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애리조나의 에이스 03
6회 초.
스콜피언스는 공격에 들어가기에 앞서 선발 투수인 산타나를 내리려 했다.
그런데 산타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5이닝 71구로 끝낼 경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네는 이번 시즌 불펜으로 뛰지 않았나? 여기서 내려가는 게 어깨에 부담도 적고…….”
“감독님, 다음 시즌부터는 선발로 뛸 겁니다.”
메이저리그에서 불펜으로 뛰었던 산타나는 선발 복귀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그는 오늘 경기에서 가능한 많은 이닝을 소화해 구단 관계자들에게 자신이 선발로 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했다.
감독이 투수 코치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100구 이내라면 괜찮을 겁니다. 원래 선발로 뛰던 선수고…….”
감독이 산타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90구까지 던지게. 그 이상은 안 돼.”
지금까지 71구를 던졌으니 잘하면 2이닝을 더 던질 수 있었다.
“95구까지 던지겠습니다.”
어떻게든 2이닝을 더 던지겠다는 뜻.
감독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좋아. 95구까지 가지.”
산타나는 6회 초에도 마운드에 올랐다. 그리곤 그레고리와 아담스, 펠튼을 삼자범퇴로 막아 냈다.
“체인지업의 위력이 떨어지니, 패스트볼로 찍어 누르는군요.”
“경기 후반 체인지업의 무브먼트와 그것을 뒷받침할 제3의 구종이 아쉽군.”
산타나의 체인지업은 낙차가 컸지만, 외계인이라 불리는 페드로 마르티네스의 그것과는 차이가 컸다.
한마디로 이 시기 체인지업은 전성기 체인지업과는 격차가 있었다.
브라이언은 그래도 산타나가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여유가 있다면 데려올 만도 합니다만…….”
“우리 구단 사정에 여유가 어디 있던가? 좌완 파이어볼러를 그냥 내줄 미네소타도 아니고.”
클라인은 부정적이었다.
“킴이 마운드에 오르니, 킴에게 집중하게.”
김민은 오늘 톰 글래빈에 빙의한 듯 공을 던지고 있었다.
그는 지독할 정도로 바깥쪽을 고집하며 타자들의 선택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이번에도 바깥쪽으로 승부할까요?”
“아마도 그렇겠지.”
김민은 마운드로 올라가기 전 록튼을 불러 한 가지를 물었다.
“스플리터를 안쪽으로 던질 텐데 받을 수 있겠어?”
안쪽으로 떨어지는 스플리터는 바깥쪽과 달리 타자를 신경 써야 했다.
록튼이 미트를 두드리며 말했다.
“안쪽이든 바깥쪽이든 걱정하지 마. 원 바운드로 던져도 잡아 줄 테니까.”
그는 실제로 수비에 자신이 있었다.
김민은 록튼처럼 수비가 강한 포수를 선호했다.
“오케이. 그럼 안쪽으로 2개쯤 갈 거야.”
“그런데 킴, 스플리터 말이야. 누구한테 던질 거야? 시몬스?”
“아니, 오스만.”
오스만은 6회 말 선두 타자였다.
‘미래의 올스타를 상대로 3타수 1안타 1홈런이면 크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겠지.’
김민은 지난 타석 때 바깥쪽 슬라이더를 던져 유격수 땅볼로 처리했다.
이번에는 반대로 안쪽 스플리터를 던져 상대할 계획이었다.
“플레이볼!”
주심의 사인과 함께 6회 말 스콜피언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첫 타자는 오스만이군요.”
“초구 홈런이 인상적이었지. 여기서 하나 더 치면 킬러 이미지를 굳힐 수 있을 거야.”
“킬러라니요. 킴은 킬러를 허용할 선수가 아닙니다.”
“킴의 입장에서 보면 반드시 잡아내야겠지. 얕보이면 안 될 테니까.”
