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징 패스트볼-8화 (8/296)

8화 샬로트 스톤 크랩스 03

원정에서 돌아온 크랩스 선수들은 얼굴이 밝지 못했다.

토니의 말에 따르면 스윕을 당했다고 했다.

‘승률이 낮은 건 메이저리그 쪽만이 아닌 것 같군.’

그가 선수단과 마주하게 된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우리 팀에 새로 합류한 투수를 소개하겠다. 킴, 그는 태평양을 건너온…….”

김민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 표현은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크랩스 선수들은 김민을 한 번 훑어보았을 뿐이었다. 그들은 새로 합류한 선수에게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킴, 투수조에 합류하게.”

“알겠습니다.”

코칭 스탭은 틴캡스 코칭 스탭과 달리 김민에게 거는 기대가 커 보였다.

‘가는 곳마다 태평양을 건너온 특급이라 하는데 파드리스에서 슈퍼 유망주로 날 포장해서 판 모양이군. 어설픈 모습을 보여 주면 실망이 크겠어.’

간단한 워밍업과 체력 훈련이 끝난 뒤, 투수 코치가 그를 불렀다.

“킴, 난 샘이라고 한다.”

샘은 틴캡스 코치였던 도렐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였다.

‘이쪽은 경력이 상당한 타입인가?’

그는 일단 투수 코치의 말을 들어 보기로 했다.

“소속 팀에서 선발 투수로 나섰다지?”

“11일에 등판해서 6이닝을 던졌습니다.”

“좋아, 그럼 이틀 뒤 등판하면 되겠군. 가능하겠지?”

“예, 가능합니다.”

크랩스는 테스트도 하지 않고 김민을 선발 로스터에 올렸다.

이것만 봐도 그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하위 싱글A에서 던지던 투수를 바로 상위 싱글A 선발 로스터에 합류시키다니, 얼마나 포장되어 있는 건지 모르겠군.’

샘은 선발 등판 일을 지정한 다음 그를 돌려보냈다.

개인 지도나 테스트는 없었다.

‘선발 등판 경기를 보고 난 다음 판단하겠다는 뜻인가? 그게 아니라면 방치겠군.’

김민은 개인 훈련 내내 투구 밸런스를 잡는 데 주력했다.

처음에는 어색했던 투구였지만 차츰 익숙해졌다.

‘완벽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감을 잡았어.’

밸런스가 잡히면서 제구력도 상당히 좋아졌다.

원하는 코스에 적어도 6할 정도는 공을 넣을 수 있었다.

팡!

공을 잡은 포수 하킴이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이스 볼!”

투수 코치 샘은 김민의 투구에 만족한 듯 턱을 쓰다듬었다.

“90마일(145km)은 가볍게 나오겠군요.”

수석 코치가 그의 옆에서 말을 받았다.

“에릭을 보내고 받아온 친구니까 그 정도는 해 줘야지.”

“메이저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요?”

“올라가지 못하면 이쪽이 곤란해. 프런트에서 주목하고 있는 유망주니까. 프런트 녀석들이 잔소리해 댈 걸 생각하니 지금부터 머리가 아프군.”

김민은 몰랐지만, 에릭은 크랩스에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던 투수였다.

일대일 트레이드는 아니었지만 그런 에릭을 주고 받아 온 김민이었다.

탬파베이 프런트는 그가 박찬호나 노모 히데오처럼 커 주길 바라고 있었다.

* * *

4월 한 달 동안 김민은 두 번 더 마운드에 올랐다.

성적은 1승 1패.

하위 싱글A에서 상위 싱글A로 팀을 옮긴 데다가 크랩스가 리그 꼴찌인 것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승률이었다.

하지만 김민은 이 성적에 만족하지 못했다.

“11이닝을 던져서 6자책점. 평균자책점이 4.90, 누가 보면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에서 뛰는 줄 알겠군. 상대는 마이너리거라고.”

그는 높은 평균자책점에 한숨을 내쉬었지만, 크랩스에서 4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고 있는 선발 투수는 단 2명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김민의 높은 평균자책점은 실책이 대량으로 나온 4이닝 6실점(4자책점) 경기 덕분이었다.

