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리스타트 03
어느 날 갑자기 20년 전으로 되돌아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복권이나 스포츠 토토를 사들이기 위해 판매점으로 달려갈 것인가?
그러나 복권 판매점에 들어간 당신은 당황하게 될 것이다.
20년 전 경기 결과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테니까.
김민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경기에서 알폰소에게 홈런을 맞아 강판당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상대 타자의 습관이나 동료 선수들의 버릇 같은 것들이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연습 투구를 하며 경기를 준비하는 것뿐이었다.
‘미래를 알고 있다고 슈퍼맨이 된 게 아니군. 다시 해 볼 기회가 주어진 것뿐인가?’
팡!
헤슬러가 미트에서 공을 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아.”
그는 김민의 패스트볼이 대략 80마일(128km) 전후라고 생각했다.
‘실전이라면 난타당하겠지만, 연습 투구에서 이 정도 구속은 괜찮아.’
20년 만의 투구.
김민은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공이 껄끄러워.’
손끝의 감각도 예전과 달랐다.
‘밸런스도 부자연스럽고…… 마치 남의 옷을 입은 느낌이야.’
그는 실전 감각을 되찾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김민이 마운드에서 내려와 헤슬러에게 말했다.
“시뮬레이션 피칭을 한번 해 보고 싶은데 누구 도와줄 사람이 없을까?”
헤슬러는 김민의 요청에 고개를 갸웃했다.
“시뮬레이션 피칭? 경기 전 전력투구는 좋지 않을 텐데?”
“전력투구로 승부하겠다는 게 아니라. 타자를 세워 둔 채 공을 던져보고 싶어.”
“알겠어. 내가 구해 보지.”
헤슬러가 더그아웃으로 향하려는 순간 도렐 코치가 목소리를 높였다.
“다들 더그아웃으로 돌아와. 연습 끝이다.”
김민은 도렐의 외침에 당황했다.
‘겨우 이걸로 연습이 끝이라고? 실전 감각은 물론 밸런스조차 맞추지 못했단 말이야.’
헤슬러가 김민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벌써 홈팀 연습 시간이 된 모양이야.”
이동시간이 길었던 탓에 원정팀 연습 시간이 평소보다 적었다.
더그아웃에 들어온 김민은 미간을 좁혔다.
‘실전 감각을 빨리 끌어올리지 못하면 큰일 나겠는걸.’
그의 불안함은 한 시간 뒤 현실이 되고 말았다.
팡!
미트에 공이 들어갔으나 주심의 손은 올라가지 않았다.
이것으로 6구 연속 볼.
“시시하군.”
타자는 배트를 내던지곤 1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노 아웃 1, 2루.
포수 헤슬러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여섯 개 연속 볼이라니, 지난 경기보다 더하잖아.’
틴캡스 코칭 스탭도 미간을 좁혔다.
“제구가 완전 꽝이군.”
“이번 이닝이나 제대로 마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도렐, 다음 투수를 준비하게.”
감독의 지시에 투수 코치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톰슨 준비해.”
“알겠습니다.”
톰슨은 코치의 지시에 글러브를 들었다.
‘킴, 아침부터 이상하더니, 경기를 완전히 망치고 있잖아. 이대로 가면 강판이라고. 차라리 몸이 좋지 않다고 말하지 그랬어.’
김민은 글러브를 벗은 뒤 잠시 땀을 닦았다.
‘연습 투구와 실전은 하늘과 땅 차이군. 커브나 체인지업은 못 써먹을 정도야.’
10년 만의 실전 등판.
마음먹은 대로 공이 가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이럴 때는 눈 딱 감고 한가운데로 밀어 넣어야 하는데…….’
투수 코치 시절 그가 선수들에게 몇 번이고 강조했던 말이 있었다.
- 맞더라도 가운데 던져라. 볼넷만큼 나쁜 건 없다.
볼넷으로 무사 1, 2루.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역으로 이행하는 중이었다.
‘무사 1, 2루에 클린업이라. 버거운 상대야.’
김민은 20년 전 상황이 다시 재현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20년 전 생각은 하지 말자. 지금은 경기에 집중해야 해.’
주자가 2루에 있었기 때문에 투수인 김민이 먼저 사인을 냈다.
손가락 하나, 그리고 둘.
헤슬러는 김민의 사인에 깜짝 놀랐다.
