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징 패스트볼-19화 (19/296)

19화 에이전트 02

띠리리릭.

꾹.

휴대폰 버튼을 누르자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젊은 여성의 목소리.

김민에게 익숙한 음성은 아니었다.

‘혹시 전화 마케팅인가?’

“누구시죠?”

“AM 컴퍼니입니다.”

AM 컴퍼니, 18년 만에 다시 듣게 된 이름.

김민은 미간을 찌푸렸다.

‘시즌 중 연락 한번 없다가 시즌이 끝나자마자 연락이 왔군. 원래대로라면 계약 해지 통보였겠지.’

그러나 상황은 18년 전과 180도 달라져 있었다.

김민은 팀이 주목하는 유망주로 성장해 애리조나 가을 리그를 앞두고 있었다.

“킴 선수, 가을 리그에 출전하게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김민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이쪽에서 먼저 계약 해지를 해 버릴까?’

김민은 계약 해지를 당할 때의 기분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었다.

“전 론 회장님의 비서 루시라고 합니다. 오늘 전화를 드리게 된 것은 론 회장님과 미팅 일정을 잡기 위해서입니다.”

론은 AM 컴퍼니 대표였다.

김민은 그를 딱 한 번, 그것도 5분 남짓을 만났을 뿐이었다.

한데 그런 론이 그와 미팅을 원하고 있었다.

‘돈이 되면 회장까지 나선다는 건가? 달면 삼키고 쓰면 뱉고, 인생의 이치이긴 하나 씁쓸하군.’

김민은 강하게 나가기로 했다.

“론이 절 만나고 싶다고요? 그럼 플로리다까지 와야 할 겁니다.”

론의 사무실은 LA에 있었다.

LA에서 플로리다까지는 비행기로도 몇 시간이나 걸리는 거리.

그가 알고 있는 론이라면 거절할 것이 분명했다.

“킴 선수, 회장님께서 전용기를 보내 주실 겁니다. 킴 선수께서는 그걸 타고 오시면…….”

김민이 루시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루시,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군요. 전 하루도 훈련을 빠질 생각이 없습니다. 그쪽에서 절 만나고 싶다면 직접 이곳 포트 샬로트까지 와야 할 겁니다.”

루시는 마이너리그 선수에 불과한 김민의 태도에 깜짝 놀랐다.

“킴 선수, 론 회장님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론 회장님이라고요. 메이저리그 스타들도 론 회장님을…….”

김민이 루시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대통령이 와도 훈련을 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절 만나려면 최신형 랩탑 정도는 선물로 가져와야 할 겁니다. 그게 예의죠.”

김민은 루시가 뭐라 반격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득이 적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김민은 그 행동만으로도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 같았다.

‘이제 AM 컴퍼니는 끝난 것 같고, 다른 에이전트를 찾아야 할 것 같군.’

루시는 전화 통화를 다시 한번 시도했으나 김민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회장실에 들어섰다.

“론, 킴 선수와 전화 통화를 했습니다.”

론은 회계 보고서를 넘기다가 그녀의 등장에 손을 멈췄다.

“그래, 날짜는?”

론은 김민과의 미팅을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임금이 성은을 내리듯 마이너리그 유망주를 만나려 했다.

루시가 머뭇거리면서 대답했다.

“일정을 잡지 못했습니다.”

순간 론의 시선이 루시를 향했다.

“뭐라고?”

“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날 만나려면 론이 플로리다로 직접 와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순간 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정말로 그렇게 말했나?”

“최신형 랩탑 선물까지 가져오라고 하던걸요. 대단한 자신감이었습니다.”

론은 기가 막힌다는 듯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재미있는 녀석이야. 내가 누구고 우리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모르는 건가?”

“다시 미팅 일정을 잡아 볼까요?”

론이 두 손을 내리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애송이에게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가 알려 주도록 하지.”

그는 김민을 철저히 무너뜨릴 생각이었다.

* * *

9월 중순.

