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애리조나의 에이스 01
김민은 자신에게 손을 내민 사내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론과 그를 가리켜 에이전트계의 양대 산맥이라 불렀다.
하지만 딱 한 사람만을 고르라면 백이면 백 다 이 사람을 가리킬 것이다.
그의 앞에 선 사내는 바로 악마의 에이전트 보라드였다.
보라드는 아무에게나 손을 내미는 사내가 아니었다.
확실한 A급 또는 메이저리그 레귤러에게만 손을 내미는 사내가 바로 보라드였다.
“사람을 착각하신 것 아닙니까?”
김민의 물음에 보라드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닐세.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킴, 자네야.”
“전 겨우 싱글A를 뛴 애송이입니다.”
보라드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면 내가 손을 내밀지 않았겠지. 킴, 내가 언제까지 손을 들고 있어야 하는 건가?”
김민은 슈퍼 에이전트를 앞에 두고도 눈빛에 흔들림이 없었다.
보라드는 그의 냉철함에 끌렸다.
‘마운드에서 보여 준 완벽한 운영은 바로 이 냉철함에서 나온 것이었군. 투수에게 냉철함이란 큰 미덕 중 하나지. 이 친구는 반드시 성공할 거야.’
그는 김민의 메이저리그 성공을 확신했다.
“지금 바로 내려놓아도 됩니다.”
단호한 거절.
보라드는 예상하지 못한 거절에 멈칫했다.
“이런 기회는 쉽게 오는 게 아닐세.”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평생 받아 보지도 못할 그런 제안이죠. 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꿈이 아닌가 싶었다.
자신이 지목한 선수가 자신을 원하지 않다니.
“론과는 끝났다고 들었는데…….”
“론이 아닙니다. 제가 꼭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엘린이 아니었다면 김민은 보라드의 손을 잡았을 것이다.
보라드와 계약한다는 것은 곧 성공을 의미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이미 엘린과 한배를 타기로 결정했다.
“꼭 필요한 사람이라. 내가 아는 사람인가?”
보라드가 아쉬움을 곱씹으면서 물었다.
“아뇨. 하지만 곧 알게 될 겁니다.”
보라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그렇군. 킴, 나는 자네와 나의 인연이 이것으로 끝이 아닐 거라 생각하네. 언젠가 나와 함께 일할 날이 올 걸세.”
김민은 가볍게 목을 끄덕임으로써 인사말을 대신했다.
이날 김민의 투구는 보라드가 인정했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 * *
“복기는 이쯤 해 둘까?”
김민은 기록지를 정리한 뒤 핸드폰을 열었다.
뚜르르륵.
신호음이 몇 번 울리고 나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킴.”
엘린이었다.
“엘, 오늘 일정이 끝났어.”
“개막전 선발, 이겼어?”
“이겼지. 6이닝 무실점.”
엘린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게 정말이야? 스콜피언스를 상대로 무실점이라고?”
“그래, 무실점 맞아.”
엘린은 김민이 호투를 펼칠 것이라 생각만 했지 무실점으로 막아낼 것이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스콜피언스의 타선은 이번 가을 리그 최강이었다.
‘스콜피언스를 상대로 무실점이라면…… 새로운 상대에게 예전의 기록은 의미가 없는 건가?’
엘린이 재차 물었다.
“시몬스는 어떻게 됐어?”
김민이 짧게 대답했다.
“잡았지.”
“정말?”
“인터넷 기사를 확인하던가.”
엘린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직 기사는 올라오지 않았어. 하지만 킴이 그렇다고 하면 그렇겠지.”
김민이 살짝 말끝을 돌렸다.
“엘, 이쪽으로 와 줘야겠어.”
“내가?”
엘린은 김민의 요구에 한 발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김민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에이전트는 내가 아닌 엘이니까.”
“그건 그렇지. 하지만 내가 거기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애리조나에 있는 선수들은 대부분 대형 에이전트 소속이라고.”
“아닌 선수들도 몇 있잖아. 그들을 노려야지.”
“그게 가능할까? 애리조나에 이미 대형 에이전트들이 대거 출몰했다고 들었어. 그들과 경쟁에서 이길 수는 없다고.”
보라드와 론이 애리조나에 온 것은 김민의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곳에 머물며 윈터 미팅이 시작되기 전까지 유망주를 수집할 예정이었다.
김민이 특유의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한 명 봐 둔 선수가 있어.”
그의 눈에 들어온 선수는 스콜피언스의 벤치를 달구고 있던 내야수였다.
