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에이전트 03
김민이 말했다.
“난 AM 컴퍼니에서 엘을 보낸 이유를 더 모르겠습니다. 서면이나 유선으로 계약 해지를 통보해도 될 텐데 말입니다.”
엘린은 김민의 날카로운 질문에 머리를 긁적였다.
“저도 그건 이상하게 생각합니다만,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니, 기분을 더 나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한 줄짜리 메시지보다 엉터리 계약서로 사람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겠다. 이 말입니까?”
“아마도 그럴 겁니다.”
엘린은 대답을 한 뒤 두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 제가 킴 선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면 사과하겠습니다. 전 정말로 킴 선수의 팬입니다.”
김민은 불쌍한 말단 직원을 다그칠 생각이 없었다. 다만 AM 컴퍼니의 행동에 화가 났을 뿐이었다.
‘치졸한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군. 뭐 그런 면이 구단과 연봉 협상할 때는 좋게 작용하는 경우도 많지만…….’
엘린은 김민이 화가 났다고 생각했는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정말입니다. 전 킴 선수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승, 평균자책점, 삼진 같은 고전적인 기록만이 아니라. WHIP나 FIP 그리고 WAR까지 괜찮습니다.”
2017년 김민이 다음과 같은 대사를 들었다면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갔을 것이다.
지금은 2000년이었다.
미국 최대 기록 사이트 베이스볼 레퍼런스조차 아직은 세이버 메트릭스를 제대로 다루지 않고 있었다.
“WAR를 알고 있는 겁니까?”
김민의 물음에 엘린이 멈칫했다.
“아,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마이너리그 쪽은 제가 직접 계산한 것이라 틀릴 수도 있습니다.”
직접 계산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이 시점에서 마이너리그 그것도 싱글A 기록을 제공하는 세이버 사이트는 없을 테니까.
“대단하군요. 직접 계산까지 할 수 있다니…….”
김민은 엘린이 단순한 통계요원이 아님을 깨달았다.
‘론이 엘린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친구 지금 시점에선 보물이야. 빈 단장의 머니볼도 이제 막 시작했을 테니까.’
그는 표정을 풀고 엘린에게 말했다.
“론이 화가 난 모양인데 이쯤에서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론 회장님은 속이 좁은 구석이 있지요.”
“어떤 식으로 나올까요?”
엘린이 다시 머리를 긁적였다.
“제 생각에는 킴 선수에 관한 안 좋은 정보를 흘린다던가. 이번에 참가하는 가을 리그에 킴 선수의 약점을 흘리겠죠.”
김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다운 방법이군요.”
그는 론의 공격으로 역으로 받아치고자 했다.
‘론, 당신은 오늘 많은 걸 잃게 될 거야.’
김민은 단순히 가을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정도로 끝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엘, 당신은 AM 컴퍼니 소속입니다. 한데 제게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팬이기 때문에…….”
“단순한 팬이기보다는 절 오래 관찰한 분 같군요.”
엘린은 허를 찔린 듯 눈썹을 떨었다.
“…….”
김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엘은 플로리다에서 뛰고 있는 AM 컴퍼니 소속 선수들의 기록을 수집하면서 관심을 두었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엘린이 FBI 수사관 앞에 선 범인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회사에 보내는 자료를 만들면서 관심을 두게 되었죠. 하지만 킴 선수의 팬이라는 건 사실입니다. 전 킴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올라갈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엘, 지금 회사에서 얼마나 연봉을 받고 있습니까?”
“재택근무만으로 3만 달러(3천7백만 원)입니다.”
김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제가 만든 법인으로 이직하시죠.”
엘린이 깜짝 놀라 말했다.
“킴 선수, 법인이 있습니까?”
“지금은 없지만 만들 겁니다.”
“선수가 직접 에이전트 컴퍼니를 운영한다고요? 그게 가능할까요?”
“당신이 도와준다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엘린은 김민의 제안에 두 손을 흔들었다.
“전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엘, 당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는 선수를 보는 눈이 있습니다. 당신의 통계와 기록이 내 눈을 만나면 아마 좋은 결과를 낼 겁니다.”
김민이 반격 카드는 새로운 에이전트 컴퍼니였다.
‘미래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는 제대로 써먹을 수 있을 것 같군.’
미래를 알고 있다고 해도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유망주나 슈퍼스타는 데려올 수 없었다.
이들은 대부분 대형 에이전트와 계약하려 할 테니까.
그러나 진흙 속의 진주처럼 박혀 있는 유망주들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들을 영입해 회사를 키운다면 5년 뒤에는 AM 컴퍼니에 대항하는 것이 가능했다.
엘린이 펄쩍 뛰며 말했다.
“킴 선수, 창업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김민은 여전히 차분했다.
“실리콘 밸리에서 이뤄지는 일이 플로리다에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이크로 소프트 같은 대기업도 작은 차고에서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엘린이 머뭇거리자 김민이 그 틈을 파고들었다.
“투자금이 걱정되는 모양이군요.”
엘린은 김민이 사람의 마음을 읽는 눈을 가진 것처럼 느껴졌다.
‘돈 문제를 정확히 지적하는군. 킴은 만난 그 순간부터 내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어. 마운드에서 뛰어난 운영을 보여 주는 것도 이와 같은 능력 때문이겠지.’
그는 백기를 들어올렸다.
“실은 5만 달러(6천2백만 원) 정도밖에 없습니다. 이걸로 회사를 운영하는 것은…….”
“저도 5만 달러를 내겠습니다. 반반이면 좋은 비율 같은데 아닙니까?”
김민이게 5만 달러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그는 이 돈으로 메이저리그에서 몇 년을 보내야 했다.
