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징 패스트볼-28화 (28/296)

28화 애리조나의 에이스 04

애리조나 가을 리그가 시작된지도 3주.

리그는 올스타 브레이크를 지나 후반기로 들어섰다.

“올스타 브레이크가 끝났다. 오늘 경기부터는 B조가 선발로 나서게 된다.”

김민은 전반기 2승을 올리면서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영광을 누렸다.

하나 후반기에는 불펜으로서 팀의 승리에 일조해야 했다.

투수 코치는 선발 로테이션을 발표한 뒤 김민이 속한 A조로 고개를 돌렸다.

“불펜에 특별히 희망하는 보직이 있는 사람 있나?”

99마일(159km)까지 던지는 강속구 투수 헨리가 가장 먼저 손을 들었다.

“마무리를 희망합니다.”

마무리는 불펜의 꽃.

희망하는 선수가 여럿 있을 수 있었다.

투수 코치가 다른 선수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또 없나?”

“저도 마무리를 희망합니다.”

이번에 손을 든 선수는 마이애미 말린스의 유망주 포드 체트였다.

“헨리와 포드, 또 다른 사람은 없나?”

동료들은 김민이 손을 들지 않은 것이 의외라고 생각했다.

‘전반기 가장 좋은 성적을 낸 건 킴인데 마무리 경쟁에 뛰어들지 않는군.’

‘킴이 마무리 자리를 강하게 요구한다면 코칭 스탭도 고민할 수밖에 없을 거야. 한데 킴은 왜 그 자리를 요구하지 않은 걸까?’

‘흠, 마무리가 싫다면 셋업을 생각하고 있는 건가?’

김민은 처음부터 마무리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포지션은 마무리와 거리가 멀었다.

투수 코치가 마지막으로 물으려는 순간 김민이 손을 들었다.

“롱릴리프를 희망합니다.”

투수 코치는 김민의 지원에 살짝 놀랐다.

‘마무리나 셋업이 아닌 롱릴리프라고? 독특한 선수군.’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김민의 지원을 받아들였다.

“좋아. 킴은 롱릴리프로. 다른 사람은 없나?”

선수들은 더 이상 손을 들지 않았다.

김민이 지원한 롱릴리프 포지션은 경쟁이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원하는 것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좋아. 킴은 롱릴리프, 헨리는 마무리, 포드는 셋업, 나머지는 네 명은 릴리프로 대기한다.”

포지션 배분이 끝난 뒤 마무리를 차지한 헨리가 김민에게 물었다.

“킴, 왜 마무리에 지원하지 않은 거야?”

김민이 훈련장을 빠져나가며 대답했다.

“길게 던질 수 없으니까.”

주변 선수들은 그제야 김민이 롱릴리프를 선택한 이유를 깨달았다.

‘킴은 마무리라는 상징적인 포지션보다 길게 던질 수 있는 포지션을 택한 것이군.’

‘마무리라는 상징보다는 실리인가? 운영의 마술사다운 선택이야.’

김민은 훈련장을 빠져나와 발을 빨리했다.

동료 투수들은 그의 뒷모습을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같은 날도 러닝인가?”

“선발 등판하는 날 빼고는 쉬지 않던데?”

“그 정도였나?”

김민의 러닝은 애리조나에 와서도 멈추지 않았다.

“팀마다 저런 친구 한둘쯤 있잖아. 비가와도 훈련을 멈추지 않는 연습 벌레.”

“맞아. 우리 팀에도 한 명 있었어. 물론 1년 만에 야구를 그만두긴 했지만.”

천재라 불리는 선수 중 김민처럼 연습에 몰두하는 이가 많지 않았다.

* * *

“킴과 베런을 추천합니다.”

“전 킴과 드와이트를 추천합니다.”

“킴과 베런입니다.”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를 이끄는 이들이었다.

홀먼 단장은 스탭들의 추천을 적어 놓은 화이트보드로 고개를 돌렸다.

