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투수전 02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본이 미간을 좁혔다.
“스플리터나 커브였다면 칠 수 있었을 거야.”
로이가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본, 둘 다 아니라면 뭘 던진 거야?”
“뭘 던졌냐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그건 슬라이더였어.”
“슬라이더? 잘못 본 거 아니야?”
본이 오른손으로 왼손을 툭 치며 말했다.
“스플리터였다면 담장 밖으로 넘겨 버렸을 거야.”
로이는 김민의 다양한 구종에 속으로 혀를 찼다.
‘커브, 스플리터, 슬라이더, 그다음은 투심 패스트볼 또는 체인지업인가? 구종이 다양한 건 좋지만, 마이너에서 이렇게 많은 공을 던진다는 것은 주 무기가 없다는 말과 같다.’
그는 김민이 다양한 구종을 던지는 것은 어느 하나 자신 있는 구종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민은 자신이 없기 때문에 다양한 구종을 던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다양한 공을 던질 수 있는 것은 야구 경력이 그 어떤 선수보다 길기 때문이었다.
본에게 던진 슬라이더의 경우 고교 시절부터 그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구종이었다.
국내 프로 구단들도 그의 슬라이더를 높이 평가해 신인 드래프트에 나오면 3라운드 안에는 뽑힐 것이라 단언했다.
하지만 그는 국내보다는 미국행을 택했다. 그리고 미국에 건너온 뒤로는 팔꿈치 부상을 염려해 슬라이더보다 커브를 주 무기로 삼게 되었다.
“스콜, 한 방 날려!”
5번 타자 스콜.
그는 파워히터답지 않게 참을성이 많았다.
김민은 포트마이어 미라클의 선수 풀이 두텁게 느껴졌다.
‘스콜도 좋고, 본도 나쁘지 않고, 투수는 더 좋아. 싱글A 팀 중에서는 아마 최상이 아닐까?’
상대가 강하다고 해서 물러설 김민이 아니었다. 그는 바깥쪽으로 철저하게 제구했다.
“스트라이크!”
스콜은 초구를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쪽 꽉 찬 공인가? 좋은 공이다. 하지만 모든 패스트볼을 이렇게 제구할 수는 없을 거야. 실투는 분명 온다.’
스콜은 인내심을 발휘하며 승부를 풀카운트까지 가져갔다.
크랩스의 넬슨 감독은 스콜이 풀카운트까지 김민을 몰아세우자 미간을 좁혔다.
“킴, 스콜에게 투구 수를 많이 빼앗겼군.”
“스콜은 정말 좋은 선수입니다. 내년이면 그도 더블A에 올라갈 겁니다.”
“어떤 면에서는 하킴보다 낫단 말이지.”
하킴은 크랩스 주전 포수이면서 클린업을 치는 뛰어난 선수였다.
오늘은 스미스가 마스크를 쓴 덕분에 지명타자로 출전하고 있었다.
김민이 모자를 슬쩍 만지며 스플리터 사인을 냈다.
‘치지 않는다면 걸어서 내보낼 수밖에.’
그는 맞아도 좋다가 아니라 걸러도 좋다는 마음으로 스플리터를 던졌다.
이런 볼 배합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슉!
빠르게 날아간 공이 가운데로 날아갔다.
스콜은 김민이 풀카운트에서 정면 승부를 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공은 홈플레이트 앞에서 브레이크가 걸린 것처럼 떨어졌다.
‘패스트볼이 아닌 스플리터?’
스콜은 배트를 멈추는 대신 높이를 조절했다. 이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딱!
배트에 맞은 공이 높이 떠올랐다.
김민은 스콜의 승부 근성과 인내심을 칭찬했다.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 노력이 뒤따르면 메이저까지도 바라볼 수 있을 거야.’
그는 날아가는 공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결과는 공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이스 플레이!”
스미스의 외침과 함께 아웃 카운트가 올라갔다.
결과는 중견수 플라이 아웃.