“10만 달러로 회사를 운영한단 말입니까?”
“제가 메이저리그에 올라가면 숨통이 트일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 2, 3년 동안 5, 6명 정도를 더 올려보내면 회사가 궤도에 오르겠죠.”
김민은 어려워 보이는 일들을 쉽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엘린은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킴 선수는 메이저리그에 올라가는 것을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김민이 엘린의 두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제가 메이저리그에 올라가지 못할 것 같습니까?”
“아, 아닙니다.”
“제가 지명한 선수들 역시 메이저리그에 올라갈 겁니다. 그러니 엘은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엘린은 생각했다.
‘킴은 기록지에서 보는 것과 실제가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는 공 하나를 두고 다투는 섬세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휘어잡는 히어로다.’
김민이 말을 이었다.
“당분간은 고객이 많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로스쿨에 등록해서…….”
메이저리그 에이전트가 하는 일 중 대부분은 법률에 관한 해석과 검토였다.
때문에 메이저리그 에이전트 중에서는 법학 관련이나 법학을 전공한 이들이 많았다.
슈퍼 에이전트라 불리는 론도 로스쿨 출신이었다.
김민의 제안에 엘린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로스쿨은 괜찮습니다.”
“네?”
“예일 로스쿨 출신입니다.”
김민은 엘린의 한마디에 깜짝 놀랐다.
“예일 로스쿨 출신이 겨우 연봉 3만 달러를 받으면서 AM 컴퍼니에서 일했단 말입니까?”
예일대 로스쿨은 하바드대 로스쿨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로스쿨이었다.
엘린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야구가 좋아서요. 제 몸을 보시면 알겠지만, 제가 메이저리그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김민은 론이 자신에게 큰 선물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엘, 한번 해 봅시다.”
엘린은 론의 지시로 굴욕적인 계약서를 들고 찾아왔으나 뜻밖의 제의에 당황했다.
“그, 그게…….”
김민이 그의 두 손을 잡았다.
“엘, 시작이 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킴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엘린은 결국 김민의 설득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는 뛰어난 수재였지만,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단 한 번의 만남이 창업까지 이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김민은 이렇게 해서 엘린과 함께 K 코퍼레이션을 창업하게 되었다.
* * *
“론은 뭐라고 하던가요?”
“론 회장은 제가 회사에 있는 줄도 모를 겁니다. 업무지원팀에서 사직서를 그냥 수리했을 뿐입니다.”
엘린은 론이 그를 모를 것이라 말했지만, 론은 그를 알고 있었다. 예일대 로스쿨이라는 배경은 쉽게 잊히지 않는 것이었다.
론은 엘린의 사직 소식에 비서에게 이렇게 말했다.
“심약한 녀석답군. 보나 마나 킴이란 녀석이 목소리를 높이자 넋이 나간 것이겠지. 학벌만 높았지 도움이 안 돼. 그런 녀석은 어디 가서도 제 몫을 못 할 거야.”
* * *
“이메일로 킴 선수에 관한 자료를 보냈습니다.”
엘린이 움츠러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직서를 낸 것이 아직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론에게 보낸 것과 같은 것이겠죠?”
“그렇습니다.”
김민은 엘린이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론은 이 자료를 가을 야구에 참가하는 타자들에게 보내 줄 생각이겠지.’
그는 자신을 상대하기 위해 나선 AM 컴퍼니 소속 타자들을 역으로 함정에 빠뜨릴 생각이었다.
“AM 컴퍼니 타자들 명단은 확보되었습니까?”
“메이저리그 에이전트는 투명하게 운영됩니다. 명단을 확보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엘, 훌륭합니다.”
김민의 한마디에 엘린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엘린은 대인 관계는 부족했지만, 사무처리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김민의 칭찬은 절대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었다.
“메이저리그 선수 노조에도 심사를 의뢰했습니다. 조만간 심사가 통과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메이저리그 에이전트 제도는 다른 프로 스포츠의 에이전트 제도와 달리 에이전트가 되는 길이 어렵지 않았다.
선수 노조의 심사를 받으면 그것으로 메이저리그 에이전트가 될 수 있었다.
반면 유럽 프로 축구나 일본 프로야구는 일정한 자격시험을 통과하지 않으면 에이전트로 등록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애리조나 가을 야구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데이터도 간추려서 보내드렸습니다.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벌써 각 구단의 참가 선수 명단이 나왔습니까?”
“오피셜은 아닙니다만 AM 컴퍼니에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윤곽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김민은 엘린의 일처리가 자신이 생각한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엘린과 함께 한다면 단순히 미래를 알고 이용하는 것 이상의 것을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엘린이 김민에게 말했다.
“그리고…… 킴, 세이버 메트릭스를 다루는 사이트를 만들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괜찮은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제게 묻는 것을 보니, 비용 문제가 있군요.”
김민은 여전히 엘린의 마음을 읽는데 능했다.
이는 엘린이 다른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기도 했다.
“제대로 사이트를 제작한다면 1만 달러(1,240만 원) 정도가 소요될 것 같습니다.”
엘린은 뛰어난 통계 분석과 법학 능력을 지녔지만, 사이트 제작 기술까지 보유하고 있진 않았다. 그는 사이트 제작을 지인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좋습니다. 미래를 위해서 그 정도 투자는 아까울 것이 없죠.”
세이버 메트릭스는 태동기에 있었다.
사이트를 만들어 선점한다면 통계 분석에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김민은 과감하게 투자하기로 했다.
‘회사가 커지면 더 많은 인재가 필요할 거야.’
그는 아직 깨닫지 못했지만, 사업자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