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첫 번째 오프 시즌 01
100마일(161km)에 육박하는 광속구 투수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관중들을 열광시킨다.
혹이라도 전광판에 100마일이 기록되면 그 공이 스트라이크가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관중들은 전광판에 기록된 숫자에 탄성을 터트리고 중계진은 감탄사를 연발한다.
김민은 이런 광속구 투수의 반대편에 서 있는 투수였다.
그는 타자의 허를 찌르고 지루할 정도로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을 반복해서 공략했다.
경기 초반에는 볼넷이 나오더라도 그는 바깥쪽을 고집하는 경우가 많았다.
탁!
배트 끝에 걸린 공이 1루 라인을 따라 흘렀다.
“1루!”
타자는 있는 힘을 다해 1루로 뛰었지만, 타구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1루수 미트가 타자의 몸을 터치하는 순간 1루심이 아웃을 선언했다.
“이것으로 투 아웃이군요.”
“킴이 잘 막아 주고 있어.”
솔라 삭스 코칭 스탭에게 김민의 호투는 빛과 같았다.
반면 서프라이즈 코칭 스탭은 거대한 벽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클리어드까지 아웃될 줄이야.”
믿었던 테이블 세터가 차례로 출루에 실패.
“범타가 계속 나오는 걸 보면 무브먼트가 좋은 모양이군.”
“쓰리쿼터니까 무브먼트는 좋을 겁니다.”
김민이 오버핸드를 버리고 쓰리쿼터를 택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무브먼트였다.
그는 공을 놓는 타점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무브먼트라고 생각했다.
‘타자의 눈에 익숙한 궤적으로 떨어지는 공은 절대 좋은 결과를 낼 수 없다.’
물론 로저 클레멘스처럼 폭발적인 구위를 지니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타자가 궤적을 예측하든 못하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김민은 로저 클레멘스가 아니었다.
“이제 클린업입니다.”
김민은 클린업을 상대로도 자신의 투구를 잊지 않았다.
바깥쪽, 또 바깥쪽, 그리고 다시 바깥쪽.
3개 연속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을 노렸다.
타자는 세 번째 공을 커트하면서 버텨냈다.
‘지독한 놈이야. 계속 바깥쪽이군.’
김민의 바깥쪽 공략이 위력적인 것은 주심의 존을 이용할 줄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존에 걸치거나 하나씩 빠지는 공으로 타자들을 유혹했다.
탁!
다시 한번 커트.
“타자의 스윙이 짧아졌습니다.”
“저건 노린 공을 치는 게 아니라 투수가 던지는 공을 따라가면서 배트를 휘두르는 거야. 저래서는 좋은 타구를 날릴 수 없지.”
김민을 상대하는 타자는 자기도 모르게 스윙 궤적이 줄어들면서 소극적인 타격폼이 되었다.
록튼은 이것이 바로 김민의 진정한 강함이라고 생각했다.
‘타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길들이고 있어. 우리 팀에서 이것이 가능한 투수는 오직 킴뿐이야.’
김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손가락 하나를 폈다.
구종은 패스트볼.
하나 코스는 달랐다.
‘안쪽!’
4개의 바깥쪽 공을 던진 다음 던지는 안쪽 패스트볼.
이것을 커트할 수 있는 타자는 많지 않았다.
팡!
포수 미트에 들어온 공이 좋은 울림을 냈다.
“스윙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서프라이즈 코칭 스탭은 김민의 투구에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당했군.”
“경기 초반 넉넉하게 점수를 뽑아놔서 다행입니다.”
김민의 호투는 그라운드의 분위기를 확 바꿔놓았다.
이제 쫓기는 쪽은 서프라이즈였다.
“역시 킴이야.”
“에이스는 언제 등판해도 에이스란 말이군.”
솔라 삭스 투수 중에는 김민의 호투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왜 타자들이 킴의 공을 치지 못하는 걸까? 구속도 그렇게 빠른 게 아니잖아.”
헨리가 대답했다.
“스플리터의 존재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클리어드에게는 스플리터를 아예 던지지 않았다고.”
“그래도 타자의 머릿속에는 스플리터가 항상 존재하는 법이지.”
몇몇은 스플리터에서 그 이유를 찾았고, 몇몇은 김민의 볼 배합에서 이유를 찾았다.
“내가 보기에 킴의 볼 배합은 남달라.”
“바깥쪽?”
“바깥쪽도 있지만, 타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안쪽 승부구를 던진다고 할까?”
“내가 보기에도 그래, 킴의 승부 타이밍은 절묘한 데가 있어. 마치 타자의 마음을 읽고 던지는 것 같단 말이야.”
이날 김민은 3회 초부터 8회 초까지 무려 6이닝을 책임졌다.
“롱릴리프가 아니라 두 번째 선발이군.”
“선발 투수에게는 저렇게 길게 던지는 게 더 나을 겁니다.”