‘볼넷을 연속으로 내준 마이너리그 투수가 안쪽으로 패스트볼을 찌르겠다고? 무슨 자신감에서 나오는 사인이야?’
그는 속으로 혀를 찼지만, 사인을 바꾸진 않았다.
여기서 사인을 바꾼다면 흔들리고 있는 김민의 제구가 더 나빠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 한번 해 보자.’
김민은 헤슬러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트 포지션에 들어갔다.
‘안쪽으로 깊게! 맞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손끝을 떠난 공이 포수 미트를 향해 날아갔다.
슉!
타자는 안쪽을 찔러오는 공을 보곤 움찔했다.
‘여기서 안쪽이라고?’
그는 바깥쪽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배트를 내지 못했다.
파앙!
미트에 들어간 공이 좋은 울림을 냈다.
‘괜찮은 공이야.’
헤슬러가 고개를 끄덕인 순간 주심의 손이 올랐다.
“스트라이크!”
타자는 배터박스에서 미간을 좁힌 채 김민을 노려보았다.
‘연속 6개를 볼로 던지고 스트라이크인가? 하나 정도는 더 지켜보는 것이 좋겠지.’
김민은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곤 한숨을 돌렸다.
‘타자의 허를 찌른 건가? 하지만 상대는 클린업이야. 쉽게 가려고 하면 곤란해.’
그는 재차 사인을 냈다.
‘하나 더 안쪽으로.’
헤슬러는 김민의 사인에 마른침을 삼켰다.
‘안쪽으로 하나 더? 이봐 상대는 3번 타자라고. 초구는 허를 찔렀지만 두 번째 공도 같은 코스라면 위험하다고.’
김민은 타자의 몸에 맞는 한이 있더라도 안쪽으로 바짝 공을 붙이고자 했다.
‘몸에 맞게 된다면 내 실력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이겠지.’
이윽고 그의 손에서 공이 떠났다.
슉!
타자는 안쪽으로 날아오는 공을 보곤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이번에도 같은 코스라고? 웃기지 마라!’
배트가 공을 향해 움직였다.
그러나 배트는 공을 맞히지 못한 채 허공을 치고 말았다.
“스윙 스트라이크!”
김민은 타자의 헛스윙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볼이라고. 클린업이지만 선구안이 좋은 건 아니군. 하긴…… 여긴 하위 싱글A였지. 공 하나, 둘을 구분해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예리한 제구까지는 필요하지 않아.’
컨트롤 부담이 줄어들자 자신감이 돌아왔다.
‘우선 아웃 카운트를 하나.’
김민이 헤슬러에게 사인을 냈다.
헤슬러는 그것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라면 해 볼 만하지.’
김민이 선택한 승부구는 낮게 떨어지는 커브.
연습 투구 때는 각이 좋지 않았지만 투 스트라이크를 잡은 상황에서는 충분히 던져 볼 만했다.
헤슬러가 미트를 내밀며 생각했다.
‘안쪽으로 패스트볼 두 개, 그리고 커브. 주자가 1, 2루라는 걸 생각하면 상당히 과감한 볼 배합이야. 킴은 볼 배합에 강점이 있는 투수인 것 같군.’
슉!
공이 큰 호를 그리면서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누가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는 커브.
투 스트라이크에 몰린 타자가 참지 못하고 배트를 냈다.
“스윙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헤슬러는 공을 포구한 뒤 재빨리 일어나 1루와 2루 주자를 송구 모션으로 견제했다.
그것을 본 주자들이 재빨리 베이스로 귀루했다.
원 아웃 주자 1, 2루.
상황은 조금 전보다 분명 나아졌다.
하지만 김민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다음 타자가 4번 타자 알폰소, 내 기억이 맞다면 첫 타석에서 알폰소를 볼넷으로 내보낸 뒤 5번에게 적시타를 맞았을 거야.’
그는 이번만큼은 알폰소를 볼넷으로 내보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4번 타자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싱글A 수준. 긴장할 필요는 없어.’
김민은 자신감 있게 초구를 뿌렸다.
탁!
알폰소는 초구를 3루 쪽으로 당겨 파울을 만들어 냈다.
김민은 알폰소의 배트 스피드와 스윙 궤적을 보곤 볼 배합을 바꾸었다.
‘선구안은 뛰어나지 않지만 컨택 능력은 좋은 것 같군.’
러그너스 더그아웃은 3번 타자가 삼진을 당했음에도 여유가 있었다.