크랩스 코칭 스탭은 이날 대량 실점은 김민의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똑. 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김민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목소리를 높였다.

“열려 있습니다.”

“킴, 나야.”

끼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것은 토니였다.

“문도 안 잠그고 뭐 하는 건가?”

“어차피 크랩스 선수들만 이용하는 숙소인데요.”

“물건이 도착했어.”

김민은 토니가 들고 있는 물건을 보고는 표정이 밝아졌다.

“드디어 도착했군요.”

2, 3일쯤 걸린다고 하던 것이 2주가 더 지나서 도착했다.

그러나 김민은 그것도 감사하게 생각했다.

2000년 4월 현재는 20년 뒤와 달리 미디어의 발달이 더디기만 했다.

“이 비디오테이프 맞지?”

“맞아요.”

“그런데 무슨 비디오테이프야. 영화나 그런 물건은 아닌 것 같고.”

“토론토 투수들의 투구 영상이죠.”

토니는 김민의 대답에 가볍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허! 투구 영상이라. 킴은 여러모로 연구를 하는군.”

“평범하게 훈련해서는 마이너리그를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요.”

남들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남들과 같은 훈련을 하면 절대 마이너리그를 벗어날 수 없었다.

토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킴, 자네는 메이저리그에 갈 수 있겠어. 다른 녀석들은 틀렸지만…….”

그가 말끝을 흐린 것은 크랩스 선수들의 발전 없는 태도 때문이었다.

크랩스 선수들은 탬파베이 선수층이 얕기 때문에 언젠가는 메이저리그에 콜업될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토니는 그들의 그러한 태도가 기량 발전을 더디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김민도 토니의 생각에 동의했다.

“다음 시즌이 되면 다들 깨닫는 것이 있겠죠.”

“그때가 되면 자넨 여기 없을 것 같군.”

이곳에 없을 것 같다는 말은 상위 리그로 콜업되어 올라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킴, 내일부터는 원정이니까 미리 짐을 싸 둬.”

“알겠습니다.”

김민은 토니를 보내곤 비디오테이프를 개봉했다.

“젊은 시절 카펜터는 어땠는지 궁금하군.”

그가 알고 있는 카펜터는 리그를 호령하던 노련한 에이스였다.

그러나 이 시기 카펜터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신인 투수였다.

‘다소 부족한 부분이 있겠지? 하지만 지금의 내겐 그 정도도 많은 참고가 될 거야.’

딸칵.

플레이어가 비디오테이프를 삼켰다.

그리고 잠시 뒤, 화면이 재생되었다.

김민은 화면에 등장한 선수를 보곤 목소리를 높였다.

“뭐야! 카펜터가 아니잖아!”

김민은 선수의 등번호를 확인하곤 가슴 한 편이 먹먹해졌다.

‘토론토의 32번…… 내 기억이 맞다면 저 선수는 바로 로이 할러데이야.’

2017년 비운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전설적인 투수 로이 할러데이.

현재 그는 토론토에서 고전 중이었다.

김민은 어설픈 폼에서 나오는 포심 패스트볼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이건 내가 알고 있는 할러데이가 아니야.’

그가 알고 있는 할러데이는 쓰리쿼터로 무시무시한 공을 던지는 슈퍼 에이스였다.

‘토론토에서는 닥터를 정통 오버핸드로 키우려 했던 건가?’

로이 할러데이는 한국 팬들에게 프로페서란 별명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미국에서는 보통 닥터로 불리곤 했다.

김민은 할러데이의 불안한 투구를 반복해서 재생했다.

‘팔의 각도가 너무 높아. 그 때문에 제구가 흔들리는 거야.’

2m에 가까운 장신이 오버핸드로 강속구를 내리꽂는다.

타자는 2층에서 공이 떨어지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것이다.

하지만 제구가 되지 않는다면 그 어떠한 공도 의미가 없었다.

할러데이의 투구 영상은 투구폼을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코치 시절 난 투구폼에 가급적이면 손을 대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제구가 흔들린다면 손을 대지 않을 수가 없겠군.’

