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천재들의 리그 02
메사 솔라 삭스의 홈구장 컵스 파크.
컵스 파크는 메이저리그 팀들이 보낸 스카우트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는 아예 스카우트 팀을 애리조나로 보냈다.
싱글A를 주관하는 브라이언은 물론 더블A의 클라인, 스카우트 팀장 그레이, 수석 스카우트 베넨까지 총 4명이 백네트 뒤편을 메우고 있었다.
브라이언이 가늘게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잔치군요.”
선배인 클라인이 그의 말을 받았다.
“스카우트만 대단한 게 아니야. 에이전트들도 대거 컵스 파크를 찾았어.”
“그러고 보니 입구에서 보라드를 만난 것 같기도 하고…….”
슈퍼스타들만 상대한다는 악마의 에이전트 보라드.
그는 론과 함께 에이전트계의 양대 산맥이었다.
“론도 왔더군.”
“론까지 왔단 말입니까? 론이라면 스프라이즈(양키스의 가을 리그 팀)쪽에 더 관심을 보일 줄 알았습니다.”
“이곳에 시몬스가 있으니까.”
“아! 그렇군요.”
시몬스는 3년 전 전미 고교 랭킹 1위를 차지했던 유망주로 현재 AM 컴퍼니와 에이전트 계약을 맺고 있었다.
론은 시몬스가 몇 년 후 1억 달러(1,240억 원)짜리 계약을 따낼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고 있었다.
“시몬스는 킴이 조심해야 할 상대 중 하나야.”
시몬스는 오늘 경기 스콜피언스의 3번 타자로 출전했다.
“샌프란시스코 소속이었던가요?”
“아니, 미네소타. 시몬스가 본즈와 짝을 이루는 건 너무하잖아.”
2000년 시즌, 배리 본즈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35세의 늦은 나이에 장타력이 폭발한 것이었다.
시즌 홈런은 49개로 커리어 하이를 기록.
메이저리그 팬들의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약물의 힘을 빌린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킴이 어떻게 개막전 선발이 된 겁니까? 구단에서 힘을 좀 쓴 거 아닙니까?”
“글쎄, 우리 쪽에서 손을 쓴 건 아닌 것 같은데…… 누군가 킴의 능력을 확인해 보고 싶어 하는 모양이야.”
브라이언이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다른 구단에서 킴을 주목하고 있다면 좋은 일은 아니군요.”
“우리 입장은 그렇지만 윗선은 좋아할지도 모르지. 더 비싼 값에 팔 수 있을 테니까.”
탬파베이는 신생팀으로 선수를 팔기보다는 모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짠돌이 구단주 덕분에 팀 연봉은 하위권을 맴돌고 있었다.
“오늘의 주인공이 등장하는군요.”
마운드에 오른 김민이 로진백을 만지면서 연습 투구 준비에 들어갔다.
“어떻게든 5회까지만 던져 달라고.”
탬파베이 스카우트들은 김민이 조기 강판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반면 내야석에 자리 잡은 중년인은 그의 조기 강판을 그 누구보다 바라고 있었다.
“잠시 뒤면 뜨거운 맛을 보게 될 거야.”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리는 이는 바로 론이었다.
론은 VIP답게 미녀 비서와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내야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저 녀석이 어째서 개막전 선발이지?”
“우리 요청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요청한 건 개막 시리즈에 선발로 내보내 달라는 것뿐이었잖아.”
“글쎄요.”
수행원의 대답에 론이 혀를 찼다.
“뭐, 어느 쪽이든 시몬스에게 홈런을 얻어맞는 건 변함이 없겠지.”
그는 김민의 조기 강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마운드에 오른 김민은 가볍게 연습 투구를 했다.
팡! 팡!
그러나 그의 투구를 주시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이곳에 모인 스카우트들은 소속팀 선수나 상위 라운드 지명자들을 관찰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대기 타석에 서 있는 건 그라함인가?”
“저 친구도 괜찮지 올해 더블A에서 3할을 쳤다고.”
잠시 뒤, 시구를 비롯한 경기 전 행사가 시작되었다.
과거 김민이었다면 상황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김민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10개 팀에서 모여든 스카우트만 해도 서른 명은 족히 넘는군. 이들 앞에서 날 망신 주겠다는 생각이겠지. 하지만 어림도 없다.’
행사가 끝나자 주심이 목소리를 높였다.
“플레이볼!”
김민은 초구 그립을 잡았다.
‘바깥쪽 포심 패스트볼.’
평소와 같이 초구는 존을 확인하기 위한 바깥쪽 패스트볼이었다.
슉!
그의 손끝에서 공이 떠나자 스피드건 십여 대가 일제히 숫자를 표기했다.
“92마일(148km)!”
1번 타자 그라함은 날카로운 스윙으로 패스트볼을 노렸다.
