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천재들의 리그 04
“스콜피언스 선발은 밥이군요.”
“이쪽은 정통파 에이스야.”
“1라운드죠?”
“1라운드 4번. 거품으로 밝혀지면 곤란한 순번이지.”
밥 로저.
그는 최고 시속 99마일(159km)의 강속구와 낙차 큰 커브를 주 무기로 하는 정통 오버핸드 투수였다.
크랩스 코치인 샘이 봤다면 진짜 투수라고 말했을 그런 투수였다.
“1라운드 4번이라 얼마나 잘 던지는 한번 보죠.”
브라이언은 김민과 정반대 포지션에 위치한 밥이 너무 부풀려져 있다고 생각했다.
‘99마일을 던질 수 있다고 모두 로저 클레멘스가 되는 건 아니야. 요즘 구속만 빠른 투수들이 지나치게 고평가되어 있어.’
100마일에 육박하는 강속구를 던지는 유망주.
메이저리그 팀들은 대부분 이런 유망주를 1, 2명씩은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팡!
밥의 연습 투구만으로도 스카우트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97마일(156km)이야.”
“연습 투구가 97마일인가? 대단하군.”
김민은 더그아웃에서 땀을 닦으면서 밥의 투구를 관찰했다.
‘최고 구속은 볼튼과 비슷하지만, 이쪽은 1라운드에 지명을 받았어. 스테미너와 브레이킹볼에서 앞서는 건가? 하지만 내가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 생각하면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하진 못한 모양이야.’
그는 앞으로 10년 동안 팀의 에이스로 이름을 날릴 선수들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팡!
포수 미트에서 좋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우완 정통파 투수의 강속구는 언제나 매력적이었다.
“패스트볼이 상당히 좋군.”
록튼이 포수 장비를 해체하며 김민에게 고개를 돌렸다.
“밥, 킴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투수지.”
“흔히 말하는 정통파 아니야?”
록튼이 니가드를 떼어 내며 말했다.
“오른손 오버 핸드에 강속구. 걱정할 필요 없어. 더블A에부터 저런 투수는 흔하다고. 난 킴의 스플리터가 더 마음에 들어.”
김민이 밥을 주시하며 물었다.
“스플리터 괜찮았어?”
“괜찮았냐고? 최고였어. 특히 던지는 타이밍이 좋더라. 난 킴 같은 투수가 마음에 들어. 투수가 볼 배합을 잘해 주면, 포수는 포구와 주자 견제에 집중할 수 있거든.”
포수하면 대부분 자신이 볼 배합을 하면서 경기를 풀어가는 지휘관 스타일을 떠올린다.
하지만 포수 중에는 록튼처럼 투수와 협업 또는 룰의 배분을 원하는 이도 있었다.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공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오오오오!”
관중들의 함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잠시 후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나이스!”
“그래! 바로 그거야!”
“멋진다! 모건!”
솔라 삭스의 1번 타자 모건이 1회 말 초구를 통타해 중앙 펜스를 넘겨 버린 것이었다.
“모건이 제대로 노렸군요.”
“그렇다고 해도 이번 공은 너무 가운데였어.”
클라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클라인, 이 공 하나만으로 밥을 평가할 수는 없겠죠.”
“자네 말대로야. 3, 4이닝은 더 봐야겠지.”
밥은 홈런을 맞은 뒤 제구가 흔들리면서 연속 볼넷을 내주었다.
그러자 스콜피언스는 타임으로 경기의 흐름을 끊었다.
“1회부터 흔들리는군요.”
“영점이 맞지 않는 걸 보면, 오프 시즌 동안 제대로 준비를 안 한 모양이야.”
확장 로스터로 메이저리그에 올라가지 못한 유망주들은 애리조나 가을 리그가 시작될 때까지 한 달 정도의 오프 시즌을 가졌다.
김민의 경우 이 오프 시즌 동안 볼튼, 스미스와 함께 플로리다에서 훈련했다.
반면 밥은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휴가를 보냈다.
그가 훈련장으로 복귀한 것은 애리조나 가을 리그 참가를 통보받은 다음이었다.
딱!
짧은 소리와 함께 공이 유격수에게 흘러갔다.
유격수는 가벼운 스탭으로 공을 잡은 뒤 부드럽게 2루에 송구했다.
“저 친구 좋군.”
브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이며 클라인의 말을 받았다.
“예, 스탭이 빠르고 송구도 정확합니다.”
스콜피언스의 유격수 그란데의 수비는 거의 모든 스카우트들이 인정하는 것이었다.
다만 그란데의 경우 공격력이 부족해 메이저리그 콜업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배트만 어떻게 되면 좋을 것 같은데…….”
“아직 22세입니다. 1년 더 트리플A에서 뛰면 평균까지 올라오지 않을까요?”
“22세는 그렇게 낙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그란데에게는 뭔가 계기가 필요해.”
메이저리그 콜업 커트라인 25세까지 앞으로 3년.
그러나 메이저리그 레귤러로 자리 잡는 이들은 25세를 채우는 경우가 드물었다.
클라인은 그란데가 더 절실하게 야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위 라운드 유망주는 대단한 게 아니야. 다른 선수보다 좋은 위치에서 2, 3년 더 기회를 받는 게 고작이야. 그 2, 3년을 그냥 흘려보낸다면 다시는 메이저리그에 올라갈 수 없어.’
밥은 그란데의 호수비 덕분에 추가 실점 없이 1회 말을 마칠 수 있었다.
“가지고 파트너.”
록튼이 마스크를 들며 김민에게 말했다.
김민은 록튼이 예상보다 좋은 포수라고 생각했다.
‘투수를 편하게 해주는 포수야. 스미스가 록튼처럼 성장할 수 있다면 좋겠어.’
