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징 패스트볼-21화 (21/296)

21화 천재들의 리그 01

매년 10월초 메이저리그는 가을 야구 열풍에 빠져들었다.

디비전 시리즈와 챔피언쉽 시리즈, 그리고 월드 시리즈.

이때만큼은 그 어떠한 프로 스포츠도 부럽지 않았다.

같은 시기 애리조나에서도 특별한 리그가 열렸다.

흔히 애리조나 가을 리그라 불리는 유망주 리그.

메이저리그 30개 팀은 팀당 7명의 유망주를 보내 6개 팀을 만들었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여섯 개 팀마다 35명의 유망주가 모였다.

이들은 미래의 메이저리거 또는 예비 메이저리거란 타이틀을 지니고 있었다.

툭.

김민은 가방을 내려놓곤 깊게 숨을 들이켰다.

“후흡…….”

애리조나의 공기는 상쾌했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이란 게 이런 것이군.”

그때 뒤쪽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자네가 킴인가?”

고개를 돌리니 금발 청년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흰색 유니폼과 어깨에 메고 있는 풀백은 그가 야구 선수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같은 팀인가?”

김민의 물음에 청년이 대답했다.

“맞아. 난 비스킷스에서 왔어. 베런이라고 해. 이쪽은 그레고리야.”

비스킷스는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의 더블A 팀이었다.

베런의 옆에 서 있는 그레고리는 구릿빛 피부를 지닌 라틴 청년이었다.

“난 그레고리.”

“킴이야.”

김민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비스킷스라면 다음 시즌에도 같은 팀에서 뛰겠군.”

베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레고리는 몸을 살짝 뒤로 뺐다.

“오! 좋지 않아! 초반에는 그렇겠지만, 중반부터는 아닐걸. 난 그 위로 올 갈 거라고.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되겠지. 비스킷스에서 뛰는 건 사양이야!”

그의 거침없는 말에 베런이 미간을 좁혔다.

“그레고리. 그런 식으로 말하다가는 프런트에 찍힌다고. 자제하는 게 어때?”

그레고리가 베런의 억양을 따라 하며 말했다.

“찍히면 어때? 프로 선수는 실력으로 보여 주는 거야. 실력이 되면 올라가고 실력이 안 되면 못 올라가는 거야. 그것뿐이야.”

김민은 그레고리의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생각했다.

‘메이저리그에 올라서는 것은 실력이지만,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실력만이 아니다. 인성이나 자기 관리가 부족한 선수는 언제 어떻게 미끄러질지 모른다.’

프로 선수들이 받는 돈은 결국 팬들의 지갑에서 나온다.

팬들이 등을 돌릴 만한 행동을 한다면 그 선수는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프로 자격이 없었다.

코치 시절 김민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선수들에게 강조하곤 했다.

“포지션이 어디야? 내야수?”

그레고리의 물음에 김민이 대답했다.

“투수.”

“투수?”

그레고리는 좌우를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포크볼을 던지는 건가?”

김민이 가방을 들며 말했다.

“그 비슷한 걸 던지지.”

“오! 정말이야?”

‘오!’란 감탄사는 그레고리의 버릇인 것 같았다.

베런이 매력적인 저음으로 말했다.

“그레고리는 무시해. 이 친구는 멋대로야.”

“베런! 정말 그러기야?”

베런은 그레고리를 무시한 채 김민에게 손을 뻗었다.

“포지션이 투수라면 미래의 에이스군. 잘 부탁해.”

김민이 악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해.”

베런은 정중하면서 예의를 차리는 스타일이었고, 그레고리는 그 반대였다.

세 사람이 속한 애리조나 가을 리그 팀은 메사 솔라 삭스였다.

메사 솔라 삭스에 유망주를 보낸 메이저리그 팀은 다음과 같았다.

시카고 컵스.

애너하임 에인절스.

플로리다 말린스.