“킴이 여섯 표, 베런이 다섯 표군.”

그는 다시 프런트 스탭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95마일(153km)도 던지지 못하는 투수가 그렇게 대단한가?”

스카우트 팀장 그레이가 물음에 답했다.

“킴은 톰 글래빈과 비슷한 유형의 투수입니다. 이런 유형에게 구속은 큰 의미가 없죠.”

홀먼 팀장이 고개를 수석 스카우트 베넨에게 돌렸다.

“베넨,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단장의 물음에 베넨이 어깨를 으쓱했다.

“킴은 좋은 선수입니다. 그가 40인 로스터에 들지 못한다면 누가 들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2년 안에 데블 레이스 선발 로스터에 들어갈 겁니다.”

홀먼 단장은 김민에 대한 극찬에 반신반의했다.

“아직 더블A도 뛰지 않은 선수를 이렇게까지 칭찬하다니…….”

그는 자신이 드래프트에서 픽한 설리반을 차기 선발 투수로 밀고 있었다.

“킴이 설리반보다 낫다는 말인가?”

설리반은 더블A에서 7승 3패 평균자책점 3.77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올렸다.

스프링 캠프에서 보여 주는 모습에 따라 메이저리그 25인 로스터에 합류할 수도 있었다.

“설리반에 비하면 아직 덜 검증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설리반이 다음 시즌 선발이라면 킴은 그다음 시즌쯤 되겠죠.”

홀먼 단장은 스탭들의 의견에 만족했다.

“아직은 설리반이 위라는 뜻이군?”

“그렇습니다.”

설리반에 대한 호평 때문일까?

홀먼 단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 그럼 킴과 베런을 40인 로스터에 넣고, 자크와 카일스를 방출하도록 하지.”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동의합니다.”

윈터 미팅 전.

김민의 40인 로스터 진입이 결정되었다.

물론 이것은 윈터 미팅 전 오프 시즌에 한정된 것이었다.

FA 선수로 누군가 이적해 온다면 김민과 베런 두 사람 중 한 명은 언제든 방출될 수 있었다.

* * *

3회 초.

무사 1. 3루.

전광판의 스코어는 6-2.

홈팀 솔라 삭스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타임아웃.”

감독이 마운드에 올라간 사이 투수 코치가 김민을 불렀다.

“킴, 조금 이르지만 마운드에 올라갈 걸세.”

김민은 2회 초부터 몸을 풀기 시작했다. 덕분에 몸은 완전히 풀려 있었다.

“언제든 올라갈 수 있습니다.”

“좋아, 그럼 마운드로 가게.”

감독이 신호를 보내자 김민이 마운드로 향했다.

‘3이닝도 채우지 못하고 6실점, 선발 투수의 멘탈이 완전 가루가 되었겠군.’

그는 2회 초 4실점 했을 때 선발 투수를 내렸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솔라 삭스의 코칭 스탭은 선발 투수를 더 던지게 했다.

그 결과 솔라 삭스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경기를 관전하고 있던 스카우트들은 김민의 등장에 눈을 크게 떴다.

“킴이 마운드에 오르는군요.”

“킴이 벌써 마운드에 오른다고? 킴 정도면 마무리로 손색이 없지 않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어쨌든 오늘 경기는 릴리프로 등판했군요.”

서프라이즈 타자들은 김민의 등장에 미소를 지었다.

“오후, 동양인 투수인가?”

“저 친구 올스타전에서 제법 던졌다지?”

“그건 기록에 넣을 만한 게 못 돼. 딱 1이닝만을 던졌으니까.”

“구속은 얼마나 나오는 거야?”

“올스타전에서는 92마일(148km)까지 봤어.”

“그 정도면 문제없어.”

김민은 연습 투구를 몇 번 한 뒤 주심에게 준비되었다는 사인을 보냈다.

“플레이볼!”

주심의 선언과 동시에 경기가 재개되었다.