그는 지난 시즌 2라운드 2번 지명을 받은 미래의 슈퍼스타였다.
딱!
배트에 맞은 공이 3루 라인을 벗어났다.
“바깥쪽 존을 공략하는 공을 저렇게 당길 수 있다니, 배트 스피드가 엄청나군.”
“저런 배트 스피드라면 어떤 코스도 쳐 낼 수 있을 거야.”
김민은 그라함의 빠른 배트 스피드를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으로 확인한 것보다 더 빠르군. 어설픈 공은 힘들겠어.’
론은 그라함의 배트 스피드에 만족했다.
“시몬스만큼은 아니지만 저 친구도 좋은 친구야. 에이전트는 누구지?”
“폴입니다.”
“폴? 그 머저리가 어떻게 저런 보물을 얻었지?”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탁!
두 번째 공은 1루 내야에 떨어지는 파울이었다.
브라이언이 펜을 빠르게 움직이며 말했다.
“배트 스피드는 빠르지만 선구안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방금 공은 볼이었는데 배트가 나왔습니다.”
“선구안이 나쁘다고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야. 방금 공은 킴이 잘 던진 거라고. 존에서 하나 정도 빠지는 패스트볼. 초구를 보고 난 다음에 저걸 거를 수 있다면 메이저리그 레벨이겠지.”
김민의 투구 패턴은 싱글A 때와 변한 것이 없었다.
초구로 바깥쪽 스트라이크를 던지고 하나 또는 반 개씩 바깥쪽으로 빼고 넣으면서 존을 체크했다.
‘오늘 존은 보통이군. 나쁘지 않아.’
3구는 다시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가는 공.
그라함은 기다렸다는 듯 배트를 휘둘렀다.
‘세 번이나 같은 코스냐!’
그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타구를 보여 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공은 홈플레이트 앞에서 낮게 떨어졌다.
팍!
크게 바운드를 일으킨 공이 포수 미트를 맞은 뒤 바닥에 떨어졌다.
“1루로 뛰어!”
세 번째 스트라이크를 포수가 포구하지 못했을 경우 타자는 1루로 뛰어갈 권리가 주어진다.
이것을 스트라이크 낫 아웃이라 부른다.
물론 언제나 이런 권리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주자가 1루에 있을 경우 2사에만 스트라이크 낫 아웃이 성립되었다.
그라함은 1루로 뛰어가면서 혀를 찼다.
‘큭, 패스트볼이 아니었어.’
싱글A에서 김민은 첫 타자에게 만큼은 패스트볼을 고집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는 패스트볼을 끝까지 던지지 않았다.
김민은 포수 록튼이 공을 잡아 1루로 던지는 것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전미 고교 랭킹 4위를 상대로 바깥쪽 패스트볼을 3개 연속 던지는 것은 만용이지.’
그가 그라함에게 던졌던 승부구는 스플리터였다.
록튼은 김민이 스플리터를 던진다는 것을 알려 줬지만, 포구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아웃 카운트가 올라가는 것을 보곤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휴…… 뒤로 빠지는 줄 알았네. 스플리터의 낙차가 그렇게 클 줄은 몰랐어.’
김민이 던진 스플리터는 록튼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각도가 좋았다.
록튼은 김민의 스플리터가 상위 리그에서도 충분히 통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킴이 싱글A인데도 불구하고 애리조나에 초대받은 것은 저 스플리터 때문인 것 같군.’
그라함을 주목했던 스카우트들 역시 스플리터 한 방에 표정이 변했다.
“저 친구, 괜찮은 구종을 던지는데?”
“방금 그건 뭐였지? 포크였나?”
“킴, 괜히 개막전 선발이 아니었어.”
브라이언은 다른 팀 스카우트들이 고개를 갸웃하는 게 마음에 들었다.
‘킴의 스플리터는 명품이지. 오늘 경기를 빛낼 무기 중 하나라고.’
대기 타석에 있던 에드가는 술렁이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브레이킹볼 하나로 난리 법석이군. 저런 공은 더블A에 얼마든지 있다고.’
실제로 더블A에는 좋은 브레이킹볼을 던지는 투수가 많았다.
한 마이너리그 유망주는 상위 싱글A와 더블A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 브레이킹볼의 질이 전혀 다릅니다. 싱글A가 그냥 슉 떨어진다면, 더블A부터는 브레이킹볼이 빠르고 무섭게 떨어집니다. 이건 정말 걷어 올릴 수가 없죠.
론은 김민이 첫 아웃 카운트를 잡아내자 혀를 찼다.
“원숭이도 재주 하나쯤은 있는 법이지. 하지만 다음은 쉽게 안 될 거야.”
그는 2번 타자 에드가에게 재차 기대를 걸었다.
에드가는 시몬스와 함께 론의 고객 중 한 명이었다.
