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징 패스트볼-11화 (11/296)

11화 투수전 01

2회 말.

김민은 6번부터 시작하는 하위 타순을 상대했다.

‘어려울 건 없어. 침착하게 하나씩 잡아내자.’

스미스와 사인을 교환한 김민은 집중력을 유지한 채 투구를 이어갔다.

첫 번째 타자는 우익수 플라이.

두 번째 타자는 2루수 땅볼.

마지막 아웃 카운트는 3루수 직선타로 잡아냈다.

볼넷과 실책으로 시작했던 1회 말과 달리 깔끔한 투구였다.

미라클 코칭 스탭은 김민의 투구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잘 던집니다.”

“1회에는 투구 수가 많았는데 2회에는 그마저도 줄여 버리는군.”

“예, 7개로 2회 말을 막아 냈습니다.”

“싱글A에서 볼 수 없는 노련미가 있어.”

상대 팀 투수가 탐나는 것은 크랩스 코칭 스탭도 마찬가지였다.

미라클 선발 카인 로이는 3회 초 첫 타자 블레이크에게 안타를 허용했지만, 나머지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3이닝 무실점에 투구 수는 27개밖에 되지 않았다.

“구속은 빠르지 않지만, 브레이킹볼과 변형 패스트볼이 좋군요.”

“저 아래로 떨어지는 공이 뭔지 알아봐. 그걸 알지 못하면 저 친구를 마운드에서 내릴 수가 없어.”

넬슨 감독의 지시에 타격코치가 움직였다.

“아래로 떨어지는 공 말이야. 구종이 뭔지 알아?”

타자들의 의견은 다양했다.

“제가 보기에는 투심 패스트볼 같습니다.”

“투심이라니, 마스터(그렉 매덕스의 별명)도 아니고 그렇게 떨어질 수는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건 싱킹 패스트볼(싱커)입니다.”

“전 그냥 포심이 떨어지는 것 같던데요. 투심이라고 하기에는 포심과 구속 차이가 별로 없었습니다.”

타격 코치는 미간을 좁혔다.

“흠, 확실한 구종을 모르겠다는 말이지?”

“구종은 모르지만 패스트볼이 안쪽으로 꺾이면서 빠르게 떨어집니다. 이건 확실합니다.”

“좋아, 그럼 싱커라고 생각하고 대처하는 게 좋겠어.”

뛰어난 싱커볼러는 공략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상대는 마이너리그, 그것도 싱글A 투수.

싱커를 던진다고 해도 한계는 분명 있을 것이다.

“안쪽 패스트볼은 고르고 바깥쪽 포심 패스트볼을 노리도록 해.”

“알겠습니다.”

3회 말.

김민 또한 삼자범퇴에 성공했다.

“테이블 세터까지 잡아 버리는군요.”

“집 나갔던 제구가 돌아온 모양이야.”

스코어는 여전히 0-0.

관중들은 예상 밖의 투수전에 고개를 갸웃했다.

“크랩스와 우리 팀은 타격으로 승부를 보는 팀 아니었어?”

“그러게 팀 컬러에 맞지 않게 투수전이군.”

팝콘을 먹고 있던 중년이 두 친구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 경기에서 지면 우리 손해야. 로이는 우리 팀 에이스거든.”

“로이가 에이스란 말입니까? 29라운드 출신이라고요.”

“언제 뽑혔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로이가 지난 4월에 몇 승을 거두었는지 알고 있어?”

로이는 1라운드 29번이 아니라 29라운드 14번 픽으로 프로에 입단했다.

이렇게 낮은 라운드에서 픽된 선수들은 대부분 꽃을 피워 보지 못한 채 프로 생활을 마감하는 게 보통이었다.

“2, 3승 했던가요?”

“4승이야. 미라클스의 12승 중 33%라고.”

1년까지만 해도 카인 로이를 주목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카인 로이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선수였다.

도렐이 1년 전 그를 보았다면 김민의 다운그레이드 버전이라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엘 투수 코치와 만나면서 로이의 인생이 달라졌다.