김민과 볼튼 그리고 스미스는 오프 시즌 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특히 스미스는 후안의 1대1 코칭 이후 타격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킴, 스미스가 공을 안 잡아 줘도 되는 거야?”

볼튼의 물음에 김민이 대답했다.

“오프 시즌에 공을 너무 많이 던지는 것도 좋지 않아.”

김민은 투수의 팔이 분필처럼 소모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2000년대 초반은 여러 가지 투구 이론이 난립하는 시기였다.

강한 어깨를 타고난 투수는 긴 이닝을 던져도 괜찮다는 이론.

앞서 언급한 분필 이론, 그리고 던지면 던질수록 어깨가 강화된다는 이론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를 지나면서 두 이론은 힘을 잃고, 분필 이론이 힘을 얻게 되었다.

2010년대 와서는 대부분의 투수 코치가 분필 이론에 근거해 투수 육성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그 결과 이닝수와 투구 수가 제한되고 투수들은 더 긴 시즌을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이 던져서 리듬을 찾는 게 아니었어?”

“밸런스나 리듬이 흩어졌을 때는 그래야 하지. 하지만 많이 던지는 건 좋은 훈련이 아니야. 어깨가 소모될 뿐이니까. 중요한 건 집중력이야.”

볼튼은 김민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프 시즌에는 될 수 있으면 적게 던지는 게 좋다는 말이군.”

“그리고…… 연투와 한계 투구 수를 넘긴 투구도 좋지 않아. 그 두 가지는 가능하면 줄여야 해. 그렇지 않으면 선수 생명이 줄어들고 말 거야.”

이 시기 에이스들은 200이닝 이상을 밥 먹듯 던졌다.

한 팀에 200이닝을 넘긴 선수가 몇 명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타고난 철완이 아닌 이상 매 시즌 200이닝 이상은 어깨에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김민은 그들이 200이닝을 초과하지 않고 그 전후로 던졌다면 적어도 2, 3년은 더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많은 투구와 이닝은 에이스의 상징이지만, 어깨에는 치명적이다.’

오프 시즌을 거치면서 김민은 쓰리쿼터 투구폼을 완성시켰다.

그는 이제 오버핸드로 던지는 게 더 어색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더니 어느새 쓰리쿼터에 적응이 되어 버렸어.”

“구속도 더 잘나오는 것 같던데. 요즘은 93마일(150km) 이상도 많이 찍히고 있어.”

“오늘 최고는 얼마야?”

“94마일(151km).”

김민은 94마일이면 애리조나 가을 리그에서도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전성기 구속까지 올라왔다.’

트리플A에서 뛰던 시기 김민은 94마일의 포심 패스트볼과 슬라이더 그리고 커브를 섞어 던졌다.

당시 김민은 정통 오버핸드 투수였는데 트리플A에서 3, 4선발을 오갔다.

투수가 약한 팀에서 뛰었다면 땜질용 선발 투수로 메이저리그 콜업 기회를 노릴 수도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그가 속한 팀들은 투수력이 나쁘지 않았다.

이후 어깨와 팔꿈치에 크고 작은 부상을 입으면서 내리막을 걸었다.

패스트볼 최고 구속이 91마일(146km)까지 떨어졌고, 결국 국내 복귀를 선언하게 되었다.

“볼튼도 괜찮던데?”

“난 구속은 내려갔지.”

“그래도 제구와 릴리스 포인트가 좋아졌어.”

“밸런스가 좋아진 건 인정해. 하지만 이렇게 던져서 상위 리그로 올라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샘은 내 발이 내려온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야.”

크랩스 투수 코치 샘이 원하는 이상적인 투수는 로켓맨이었다.

로켓맨 로저 클레멘스는 약물 스캔들 미첼 리포트로 위상이 추락했지만, 이 시기에는 위대한 투수 중 한 명이었다.

따라서 투수 코치인 샘이 그를 추종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로켓맨은 머릿속에서 지워, 그 친구는 정상이 아니야.”

“로저가 정상이 아니라고?”