론이 고개를 비서 루시에게 돌렸다.
“에드가에게 제대로 자료가 갔겠지?”
“물론입니다.”
에드가에게 주어진 자료는 엘린이 퇴사 전 작성한 것이었다.
김민은 이미 에드가가 어떤 자료를 읽었는지 알고 있었다.
‘3라운드 7번. 디트로이트 유망주 랭킹 5위. 미래의 메이저리거. 하지만 아직 메이저리거가 된 건 아니야.’
그는 에드가를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사인 교환을 마친 김민이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에드가는 경기 전 몇 번이고 론이 보낸 자료를 읽었다.
‘1회 던지는 공은 대부분 바깥쪽에서 형성된다. 그라함에게 던진 공도 셋 모두 바깥쪽이었다. 이번에도 바깥쪽이다.’
그는 이미 배터박스에 바짝 붙어 있었다.
이는 철저히 바깥쪽을 노리겠다는 뜻이었다.
그레이는 타자와 투수를 번갈아 보곤 쓴웃음을 지었다.
“바깥쪽 볼 배합을 읽은 모양이군. 뭐 포수가 볼 배합을 가져간다면 타자의 위치만을 보고 대처할 수 있겠지만…….”
“볼 배합을 하는 게 투수라서 어렵다는 뜻인가?”
“그렇지.”
팀장 그레이와 수석 스카우트 베넨은 격이 없었다.
이윽고 공이 김민의 손끝을 떠났다.
슉!
패스트볼이 빠르게 포수 미트를 향했다.
파앙!
타자의 배트는 헛돌았고 주심은 목소리를 높였다.
“스트라이크!”
스카우트들은 김민의 초구에 혀를 내둘렀다.
“안쪽으로 찔렀어.”
“바깥쪽이 아니라 안쪽, 로케이션에도 능한 모양이군.”
김민이 선택한 초구는 바깥쪽 패스트볼이 아닌 안쪽 패스트볼이었다.
에드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뭐야. 자료와 이야기가 다르잖아. 안쪽 깊숙한 공이라니!’
김민은 놀란 에드가를 보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론이 꽤 당황하고 있겠군.’
그의 예상대로였다.
론은 김민의 초구에 눈을 깜빡였다.
“안쪽이라고? 저 녀석은 톰 글래빈의 카피가 아니었나?”
수행원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게…… 다른 경기에서는 저런 패턴을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
김민은 계속해서 두 번째 공을 던졌다.
슉!
이번 공도 안쪽이었다.
에드가는 반사적으로 배트를 휘둘렀다.
‘이런 젠장!’
탁!
배트에 맞은 공이 3루 라인을 벗어났다.
배터박스에 바짝 붙어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공을 컨택하지 못한 것이었다.
록튼은 에드가의 대처가 능숙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초구가 안쪽으로 왔으면 즉시 배터박스 위치를 바꿔야지.’
에드가는 두 번째 공까지 보고 난 다음에야 배터박스의 위치를 되돌렸다.
카운트는 이미 투 스트라이크 노 볼.
투수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공 하나면 아웃이군.”
“그라함에 이어 에드가까지 카운트가 몰렸어.”
“저 친구 상당히 공격적인 피칭을 하는데?”
“잘 키우면 노모의 재림이 될지도 몰라.”
록튼은 김민의 패스트볼이 강력하진 않지만 위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로케이션과 제구가 좋아. 신뢰할 수 있는 패스트볼이야.’
에드가도 자신이 위기에 몰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라함과 같은 패턴이군. 빌어먹을! 다음 공은 십중팔구 스플리터겠지?’
길게 생각할 여유도 없이 세 번째 공이 날아왔다.
슉!
밋밋한 패스트볼이 치기 좋은 한가운데를 향해 날고 있었다.
에드가는 그 공을 보곤 속으로 혀를 찼다.
‘전형적인 낚시군. 투 스트라이크 노 볼에서 스플리터를 던지는 녀석이 한가운데 럭키볼을 줄 리가 없잖아. 이건 100% 스플리터야!’
그는 배트를 휘두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은 그의 예상과 달리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포수 미트에 꽂혔다.
팡!
주심이 멋진 제스처로 목소리를 높였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완벽히 허를 찌른 볼 배합.
‘이럴 수가!’
에드가는 얼굴도 들지 못한 채 배터박스를 빠져나와야 했다.
관중석은 김민의 연속 삼진으로 술렁거렸다.
“삼구삼진이야.”
“저 친구 대단한데?”
“개막전 선발 자격이 있어. 그라함과 에드가를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웠어.”
반면 론은 믿었던 에드가가 삼구삼진으로 물러서자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가 화를 폭발시키려는 순간 수행원이 시선을 타자에게 돌리며 말했다.
“회장님, 시몬스입니다.”
시몬스는 스콜피언스 최강의 타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