클리어는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김민에게 옮겼다.
“그렇군. 빠른 공 아니면 느린 공.”
그의 머릿속에는 다음 두 가지가 담겨 있었다.
첫 번째는 바깥쪽 패스트볼.
김민은 3번 타자 데이빗을 제외하곤 대부분 바깥쪽 패스트볼로 초구를 선택했다. 이 공을 타자가 머릿속에 그리는 것은 당연했다.
두 번째는 스플리터.
1회 초 김진이 삼진을 잡은 공은 슬라이더였다. 그러나 널리 알려진 그의 주 무기는 스플리터였다.
‘녀석의 스플리터는 예측하지 못한 순간 날아온다. 그렇다면 항상 스플리터를 염두에 두는 것이 좋다.’
클리어는 바깥쪽 공을 어퍼 스윙으로 공략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면 바깥쪽으로 살짝 떨어지는 스플리터와 패스트볼을 동시에 커버할 수 있었다.
‘자, 바깥쪽으로 하나 던져 보라고.’
김민이 와인드업과 동시에 초구를 던졌다.
슉!
바깥쪽 패스트볼.
‘이 친구 너무 정직하군.’
클리어는 기다렸다는 듯 배트를 휘둘렀다.
딱!
그러나 배트에 맞은 공은 정면이 아닌 관중석으로 휘어져 나갔다.
‘칫, 볼이잖아. 정직하다는 말은 취소야!’
바이슨은 김민의 바깥쪽 투구를 보곤 턱을 쓰다듬었다.
“또 바깥쪽 패스트볼이군.”
“타자들도 알고 있을 텐데…… 쉽게 공략을 하지 못하는군요.”
“나도 그게 이상해. 1회라면 모를까 2회에도 파울로 시작하다니, 하나쯤 정타가 나올 때도 되었을 텐데 말이야.”
클리어는 경험이 많은 타자였다. 그는 김민이 스트라이크를 많이 던지는 유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90마일 초반 패스트볼이라면 딱 치기 좋은 그런 공이지. 그 공을 초구부터 존에 꽂을 수는 없을 거야. 초구를 볼로 선택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야.’
그는 김민이 1회 선전한 것은 타자들이 그의 투구 유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타입은 기다리면서 존을 좁혀야 한다.’
그러나 김민의 두 번째 공은 그의 기다림을 허락하지 않았다.
팡!
“스트라이크!”
바깥쪽 코스를 정확히 찌른 패스트볼.
클리어는 순식간에 투 스트라이크 노 볼까지 몰리고 말았다.
“클리어가 구석에 몰렸어.”
“방금 공 왜 치지 않은 걸까? 바깥쪽 패스트볼이었잖아.”
B팀 선수들은 김민의 피칭에 혀를 내둘렀다.
데이빗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클리어는 스플리터가 온다고 생각한 모양이야.”
포심 패스트볼과 스플리터의 이지선다.
하지만 김민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공을 던질 수 있었다.
클리어는 김민이 던진 두 번째 공에 속으로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녀석…… 설마 내 머릿속을 읽은 건 아니겠지?’
그는 존을 좁히기는커녕 선택지를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할 수 없지. 초심으로 돌아가서 바깥쪽을 공략하자.’
클리어는 안쪽으로 승부구가 오면 패배를 인정하기로 했다.
‘투 스트라이크는 잡았고. 다음은 승부구인가?’
김민은 승부를 오래 끌지 않았다. 그는 사인을 교환한 뒤, 바로 세 번째 공을 던졌다.
슉!
빠른 공이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을 노렸다.
클리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기다리던 공이군. 이번 승부는 내 승리다!’
그는 배터박스 라인에 붙어 서 있었기 때문에 바깥쪽으로 하나쯤 빠지는 공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펜스까지 날아가라!’
강력한 스윙이 공을 노렸다.
파악!
공과 배트가 충돌한 순간 배트가 거짓말처럼 부러지고 말았다.
록튼은 마지막 순간 공이 휘어지면서 배트 헤드를 강타한 것을 보았다.
‘배트 브레이커인가?’
툭. 툭…….
부러진 배트에서 튕겨 나간 공은 투수 앞으로 굴러갔다.
“1루!”
김민은 그 공을 잡은 뒤, 포수의 콜 사인에 따라 침착하게 1루에 송구했다.
팡!
클리어는 발이 빠른 타자가 아니었기에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아웃!”
1루심의 아웃 판정에 구단주 빈스가 미소를 지었다.
“저 친구 좋군. 올해 메이저리그에서 볼 수 있는 건가?”
홀먼 단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확장 로스터 때는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빈스가 미간을 좁혔다.
“그렇게 늦게?”
“아직 더블A도 밟지 않은 선수입니다.”
빈스에게 더블A나 트리플A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돈을 벌어다 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었다.
“홀먼, 저 정도면 메이저리그에서 통하지 않겠나?”
“빈스, 아직 연습 경기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괜찮은 것 같은데.”
구단주의 지지에 홀먼이 한발 물러섰다.
“시범 경기 성적이 좋다면 콜업을 고려해 볼 수도 있습니다.”
빈스는 무엇이 생각났는지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 보니, 저 친구 말이야…….”
홀먼이 재빨리 되물었다.
“마음에 걸리시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에이전트가 누군지 알아봐. 보라드라면 곤란하니까.”
빈스는 보라드 사단 소속 선수들이 높은 몸값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몸값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커질 선수라면 차라리 키우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홀먼은 즉시 휴대폰을 꺼내 프런트에 전화를 넣었다. 그리곤 김민의 에이전트와 계약에 관한 내용을 보고받았다.