“알폰소의 배트 스피드가 좋군.”
“3년 안에 메이저리그에 올라갈 겁니다.”
“2라운드 21번이던가?”
“22번이었습니다.”
알폰소는 코칭 스탭의 예언대로 3년 만에 메이저리그 그라운드를 밟았다.
하지만 그의 재능은 딱 거기까지였다.
이후 5년 동안 그는 트리플A와 메이저리그 25인 로스터를 넘나들며 자리를 잡지 못했다.
김민이 알고 있는 알폰소의 마지막은 일본에서 용병으로 뛰었다는 것이었다.
따악!
두 번째 공도 파울.
김민은 주심으로부터 새 공을 받은 뒤 호흡을 조절했다.
‘빠른 배트 스피드, 좋은 컨택. 90마일(145km) 패스트볼로는 무리야. 녀석은 안쪽이든 바깥쪽이든 다 쳐 낼 거야. 커브나 체인지업을 던져…… 아니야. 녀석에게 홈런 맞은 공은 분명 커브였어. 커브는 힘들어. 체인지업도 마찬가지고.’
20년 전 기억이 그의 볼 배합을 멈추게 만들었다.
그가 멈칫하자 헤슬러가 타임을 요청했다.
“무슨 일인가?”
“사인이 맞지 않는 모양입니다.”
헤슬러는 주심에게 적당히 핑계를 대고 마운드로 올라갔다.
“킴, 무슨 일이야?”
김민은 헤슬러의 물음에 글러브로 입을 가렸다.
“잠깐 생각할 것이 있어서.”
“킴, 지금은 경기 중이라고.”
“알고 있어.”
“집중해. 여기가 승부처야.”
원 아웃 1, 2루.
배터박스에는 4번 타자.
여기가 승부처라는 사실은 야구 선수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김민이 던지듯 물었다.
“헤슬러, 오늘 내가 던진 볼 중에 어떤 게 가장 좋았어?”
헤슬러는 1, 2초 정도 생각한 뒤에 대답했다.
“3번에게 던진 초구가 가장 좋았어.”
“가운데 몰린 공이었는데도?”
“공 끝이 좋았거든.”
김민은 헤슬러의 대답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그래 바로 그거야.’
그는 헤슬러에게 조금 더 다가가 다음 공을 이야기했다.
헤슬러는 김민의 말을 듣곤 깜짝 놀랐다.
“하이 패스트볼을…… 그걸 던질 수 있는 건가?”
“던질 수 없더라도 던져 봐야지.”
타자 눈높이로 날아오는 하이 패스트볼.
메이저리그 정상급 투수들에게는 어렵지 않은 공이었지만, 마이너리그 투수들에게는 제구가 쉽지 않은 공이었다.
헤슬러는 김민이 미더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를 믿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좋아, 그걸 던져. 내가 받아주겠어.”
헤슬러가 홈플레이트로 돌아가자 경기가 재개되었다.
“플레이볼!”
김민은 2루 주자와 1루 주자를 번갈아 체크하곤 투구에 들어갔다.
‘한가운데 높은 코스.’
손끝을 떠난 공이 미트를 향해 화살처럼 날아갔다.
슈육!
알폰소는 눈높이로 날아오는 공을 보곤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볼인가? 아니, 칠 수 있다.’
따악!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공이 외야로 날아갔다.
김민은 높이 날아가는 공을 보면서 눈을 크게 떴다.
‘그 높은 공을 쳐 내다니, 알폰소는 괴물인가?’
알폰소는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하지 못했지만, 메이저리그에서 뛸 수 있는 재능을 가진 타자였다.
그는 배트 스피드만으로 김민의 하이 패스트볼을 외야로 밀어 냈다.
그러나 외야로 공을 보낸다고 해서 모두 안타나 홈런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우익수 브로던이 빠른 발을 이용해 알폰소의 타구를 잡아냈다.
“나이스 캐치!”
헤슬러가 목소리를 높이면서 팀의 사기를 높였다.
“이것으로 투 아웃이군.”
틴캡스 감독은 김민이 투 아웃을 잡자 톰슨을 불펜에서 철수시켰다.
“위태위태하긴 해도 1회는 어떻게든 막을 것 같습니다.”
알폰소 다음으로 타석에 들어선 것은 5번 타자 존슨.
그는 20년 전 김민에게 2루타 두 방을 선사한 선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