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리스타트 02
김민은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 전부터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자꾸 부르고 있었다.
“일어나! 도착했다고!”
눈을 뜨니 톰슨이 여전히 그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꿈에서 꿈을 꾼 건가? 이게 무슨 상황이지? 설마 꿈이 아닌 현실인가?’
그가 멍하게 있자 투수 코치가 다가와 말했다.
“킴, 몸이 좋지 않으면 빨리 이야기를 해! 그래야 선발을 바꾸지!”
김민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몸이 안 좋은 건 아닙니다.”
“그럼 뭐야?”
“잠이 조금…….”
“밤새 TV를 본 모양이군! 그런 식이면 마이너리그를 벗어날 수 없어! 똑바로 하라고! 이곳은 정글이야! 그런 자세로 어떻게 메이저리그에 도전한단 말인가? 동양인 어드밴티지가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해!”
인터넷이 광범위하게 퍼지기 직전 시대.
숙소에서 할 수 있는 건 TV와 잡지 그리고 비디오 게임뿐이었다.
투수 코치의 잔소리가 다시 쏟아졌다.
“혹시 숙소에 비디오 게임을 들여놓은 것은 아니겠지? 우리 팀에 그런 선수가 있다고 믿고 싶지 않네. 그런 걸 다루는 선수는 절대 메이저리그에 올라갈 수 없어. 킴, 내 말 알아들었나?”
투수 코치 도렐은 삼십 대 중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긴 소리를 늘어놓았다.
김민은 도렐의 잔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나도 선수들에게 저렇게 잔소리를 많이 했을까? 아니지, 적어도 난 저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던 것 같아.’
그는 코치의 잔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았다.
도렐의 잔소리가 끝나자 주전 포수 헤슬러가 다가왔다.
“킴, 오늘 패턴은 A야.”
패턴 A는 팀에서 사용하는 사인 패턴 세 가지 중 하나였다.
마이너리그팀에서 사용하는 패턴답게 패턴 A는 페이크가 적고 암기가 편했다.
“오케이. 패턴 A.”
헤슬러가 다시 한번 확인하듯 말했다.
“패턴 A니까 실수하지 말라고. 그리고 지난번 투구 때처럼 던지면 곤란해.”
김민은 미간을 좁혔다.
“지난번?”
“드래곤즈와 경기 말이야. 1과 2/3이닝 3실점 2회 강판. 기억 안 나?”
20년 전 경기를 어떻게 일일이 기억한단 말인가?
김민이 혀를 차려는 순간 헤슬러가 말했다.
“그리고 4번 알폰소를 조심해. 녀석의 배트는 상당하다고.”
알폰소.
어찌 그 이름을 잊을 수 있을까?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김민은 알폰소를 잊지 못했다.
‘빌어먹을…… 꿈이라면 제대로 악몽이군. 하필 알폰소를 상대로 던지는 날이었다니.’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곤 톰슨에게 고개를 돌렸다.
“후…… 톰슨, 오늘 며칠이야?”
“킴, 자기 등판 날짜도 몰라? 4월 11일이잖아.”
“2000년?”
“그래 2000년. 이상한 소리 자꾸 할 거야?”
김민은 다시 한번 속으로 혀를 찼다.
‘그래, 악몽이라면 이쯤은 돼야겠지.’
2000년 4월 11일.
김민은 토론토 블루제이스 산하 마이너리그팀 러그너츠를 상대로 등판했다. 그리고 2이닝 7실점으로 무너졌다.
3회 말 4번 타자 알폰소에게 3점 홈런을 맞은 게 결정적이었다.
이날 투구는 그의 야구 인생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경기가 끝난 다음 감독이 버스 뒤로 부르는 건가? 쳇…… 그 장면에서 딱 잠이 깨겠군. 역시 꿈이었어.’
김민은 악몽에서 빨리 깼으면 싶었다. 그러나 꿈은 그의 생각보다 길고 생생했다.
* * *
“경기 전 식사는 라커룸이 아닌 복도다.”
선수들이 얼굴을 찡그리면서 코칭 스탭에게 불만을 제기했다.
“또 복도입니까?”
“여기 라커룸은 너무 작아서 식사까지는 무리야.”
마이너리그, 그것도 하위 싱글A에서 좋은 대우를 바라는 것은 사치였다.
복도에 놓인 것은 우유와 오렌지 주스 그리고 딸기잼과 푸석한 빵이었다.
힘을 써야 하는 운동선수들에게 턱없이 부족한 식사였다.
하지만 마이너리그 원정 경기에서는 이것도 감지덕지했다.
김민은 빵을 입에 넣고 다시 한번 볼을 꼬집었다.
이번에도 아팠다.
‘무슨 꿈이 이리 현실감이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꿈이 아닌 것 같았다.
선수들의 움직임과 주변의 공기.
모든 것이 꿈과는 거리가 멀었다.
김민은 손을 뻗어 톰슨의 뺨을 꼬집었다. 그러자 톰슨이 화를 내며 죽일 듯 쏘아보았다.
“아얏! 뭐 하는 거야!”
“나 좀 한 대 쳐 주라.”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당일 선발 투수 몸에 손을 대는 동료가 어디 있어!”
“그럼 볼이라도 꼬집어 봐.”
톰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킴, 미친 거야?”
“어서.”
톰슨은 마지못해 김민의 뺨을 꼬집었다.
“아악…….”
그는 변화구가 뛰어난 투수답게 손가락 힘이 상당했다.
‘눈물이 날 만큼 아프다는 건…… 꿈이 아니라는 뜻이군.’
꿈이 아니라면 20년 전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설마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날 줄이야.’
김민이 놀라고 있는 사이 투수 코치 도렐이 복도에 들어섰다.
“투수조는 5분 안에 식사를 마치고 불펜으로 집합한다.”
투수조 고참 트릭스가 코치의 지시에 이마를 찌푸려 말했다.
“식사하고 바로 준비운동입니까? 이러다가 소화 불량 걸리겠습니다.”
“오늘은 이동 거리가 많아 쉴 시간이 없다. 불평은 메이저리그에 올라간 뒤에 해도 늦지 않는다.”
탁!
도렐은 트릭스의 말을 막은 뒤 문을 닫고 사라졌다.
잠시 뒤 톰슨에 김민에게 말했다.
“쳇, 자기는 소고기 패티가 들어 있는 샌드위치를 먹겠지.”
소고기 패티가 들어 있는 샌드위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20년 전으로 돌아왔다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었다.
김민이 톰슨에게 물었다.
“톰슨, 패턴 A는 어떤 식이었지?”
“어떤 식이냐니? 첫 번째 손가락 숫자에 따라 구종을 정하고…….”
김민의 머릿속에서 20년 전 기억이 살아났다.
“손가락 하나에 포심 패스트볼, 둘에 체인지업, 셋에 투심 패스트볼이나 슬라이더.”
“맞아. 그리고 두 번째 사인은 페이크.”
“오케이. 고마워.”
톰슨이 김민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말했다.
“너 오늘 좀 이상하다.”
“뭐가?”
“하루 사이에 영어가 유창해졌어.”
김민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가? 꾸준히 노력한 덕분이겠지.”
2000년 4월 11일이라면 미국에 온 지 2년째.
당시 김민의 영어 실력은 손짓 발 짓을 섞어 간신히 의사를 표현하는 정도였다.
구단 스탭이나 선수들과 자유롭게 대화를 하게 된 것은 마이너리그 4년 차부터였다.
마이너리그에서 익힌 영어는 코치가 된 후 큰 힘을 발휘했다.
용병 투수들은 그의 유창한 영어에 엄지손가락을 세우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