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리스타트 01
서울 시내 어느 골목길.
지글지글 익어 가는 불판 곁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김 코치, 정말 엿 같은 세상 아닌가?”
장순형은 2군 타격 코치로 김민과 입단 동기였다.
“정말 팀을 떠나야 하는 건 최홍 그 뭣 같은 인간이라고.”
최홍은 호크스의 감독이자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그는 지도자로서 무능했지만, 선수 시절 경력과 오너의 후원, 팬들의 지지가 있어 은퇴 5년 만에 호크스 감독으로 승진했다.
장순형은 호크스 투수진을 망가뜨린 원흉이 바로 최홍이라고 주장했다.
“인간 백정이지. 투수들을 그렇게 굴리니…….”
“막지 못한 내 잘못도 있어.”
장순형이 격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람이 그렇게 좋기만 하니까! 총알받이가 된 거야!”
김민은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비흡연과 절주.
이 두 가지는 그가 마이너리그 시절부터 지켜 온 습관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장순형이 김민에게 물었다.
“박종덕, 그 자식 봤어?”
“종덕이가 왜?”
박종덕은 2군 투수 코치로 김민의 5년 후배였다.
“자네 후임으로 내정되었다는군.”
“경력 7년이니까. 1군에 설 때도 됐지.”
“아니, 이 사람! 자넬 뒤에서 민 게 바로 박종덕이야! 오너와 술자리에서 자네가 투수진을 망쳤다고 그렇게 말했단 말일세!”
김민은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박종덕이 기회주의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쉽게 인연의 끈을 놓아 버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내게 투구폼과 밸런스에 대해 묻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사람 일이란 모르는 것이군.’
배신감을 넘어 혐오감마저 들었다.
김민은 잔을 내려놓곤 장순형에게 고개를 돌렸다.
“믿을 수 있는 말인가?”
“믿을 수 있지!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장순형은 김민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지만, 그처럼 무뚝뚝한 사내는 아니었다. 처세술에 한해서 그는 김민보다 몇 수는 위였다.
“…….”
“오해하지 말라고, 우연히 불려 간 자리야.”
“누가 뭐라고 했나.”
장순형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김 코치, 우리 같이 경력이 없는 사람들은 라인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어. 이해해 주게.”
경력이 없다.
10년 동안 선수들을 지도한 것이 경력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 장순형이 말하는 경력은 다른 것이었다.
처세술에 뛰어난 그가 1군 코치가 되지 못하는 이유.
선수 시절 경력.
장순형은 1군 경력이 거의 없는 2군 출신 코치였다.
사람들은 장순형이 프로야구 코치가 된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말하곤 했다.
김민도 이 부분에서는 내세울 게 별로 없었다.
7년 동안 마이너리그를 전전한 뒤, 국내로 유턴.
이후 이렇다 할 활약 없이 3년 만에 은퇴.
어깨 부상이라는 변명 거리가 있었지만, 선수 시절 커리어가 부족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김민이 물었다.
“내가 호크스에서 삼관왕이라도 했다면 사정이 달라졌을까?”
장순형은 김민의 물음에 목소리가 커졌다.
“물론이지! 자네가 호크스 프랜차이즈 스타였으면 이미 오래전에 감독 자리를…….”
김민이 장순형의 말을 자르며 술을 따랐다.
“최소한 이렇게 잘리진 않았겠지.”
“그래, 이런 일로 잘리진 않았겠지. 제길 첫 단추를 잘못 끼워서 그래.”
“자넨 항상 그러더군. 잘못 끼운 첫 단추라고 말이야.”
“난 투수에 소질이 없었어. 그런데도 20대를 몽땅 공 던지는 데 쓰고 말았지. 그게 아니었다면 훨씬 일찍 1군에 데뷔했을 테지.”
장순형은 구단 사정에 의해 입단 후 투수로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그의 투구는 프로 레벨과 차이가 컸다.
그가 프로 1군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타자로 전향한 뒤였다.
“난 어디서 단추를 잘못 끼운 걸까?”
“자네는 내가 보기에 호크스에 입단한 게 문제야. 다른 구단에 갔으면 그렇게 어깨가 망가지지 않았을 거라고.”
입단 첫해 김민은 89이닝을 던졌다.
이닝만 따지면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가 불펜 투수라는 사실이었다.