“휴식일이 지켜진다면 말이지.”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은 김민의 호투가 부러울 따름이었다.
융커스가 펜을 움직이며 말했다.
“탬파베이는 좋겠어. 오랜만에 제대로 된 투수 유망주가 나왔군.”
“탬파베이는 킴이 아니라 설리반을 밀고 있지 않던가요?”
“내가 보기에는 설리반보다 킴이 나아.”
설리반은 95마일(153km) 전후의 패스트볼을 던지는 정통파 투수였다.
“운영과 제구 때문입니까?”
“구위는 하락할 수 있어도 운영과 제구는 어디 가지 않아.”
융커스는 김민의 롱런을 예상하는 스카우트 중 한 명이었다.
이날 경기는 솔라 삭스가 8회 말 대추격을 펼쳐 8-8 동점으로 끝났다.
경기 직후, 투수 코치가 김민을 불렀다.
“킴, 훌륭한 투구였네. 오늘 등판은 어떤 느낌이었나?”
첫 불펜 투구에 대한 느낌을 물은 것이었다.
그러나 김민의 대답은 코치의 예상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아쉬웠습니다.”
“아쉬웠다고? 어떤 점이 아쉬웠나? 제구가 잘되지 않은 건가?”
“아닙니다. 서프라이즈의 양키스 유망주들을 상대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습니다. 그들을 상대로 공을 던질 수 있었다면 조금 더 즐거웠을 겁니다.”
투수 코치는 김민의 대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허! 킴은 상대한 타자들의 소속 팀까지 알고 있었던 건가? 이건…… 경기 전 타자들을 상세하게 분석했다는 말인데…….’
상대 팀 타선을 분석하는 것은 선발 투수나 포수의 몫이었다.
김민처럼 불펜에서 등판하는 경우 상대 팀에 대한 분석보다는 자신의 컨디션과 밸런스 유지에 더 많은 신경을 썼다.
김민이 투수 코치에게 물었다.
“휴식일은 며칠 보장되는 겁니까?”
“6이닝을 던졌으니 4일은 돼야겠지.”
김민은 4일 휴식이란 말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건 좋은 일이군요.”
그는 서프라이즈를 상대로 호투한 것보다 4일 휴식을 가지게 되었단 사실에 기뻐했다.
‘4일이라면 선발 투수와 동등한 휴식일이야. 이 정도면 개인 훈련은 물론 엘린과 미팅도 가질 수 있겠어.’
김민이 리그를 뛰고 있는 동안 엘린은 한 명의 선수라도 더 잡으려고 애리조나를 누비고 있었다.
* * *
“가을 리그도 이제 마지막이군요.”
“리그 MVP는 도노반인가?”
“한 달 남짓한 리그에서 8개의 홈런. MVP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클라인이 시선을 마운드로 돌리며 말했다.
“브라이언, 말은 그렇게 하지만 도노반의 MVP를 인정하지 않는 모양이군.”
브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킴도 못지않다고 생각하니까요.”
김민은 가을 리그 동안 선발과 불펜을 합쳐 31이닝을 던졌고, 평균자책점 1.74를 기록했다.
그의 압도적인 투구 덕분에 솔라 삭스는 지구 1위를 달성할 수 있었다.
“타고투저 시대에 1점대 평균자책점은 대단한 일이지.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기록보다는 속도에 가 있는 것 같아.”
그는 김민이 90마일 후반대 강속구를 던졌다면 지금보다도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100마일(161km)까지도 아니야 98마일(158km)을 던졌다면 11월 아메리칸 베이스볼 일러스트의 표지를 장식할 수도 있었을 거야.’
대부분의 스카우트는 김민의 룰모델로 애틀랜타의 에이스이자 200승 투수 톰 글래빈을 적어 놓았다.
클라인도 마찬가지였다.
- 오른손 톰 글래빈.
그는 단장과 구단주의 이해를 돕기 위해 톰 글래빈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김민이 톰 글래빈과 전혀 다른 투수라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김민의 룰 모델은 스카우트들이 생각하는 톰 글래빈이 아닌 크리스 카펜터였다.
‘킴은 구속도 톰 글래빈보다 빠르고 구종도 더 다양하다.’
속도가 빠르고 구종이 다양하다.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 김민이 톰 글래빈보다 더 뛰어난 투수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톰 글래빈은 김민이 가지지 못한 장점을 두 가지나 가지고 있었다.
‘현미경 제구와 좌완, 특히 좌완이라는 이점은 쉽게 극복할 수 없다.’
클라인은 톰 글래빈이 우완 투수였다면 지금처럼 많은 승리를 거둘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킴은 얼마나 많은 승리를 거둘 수 있을까? 이대로 잘 성장해 준다면 아마 100승에서 150승은 해 줄 수 있겠지.’
100승 이상을 거두려면 10승 이상 시즌을 10년 이상 기록해야 했다.