스콜의 스윙과 대처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스플리터가 아닌 포심 패스트볼에 타이밍을 맞췄기 때문에 정확한 타격이 되지 못했다.
‘이 승부에서 내가 이길 수 있었던 것은 20년이라는 프로 경력 덕분이다. 두 사람의 경험이 반대였다면 스콜은 이번 타석에서 홈런을 뽑아냈을 것이다.’
그는 남은 한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우곤 6회 말 투구를 마쳤다.
“6회까지 0-0, 둘 다 대단하군요.”
“반대로 말하면 양쪽 배트가 침묵하고 있는 거야.”
크랩스 코칭 스탭은 어떻게든 7회에 점수를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로이는 좋은 투수지만, 공략 불가능한 투수가 아니야.”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이번 회부터 공략 방법을 바꾸지.”
“어떻게 말입니까?”
“공을 띄우지 말고 굴리자고.”
넬슨 감독은 싱글A 선수들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탁!
배트에 맞은 공이 느리게 1, 2루 사이를 향했다.
“1루!”
1루수가 급히 공을 향해 달리는 사이 로이가 베이스 커버를 들어갔다.
앞서 김민은 이 베이스 커버를 깔끔하게 성공시킨 바 있었다.
로이도 나쁘지 않은 수비를 선보였다.
스타트와 스피드 그리고 베이스를 밟는 위치까지.
모든 것이 좋았다.
나쁜 것은 오직 하나.
1루수의 송구였다.
“송구가 빠졌어! 주자가 2루로 간다!”
로이의 멘탈이 흔들린 것은 이쯤이었다.
무사 2루.
로이는 한 점도 주지 않겠다는 마음이 너무 강했다.
주자를 묶어두기 위해 던진 견제구가 빠진 순간 로이는 평정심을 잃고 말았다.
이후 중전 안타가 나왔고 크랩스는 어렵지 않게 선취득점을 올릴 수 있었다.
스코어 1-0 크랩스의 리드.
“나이스! 브래들리!”
“잘했어! 그렇게 치는 거라고!”
로이는 전광판을 보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 등판에서 패전이라. 자업자득이군.”
싱글A 시즌을 전승으로 마치고자 했던 욕심.
그것이 실점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마무리는 제대로 한다.’
집중력을 되찾은 로이는 두 타자를 연속 범타 처리하곤 이닝을 마쳤다.
7이닝 1실점 3삼진 3피안타 1사사구.
더그아웃으로 돌아오자 투수 코치가 그를 불렀다.
“로이, 여기까지 던지도록 하지.”
“타선이 이번 회에 힘을 내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무리해서 8회에 올라갈 필요는 없어.”
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는 마지막 투구를 마친 뒤 시선을 그라운드로 돌렸다.
마운드에는 검은 머리를 한 동양인 투수가 투구판을 밟고 있었다.
‘킴이라고 했나? 오늘 패배는 다음에 반드시 갚아 준다.’
그는 더블A로 올라가기 때문에 싱글A에서는 더 이상 등판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 더 높은 곳에서 김민을 만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내 감은 나쁘지 않아. 분명 오늘보다 높은 곳에서 만나게 될 거야.’
김민은 미라클의 하위 타선을 상대해서 내야 안타 하나를 내줬지만, 나머지 두 타자를 인필드 플라이와 삼진으로 잡아내며 이닝을 마쳤다.
미라클 코칭 스탭은 김민의 위기관리 능력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1회부터 지켜봤지만, 주자를 내보내고도 긴장하지 않는군.”
“실책이 나왔을 때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멘탈이 상당한 친구인 것 같습니다.”
“기회가 되면 우리 팀으로 데려왔으면 좋겠어.”
“감독님 우리 팀은 힘들지 않을까요?”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며 투수 코치의 말을 받았다.
“하긴 저 정도 기량이면 내년에는 싱글A에 없겠지. 더블A에서도 통할 기량이야.”
이날 김민은 싱글A에 올라온 뒤 최고의 피칭을 선보였다.
