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운영의 마술사 03
두 사람은 간단히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오후 훈련에 들어갔다.
오후에는 1시간씩 번갈아 가며 상대편의 훈련을 도왔다.
“발 높이는 괜찮은데 허리가 늦게 돌아가.”
김민의 지적에 볼튼이 질문을 던졌다.
“공을 최대한 늦게 보여 주려는 동작인데 이게 좋지 않은 건가?”
“타자에게 구종을 감추는 것보다 하중 이동이 먼저거든.”
볼튼은 김민의 설명을 수용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바로 투구폼을 바꿨다.
“이렇게 고치면 되는 건가?”
“그렇지. 그게 훨씬 좋아.”
볼튼은 바꾼 폼으로 수차례 투구를 이어갔다.
퍽! 퍽!
공은 볼판 가운데를 중심으로 뿌려졌다.
투구를 마친 볼튼이 김민에게 소감을 말했다.
“킴, 이 폼 말이야. 편하긴 한데 이렇게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어. 왠지 위력이 떨어진 것 같아.”
“위력이 없는 건 아니야. 스피드건에 구속이 95마일(153km) 이상 나왔거든. 그리고 투구폼은 투수에게 아주 중요해. 몸이 불편하면 선수 생활을 길게 이어갈 수 없거든. 야구 1년만 하고 그만둘 거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한 차례 훈련을 마친 두 사람은 그늘로 자리를 옮겼다.
볼튼이 김민에게 물병을 내밀며 물었다.
“근데 킴은 왜 투구폼을 바꾸려 하는 거야? 그대로 가도 조만간 메이저리그에 콜업될 텐데 말이야.”
“메이저리그에 콜업되는 게 목표가 아니니까.”
볼튼은 김민의 한마디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메이저리그에 콜업되는 게 목표가 아니라고? 그건 메이너리거가 목표가 아니라는 소리잖아. 킴, 뭘 목표로 하고 있는 거야?”
“내 목표? 난 구단을 움직일 수 있는 선수가 되고 싶어.”
구단을 움직일 수 있는 선수.
한마디로 리그를 호령하는 스타가 되겠다는 뜻.
볼튼은 김민의 포부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한 방 먹었네. 킴, 넌 정말 대단해.”
김민은 본심을 말한 뒤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야심만 클 뿐이야.”
볼튼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킴은 야심만 큰 사내가 아니야. 재능과 노력, 두 가지 덕목을 동시에 가지고 있지. 몇 년 안에 네가 원하는 그런 선수가 될 거야.”
그는 미래의 슈퍼스타가 자신의 눈앞에 앉아 있다고 생각했다.
‘킴이라면 해낼 수 있을 거야. 킴은 내가 본 유망주 중에 제일이니까.’
볼튼은 1라운드에서 뽑힌 선수들을 꽤 보았지만, 김민만큼 인상적인 선수를 본 적이 없었다.
“킴, 하나 더 물어봐도 돼?”
“괜찮아.”
“네 야구 지식 말이야. 누구에게 배운 거야?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야구 선수였나? 같은 싱글A 선수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야.”
김민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 아버지는 버스 기사였지. 야구와는 거리가 멀었어.”
“버스 기사였다고? 그럼 그 많은 지식은 누구에게 배운 거야?”
“내게 야구를 가르쳐 준 사람은 한 명이 아니야.”
볼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코치가 여럿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란 말이군.”
김민의 야구 지식은 하루아침에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야구를 했으니, 장장 30년이군. 코치 생활을 뺀다고 해도 20년. 야구 지식이 옅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두 사람이 휴식을 마치고 일어서려는 순간 한 사내가 훈련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둘 다 휴가에 뭐 하는 거야?”
두 사람을 향해 질문을 던진 이는 바로 김민의 전담 포수 스미스였다.
볼튼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스미스, 고향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어?”
“벌써 다녀왔지.”
“이틀 만에?”
볼튼의 물음에 스미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겨울 연락이 끊긴 여자 친구를 찾아갔는데 벌써 결혼했더라. 그래서 이렇게 되돌아왔지.”
그의 대답에 김민과 볼튼이 얼어붙었다.
‘실연 그 이상이군.’
‘지난겨울이라면 반년 남짓 지난 건가? 스미스의 상심이 크겠군.’