불펜 투수의 89이닝은 선발 투수의 180이닝 이상.
게다가 경기 수도 다른 불펜 투수에 비해 많았다.
어깨에 과부하가 걸리는 것은 당연했다.
“돌핀스에 갔으면 나았을 거야.”
“돌핀스라. 불러 줬다면 갔겠지. 하지만 돌핀스는 투수가 넘치는 팀이었다고. 그리고 야구에 만약은 없어.”
“나도 알아. 그래도 이런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다고.”
술자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장순형이 너무 빨리 취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김민은 장순형을 택시에 밀어 넣은 뒤, 문을 닫았다. 그리곤 앞으로 가서 택시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했다.
“구의 사거리 부탁합니다.”
택시 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구의 사거리, 알겠습니다.”
잠시 뒤, 긴 배기음과 함께 택시가 사라졌다.
혼자가 된 김민은 숙소로 향했다.
딸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한기가 느껴졌다.
10년째 혼자 사는 원룸.
한기가 느껴지는 건 당연했다.
투둑.
김민은 옷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쓰러졌다.
‘잘못 끼운 단추라. 호크스 입단보다는 어린 나이에 미국행이 아니었을까?’
그는 잘못된 선택에 관해 더 생각해 보려 했지만, 술기운을 이길 수 없었다.
눈을 감자 그대로 잠이 쏟아졌다.
* * *
“킴, 킴. 일어나!”
김민은 귓전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소리에 눈을 떴다.
“누, 누구야?”
상대는 영어로 묻고 있었지만, 김민의 대답은 한국말이었다.
질문은 던진 쪽이 당연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뭐라고 하는 거야? 영어를 쓰라고.”
김민은 눈을 비비고 일어나 상대를 살폈다.
“톰슨?”
붉은 수염에 붉은 머리카락.
20년 전 그의 룸메이트였던 브래들리 톰슨이었다.
‘저 친구는 꿈에서도 영어를 쓰나? 하긴 저 친구가 한국말을 쓰는 걸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거겠지.’
김민이 영어로 바꾸어 말했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냐고? 네가 오늘 원정 경기 선발이잖아. 정신 차리라고.”
‘선발? 내가?’
꿈에서 선발 투수로 나서는 것인가?
김민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들은 힘들 때 군대 다시 가는 꿈을 꾼다고 하던데. 난 마이너리그 시절 꿈이군. 그런데 꿈치고는 너무 생생하군.’
그의 마이너 시절은 군대 못지않았다.
계약금을 부모님께 모두 보낸 그는 배트 하나 사는데도 고민을 하고, 햄버거 하나 사 먹는 것도 계산해야 하는 가난한 마이너리거였다.
‘투수라서 배트가 많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다행이었지. 포지션이 타자였다면 정말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김민은 몸을 일으킨 뒤 주섬주섬 유니폼을 입기 시작했다.
‘정말 꿈 맞나? 촉감이나 다른 감각이 너무 현실적이야.’
바로 그때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킴! 킴! 어디 있나!”
화들짝 놀란 톰슨이 김민을 대신해 대답했다.
“일어났습니다! 나갑니다!”
“어서 나오라고 해!”
감독은 말을 남기곤 멀어져갔다.
아마도 버스를 타려는 모양이었다.
톰슨이 곁에서 김민을 재촉했다.
“세면은 됐고, 어서 신발이나 신어.”
“오케이. 오케이.”
김민은 잠이 덜 깬 표정으로 방을 나왔다. 그리곤 숙소 앞에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올랐다.
그가 버스에 오르자마자 투수 코치가 영어로 잔소리를 쏟아 냈다.
“그런 정신으로 어떻게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오르겠다는 거야! 자기 선발 경기조차 챙기지 못하는…….”
김민은 잔소리 대부분을 알아들었지만, 모르는 척 고개를 숙였다.
‘꿈치고는 대사도 찰지고, 설마 꿈이 아닌 것 아니야?’
그는 톰슨 옆에 앉은 뒤 볼을 꼬집어보았다.
‘제길…… 아프잖아. 꿈에서는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던데 거짓말이었던가?’
김민은 두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다시 눈을 뜨면 아침이겠지. 마이너리그 시절 꿈은 사양이라고.’
이윽고 구단 버스가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