조엘은 무색무취한 그에게 싱커를 가르쳤다.

“이것 하나만 제대로 던질 수 있어도 메이저리그에 갈 수 있어.”

“메이저리그 선발로 마운드에 오를 수 있단 말입니까?”

“원하는 곳에 원하는 속도로 던질 수 있다면.”

카인 로이는 그날부터 죽기 살기로 싱커를 연습했다.

그리고 6개월 만에 카인 로이는 싱커를 원하는 코스에 던질 수 있게 되었다.

“싱커를 완성했습니다.”

조엘 투수 코치는 고개를 저었다.

“타자를 앞에 두고 던지는 것과 불펜에서 던지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야.”

투수 코치의 말은 사실이었다.

실전에서 로이는 싱커를 제대로 컨트롤할 수 없었고, 수많은 볼넷을 내주었다.

감독은 볼넷을 남발하는 로이를 하위 싱글A나 루키 리그로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로이를 조엘 투수 코치가 보호하고 나섰다.

“뛰어난 에이스의 탄생에는 인내심이란 덕목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여기서 로이를 포기한다는 것은 미래의 에이스 한 명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 로이는 싱커로 삼자범퇴 이닝을 만들어 냈다.

조엘은 카인 로이의 집념이 만들어 낸 기적이라고 평했다.

‘내 제자 중 로이는 가장 뛰어난 선수다. 그의 패스트볼과 큰 차이가 없는 싱커는 무서운 무기다.’

김민과 크랩스는 몰랐지만, 카인 로이의 싱글A 투구는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그는 이틀 뒤 더블A 승격이 예정되어 있었다.

“로이, 이번 회도 잘 던졌어.”

“코치님 덕분입니다.”

로이는 4이닝을 단 41개의 투구로 끝냈다.

크랩스 코칭 스탭은 차갑게 식어 버린 배트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로이에게 또 1승을 헌납하는 모양이군.”

“이쪽도 잘 던지고 있으니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김민은 4회 말 스콜에게 2루타를 허용했지만, 다음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면서 이닝을 끝냈다.

“킴, 나이스 피칭.”

“잘한다! 킴!”

김민은 동료들의 환호성과 함께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그는 더그아웃에 들어오자마자 투수 코치를 찾아갔다.

“투구 수가 몇 개죠?”

“57개.”

“상대는요?”

“41개.”

“16개 차이군요.”

김민의 시선은 로이에게 향해 있었다.

‘누구지? 내 기억에 저런 대단한 투수는 없었는데. 우연히 긁히는 날인가?’

싱글A에 흔히 있는 유망주 투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투수 코치 샘이 김민에게 엄지를 내밀며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 킴도 잘하고 있다고.”

김민은 크랩스 이적 후 최고의 피칭을 보여 주고 있었다.

땀을 닦고 수건을 내려놓자 수석 코치가 다가와 물었다.

“킴, 한계 투구 수는 몇 개지?”

“100개 정도 될 겁니다.”

“그럼 7회까지는 맡아 줄 수 있겠군.”

“더 던질 수도 있습니다.”

수석 코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긴 메이저리그가 아니야. 무리할 필요는 없어.”

김민은 그라운드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7이닝 노디시전(승패 없음)인가? 좋지 않은데.’

로이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싱글A 마지막 투구를 노디시전으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싱커가 절묘한 각도로 떨어지면서 타자의 배트를 끌어냈다.

탁!

1루수에게 향하는 느린 땅볼.

1루수는 공을 잡아 그대로 타자를 터치했다.

“또 투 아웃이군요.”

“싱커에 대한 대처가 안 되는군.”

“패스트볼과 같은 속도로 날아오는 싱커는 메이저리거들도 힘겨워하는 공입니다. 싱글A에서 저런 공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사기입니다.”

싱커를 쳐 내기 위해서는 어퍼 스윙이 필수였다.

그러나 크랩스에서 어퍼 스윙에 능숙한 선수는 클린업과 6번 타자 브래들리가 전부였다.

딱!

잘 맞은 타구가 우익수와 중견수 사이로 날아갔다.