스카우트들은 오스만의 파워에 80점 만점에 75점이라는 후한 점수를 주었다.
탁!
초구는 1루 더그아웃으로 향하는 파울.
오스만을 상대하는 김민의 제구는 다른 타자들을 상대할 때보다 하나 정도 더 밖으로 빠져 있었다.
“킴이 오스만의 긴 팔을 신경 쓰는 것 같군요.”
“1회 홈런을 맞았으니 신경을 쓰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두 번째 공은 안쪽 패스트볼이었다.
오스만은 이 공에 당황했다.
‘안쪽이라고?’
팡!
공이 포수 미트에 꽂히자 주심이 목소리를 높였다.
“스트라이크!”
그는 허를 찌른 볼 배합에 배트를 내보지도 못한 채 카운트를 헌납할 수밖에 없었다.
“킴이 드디어 안쪽을 찔렀습니다.”
“세 번째 타석부터는 바깥쪽만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모양이군.”
“역으로 가져가는 볼 배합이 좋긴 하지만, 조금은 아쉽군요. 바깥쪽으로 철저히 승부하는 투수를 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스카우트들은 김민이 톰 글래빈의 빙의에서 벗어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톰 글래빈은 경기 내내 바깥쪽 공만 고집하지 않았다. 그는 필요에 따라 안쪽에도 얼마든지 공을 꽂아 넣을 수 있는 투수였다.
‘큭, 안쪽이라. 로케이션을 가져가겠다는 뜻이군.’
오스만은 배터박스에서 살짝 뒤로 물러섰다.
록튼은 그 모습을 보곤 바깥쪽으로 승부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안쪽으로 하나 다시 바깥쪽으로 하나, 로케이션으로 승부를 거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러나 김민의 사인은 안쪽 공이었다. 그것도 지금까지 던지지 않았던 스플리터.
록튼은 김민의 사인에 집중했다.
‘아까 말했던 승부구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미트를 앞으로 내밀었다.
슉!
김민의 손끝을 떠난 공이 미트를 향해 나아갔다.
오스만은 그 공을 보곤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안쪽 패스트볼? 두 번이나 통할 것 같으냐?’
그의 머릿속에 안쪽 스플리터는 존재하지 않았다.
수 싸움만 생각하면 완벽한 김민의 승리.
그러나 오스만의 재능은 주변 사람들이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그는 떨어지는 스플리터를 동물적 감각으로 때려냈다.
팍!
홈플레이트 앞에서 강하게 바운드 된 공.
‘바운드가 높아!’
브라이언은 아무래도 내야 안타가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레이도 같은 생각이었다.
‘야구는 볼 배합으로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니야.’
모두가 내야 안타를 생각하고 있는 순간 김민이 오른손을 쭉 뻗었다.
“맨손 캐치?”
록튼이 크게 놀란 순간 김민이 1루를 향해 송구했다.
팡!
“아웃!”
투수의 호수비.
이것 역시 예상하지 못한 변수 중 하나였다.
“나이스 캐칭!”
“좋았어! 킴!”
동료들은 김민의 호수비에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투수 코치와 감독은 미소를 짓지 않았다.
“위험한 수비군.”
“투수는 공을 던지는 손을 보호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번 수비는 위험했습니다.”
김민 역시 자신의 수비가 과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지나치게 달아올랐어.’
그러나 그는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마운드에 선 투수는 링에 오른 복서와 같았다.
어떻게든 타자를 잡고 싶다.
이 승부에서 지고 싶지 않다.
이기고자 하는 갈망.
김민은 그것이 없는 자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오른손 검지를 들며 동료들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원 아웃이야. 천천히 가자.”
“오케이!”
“그렇게 가자고.”
김민은 다음 타자 에드가를 상대했다.
에드가는 유독 김민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이번만큼은 안타를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깥쪽을 버렸으니, 내게도 안쪽부터 오겠지?’