그는 할러데이의 예를 자신에게 대입해 보았다.

‘할러데이와 같은 오버핸드니까. 그와 같은 방식으로 접근한다면…… 일단 쓰리쿼터로 팔을 내려야겠지. 그렇게 하면 구속이 약간 상승할 거야. 1마일(1.6km) 정도? 아니, 그 이상도 가능할지 몰라.’

여기에 슬라이드와 킥킹까지 변화를 주면 2마일(3.2km) 정도까지 구속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올라간 구속이 성공을 장담하진 않았다.

쓰리쿼터로 투구폼을 바꾸는 것은 구속보다는 제구력을 잡기 위한 것이었다.

‘쓰리쿼터로 투구폼을 바꾸면 할러데이처럼 제구력이 좋아질까? 공을 놓는 타점만 낮아지는 것 아닐까?’

그는 머릿속 시뮬레이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직접 공을 던져 봐야겠어.’

김민은 글러브를 들고 방을 나섰다.

* * *

“토니, 연습장 라이트 쓸 수 있죠?”

“라이트는 왜? 야간 연습이라도 하려고?”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라이트를 켜 주긴 하겠지만, 끄는 건 킴이 알아서 해야 해. 난 곧 퇴근하거든.”

김민이 글러브를 들며 말했다.

“끄는 건 당연히 제가 해야죠.”

왼쪽에 앉아 있던 스미스가 김민과 토니의 이야기를 듣곤 퉁명스럽게 말했다.

“부상당하고 싶어서 안달 났군.”

스미스는 하킴에 이은 팀의 두 번째 포수였다.

토니가 미간을 좁히며 스미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스미스, 열심히 하려는 친구가 있으면 도와주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열심히라고요? 저 친구는 지금 절벽을 향해 악셀을 밟고 있어요.”

김민은 스미스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투수의 어깨는 쓰면 쓸수록 소모된다는 분필 이론을 말하는 것 같군.’

그도 스미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매일 연습하는 건 아니야. 오늘만이야. 확인해야 할 사실이 있거든.”

“확인해야 하는 사실? 새로운 구종이라도 익힌 건가?”

“구종보다는 투구폼이야. 시간이 있다면 어울려 주겠어?”

스미스는 김민의 제의에 어깨를 으쓱했다.

“사양하겠어. 내가 왜 그런 일에 손을 대야 해.”

그러자 토니가 미간을 좁혔다.

“스미스, 그런 태도로는 절대 상위 리그로 올라갈 수 없어.”

스미스는 24세로 크랩스에서는 가장 나이가 많은 축에 속했다.

사실 그는 메이저리그 콜업에 대한 희망을 어느 정도 버린 상태였다.

메이저리그는 25세 안에 콜업되지 못하면 그 이후에는 콜업될 확률이 크게 떨어졌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1년 남짓.

팀의 두 번째 포수인 스미스가 1년 안에 메이저리그에 콜업될 확률은 김민이 메이저리그에 콜업될 확률보다 훨씬 낮았다.

“태도가 문제가 아니잖아요. 난 못 올라간다고요.”

스미스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김민은 이것이 크랩스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상위 지명자들은 메이저리그 콜업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다른 팀에서 밀려난 선수들은 콜업을 너무 어렵게 생각한다.’

손을 뻗어 스미스의 팔을 잡았다.

“공을 받아 줘.”

스미스는 김민의 표정이 사뭇 진지한 것을 보곤 대답을 망설였다.

‘귀찮은 일에 휘말렸는데 어떻게 하지?’

그가 망설이자 김민이 말을 덧붙였다.

“내 훈련을 도와준다면 감독님께 스미스의 선발 추천을 요구하겠어.”

선발 투수들은 자신과 궁합이 잘 맞는 포수를 선택할 권리가 있었다.

물론 선발 투수가 요구한다고 해서 무조건 포수가 바뀌는 건 아니었다.

팀 사정에 따라 주전 포수가 그대로 가는 경우도 많았다.

스미스는 팀의 두 번째 포수, 다시 말해 하킴의 백업 포수였다. 그에게 선발 출장이란 미끼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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