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첫 번째 오프 시즌 03
김민은 이번 오프 시즌 동안 3가지 사항을 개선시키고자 했다.
그 3가지 사항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았다.
첫 번째 투구폼의 안정화.
김민은 지난 시즌 투구폼을 오버핸드에서 쓰리쿼터로 바꾸었다.
새로운 투구폼은 애리조나 가을 리그를 거치면서 상당히 안정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눈에 보였다. 그는 오프 시즌 동안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작정이었다.
두 번째는 제구력 향상.
김민은 투수 코치 시절 투수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구속은 타고 나는 것이지만 제구력은 각자의 노력에 달렸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은 김민의 제구력에 55점을 주었다.
이것은 메이저리그 선발 투수 평균 이상이라는 뜻.
그러나 김민은 적어도 60점 이상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00마일(161km)을 던질 수 없다면 그에 버금가는 제구력을 갖춰야 한다. 그래야만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을 수 있어.’
첫 번째 목표인 투구폼 보완도 결국에는 제구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다.
마지막은 커터와 커브의 숙련도 상승이었다.
김민은 지난 시즌 커브와 커터를 섞어 던졌다. 하지만 두 구종 모두 무브먼트나 구위가 타자를 압도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승부처에서는 스플리터나 슬라이더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민은 승부처에서 망설이지 않고 커브와 커터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타자를 상대하는 무기는 많을수록 좋아.’
팡!
포수 미트에 꽂힌 공이 좋은 소리를 냈다.
“나이스 볼!”
스미스가 공을 건네자 김민이 물었다.
“어땠어?”
“괜찮았어.”
“10점 만점에 몇 점?”
“7점?”
김민이 미간을 좁혔다.
“그 정도로는 곤란해.”
스미스가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8점 이상은 욕심이야. 그 정도 컷패스트볼이면 충분하지 않아?”
김민이 방금 던진 공은 흔히 커터라 부르는 컷패스트볼이었다.
“내 커터는 느리잖아. 10점 만점이 아니면 담장을 넘어갈 거야.”
스미스가 미트를 내밀며 말했다.
“누가 킴의 공을 쳐서 담장을 넘기는데?”
김민이 가운뎃손가락을 깊게 넣으며 그립을 잡았다.
“배리 본즈.”
“그 친구는 리그가 다르다고.”
슉!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 공이 미트에 꽂혔다.
팡!
이번 공은 속도와 각도 두 가지 모두 훌륭했다.
스미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8점!”
김민이 항의하듯 말했다.
“스미스, 그 공은 9점 이상 줄 수 있는 것 아니었어?”
“각도는 좋은데 공이 너무 일찍 변했어. 감이 좋은 타자라면 거르거나 커트할 수 있을걸?”
“좋아. 인정하지.”
이날 김민이 던진 20개의 컷패스트볼 중 8점 이상은 딱 3개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그럭저럭 휘어져 나가는 공.
김민은 결과에 만족할 수 없었다.
“흠, 뭐가 문제일까?”
그립은 완벽했다.
그가 가르친 그립으로 평균자책점 트로피를 들어 올린 투수도 있었다.
‘내 가운뎃손가락 길이가 짧은 건가? 아니면 악력이 부족한 걸까?’
전자라면 개선 가능성이 없었다. 반면 후자라면 악력을 높이는 것으로 구위를 높일 수 있었다.
‘커터를 빠르게 구사하려면 스플리터를 던질 때보다 더 큰 악력이 필요한 건가? 그건 아닐 텐데…….’
그가 고민하는 사이 스미스가 다가왔다.
“킴, 왜 그렇게 커터에 집착하는 거야? 난 킴의 시그니처(대표 구종)가 스플리터라고 생각해.”
김민이 공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무기가 2개면 더 좋지 않겠어?”
“그런 생각이라면 차라리 슬라이더를 연마하는 게 어때? 스플리터와 구속 차이도 나서 더 좋을걸?”
스미스의 조언에는 뼈가 있었다.