타석에 들어선 것은 5번 타자 노먼.

노먼은 오늘 2타수 1안타로 좋은 타격감을 보여 주고 있었다.

‘체구도 작고…… 별로 강해 보이지 않는 투수군. 실제 구위는 어떨지 모르겠어.’

슉!

초구는 바깥쪽 패스트볼이었다.

‘이쯤이야!’

노먼은 초구부터 자신 있게 배트를 휘둘렀다.

탁!

배트 끝에 빗맞은 공이 2루수 정면으로 흘렀다.

서프라이즈 동료들이 그 타구에 혀를 찼다.

“노먼, 성급했어!”

“바깥쪽으로 빠지는 볼이잖아.”

노먼은 성급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바뀐 투수의 초구를 공략하라는 야구의 암묵적인 룰에 따른 것뿐이었다.

“2루!”

2루수는 타구를 잡은 뒤 유격수에게 빠르게 토스했다.

“좋았어!”

여기서부터는 유격수의 몫이었다.

공을 받은 유격수는 멋진 동작으로 1루 주자의 슬라이딩을 피하면서 1루에 송구했다.

팡!

1루심은 미트에 공이 들어온 순간 강하게 오른손을 내리찍었다.

“아웃!”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더블 플레이.

그러나 솔라 삭스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키스톤 콤비가 더블 플레이를 완성하는 동안 3루 주자가 홈을 밟았던 것이었다.

스코어는 이제 7-2까지 벌어졌다.

록튼이 마스크를 벗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괜찮아! 더블 플레이를 잡았다고!”

김민도 록튼의 의견에 동의했다.

‘점수 차이가 클 때는 3루 주자를 무리하게 홈에서 잡기보다는 아웃 카운트를 하나 더 늘리는 게 나아.’

그는 6번 타자 페드로를 삼구삼진으로 잡아내곤 이닝을 마쳤다.

“킴, 나이스 피칭.”

“오늘도 좋은데?”

김민이 유격수 그린과 글러브를 마주하며 말했다.

“아까 플레이는 정말 좋았어.”

그린이 검은 얼굴에 흰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그 정도는 기본이지.”

급한 불을 끄는 데 성공한 솔라 삭스였지만 좀처럼 따라가는 점수를 뽑지 못했다.

“3회 말 공격은 허무할 정도군.”

“공 8개에 끝났어.”

스카우트들이 불평하는 사이 공수 교대가 이뤄졌다.

4회 초.

김민이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상대하는 타순은 7, 8, 9번.

김민은 철저하게 바깥쪽으로 투구했고, 세 타자는 그의 제구와 운영에 당황했다.

“또 당했어.”

김민이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잡아내자 서프라이즈 벤치가 술렁거렸다.

“빠르지 않은 것 같은데 왜 못 치는 거야?”

“바깥쪽 제구가 생각보다 좋아.”

“꽉 찬 공이라고 해도 90마일 정도면…….”

“단순히 꽉 찬 공이 아니야. 저 녀석 하나둘씩 빼고 넣는다고. 그래서 치기 힘든 거야.”

서프라이즈 코칭 스탭도 김민의 투구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좋은 투수군요.”

“가을 리그 전반기 성적이 우연은 아니었군. 불펜으로 올라와서 저런 제구를 보여 줄 줄이야.”

“하지만 이대로 경기가 끝나진 않을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우리 팀의 테이블 세터는 강하거든.”

서프라이즈가 자랑하는 1, 2번.

그들은 다음 시즌 메이저리그 콜업을 예약한 상태였다.

김민 역시 그들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번 타자 폴은 컨택이 좋고, 2번 클리어드는 발이 빠르다. 웬만한 내야 땅볼은 다 세이프가 될 거야.’

그가 더그아웃으로 들어오자 투수 코치가 다가왔다.

“킴, 다음 이닝도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가능하다면 길게 던져 주게. 물론 휴식일은 보장할 걸세.”