2회 초 스콜피언의 공격은 4번 타자 조부터 시작했다.
김민은 조의 떡 벌어진 어깨와 보디빌더 같은 근육을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봐도 스테로이드군.’
약물의 시대, 마이너리그 유망주들 중에도 약물에 손을 대는 이가 많았다.
포지션이 투수였기 때문일까?
김민은 약물에 대한 혐오가 컸다.
‘야구는 파워만으로 되는 게 아니야.’
조는 뛰어난 파워히터였지만 시몬스처럼 완벽한 타자가 아니었다.
김민의 완급조절에 배트가 연신 헛돌았다.
“2-2카운트에서 삼진. 끝까지 가진 않았군.”
“승부처를 아는 좋은 투수야. 마지막 공은 스플리터가 아니라 체인지업 계열이었지?”
“맞아. 체인지업이었어. 아시아 출신이라 그런지 브레이킹볼이 다양한 것 같군.”
스카우트들은 김민의 다양한 구종을 보곤 종합 점수를 상향 조정했다.
하지만 모든 스카우트가 다 같은 평가를 내린 것은 아니었다.
디트로이트의 스카우트는 다양한 구종이 득이 되는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저런 타입은 한 경기만 보고는 알 수가 없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걸 다 보여 주고 나면 의외로 허당인 경우가 많아. 5회까지 지켜보고 평가해도 늦진 않아.”
김민은 2회 나머지 두 타자를 내야 땅볼로 잡아내곤 깔끔하게 이닝을 마쳤다.
그의 깔끔한 투구는 3회와 4회까지 이어졌다.
5회까지 지켜봐야 한다고 주장했던 스카우트도 4회 초가 끝나자 고개를 끄덕였다.
“완급조절과 운영이 절묘해.”
그의 옆에 있던 스카우트 역시 같은 평가였다.
“싱글A 투수답지 않게 운영능력이 뛰어납니다. 그리고 한 타순이 돌고 나서도 구속의 변화가 없다는 것은…… 스태미나도 나쁘지 않다는 뜻입니다.”
브라이언은 김민의 호투에 기분이 좋아졌다.
‘킴,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어서 메이저리그에 올라오라고.’
클라인이 노트에 빠르게 무엇인가를 적었다.
“클라인 뭘 적는 겁니까?”
“볼 배합을 분석해 봐야 할 것 같아서.”
“뭔가 문제라도…….”
“문제라기보다는 훌륭해서 말이야.”
브라이언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 정도입니까?”
“솔직히 말해 4회에는 마스터(그렉 매덕스)가 던지는 줄 알았어. 모든 타자들의 승부구가 첫 타석과 엮이더군.”
탬파베이 스카우트 팀장 그레이도 자신의 박한 평가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킴이라. 조금은 하는군.”
“조금인가?”
수석 스카우트 베넨은 김민을 높이 평가했다.
“조금이 아니라. 진흙 속의 진주야.”
그레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한 경기 잘한 것뿐이야.”
“자네 싱글A 기록 못 봤나? 저 친구는 진짜라고.”
“그가 진짜라면 더블A에서 자신을 증명해 보이겠지.”
베넨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자기 팀 선수를 질투하는 건가?”
그레이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내가 언제?”
“지금 그러고 있어.”
김민의 호투에 가장 격렬하게 감정을 드러낸 이는 그레이가 아니었다.
“스콜피언스 녀석들! 뭐하는 건지 모르겠군! 벌써 한 타석 돌았잖아!”
화를 내는 것은 바로 AM 컴퍼니의 론이었다.
시몬스가 두 번째 타석에서 볼넷을 골라냈지만 그것으로는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5회에는 잘해 줄 겁니다.”
수행원의 위로에 론이 눈을 부릅떴다.
“잘해 주긴 뭘 잘해 줘? 타순 안 보이나? 6, 7, 8번이라고!”
론의 예상대로 5회 스콜피언스는 단 한 명도 1루를 밟지 못했다.
오늘 경기 세 번째 삼자범퇴.
론은 경기를 끝까지 관전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간다.”
그의 얼굴은 만루홈런을 맞은 투수와 같았다.
“5이닝 무실점. 좋군요.”
검은 선글라스를 쓴 사내가 백네트 뒤에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옆에는 은발의 노신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플로리다에서 한 번 봤는데 좋더군.”
“개막전 선발. 좋은 결정이었습니다.”
김민을 개막전 선발로 올린 것은 론이 아닌 은발의 노신사였다.
그는 김민의 진짜 실력을 애리조나에서 확인하고자 했다.
“회장님의 눈은 정말 대단합니다. 흙 속에서 진주를 발견하실 줄이야.”
“이미 진흙 속에서 나와 빛을 내고 있는 상황이었지. 난 그냥 주었을 뿐이야.”
6회 초.
김민이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스코어는 4-0 솔라 삭스의 리드.
스콜피언스의 선발 밥은 99마일(159km)의 강속구를 뿌렸으나 5이닝 동안 4실점으로 체면을 구기고 말았다.
“킴, 이번 회가 마지막이야.”
록튼의 전언에 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
그는 첫 타자에게 안타를 허용했지만, 철저한 로케이션과 다양한 구종 그리고 특유의 완급조절로 실점 없이 6회 초를 막아냈다.
“나이스 피칭.”
“좋았어. 킴.”
“멋진 투구였어.”
동료들의 찬사와 함께 개막전 투구가 끝났다.
6이닝 무실점 5삼진 3피안타 1사사구.
삼진이 많지 않은 것은 중반 이후 맞춰 잡는 데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경기가 끝난 뒤 은발의 노신사가 라커룸 입구로 그를 찾아왔다.
그리곤 그에게 뜻밖의 메시지를 던졌다.
“나와 함께 일해 보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