스미스는 두 사람의 경직된 표정을 보곤 손을 내저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메이저리그에 올라갈 가능성이 없는 유망주를 언제까지 기다려 줄 수는 없으니까.”
25세가 넘은 유망주의 메이저리그 콜업 가능성이 적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바가 있었다.
스미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김민의 도움으로 출전 경기가 늘었지만, 여전히 상위 리그 콜업 가능성이 적었다.
김민은 스미스의 경기력이 저하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스플리터를 실수 없이 받아 낼 만큼 좋아졌는데 엉뚱한 곳에서 폭탄이 터졌군. 그냥 두고 보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커.’
그는 마이너리그 시절 실연당한 동료 선수를 수없이 보았다. 그래서 그는 어떠한 인연도 만들지 않고 오직 야구만을 바라보았다.
볼튼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래도 너무하는군. 아직 시즌 중이잖아. 가을까지 기다려 봐도…….”
“볼튼, 이 성적으로 메이저리그 확장 로스터에 합류한다는 건 무리야.”
김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무리야.”
그의 냉정한 평가에 스미스가 멈칫했다.
“킴, 맞는 말이긴 한데 상당히 아프군.”
김민이 스미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스미스, 올해는 어떻게 해도 무리야. 하지만 최선을 다한다면…… 아니 최선 그 이상으로 노력한다면 내년 가을에는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몰라.”
스미스는 김민의 말이 립서비스가 아님을 깨달았다.
“최선을 뛰어넘는 노력이면 가능하다고? 하지만 그 노력을 어떻게 할 수 있는데?”
“내가 도와주지. 물론 대가가 없는 건 아니야.”
“대가?”
스미스는 김민의 말에 반신반의했다.
‘킴은 뛰어난 선수다. 하지만 그는 투수야. 투수가 포수인 날 어떻게 도와준다는 거지?’
김민이 스미스에게 말했다.
“대가는 메이저리그까지 날 따라오는 것. 뒤처진다면 그대로 버리고 갈 거야.”
옆에서 듣고 있던 볼튼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킴, 네 야구 지식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스미스는 포수라고…….”
김민이 볼튼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타격 쪽은 잘 모르지만, 최고의 포수가 갖춰야 할 덕목은 잘 알고 있어. 난 그걸 스미스에게 가르쳐 줄 거야. 물론 그걸 어떻게 해낼 수 있는지는 나도 몰라. 그 부분은 스미스 자신이 해결해야 해.”
스미스는 언제까지 싱글A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좋아. 하겠어. 죽을 만큼 노력할 테니까. 두 사람 모두 날 도와줘.”
김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플로리다에서 죽을 만큼 뛰어 보자고.”
볼튼은 엉겁결에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간 것을 깨닫곤 어깨를 으쓱했다.
“두 사람 모두라니, 나도 죽을 만큼 뛰는 건가?”
“물론이지.”
스미스의 합류로 김민과 볼튼은 훈련의 깊이를 더할 수 있었다.
* * *
후반기 첫 등판.
김민은 1회부터 크게 흔들리며 주자를 두 명이나 내보냈다.
투 아웃 주자 1, 3루.
“조금 오래 쉰 덕분일까요? 평소보다 더 흔들리는군요.”
넬슨 감독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라운드를 주시했다.
“좋지 않은 건 킴이 아니야. 스미스의 포구를 봐. 두 개나 공을 뒤로 흘렸다고. 포수가 저렇게 흔들리면 투수가 좋은 투구를 할 수가 없지.”
김민은 스미스가 두 개나 공을 뒤로 흘렸지만, 그를 탓하지 않았다.
‘포구 모션을 바꾸는 건 투수의 투구폼을 바꾸는 것만큼 어려운 과정이야. 스미스, 그걸 해내지 못하면 절대 좋은 포수가 될 수 없어.’
그가 스미스에게 요구한 것은 안정된 포구와 프레이밍이었다.
김민은 이 두 가지만 확실해도 메이저리그에 진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00년 기준으로 프레이밍의 가치는 크게 높지 않다. 하지만 약물의 시대가 끝나는 순간 그 가치는 크게 올라가게 될 것이다.’
스미스는 안정된 포구와 프레이밍을 위해 공을 빠르게 미트에서 빼는 습관을 고쳐야 했다.
‘침착하자. 주자가 없을 때는…… 아니, 결정구가 들어올 때는 최대한 존에 미트를 붙여야 해.’
