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샬로트 스톤 크랩스 05
‘본에게 악감정은 없지만, 여기서는 무조건 잡아야 해.’
본은 트리플A에서도 4번 타자로 출장하곤 했다.
김민이 기억하는 본은 오만 그 자체였다. 하나 속은 메이저리거에 대한 열등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때문에 팀 동료들은 대부분 본을 좋아하지 않았다.
반면 김민은 그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도 본 못지않게 오랜 시간 마이너리그에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마이너리그에 오래 머무르는 선수들은 대부분 본처럼 열등감이 피어나기 마련이었다.
‘본은 안쪽이 강했어. 그렇다면 바깥쪽으로 하나.’
슉!
본은 초구에 반응했다.
딱!
벼락같은 타구가 1루 라인을 타고 흘러갔다.
“와아아!”
관중석에서 잠시 탄성이 터져 나왔으나 1루심의 판정은 파울이었다.
“파울!”
김민은 모자를 벗은 뒤 땀을 닦았다.
“후…… 십 년 감수했군. 젊은 본은 안쪽만 강한 게 아니네.”
그가 의도한 공은 바깥쪽 존에서 하나 정도 빠지는 패스트볼이었다.
하나 공은 존에 바짝 붙어 들어갔고, 본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자칫 잘못했으면 1, 3루 주자가 모두 홈을 밟았을 것이다.
김민은 신중하게 두 번째 공을 던졌다.
이번 공은 안쪽으로 떨어지는 커브였는데 본은 반응하지 않았다.
‘쳇, 볼이란 게 너무 보였나?’
3구는 다시 바깥쪽 패스트볼.
이번에는 존에서 하나 정도 빠지는 공이 제대로 들어갔다.
본은 이번에도 배트를 휘둘렀다.
탁!
빗맞은 공이 관중석에 떨어졌다.
“파울!”
카운트는 투 스트라이크 원 볼로 투수에게 유리하게 변했다.
본은 불리한 볼카운트가 되자 미간을 좁혔다.
‘투 스트라이크를 잡았으니, 이제 포크볼을 던지겠지. 뻔하디뻔한 볼 배합이야.’
그는 김민의 포크볼을 확신했다.
김민도 평소 같았으면 이 타이밍에서 스플리터를 던졌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본이었기에 다른 볼 배합을 가져갔다.
‘이제 좋아하는 코스에 하나 던져 주지.’
그가 선택한 공은 안쪽 높은 패스트볼.
안쪽 공에 강한 본에게 맞춘 유인구였다.
슉!
패스트볼이 포수 미트를 향해 돌진했다.
본은 눈높이로 패스트볼이 날아오자 반사적으로 배트를 내밀었다.
‘포크볼도 아니고, 날 상대로 안쪽 패스트볼 승부라니, 건방지다!’
그는 공을 담장 밖으로 날려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김민의 패스트볼은 그가 예상한 코스보다도 공 하나 정도 더 높았다.
‘하이 패스트볼?’
본은 상위 라운드 유망주답게 절묘한 배트컨트롤로 공을 찍어 눌렀지만, 타구의 질이 좋지 못했다.
툭.
빗맞은 공이 3루 쪽으로 굴러갔다.
“홈!”
스미스의 외침에 3루수 스나이더가 강하게 공을 뿌렸다.
‘맡겨 달라고!’
파악!
스미스의 미트와 3루 주자의 손이 홈플레이트를 두고 격전을 벌였다.
세이프인가? 아웃인가?
촤아아악!
한 차례 먼지구름이 피어오른 뒤 모두의 시선이 주심에게 쏠렸다.
이윽고 주심이 오른손을 크게 휘두르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웃!”
“세이프입니다! 세이프라고요!”
3루 주자는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판정은 바뀌지 않았다.
미라클 코칭 스탭은 무사 1, 3루의 기회가 2사 1, 2루로 바뀐 것을 보곤 이마를 찌푸렸다.
“1점 뽑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감독님, 아직 공격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스콜에게 기대를 걸어 보죠.”
스콜은 미라클의 5번 타자로 클린업 중 유일한 좌타자였다.
김민은 스콜의 떡 벌어진 어깨를 보곤 속으로 혀를 찼다.
‘이쪽도 한 파워 하는 모양이군.’
바야흐로 대 홈런의 시대.
마이너리그에도 뛰어난 파워를 지닌 타자가 즐비했다.
‘설마 약물은 아니겠지.’
트리플A나 메이저리그에서는 광범위하게 약물이 사용되고 있었으나 아직 하위 리그는 약물과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스콜이 약물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그가 약물에 취해 있는 선수라면 어설픈 패스트볼은 위험했다.
김민은 초구로 바깥쪽을 선택했다.
‘한 타자만 더 잡자고.’