이름은 슈펠츠, 독일계 아버지를 둔 그는 21라운드라는 낮은 순번으로 뽑혔다.
낮은 순번 덕분에 마이너리그에서 4년을 보낸 그는 5년째 메이저리그에 콜업되었고, 이후 단 한 번도 마이너리그에 내려가지 않았다.
메이저리그 레귤러로 12시즌을 보냈고 올스타에 1번 선정되었다.
물론 이것은 김민만이 알고 있는 미래였다.
현재 슈펠츠는 더블A와 싱글A를 오가는 유망주에 불과했다.
“누군데?”
“슈펠츠.”
“모르는 선수네.”
“커뮤니티에서 언급되지 않고 있는 건가?”
“어느 팀 소속이야?”
“디트로이트.”
김민의 대답에 엘린이 빠르게 인터넷 기록을 검색했다.
“아, 있다. 있어. 크벨 슈펠츠, 독일계 22세, 우투우타 포지션은 내야수. 하우저의 부상 때문에 애리조나에 뒤늦게 합류하게 된 선수군.”
누군가의 부상이 누군가에게는 천금 같은 기회였다.
김민은 엘린의 말을 듣곤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슈펠츠가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하우저의 부상 덕분이었군. 하우저의 부상이 아니었다면 올스타 출신 내야수의 탄생이 몇 년은 늦춰졌겠지.’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직 이렇다 할 에이전트가 없을 거야. 우리가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 충분히 계약할 수가 있어. 다만 빨리 와야 해. 당장 내일부터 좋은 활약을 펼칠 수도 있으니까.”
“오케이. 슈펠츠라면 어떻게든 해 볼게.”
상대가 유명하지 않은 유망주라는 사실을 알자 엘린도 힘이 나는 모양이었다.
김민은 전화를 끊은 뒤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슈펠츠와 내가 메이저리그에 콜업되면 당분간 돈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거야.”
다음 날.
엘린은 슈펠츠와 만났다.
슈펠츠는 이날도 벤치를 달궜기 때문에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그를 김민과 엘린이 동시에 마크했다.
슈펠츠는 어제 경기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 준 동양인 투수를 알고 있었다.
그가 엘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사람이 킴의 에이전트라고?”
“그래, 겉모습과 달리 아주 뛰어난 에이전트야.”
슈펠츠는 반신반의했다.
“그래서 용건이 뭐야?”
“당신과 계약하고 싶습니다.”
엘린의 말에 슈펠츠가 망설였다.
“난 이미 에이전트가 있어.”
김민이 물었다.
“슈펠츠, 에이전트에게 제대로 된 대우를 받고 있는 거야? 연락은 1년에 몇 번이나 해?”
“연봉 협상할 때쯤은…….”
“그런 식은 안 돼. 그건 그냥 선수를 데리고 있는 것에 불과해. 진짜 에이전트는 선수와 자주 대화하면서 선수를 메이저리그로 인도한다고.”
슈펠츠도 자신이 계약한 에이전트 사무실이 자신에게 무관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번 가을 리그 때도 그가 애리조나에 도착하고 나서야 참가를 확인하는 전화를 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 친구, 아니, 이 사람이 날 메이저리그로 인도할 수 있다고?”
엘린이 품속에서 명함을 꺼내며 말했다.
“에이전트 사무실에 소속된 직원이 아니라 진짜 에이전트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슈펠츠는 진짜 에이전트라는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조건은 어떻게 됩니까?”
“에이전트 평균입니다. 4%죠.”
전체 연봉의 4%, 1000만 달러(124억 원) 계약이면 40만 달러(4억9천만 원)가 에이전트에게 돌아간다는 뜻이었다.
슈퍼 에이전트인 보라드의 경우 6%의 수수료를 받고 있었다.
“나쁘지 않군요.”
“마이너리그의 각종 데이터 제공, 오프 시즌 개인 인스트럭터 고용 등이 서버스로 제공될 겁니다.”
“인스트럭터도 고용해 준단 말입니까?”
이번에는 김민이 엘린을 대신해 대답했다.
“선수를 위한 에이전트니까.”
김민은 엘린의 성공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스트럭터까지 투자해도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킴, 어째서 내게 이런 에이전트까지 소개시켜 주는 거야?”
슈펠츠는 김민과 초면이었다. 초면의 호의는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해도 될까?”
“솔직한 게 좋지.”
“세이버 매트릭스란 말 들어 봤어?”