볼 카운트 2-2, 김민은 승부구로 슬라이더를 선택했다.
‘스미스, 심판의 눈을 속여 보자고.’
그는 바깥쪽으로 공 하나 정도 빠지는 슬라이더를 던졌다.
슉!
빠르게 날아온 공이 홈플레이트 앞에서 바깥쪽으로 휘어져 나갔다.
타자는 배트를 내다가 그대로 멈췄다.
그러나 판정은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타자는 크게 화를 내며 주심에게 고개를 돌렸다.
“스윙이 아닙니다!”
주심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받았다.
“그래, 스윙이 아니야. 다만 공이 존에 들어왔을 뿐이야.”
타자는 주심의 말에 깜짝 놀랐다.
“존에 들어왔다고요?”
“포수 미트 못 봤나? 존에 걸쳤다고.”
타자는 슬라이더가 걸쳤다는 말에 고개를 김민에게 돌렸다.
‘싱글A에서 존에 걸치는 슬라이더를 던질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김민이 소문대로 대단한 투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민이 던진 공은 존을 통과하거나 걸치지 못했다.
그의 슬라이더가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은 것은 스미스의 프레이밍 덕분이었다.
김민이 더그아웃으로 향하면서 스미스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스미스, 괜찮았어.”
스미스가 그 주먹을 받으며 말했다.
“휴…… 십 년 감수했어.”
삼진 아웃으로 1회 초 위기를 넘긴 김민.
2회부터는 탄탄대로였다.
6회까지 4피안타 무실점.
크랩스의 에이스는 자신의 능력을 경기로 증명해 보였다.
샘이 넬슨 감독에게 고개를 돌렸다.
“더블A로 올려 보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나도 그러고 싶네. 하지만 프런트에서 뭐라 말이 없으니…….”
며칠 전 스카우트 팀장 그레이는 브라이언의 내민 보고서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미래의 에이스라고?”
“그렇습니다.”
“싱글A에서 7경기 던진 투수에게?”
“확실한 재능입니다.”
그레이는 브라이언의 격찬이 못마땅했다.
“단장님이 이런 보고서를 보고 뭐라고 하겠나? 필시 소설이라 할 거야. 다시 써 와.”
브라이언은 그레이의 외침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 더블A로 올려 보내서 테스트를…….”
“그건 우리가 결정할 사항이 아니야.”
브라이언은 길게 한숨을 내쉬곤 사무실을 나왔다.
딸칵.
지포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
담배 연기가 폐를 파고들었다.
담배가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담배만이 답이었다.
“브라이언, 뭘 그렇게 고민하는 건가?”
고개를 돌리니, 운영팀장 코너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요.”
코너가 다가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도 한 개비 주게.”
브라이언은 코너에게 담배를 내민 뒤 불까지 붙여 주었다.
코너가 깊이 연기를 마신 뒤 길게 내뱉었다.
그 모습이 마치 우수에 빠진 배우 같았다.
“팀장님은 뭐가 잘 안 풀리는 겁니까?”
“구단 수익. 정확히 말하면 티켓 판매라고 할까?”
“그건 팀장님 탓이 아니잖아요. 구장 위치가 뭣 같아서…….”
“쉿, 그런 말은 조심하게. 구단주나 단장이 들으면 뭐라 날뛸지 모르니까.”
두 사람은 구단 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웠다.
경기가 없는 날이었기에 두 사람은 마음껏 담배 연기를 내뿜을 수 있었다.
“그래, 자네는 뭐가 안 풀리는 건가?”
“싱글A 투수를 한 명 추천했는데 그레이 마음에 들지 않나 봐요.”
코너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나 마나 제구력이나 운영으로 승부하는 투수였겠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레이는 스피드 신봉자야.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투수라고 생각하지.”
“빠르면 좋은 건 사실이지만, 빠르고 제구력까지 갖춘 투수는 드물잖아요.”
코너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일세. 그런 투수는 드물지. 브라이언, 자네가 점찍은 투수 내가 한 번 맞춰 볼까?”
“알고 계신 겁니까?”
“두렵나?”
“담배 한 개비를 걸죠.”
코너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킴, 내 승리일세.”
브라이언은 코너에게 담배를 갑 채로 내밀었다.
“킴을 더블A에서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