오클랜드 어슬레틱스.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

시카고 컵스를 제외하면 마켓 규모나 주머니 사정이 좋은 팀들이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겉멋이 든 선수는 많지 않았다.

“저기 오클랜드 샌님들이 오는군.”

그레고리의 한마디에 베런이 미간을 좁혔다.

“적당히 하라니까.”

“왜?”

“가을 리그 동안은 팀메이트야.”

“알고 있어.”

각 팀의 유망주들이 모두 도착하자 메사 솔라 삭스의 코칭 스탭이 등장했다.

그레고리는 오른쪽에 선 중년인을 보고 혀를 찼다.

“뭐야. 데이빗을 여기서 또 봐야 해?”

데이빗은 비스킷스의 타격 코치로 가을 리그 동안 솔라 삭스의 타격 코치를 맡게 되었다.

한가운데 선 중년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제군들, 애리조나에 온 것을 환영한다. 난 한 달 동안 메사 솔라 삭스의 감독을 맡게 된 리라고 한다.”

리 감독은 트리플A에서 오랜 기간 수석 코치와 감독으로 활약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이곳에 모인 이유는 가을에 시간이 남기 때문이 아니다. 거기 웃고 있을 때가 아니다. 너희가 여기서 이렇게 서 있는 동안…….”

리 감독의 연설은 5분가량 이어졌다. 그의 연설이 끝난 다음에 선수들은 투수조와 타자조로 나뉘었다.

김민은 당연히 투수조였다.

솔라 삭스 투수 코치는 휜 수염을 멋지게 기른 람이었다.

람은 메이저리그 유망주들에게는 익숙한 코치였다.

“난 람이다. 한때, 바람의 람이라고 불리기도 했지.”

그는 투심 패스트볼을 무기로 통산 158승을 거둔 메이저리그 스타였다.

“너희들은 팀에서 주목하는 유망주다. 소속 팀에서는 다들 에이스로 뛰고 있겠지. 하지만 이곳에서까지 에이스로 뛸 수는 없다. 누군가는 불펜에서 뛰어야 하고 누군가는 경기에 나서지 못할 수도 있다.”

람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솔라 삭스는 투수만 해도 15명.

선발 로스터를 정리하는 것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그래도 나는 공평하게 기회를 주고 싶다.”

그는 잠시 말을 쉰 뒤 명단을 들었다.

“투수조는 A와 B조로 나뉘어 운영될 것이다. A조 투수들은 올스타 브레이크 전에 선발로 뛰게 될 것이다. 각자 2경씩 선발로 나간다고 보면 된다. B조 투수들은 A조가 선발을 뛰는 동안 불펜을 맡는다. 그리고 올스타 브레이크가 끝나면 두 조의 역할은 반대가 된다. 이해하겠나?”

선수들이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람은 선수들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패기가 없다!”

그의 호통에 선수들의 눈빛이 살아났다.

“알겠습니다!”

람은 선수들의 대답을 들은 뒤 투수조를 둘로 나뉘었다.

김민은 초반 선발로 나서는 A조에 속했다.

‘A조인가? 오프 시즌 동안 착실히 준비했으니, 문제는 없다.’

람은 조 편성을 마친 뒤 김민을 따로 불렀다.

“자네가 킴인가?”

“그렇습니다.”

김민은 속으로 의문이 들었다.

‘왜 날 부른 거지?’

람이 명단을 접으며 말했다.

“이틀 뒤 선발이니, 준비하게.”

김민의 눈이 커졌다.

“네?”

“첫 경기 선발이야. 긴장하지 말고 제대로 던져.”

솔라 삭스 개막전 선발.

메이저리그가 아닌 마이너리그에서도 개막전 선발이 가지는 의미는 컸다.

특히 애리조나 가을 리그에서 개막전 선발은 미래의 에이스를 의미했다.

‘내가 그렇게까지 주목을 받는 신인이었나?’

김민은 미간을 좁혔다.