김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휴식일이 보장된다면 끝까지 던질 수도 있습니다.”

5회 초.

김민은 서프라이즈의 테이블 세터를 상대하기 위해 마운드에 올랐다.

1번 타자 폴은 김민 같은 유형의 투수에게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스트라이크 존에서 공 하나둘 빼는 것으로 타자를 요리한다고? 시대가 어느 때인데 그런 잔재주가 통할 것 같아?’

그는 배트를 짧게 잡았다.

김민은 그의 타격 자세를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빠르고 짧은 스윙으로 정확한 컨택을 하겠다는 뜻이군.’

그는 초구부터 볼 배합에 변화를 주었다.

슉!

타자 안쪽을 찌르는 공은 포심 패스트볼.

폴은 김민의 볼 배합에 혀를 찼다.

‘바깥쪽이 아니라 안쪽인가?’

그는 배트를 휘두르는 대신 안쪽 공을 지켜보기로 했다.

‘운이 좋다면 볼이 될 거야.’

그러나 김민은 그에게 행운을 허용하지 않았다.

“스트라이크!”

주심의 목소리와 함께 폴이 미소가 사라졌다.

‘안쪽도 정확하게 제구할 수 있단 말이지?’

그는 짧게 잡았던 손을 아래로 내리고 타격 위치를 조정했다.

록튼은 폴이 정석에 가까운 위치에서 타격하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센스가 좋군. 초구만 보고 자세를 바꿨어.’

김민 역시 폴의 센스를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폴에게 출루를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슉!

두 번째 공이 바깥쪽을 향했다.

‘안쪽 다음 바깥쪽 로케이션이냐!’

폴은 짧은 스윙으로 그 공을 쳐 내려 했다. 하나 배트가 공을 때리려는 순간 공이 낮게 가라앉았다.

‘스플리터!’

배트는 허공을 가르고, 주심은 목소리를 높였다.

“스윙 스트라이크!”

투 스트라이크 노 볼.

폴의 자존심이 구겨지는 순간이었다.

‘로케이션에 완전히 당했다.’

그는 김민의 클래스가 자신이 예상한 것 이상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좋은 투수야.’

폴은 바짝 긴장한 채 세 번째 공을 상대했다.

세 번째 공은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슬라이더.

폴은 마지막 순간 배트를 멈췄고, 록튼은 미트를 1루심에게 향했다.

1루심은 록튼의 물음에 두 손을 활짝 펼쳤다.

“세이프야!”

“돌지 않았어.”

서프라이즈 벤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아직 볼 카운트는 김민에게 유리했다.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공을 끝까지 확인했다는 건가? 눈은 확실히 좋군.’

평범한 타자였다면 슬라이더에 헛스윙이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폴은 메이저리그 타자들과 동등한 선구안을 지니고 있었다.

‘쉬운 타자는 아니군.’

김민은 신중하게 네 번째 공을 선택했다.

슉!

이번 공은 안쪽이었다.

‘패스트볼?’

폴은 배트를 아래로 내리며 공을 커트하려 했다.

그러나 김민이 던진 공은 단순한 패스트볼이 아니었다.

탁!

배트 아래쪽에 맞은 공이 큰 바운드를 일으켰다.

“바운드가 커! 살 수도 있겠어!”

투수 옆을 통과하는 투 바운드.

폴의 빠른 다리를 생각하면 내야 안타가 될 수도 있는 타구였다.

하지만 유격수 그린의 수비는 서프라이즈의 기대를 무너뜨렸다.

“아웃!”

1루심의 선언과 함께 폴이 고개를 숙였다.

“빌어먹을 스플리터!”

양키스 스카우트 융커스는 김민의 철저한 로케이션에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좋은 투수야. 저런 투수는 쉽게 무너지지 않지.”

그는 김민의 제구와 운영에 65점이라는 높은 점수를 주었다.

‘보스는 좋아하지 않겠지만 감독은 좋아할 만한 투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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