“타고난 유전자가 다르거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어.”

김민은 약물을 빙 돌려 표현했다.

볼튼은 아직 싱글A에 머물고 있는 유망주였기 때문에 약물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하긴 우리하고 다른 존재이니 그런 성적을 냈지.”

로켓맨 로저 클레멘스는 김민과 같은 나이에 메이저리그에 선발 투수로 콜업되었고, 스미스와 같은 나이에 통산 60승과 리그 MVP, 사이영상을 기록했다.

‘리그를 뒤흔드는 레전드는 시작부터 다르다. 내가 로켓맨처럼 할 수 있을까?’

그는 메이저리그에 콜업되는 것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탕. 탕.

누군가 훈련장 밖에서 철망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볼튼이 고개를 돌리자 상대가 목소리를 높였다.

“킴 선수 있습니까!”

김민을 부른 사내는 뚱뚱한 백인 청년이었다.

볼튼이 김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는 사람이야?”

김민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전혀.”

“그럼 누구지?”

“인터넷 기사 아닐까?”

“인터넷?”

“컴퓨터로 세계를 연결하는 망이야. TV와 전화를 합한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이 시기 인터넷은 막 대중화가 시작된 시점이었다.

마이너리그 선수들 중에는 인터넷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킴, 선수!”

김민은 자신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는 청년에게 손을 들었다.

“여기 있습니다! 조금 기다려요!”

그는 가볍게 마무리 운동을 하고 청년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청년이 안경을 세우며 자신을 소개했다.

“엘린 브라운이라고 합니다. 편하게 엘이라고 불러주세요.”

“엘, 혹시 프런트에서 왔습니까?”

엘린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전 AM 컴퍼니에서 나왔습니다.”

김민은 AM 컴퍼니라는 말에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계약 해지 통보를 하기 위해 직접 사람을 보낸 건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출장비가 아까울 텐데. 뭔가 다른 속셈이 있는 모양이군.’

그는 엘린에게 서서 말하는 건 조금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김민이 숙소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이 저희 팀 숙소입니다. 입구로 들어가면 바로 로비이니 조금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10분 뒤.

두 사람은 로비에서 마주앉았다.

“킴 선수, 만나 뵙게 되서 영광입니다.”

엘린은 사람을 대하는 것이 서툴렀다.

어색한 미소나 삐뚤어진 넥타이, 빛이 바랜 셔츠는 그가 대인업무를 전담하는 사람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무슨 일로 플로리다까지 날아오신 거죠?”

엘린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비행기로 오진 않았습니다. 마이애미에서 차로 달려왔죠.”

“마이애미에서 왔다고요?”

“재택근무입니다. E메일로 보고서를 보내고 계좌로 돈을 받죠.”

2000년 컴퓨터와 인터넷을 사용한 재택근무라면 꽤 앞서 나가는 기업이었다.

‘AM 컴퍼니를 다시 보게 되는군.’

엘린이 김민에게 말했다.

“본사에서 출장 지시를 내린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래서 꽤 긴장하고 있습니다.”

김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보이는군요.”

“결론부터 말씀드릴까요?”

김민이 짧게 되물었다.

“가능합니까?”

“물론이죠. 전 킴 선수의 팬입니다.”

“좋습니다.”

엘린은 본론에 앞서 잠시 말을 쉬었다.

김민은 그의 표정과 이마의 땀만으로도 좋지 않은 소식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올 게 왔군.’

엘린이 입을 열었다.

“본사에서 제게 지시한 것은 계약 갱신을 위해 새로운 계약서를 작성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계약은 킴 선수에게 좋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킴 선수라면 사인하지 않을 겁니다.”

엘린의 정직한 한마디에 김민이 미소를 지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엘린이 땀을 닦으며 되물었다.

“이런 계약서를 예상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론과 전 사이가 좋지 않으니까요.”

엘린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AM 컴퍼니에서 왜 이런 식으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킴 선수는 정말 뛰어난 유망주인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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