“킴의 소속사는 K코퍼레이션이라는 신생 에이전트라고 합니다.”
신생이라는 말에 빈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콜업 보너스도 낮은 편이더군요. 아마 신생 에이전트이기 때문이겠죠.”
빈스가 오랜만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콜업 보너스가 작다고? 그것참, 반가운 소식이군.”
김민의 노림수는 예상보다 빨리 구단주 빈스를 저격했다.
빈스가 홀먼에게 강한 어조로 말했다.
“시범 경기 성적이 좋으면 킴을 바로 로스터에 넣도록 해. 저런 선수는 마케팅에 도움이 된단 말일세.”
홀먼은 지금까지 김민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구단주의 지지에 태도를 바꾸었다.
“알겠습니다. 킴을 시범 경기 선발로 투입하겠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김민의 선발 등판이 정해졌다.
이반 감독과 코칭 스탭은 이 사실을 모른 채 김민을 주시하고 있었다.
“13개의 공으로 아웃 카운트 5개를 잡았군.”
“많이 던지지 않고 타자들을 잡아내고 있습니다. 맞춰 잡는 유형의 투수인 것 같습니다.”
이반 감독은 그것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타자들의 배트가 성급하게 나오고 있어. 아마 스피드 때문이겠지.”
김민의 패스트볼 구속은 트리플A 평균에 가까웠다.
사람은 익숙한 것에 경계심을 풀기 마련.
트리플A 선수가 중심인 B팀 타자들은 김민의 익숙한 구속에 신중함이라는 미덕을 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눈에 들어온 공을 공략하기 위해 쉴 새 없이 배트를 내고 있었다.
‘킴이 조금 더 빠른 공을 던졌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조금 더 신중하게 배트를 내밀었을 거야.’
수석 코치 바이슨은 조금 더 문학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굶주린 늑대들이 늙은 양을 습격하고 있지만, 늙은 양은 겉모습일 뿐,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노련한 사냥꾼이다.”
그는 김민이 의도적으로 타자들이 치기 좋은 코스에 공을 던지고 있다고 판단했다.
투수 코치 블렛소가 물었다.
“그럼 킴은 바깥쪽 외에도 제구가 가능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마 그럴 거야. 바깥쪽만큼은 아니지만, 안쪽도 상당한 수준이겠지. 킴은 노련한 사냥꾼이야.”
블렛소는 바이슨의 말을 인정하기 힘들었다.
“다양한 구종에 좋은 제구라면 마이너리그에 있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는 김민이 그 정도 실력을 지니고 있다면 벌써 메이저리그나 트리플A에 콜업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이슨의 생각은 달랐다.
“젊은 선수는 언제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는 거야. 1년 전까지 평범한 선수가 어떠한 계기를 통해 올스타급으로 성장하는 경우도 있지. 난 킴이 그런 선수라고 생각해. 그에게도 어떠한 계기가 있었을 거야.”
지금까지 옆에서 지켜만 보고 있던 배터리 코치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혹시 트레이드 때문이 아닐까요?”
바이슨이 고개를 돌렸다.
“트레이드?”
“킴은 지난 시즌 파드리스에서 우리 팀으로 트레이드가 되었습니다.”
바이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트레이드는 젊은 선수에게 좋은 자극이 되곤 하지.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커.”
코칭 스탭이 의견을 교환하는 사이 김민이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잡아냈다.
2이닝 무안타 무실점 2K.
김민의 피칭은 깔끔한 투구 그 이상이었다.
“나이스 피칭!”
김민이 록튼과 글러브를 마주하며 말했다.
“나이스 블로킹.”
그가 2회 초 마지막으로 던진 공은 원 바운드로 떨어진 스플리터였다.
“킴, 무슨 약이라도 한 거야? 오늘 던진 모든 공이 좋아.”
김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리가? 난 평소처럼 던지고 있어.”
“아니야. 애리조나 때와 구질이 다르다고.”
김민은 록튼의 말이 립 서비스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난 가을과 구질이 달라졌다면 그건 아마도 오프 시즌 훈련의 영향일 것이다.’
그는 3회와 4회에도 좋은 피칭을 이어갔다.
B팀 타자들은 김민의 공이 때릴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때리기 힘들다는 평을 내놓았다.
“이상하게 정타가 안 나온단 말이야.”
“난 패스트볼이 조금 뜨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패스트볼이 뜬다고?”
데이빗이 고개를 갸웃하자 미첼이 오른손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위로 크게 오르는 게 아니라 이렇게 살짝 떠오르는 거야.”
7번 타자 데릭도 미첼의 말에 동의했다.
“나도 그렇게 느꼈어. 저 녀석이 던지는 패스트볼은 평범하지 않아.”
투수 코치 블렛소는 그 이유를 회전수에서 찾았다.
‘회전수가 많은 공은 그렇지 않은 공보다 직진성이 강하다. 그 덕분에 일반적인 패스트볼보다 아래로 떨어지는 시기나 위치가 늦게 되지. 타자들이 떠오른다고 느낀 공의 정체는 더 늦게 떨어지는 공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설명으로 모든 의문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떠오르는 느낌을 줄 정도로 강한 회전이 걸린 포심 패스트볼은 보통 97마일(156km) 이상이 대부분이었다.
하나 김민의 패스트볼은 93마일(150km) 전후에 그쳤다.
블렛소는 김민이 어떻게 해서 낮은 구속에서 그러한 효과를 내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