그러나 에드가에게 던진 초구는 바깥쪽이었다.
팡!
“스트라이크!”
에드가는 혀를 찼다.
‘왜 나만!’
그는 배트를 짧게 잡고 컨택 위주로 나섰다.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좋지 않았다.
탁!
배트 안쪽에 맞은 공이 3루수에게 굴러갔다.
에드가는 1루로 달려가면서 간절히 외쳤다.
‘놓쳐라! 놓쳐!’
그러나 3루수는 안정된 동작으로 포구한 뒤 깔끔하게 송구했다.
결과는 아웃.
에드가의 긴 한숨이 그라운드를 맴돌았다.
“하아…….”
김민은 에드가의 아웃을 확인하곤 손가락 두 개를 폈다.
“투 아웃!”
시몬스는 그 모습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호수비로 끓어오른 템포를 스스로 가라앉혔어. 저 녀석…… 정말 마이너리거가 맞는 건가?’
그는 마이너리그의 어떤 투수도 김민처럼 경기를 운영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이겨내야 한다.’
시몬스는 오늘 경기 2타수 무안타로 묶여 있었다. 그는 이번 타석만큼은 안타를 뽑아낼 생각이었다.
“또 시몬스군요.”
“유독 자주 돌아오는 것 같군.”
코칭 스탭은 두 사람의 대결이 흥미진진할 거라 생각했다.
예상대로 김민과 시몬스의 대결은 1, 2구로 끝나지 않았다.
팡!
4구를 참아 낸 시몬스.
카운트는 이제 2-2였다.
“쉽게 물러설 생각이 없군요.”
“시몬스에게도 자존심이 걸린 승부겠지.”
김민은 바깥쪽으로 잇달아 3개를 던진 뒤 안쪽 스플리터를 던졌다.
그러나 시몬스는 반응하지 않았다.
‘안쪽을 버린 건가? 아니면 오스만의 타석을 기억하고 있는 건가?’
어느 쪽이든 시몬스를 잡아내지 못했으니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었다.
‘커브를 하나 던져 볼까? 아니야. 그런 걸로는 시몬스를 잡을 수 없어. 녀석의 이번 타석 집중력은 최고야.’
그가 망설이자 록튼이 타임을 걸고 마운드에 올라갔다.
“킴, 인터벌이 너무 길어.”
김민이 글러브로 입을 가린 채 말했다.
“4번째 공을 골라 낼 줄 몰랐어.”
“다음 승부구는 없는 거야?”
“있긴 한데 너무 위험해.”
“어차피 지고 있잖아. 맞아도 좋다고 생각하고 던져.”
김민은 그제야 자신이 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서 시몬스를 잡아내도 패전 투수란 말이지?’
그는 미간을 좁혔다.
‘잊고 있었어. 내가 상대하는 게 누구인지.’
김민은 시몬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음 공은 하이 패스트볼이야. 내가 다른 사인을 내도 무조건 하이 패스트볼이 간다고 생각해.”
“알겠어.”
록튼은 고개를 끄덕이곤 홈플레이트로 돌아갔다.
잠시 뒤, 김민은 예고한 것처럼 하이 패스트볼을 던졌다.
슉!
포심 패스트볼이 타자 눈높이로 날아갔다.
‘하이 패스트볼? 하지만 높이가 낮아.’
시몬스는 공을 향해 배트를 내밀었다.
‘각도만 조금 바꿔 주면 내야를 뚫을 수 있다. 어차피 내가 원하는 건 홈런이 아니야.’
배트와 공이 닿는 순간 시몬스는 손목에 힘을 주었다.
탁!
배트에 맞은 공이 2루수와 유격수 사이를 뚫는 듯했다.
“안타다!”
그러나 유격수는 타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쫓아가서 공을 잡아냈다.
브라이언은 유격수의 훌륭한 풋워크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좋은 풋워크야. 평범한 유격수였다면 절대 따라가지 못했을 거야. 야구 천재라 불릴 만하군.’