‘10년 동안 메이저리그 선발 로스터에서 두 자릿수 승수를 거둔다면 그것만으로도 대성공이지.’
그러나 김민은 클라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킴, 오늘도 러닝인가?”
“물론입니다.”
솔라 삭스 코칭 스탭은 김민처럼 자기 관리가 철저한 선수를 처음 보았다.
“태평양을 건너온 선수는 다 저런 건가?”
투수 코치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일본인 선수를 몇 보았지만, 킴과 같은 선수는 드물었습니다.”
“그럼 킴이 특별하다는 것이군.”
“정말 대단한 관리입니다. 마지막 날까지도 저렇게 뛰는 선수는 처음입니다.”
김민은 리그 마지막 날까지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애리조나 리그는 성공적이었어. 다음은 더블A야.’
그는 더블A야말로 진짜 승부처라고 생각했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생각도 같았다.
더블A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둔다는 것은 메이저리그 직행을 의미했다.
‘적어도 7, 8승은 거둬야겠지.’
경기 수가 적은 마이너리그에서 7, 8승을 거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러닝을 마치고 돌아오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엘.”
“킴, 마지막 날까지 훈련하는 겁니까?”
“프로 선수에게 마지막 날은 은퇴하는 날뿐이야.”
엘린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휴식이 훈련보다 나을 때도 있습니다.”
“그 말 기억해 두지.”
엘린이 김민과 함께 걸으며 말했다.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녔는데 성과는 얼마 없군요.”
“한 명도 계약하지 못한 건가?”
“두 명 계약했습니다만…… 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김민은 슈펠츠 빼고 두 명이라면 나쁠 게 없다고 생각했다.
‘애리조나에 모여 있는 선수들은 대부분 팀에서 주목하는 유망주. 그런 선수들 사이에서 세 명이나 계약했다면 실패가 아닌 대성공이라고 봐야겠지.’
그는 엘린이 의외로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누구누구야?”
“토머스와 부르스라는 선수입니다. 두 사람 모두 하위 라운드 지명자죠.”
“하위 라운드로 여기까지 왔다면 상당한 노력파겠군.”
“그보다는 상위 순번에 있는 유망주가 부상이나 관리 등을 이유로 빠졌기 때문입니다.”
김민이 두 손을 앞으로 펴며 말했다.
“누군가가 빠져서 이곳에 왔다면, 그 누군가를 대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뜻이잖아. 하위 라운드에서 그런 능력을 키웠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들은 주목받을 권리가 있어.”
엘린은 김민이 일반적인 선수와 시각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주목받을 권리가 있다고? 20대 초반 선수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니 대단해. 10년 이상 메이저리그를 뛴 선수도 킴처럼 여유 있진 않을 거야.’
그가 살짝 말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킴, 다음 시즌 계약은 어떻게 할 겁니까?”
“다음 시즌 계약?”
“탬파베이에서 40인 로스터 계약 통보가 왔습니다.”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는 40인 로스터 마감 하루 전, 김민을 40인 명단에 포함시켰다.
40인 로스터에 든 선수들은 일반적인 마이너리그 선수들과 달리 최저 연봉을 보장받았다.
물론 메이저리그 최저 연봉보다는 훨씬 낮은 금액이었다.
그래도 일반적인 마이너리그 선수들과 달리 생활이 가능한 정도의 금액을 보장받았다.
“구단에서 날 40인 로스터에 넣어 준 건가?”
“가을 리그 성적이 대단했잖아요. 넣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겁니다.”
11월에 메이저리그 40인 로스터를 확정하는 것은 룰5 드래프트라 불리는 마이너리그 드래프트 제도 때문이었다.
김민은 아직 마이너리그에서 뛴 시즌이 2시즌밖에 되지 않아 룰5 드래프트 해당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탬파베이 구단이 그를 40인 명단에 올린 것은 그의 가치를 그만큼 높게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엘린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연봉은 뭐 최저로 맞추겠죠. 다만 콜업 보너스를 조금 높여 볼 생각입니다.”
선수의 연봉을 책임지는 것은 에이전트의 사명이자 의무였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른데 들어 보겠어?”
“들어 보겠습니다.”
“콜업 보너스를 평균보다 낮추는 게 좋을 것 같아.”
보너스를 높이는 게 아니라 낮춘다.
엘린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발언이었다.
“그게 무슨…….”
김민이 오른손 검지를 돌리며 말했다.
“우리 구단주는 짠돌이잖아. 콜업 보너스가 높으면 그 금액만으로도 콜업을 망설일 거야. 난 콜업 보너스 몇십 만 달러를 더 받는 것보다 메이저리그에 콜업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엘린은 김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네요. 데블 레이스 구단주는 짠돌이 중에서도 짠돌이니까요.”
그는 김민이 다시 보였다.
‘킴은 타자만 분석하는 게 아니었어. 구단주의 성향까지 분석하다니…… 정말 당할 수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