스플리터와 커터는 변형 패스트볼로 속도가 비슷했다.
반면 슬라이더는 고속 슬라이더를 제외하곤 스플리터와 속도 차이가 났다.
“체인지 오브 페이스인가?”
체인지 오브 페이스는 구속 차이를 이용한 타자의 타이밍 빼앗기를 말했다.
“타이밍 빼앗기는 투구의 기본이지.”
김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슬라이더라. 괜찮은 조언이야. 하지만 이미 커터를 시작해 버렸어.”
“끝을 볼 작정이야?”
“물론.”
다음 날부터 김민은 악력 강화 훈련에 들어갔다.
* * *
1월 말.
김민은 쓰리 쿼터 투구폼 교정을 끝냈다.
“앞으로는 이 투구폼으로 가겠어.”
스미스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킴, 팔 회전이 좀 큰 것 같아. 포물선이 아니라 직선을 그리면 공의 위력도 살고 더 힘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구속도 1마일은 더 나올 거야.”
김민은 그의 조언을 부인하지 않았다.
“확실히 직선으로 던지는 게 공에 힘을 더 줄 수 있지. 하지만 팔꿈치에 과부하가 걸리잖아. 난 데뷔와 동시에 수술대에 오르긴 싫어.”
스미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렇게까지 위험한 건가? 많은 투수들이 직선으로 던지잖아. 페드로도 그렇고 우드도 그렇고…….”
2001년 현재.
메이저리그의 에이스들은 부상 위험이 큰 투구폼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수술대 위에 오르게 될 것이다.
김민은 미래의 일을 스미스에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난 그들과 다르게 내구성이 약하니까.”
스미스는 내구성이 약하다는 말에 어깨를 으쓱하곤 화제를 볼튼의 스플리터로 돌렸다.
“볼튼 말이야. 생각처럼 스플리터가 잘 안 들어가는 모양이야.”
“나도 처음 연마할 때는 꽤 힘들었지.”
“킴이 조금 도와주면 안 될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립과 던지는 요령을 알려 주는 것뿐이야. 나머지는 스스로 해야지.”
김민은 스플리터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공을 놓는 타이밍이나 자세를 교정해 줄 수도 있지만, 스스로 깨우친다면 투수로서 한발 더 나아갈 수 있다.’
그는 볼튼이 메이저리그를 목표로 하고 있는 이상 스탭 업이 필수라고 생각했다.
“거기 두 사람!”
스미스가 고개를 돌리니 토니가 서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신입이야!”
“신입이요? 아무도 없잖아요?”
스미스의 물음에 토니가 말했다.
“하위 싱글A에서 4명쯤 올라올 거야. 두 사람이 나 대신 기숙사 안내 좀 해 줘. 난 프런트에 가 봐야겠어.”
“토니, 자기 일을 왜 선수에게 시키는 겁니까?”
“오프 시즌 동안 먹여 주고 재워 줬잖아.”
스미스가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알았어요.”
“키는 로비 테이블 위에 있어.”
“예. 예.”
스미스가 김민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병아리들은 내가 맡을 테니까. 킴은 볼튼을 좀 봐 달라고.”
김민은 할 수 없이 볼튼이 훈련하고 있는 불펜으로 향했다.
퍽!
가죽 판에 닿은 공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김민은 그 모습을 보곤 이마를 찌푸렸다.
‘위험한데?’
“볼튼, 그만두는 게 좋겠어.”
볼튼이 땀을 닦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킴, 아직 멀었어.”
“내가 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많은 투구 수는 좋을 게 없다고.”
그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공을 던진 모양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공의 수만도 대략 100여 개.
‘줄여 잡아도 200개는 던진 모양이군.’
200개는 한 경기 선발 등판 투구 수보다 훨씬 많은 것이었다.
“혹사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
볼튼이 글러브를 벗으며 말했다.
“스플리터가 제대로 떨어지지 않아.”
김민이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손을 줘 봐.”