타격 코치는 드디어 장타가 나오는가 싶어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결과는 우익수 플라이 아웃이었다.

“우익수의 호수비군요.”

“쳇, 아깝게 되었어.”

로이가 이번에 던진 공은 싱커가 아닌 포심 패스트볼이었다.

그의 포심 패스트볼은 커브나 싱커와 달리 좋은 타구가 나오곤 했다.

‘이걸로 6이닝 무실점이군.’

로이는 마운드에서 내려온 뒤 투수 코치를 찾아갔다.

“코치, 다음 이닝도 던지겠습니다.”

투수 코치가 미간을 좁혔다.

“예정은 6이닝까지였잖아.”

“승리 투수로 싱글A 투구를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투수 코치는 대답 대신 감독에게 고개를 돌렸다.

감독이 양손을 앞으로 뻗으며 말했다.

“던지고 싶은 만큼 던지게 해. 다만 투구 수는 90개까지야.”

로이의 현재 투구 수는 52개.

이론상으로 그는 완봉이 가능했다.

“감사합니다.”

6회 말.

미라클 타자들이 결승점을 따기 위해 타석에 들어섰다.

‘세 번째 타순이다. 이제 스플리터에 호락호락 당하지 않는다.’

미라클 코칭 스탭은 3회 말이 끝나고 김민의 구종을 스플리터라 정의했다.

스플리터를 공략하는 방법은 싱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쪽도 싱커 공략이 가능한 선수는 많지 않았다.

김민은 본이 배터박스에서 배트를 휘두르고 있는 것을 보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첫 타자부터 본인가? 쉽지 않은 이닝이군.’

안쪽에 강하고 바깥쪽에 약한 본.

그러나 어설픈 공은 안쪽이든 바깥쪽이든 가리이지 않고 때려냈다.

제구가 조금만 어긋나도 장타를 허용하고 말 것이다.

‘집중하자.’

초구는 바깥쪽 패스트볼.

파앙!

포수 미트에 들어간 공이 좋은 울림을 냈다.

본은 김민의 초구를 보곤 배트에 힘을 주었다.

‘코너를 제대로 노렸다. 이 녀석…… 아직 힘이 빠지지 않았어.’

두 번째 타석에서 본은 스플리터에 삼진으로 물러났다.

그는 이번 타석에서 그 복수를 해 줄 생각이었다.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았으니, 기분이 좋겠지. 두 번째 공으로 스플리터를 던져 보라고.’

김민은 초구를 던지고 나서 본이 노리고 있는 공을 읽을 수 있었다.

‘패스트볼은 아니고, 커브나 스플리터를 노리는 모양이군.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아마 십중팔구 전 타석에서 삼진을 당한 스플리터겠지.’

그는 그립을 고쳐 잡았다.

이번 그립은 마이너리그 시절 그가 가장 많이 던진 공이었다.

‘본, 미안하지만 이번에도 내가 이겨야겠어.’

슉!

김민의 손을 떠난 공이 바람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온다.’

본은 안쪽으로 들어오는 공에 바로 배트를 냈다.

‘그대로 넘겨 주마.’

어퍼 스윙이 공을 향해 나아갔다.

여기서 공 하나 정도 떨어진다면 정확히 스윙 궤적과 일치했다.

‘잡았다!’

그러나 공은 떨어지는 대신 옆으로 휘어져 나갔다.

툭.

배트 끝에 걸린 공이 라인을 타고 굴러갔다.

본은 너무 놀라 1루로 뛰어가는 것을 잠시 잊을 정도였다.

‘6회에 뜬금없이 슬라이더라고! 저 녀석은 대체 몇 개 구종을 던지는 거야.’

김민은 1루수가 공을 잡는 것을 보곤 빠르게 베이스 커버에 들어갔다. 그리곤 깔끔하게 송구를 잡아 타자를 아웃시켰다.

코칭 스탭은 프런트가 유망주를 제대로 잡아 왔다고 생각했다.

“킴도 좋군요.”

“에릭에겐 미안하지만, 이번 트레이드는 우리가 이긴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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