슉!
90마일(145km) 패스트볼이 포수 미트를 향해 돌진했다.
파앙!
스콜은 초구를 그대로 흘려보냈다.
그는 큰 덩치와 다르게 신중한 성격의 타자였다.
‘그대로 흘려보냈다. 예상보다 선구안이 좋은데. 어쩌면 이 친구가 4번에 더 어울릴지도 몰라.’
투수에게 살짝 불리한 볼카운트.
김민은 두 번째 공도 바깥쪽으로 던졌다.
이번에는 보다 존에 가깝게 붙인 패스트볼이었다.
스콜은 이 공에 배트가 나왔다.
예상대로 좋은 선구안이었다.
탁!
배트 끝에 걸린 공이 그대로 백네트에 꽂혔다.
터엉!
김민의 볼 끝이 무뎠다면 그대로 1루수 키를 넘겼을 것이다.
주심이 두 손을 좌우로 펼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파울!”
볼 카운트 1-1.
주심에게 새 공을 받은 김민이 모자를 만졌다.
스플리터 사인.
‘선구안이 좋은 타자를 상대로 이거만 한 공이 없겠지.’
스미스는 김민의 사인에 긴장했다.
‘3구인데 벌써 스플리터인가? 킴이 강수를 두는군.’
김민은 1, 2루 주자를 한 번씩 훑어보곤 투구에 들어갔다.
주자들은 투 아웃이었지만 볼 카운트가 1-1이었기에 스타트를 끊지 않았다.
‘주자는 묶었고, 남은 건 타자인가?’
슉!
손끝을 떠난 공이 홈플레이트 앞에서 낮게 가라앉았다.
이번에도 스플리터는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스윙 스트라이크!”
스콜은 헛스윙을 하고 나서야 김민이 던진 공이 포크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포크볼치곤 속도가 빨라. 이건 스플리터야.’
상대의 구종을 꿰뚫어 보았지만, 카운트는 이미 불리하게 변해 있었다.
‘내가 이대로 물러설 것 같으냐!’
탁! 탁!
스콜은 4구와 5구를 커트하면서 끈질기게 버텼다.
김민은 스콜의 버티기에 미간을 좁혔다.
‘저 친구, 덩치와 달리 야구를 좀 하는군.’
스미스도 스콜이 김민을 힘들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콜 만만치 않은 타자야. 선구안도 좋고 자세에도 빈틈이 없어. 그가 이런 식으로 버티면 다음 이닝도 위험해.’
그는 다음 공으로 스콜을 잡아내지 않으면 다음 이닝에도 여파가 미칠 거라 생각했다.
김민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여기서 잡는다. 더는 공을 낭비하지 않겠어.’
그는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스미스는 김민의 사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커브라고? 스플리터가 아니라?’
그는 김민이 결정구로 스플리터를 다시 한번 사용할 거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김민이 선택한 결정구는 스플리터가 아닌 커브였다.
‘커브는 위험할 수도 있어. 상대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유망주라고.’
사인 변경은 없었다.
김민은 그대로 커브를 던졌다.
휙!
김민의 손을 떠난 공이 큰 포물선을 그렸다.
스콜은 머리 높이에서 떨어지는 공을 보곤 혀를 찼다.
‘여기서 커브라고?’
그는 허를 찔렀지만, 구속이 공이라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몸의 반응이 그의 생각과 달랐다.
배트는 공을 스치지도 못한 채 헛돌고 말았다.
“스윙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주심의 판정에 스콜은 고개를 숙였다.
‘어째서지? 어째서 그걸 치지 못한 걸까?’
스미스는 미트에서 공을 뺀 뒤 홈플레이트에 던졌다.
“오케이. 무사 1, 3루를 막았어!”
미라클 코칭 스탭은 김민의 투구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방금 공 말이야. 커브 아니었나?”
“상당히 느린 커브였습니다.”
“대단한 오프 스피드 피치군. 싱글A에 저런 공을 던질 수 있는 투수가 있었다니…….”
“곧 상위 리그로 올라가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김민은 더그아웃으로 돌아가 동료들과 하이 파이브를 나누었다.
“나이스 피칭.”
“고마워.”
크랩스 코칭 스탭은 김민이 제힘으로 위기를 탈출하자 만족감을 표했다.
“좋은 피칭이었다.”
“감사합니다.”
2회 초.
크랩스의 타선은 4, 5, 6번으로 이어지는 호타순이었다.
그러나 세 명의 타자는 단 한 명도 1루를 밟지 못한 채 더그아웃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또 삼자범퇴야?”
“저 친구 제법이군.”
“그러게 말이야. 공도 별로 빠르지 않은데 주자를 내보내지 않고 있어.”
미라클 마운드를 지키는 투수의 이름은 카인 로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