“아니.”
“세이버는 클래식 스텟을 대신할 새로운 지표야. 여기에 따르면 네 마이너리그 성적은 상당히 인상적이야.”
김민이 고개를 돌리자 엘린이 슈펠츠의 세이버 스탯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슈펠츠는 그 설명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엘린과 김민이 자신을 높게 평가한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슈펠츠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쪽에서 날 높게 평가해 주는 만큼 나도 그쪽을 믿겠어.”
엘린이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생각했습니다.”
이날 엘린은 김민을 제외한 첫 번째 선수와 계약하는데 성공했다.
K 코퍼레이션으로서는 의미 있는 한 발이었다.
* * *
탬파베이 스카우트팀은 김민의 선전에 한시름을 놓았다.
“지난 트레이드의 최고 수확은 킴인 것 같습니다.”
“킴은 아직 더블A도 올라가지 않은 선수야.”
“하지만 야구 천재들 사이에서 그 재능을 보여 줬습니다. 그라면 할 수 있습니다.”
애리조나 가을 리그에서 뛰어난 성적을 보여 준 선수들은 대부분 메이저리그 레귤러가 되었다.
브라이언은 김민이 탬파베이 선발 로스터 한자리를 꿰찰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킴은 괜찮았지만 타자 쪽은 부진했습니다.”
낮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클라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맡고 있던 더블A 선수들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담은 노트를 내밀었다.
그의 한마디에 주변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오늘 경기에 나선 탬파베이 소속 야수는 그레고리와 핸더슨이었다.
그레고리는 3타수 무안타 1삼진, 핸더슨은 2타수 무안타 2삼진이었다.
핸더슨의 부진은 장타력을 가진 3루수라던 타이틀을 산산조각내 버렸다.
“파워툴은 문제가 없는데 다들 컨택이 안 됩니다.”
그레이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직 애리조나 가을 리그는 두 경기를 치렀을 뿐이야.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어.”
베넨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받았다.
“그레이 팀장의 말이 옳아.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지.”
탬파베이 스카우트들은 남은 경기에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6게임이 지나고도 탬파베이 유망주들의 부진은 끝나지 않았다.
“베런이 홈런을 하나 친 걸 빼면, 장타가 전멸이군요.”
“그나마 베런이 쳐줘서 다행입니다.”
“하지만 베런은 1루 자원 아닙니까? 우리 팀에는 프레드릭이 있습니다.”
프레드릭은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의 주전 1루수로 이번 시즌 27개의 홈런을 쏘아 올린 거포였다.
“프레드릭은 벌써 35세입니다. 베런으로 그를 대체할 수 있다면 나쁘지 않습니다.”
베런으로 프레드릭을 대체하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프레드릭의 계약이 2년 더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트레이드는 어떨까요?”
“베런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받아주는 구단만 있다면…….”
“다음 시즌이면 36세의 노장을? 쉽지 않을 걸세.”
그레이가 두 손을 흔들며 말했다.
“답답한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하도록 하지. 다들 내일 경기나 전망해 보도록 하세.”
내일 경기는 탬파베이가 자랑하는 유망주 김민의 선발 경기였다.
“퀄리티 스타트만 보여 줘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클라인의 말에 베넨이 미소를 지었다.
“점수가 짜군. 무실점 투수에게 3점이나 허락하다니 말이야.”
클라인은 신중한 편이었다.
“스콜피언스는 두 번 실패하지 않을 겁니다.”
솔라 삭스는 래프터스와 원정을 마치고 스콜피언스 원정을 앞두고 있었다.
덕분에 김민은 연속으로 스콜피언스를 상대해야 했다.
스콜피언스 타자들은 다음 경기 선발 투수가 김민이라는 말을 듣곤 고개를 끄덕였다.
“복수전이군.”
“올스타 브레이크 전에 좋은 기회가 왔어.”
“1회부터 두들기자고.”
“물론이지. 녀석의 무기가 스플리터라는 걸 안 이상 실패는 없을 거야.”
스콜피언스의 3번 타자 시몬스는 동료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미간을 좁혔다.
‘그런 자세로는 절대 킴을 공략할 수 없다. 녀석은 희대의 전략가다. 상대를 바로 보지 못한다면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그는 지난 경기에서 보여 준 호투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몬스는 내일 경기 목표를 3타수 1안타로 잡았다.
6경기에서 0.383의 타율을 기록하고 있는 천재 타자의 목표치고는 너무나 소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