그러나 상황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공을 잡았어.”
“하지만 아직이야!”
시몬스의 발과 유격수의 송구.
어느 쪽이 빠를지는 대 봐야 알 수 있었다.
팡! 팍!
공과 발이 동시에 베이스에 도착했다.
“판정은?”
브라이언이 짧게 외친 순간 1루심이 오른손을 들었다.
“아웃!”
주심의 아웃 선언에 브라이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역시 발은 공을 이길 수 없군.”
시몬스는 끝내 김민을 넘지 못했다.
“시몬스, 아슬아슬했어.”
동료의 위로에 시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슬아슬했지.”
그는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뒤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킴, 왠지 계속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김민은 시몬스를 잡아내고도 담담했다. 그의 목표는 시몬스가 아닌 요한 산타나였다. 그는 7회 말에도 마운드에 올라 세 타자를 범타로 잡아냈다.
김민의 안정감 있는 투구에 스카우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킴은 산타나에 비해 후반이 강하군.”
“산타나는 7회 초에 볼넷이 2개였지?”
“그래, 산타나는 점점 흔들리고 있어. 다음 회는 아마 무리일 거야.”
“반면 킴은 7회 말에도 구속이 떨어지지 않았어.”
7회 초를 마쳤을 때 산타나의 투구 수는 89개.
한계 투구 수까지는 6개의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감독은 고개를 내저었다.
“7이닝 무실점. 선발 투수로서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산타나도 자신이 한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제구력이 흔들리고 있어. 구속으로 찍어 누르는 것도 지난 이닝이 마지막. 다음 이닝에 나서면 반드시 실점할 거야.’
“알겠습니다. 여기까지 던지도록 하겠습니다.”
8회 초.
스콜피언스는 투수를 산타나에서 몰린으로 교체했다.
그리고 몰린은 베런에게 투런 홈런을 맞았다.
스코어 2-1 솔라 삭스의 역전.
“나이스 베런!”
그레고리가 마치 자신이 홈런을 친 듯 기뻐했다.
코칭 스탭은 몸을 풀고 있는 김민을 보며 의견을 교환했다.
“투수를 교체할까요?”
“킴은 아직 던지려는 것 같은데. 몇 구를 던졌지?”
“88구입니다.”
“좋아. 8회 말에도 킴을 내보내지. 단, 주자를 내보내면 바로 교체야.”
“알겠습니다.”
8회 말.
김민이 마운드에 올랐다.
시몬스는 다시 한번 자신에게 기회가 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민은 시몬스를 다시 만날 생각이 없었다. 그는 7, 8, 9번 타자를 깔끔하게 처리했다.
그가 더그아웃으로 돌아오자 감독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킴, 훌륭했어.”
투수 코치도 그의 호투를 칭찬했다.
“에이스다운 투구였네.”
김민이 담담하게 말했다.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그의 말대로 그는 마운드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9회 초.
솔라 삭스가 2점을 더 뽑으면서 스코어는 4-1로 벌어졌다.
“오늘 경기는 힘들어졌군요.”
“아직 몰라 스콜피언스의 9회 말 타선도 좋다고.”
9회 말 시몬스가 적시타를 때리면서 분전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솔라 삭스는 100마일(161km)을 던지는 마무리 투수 모어랜드를 투입해 경기를 매조지었다.
최종 스코어 4-2 솔라 삭스의 승리.
“아쉽게 되었군.”
산타나는 7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했지만, 8이닝 1실점으로 버틴 김민에게 승리 투수를 넘겨줘야 했다.
산타나가 투수 코치에게 말했다.
“에이스 대결은 원래 이런 법이죠. 끝까지 던지지 못한 제 패배입니다.”
그는 더 길게 던질 수 있도록 체력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킴이라고 했던가? 다음에는 끝까지 던져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