‘아니다. 이건 날 주목하기 때문이 아니야. 누군가 주목을 받게 하기 위해서 날 개막전 선발에 넣은 거야.’

그는 이 정도까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었다.

‘론!’

론은 여러 스카우트 앞에서 망신을 주기 위해 김민을 개막전 선발에 넣은 것이었다.

김민은 쓴웃음을 지었다.

‘개막전부터 이런 함정을 팔 줄이야. 상대 팀은 아마도 타격이 강한 스콜피언스겠지?’

스콜피언스는 인디언스, 레드삭스, 피스톤즈가 속해 있었기 때문에 타격만 놓고 보면 가을 리그 제일이었다.

‘좋아. 스콜피언스를 잡아 주지.’

김민이 개막전에서 빼어난 피칭을 보여 준다면 그의 주가는 하늘 높이 치솟을 것이다.

물론 론은 이런 결과를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김민이 스콜피언스를 상대로 3이닝을 채우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숙소로 돌아오자 그레고리가 김민을 반겼다.

“킴, 어떻게 됐어? 언제 선발이야?”

김민이 짧게 대답했다.

“개막전.”

“뭣?”

그레고리는 총에 맞은 사람처럼 크게 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멈칫하자 뒤에 서 있던 베런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그레고리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오! 쉿! 킴이 개막전 선발이래!”

“뭐라고?”

그 또한 놀랐다.

그들은 싱글A에서 올라온 김민이 어떻게 솔라 삭스의 개막전 선발을 맡게 되었는지 의아해했다.

김민은 놀라는 두 사람을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코칭 스탭이 내 마구를 보고 싶은 모양이야.”

그레고리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진짜 포크볼을 던지는구나!”

노모 히데오의 포크볼은 메이저리그에 큰 반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 이후 포크볼로 그와 같은 임팩트를 준 일본 투수는 없었다.

이는 포크볼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노모가 특별하다는 뜻이었다.

“다들 기대해도 좋아.”

김민은 농담 반 진담 반인 말을 던지곤 숙소로 향했다.

‘1인 1실. 좋군.’

메이저리그 탑 유망주들이 모이는 팀이었기에 대우가 나쁘지 않았다.

‘35명 중 1라운드에 뽑힌 선수가 7명, 3라운드까지 넓히면 18명…… 정말로 미래의 슈퍼스타들이군.’

10라운드 밖에서 뽑힌 선수와 김민처럼 언드래프트로 입단한 선수는 35명 중 3명밖에 되지 않았다.

김민은 랩탑을 꺼내 선수들의 데이터를 살피기 시작했다.

‘다들 좋은 선수들이야. 과거의 나였다면 이들과 경쟁하기도 전에 기가 꺾였을 거야.’

그는 솔라 삭스 선수들을 확인하곤 개막전 상대인 스콜피언스로 넘어갔다.

* * *

솔라 삭스의 홈 개막전.

김민은 불펜에서 몸을 풀기 시작했다.

팡. 팡.

그의 공을 받아 주는 이는 오늘 경기 파트너인 록튼.

“나이스 볼.”

록튼은 비스킷스의 포수로 그레고리, 베론과 한 팀에서 뛰고 있었다.

설명을 조금 덧붙이자면 하킴을 다시 싱글A로 밀어낸 주인공이 바로 그였다.

김민이 공을 받으며 물었다.

“록튼, 오늘 경기 볼 배합은 내가 직접 하고자 하는데 어때?”

“킴이 직접 한다고?”

록튼의 눈에 비친 김민은 싱글A에서 올라온 풋내기였다.

‘어려서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는 건가? 오늘 상대는 최강 공격력의 스콜피언스라고. 뭐, 직접 볼 배합을 한다면 결과가 좋지 않아도 내 탓은 못 하겠지.’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김민의 제안을 수락했다.

“알겠어. 네가 먼저 사인을 내도록 해.”

김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마워.”

그의 머릿속은 오늘 경기 플랜으로 꽉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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