볼튼은 망설이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김민이 그의 손을 강하게 잡았다.
“아앗!”
볼튼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킴, 이게 무슨 짓이야!”
“역시 그랬어.”
김민이 볼튼의 손을 놓았다.
“스플리터를 던지기에는 악력이 너무 약해.”
“그게 무슨 소리야? 포크하고 달리 스플리터는…….”
“포크볼보다는 아니지만, 스플리터는 악력을 많이 소모하는 구종 중 하나야. 많이 구사하면 속구 구속은 물론 제구력까지 악화될 수도 있지. 그래서 선발 투수 중에는 스플리터를 주 무기로 삼는 선수가 드물어.”
그 말에 볼튼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난 스플리터를 던질 수 없다는 말이야?”
“꼭 던지고 싶다면 악력을 강화해야 해.”
볼튼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악력을 키우는 훈련을 하면 던질 수 있는 건가?”
“플레이트 핀치나 바벨 쿠션 그립 같은 훈련이 있는데 볼튼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고. 내가 했던 훈련을 소개하지.”
김민이 주머니에서 고무링을 꺼내며 말했다.
“고무링을 손가락 힘으로 늘리는 훈련인데 전문 용어로는 밴드 핑거라고 하지.”
“밴드 핑거?”
“그래, 가장 두꺼운 고무링을 늘릴 수 있을 때까지 스플리터는 접어 두는 게 좋아.”
김민은 밴드 핑거 덕분에 커터의 완성도를 10점 만점에 9점까지 높일 수 있었다.
현재 그의 커터는 스플리터와 대등한 수준이었다.
볼튼은 김민의 코칭에 두 손을 모았다.
“킴, 정말 고마워.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
김민이 오른손 검지를 흔들며 말했다.
“너무 고마워하지 말라고. 방금 코칭은 K 코퍼레이션에 수당으로 달아 놓을 생각이야.”
볼튼은 김민의 농담에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정말.”
그의 감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김민은 볼튼과 함께 바닥에 떨어진 공을 모으며 생각했다.
‘이번 생에서도 투수를 가르치는 건 변함이 없는 모양이군.’
* * *
이틀 뒤.
김민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킴, 스프링 캠프 일정이 나왔어요. 이번에도 애리조나입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엘린이었다.
“스프링 캠프?”
“40인 로스터에 들었잖아요. 당연히 메이저리그 스프링 캠프부터 시작이죠. 잘하면 더블A를 건너뛰고 메이저리그에 직행할 수도 있다고요.”
김민은 마이너리그에서 7년이나 뛰었지만, 메이저리그 스프링 캠프에 초청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메이저리그 스프링 캠프란 말이 무척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싱글A에서 바로 메이저리그로 가는 건 어렵지 않겠어?”
“뭐, 그렇긴 하죠. 하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스프링 캠프에서 최대한 좋은 모습을 보여 주세요.”
김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어. 그렇게 해 볼게.”
같은 날 저녁.
토니가 김민에게 비행기 표를 내밀었다.
“프런트에서 보내온 거야. 스프링 캠프 초대장과 같은 것이지.”
“토니, 이건 비즈니스 클래스잖아요.”
김민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비즈니스 클래스를 탄 적이 없었다.
“메이저리그 스프링 캠프니까. 킴, 다시는 여기로 돌아올 생각하지 말게.”
“성공하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토니가 주먹을 내밀었다.
“건투를 비네.”
김민이 주먹을 마주하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토니, 잘 있어요.”
밖으로 나오자 볼튼과 스미스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항까지 함께 하려고.”
“티처, 그냥 헤어지면 섭섭하잖아.”
볼튼은 밴드 핑거를 전수한 그 날 이후 김민을 티처라 부르기 시작했다.
김민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못 말리겠군.”
“어서 출발하자고.”
스미스가 운전대를 잡고, 볼튼이 짐을 트렁크에 넣었다.
잠시 뒤, 픽업트럭이 긴 배기음과 함께 공항으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