8이닝 무실점 7삼진 4피안타 3사사구.
넬슨 감독은 엄지를 세우며 김민의 피칭을 칭찬했다.
“역시 태평양을 건너온…….”
‘특급인 겁니까?’
“특급답군.”
김민은 태평양 특급이란 별명이 상위 리그까지 이어지지 않길 바랐다.
* * *
탁!
배트에 맞은 공이 큰 바운드를 일으키며 포수 마스크를 강타했다.
“괜찮나?”
“괜찮습니다.”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는 이는 스미스였다. 그는 타격 코치 후안에게 부탁해 지근거리에서 타구를 받아내고 있었다.
“스미스, 이렇게까지 하게 된 이유가 뭔가?”
“킴과 경기에서 깨달았습니다.”
“흐흠?”
“전 아직 포수가 아닙니다.”
스미스는 김민과 호흡을 맞추며 좋은 성적을 냈다.
코칭 스탭도 스미스의 능력을 좋게 평가했다.
하지만 그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경기 내내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공을 받아야 했다.
‘킴이 구종을 바꿀 때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어. 단지 공을 받는 것만으로 긴장했단 말이야. 이런 상태로 메이저는커녕 팀의 주전 포수도 무리야.’
그는 타율이나 홈런 같은 타격 지표보다 제대로 된 포수가 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후안이 말을 하면서 배트를 휘둘렀다.
“스플리터 포구가 마음에 안 들었나?”
탁!
땅볼이 강하고 빠르게 정면으로 날아왔다.
스미스는 몸을 낮춰 그 공을 블로킹했다.
퍽!
공이 가슴 보호대를 강타하면서 둔탁한 소리를 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킴의 제구가 조금만 어긋났더라도 패스트볼(포일)이 나왔을 겁니다.”
후안은 공을 때리면서 생각했다.
‘재미있는 상황이야. 투수가 포수를 키운 모양새라니.’
그는 스미스가 타격에는 재능이 없지만, 포수로서 재능이 있다고 보았다.
이대로 잘 성장한다면 메이저리그 주전은 될 수 없겠지만, 백업 한 자리는 노려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잘 성장했을 때지만.’
김민은 지난 투구 이후 5일의 휴식을 가졌다.
그가 5일을 쉴 수 있었던 것은 중간에 경기가 없는 팀 휴식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쉬는 5일 동안 투구 없이 하체 훈련과 러닝에 중점을 두었다.
하루는 투수 코치 셈이 그를 불러 물었다.
“왜 러닝에 그렇게 집착하는 건가? 그냥 쉬어도 되지 않나?”
김민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어깨를 쉬는 동안 할 수 있는 운동이 이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남과 같아서는 남을 이길 수 없다.
김민은 이 대명제를 착실히 지키고 있었다.
“어깨를 쉬면서 운동이라. 일리는 있군. 하지만 다음 등판도 생각해야지.”
“그래서 뛰는 거리를 조절하고 있습니다.”
샘은 김민이 뛰는 거리를 조절하고 있다는 말에 가볍게 놀랐다.
‘스스로 트레이닝을 컨트롤할 수 있을 정도인가? 어디까지 우리를 놀라게 하려는 건지 모르겠군.’
김민은 투구를 마친 다음날은 3km를 뛰었고, 그다음 이틀은 10km 이상을 뛰었다. 그리고 등판 전 이틀은 5km와 3km를 뛰면서 체력을 안배했다.
‘메이저리그라면 다음 등판에 모든 컨디션을 맞춰야겠지. 하지만 이곳은 마이너리그야. 자신을 성장시키지 못하면 언젠가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어. 힘들더라도 이겨내야 해.’
15년 전 그는 트리플A에서 그 한계와 마주했다.
90마일(145km) 패스트볼과 평범한 커브는 약물로 무장한 타자들에게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리하진 말게 에이스.”
김민은 단 한 달 만에 에이스 자리를 꿰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