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행복해!
며칠 후, 정서원이 입원해 있는 동안 신청했던 친자 검사 결과가 우편으로 날아왔다. 서진우는 그 서류를 먼저 펼쳐보지 않았다. 이상현에게도 서류가 도착했으니 그가 퇴근한 저녁에 함께 뜯어보자는 합의 때문이었다. 덕분에 정서원은 우편이 도착한 아침부터 내내 서류가 있는 서재에서 떠나지 못했다.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서진우가 웃으며 지켜본다.
“왜? 뭐 또 혼날 짓 했어?”
“아, 아니이. 그냥…….”
“그럼 혼날 짓 할 생각 중이야?”
속내를 들킨 정서원이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문다. 정말 서진우가 자리를 뜨기라도 하면 서류를 찢든지, 숨기든지, 태우든지, 어떻게든 보지 못하게 할 궁리를 하고 있었던 탓에 딸꾹질까지 나오고 말았다.
“아니, 나, 그냥, 진우랑 같이 있고 싶어서…….”
“응, 그랬어?”
“으응…….”
정서원은 뒤늦게 변명을 붙였지만 서진우는 귀엽게 봐 주기만 할 뿐 믿는 기색은 아니었다. 책상에 턱을 괸 채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눈빛에 찔리는 구석이 많은 정서원만 작아진다. 정서원은 제게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이 오늘처럼 부담스러운 적은 처음이었다. 그가 면피용으로 갖고 왔던 육아 책을 집어 들었다.
“나…… 책 볼래, 진우야.”
“그래, 그럼 방해하면 안 되겠네?”
“……응.”
그런데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다. 정서원은 울상이 되어 먼저 고개를 돌렸다. 재미도 없고 흥미도 없는 책은 당연히 읽히지 않았고 페이지는 계속 같은 곳에 멈춰 있었다. 가끔씩 서진우를 힐끗거리던 정서원은 그때마다 눈이 마주쳐 결국엔 감시하는 것도 포기해야만 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울적해진다. 그리고 불쑥 불안해졌다.
‘진우 애가 아니라고 나왔으면 어떡해……. 흑.’
눈물이 찔끔 샜다. 정서원은 서진우가 보기 전에 얼른 눈물을 닦고 책에 집중하는 척을 했다. 얼른 진우가 자리를 뜨면 좋겠다. 전화라도 오면 좋겠다. 평소에는 지겹게도 전화를 걸어 서진우를 떨어뜨려 놓더니 오늘은 왜 이리 조용한 건지 모르겠다. 초조한 맘은 얼마 가지 못했다. 늘 이 시간에 낮잠을 잤던 탓에 졸음이 꾸벅꾸벅 찾아들기 시작한다. 소파에서 한참 기회를 노리던 정서원은 깜빡깜빡 졸다가, 기어코 고개를 툭 떨군 채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침대 위였다. 잠에서 깬 정서원은 화들짝 놀라 창밖부터 확인했다. 가을을 넘긴 하늘이 벌써 캄캄해져 있었다. 못해도 여섯 시는 훌쩍 넘긴 시간인 것 같았다.
“어, 어떡해애…….”
눈물이 펑펑 샘솟았다. 아직 서류도 못 숨겼는데, 방법도 못 찾았는데…… 침대 위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그는 복도에서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 몸을 바싹 굳혔다. 두려움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정서원은 서둘러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척을 하기로 했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슬리퍼를 신은 발은 사뿐사뿐 소리를 내며 조용히 다가와 침대에 멈춰 섰다. 웅크리고 누운 자리가 살짝 출렁인다. 옆자리에 앉은 서진우가 정서원에게 말을 걸었다.
“형, 더 잘 거야?”
“…….”
“일어나서 같이 봐야지.”
“…….”
“형.”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정서원을 채근한다. 그가 다정할수록 정서원은 희망이 몽글몽글 샘솟았으나, 곧 그러다가도 아주 무섭게 굴 수 있다는 걸 깨닫고는 서글퍼졌다. 눈물이 나서 밖에 나갈 수가 없었다.
정서원이 답이 없자 서진우가 덮은 이불을 조심스럽게 걷는다. 이불을 붙잡고 부질없는 반항을 하던 정서원은 결국 서진우를 대면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맡 조명을 켠 서진우가 눈매를 접어 웃었다. 그의 손이 푹 젖은 눈가를 훑었다.
“왜 울었어.”
“……그냥…….”
“그냥 울었어?”
“……응…….”
서진우가 정서원을 끌어안고 등을 쓸어 준다. 정서원은 울 것 같은 걸 간신히 참고는 서진우에게 폭 안겼다.
“나가자. 응? 형도 궁금했잖아.”
“……싫어, 안 볼래…….”
“봐야지 형이 안심할 거 아냐. 지금도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등을 쓸던 손이 머리카락을 정돈해 준다. 상황이 이러니 불안한 맘에는 그 정도 다정함이 마치 튼튼한 동아줄처럼 느껴졌다. 정서원은 서진우를 붙잡고 응석을 쏟아 냈다.
“……진우야. 안 보면 안 돼? 나, 난 안 볼래…….”
“어차피 알게 될 텐데 왜 그렇게 고집을 부려. 응?”
“무섭단 말야……. 흑, 진우야아…….”
약한 척, 힘든 척, 여린 척. 온갖 척을 해도 서진우는 웃기나 할 뿐 정서원을 봐주지 않았다. 눈물을 닦아 주고 젖은 눈가에 키스를 해 주면서도 결국에는 거실로 이끌었다.
서진우의 손을 꼭 붙잡은 채로 거실로 나오자, 그곳엔 이미 이상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운 흔적이 역력한 얼굴을 보고는 아주 안타까운 듯 탄식했다.
“왜 그렇게 울었어요. 치과 가기 싫은 어린애도 아니고.”
흑. 정서원은 작게 딸꾹질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어렸을 때 그는 치과 가기 싫다고 고집 부린 적 없는 착하고 의젓한 아이였다. 그리고 이것과 그것은 결이 달랐다. 억울하여 항변하고 싶었지만 괜히 입을 열었다간 울음이 샐 것 같았다. 얌전해진 그를 서진우가 소파에다 앉힌다. 서진우는 맨다리에다 담요도 펼쳐 주고 그의 품에다 쿠션도 안겨 주었다. 이상현이 웃으며 빈정거렸다.
“네가 확인하고 나서도 그렇게 다정해야 하는데.”
“너야말로 딴말하지 마.”
“무섭네. 서원 씨 데리고 어디 도망가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
사나운 둘 사이에서 정서원만 잔뜩 위축된다. 내리깔린 속눈썹이 불안하게 깜빡거려진다. 둘이 싸우지 않고 아주 온건한 상태에서 서류를 확인하고, 자신도 어떤 결과든 아주 온건한 상태로 보존되길 바랐다. 서진우의 아이인 게 최선이었지만 아니라면 최소한 혼은 나고 싶지 않았다. 화를 내는 서진우는 너무나 무서웠다.
이상현과 서진우는 다행히 이미 서로 말도 섞기 싫어하는 터라 더 빈정거리지 않았다. 대신 서류 봉투가 꺼내졌다. 정서원을 사이에 두고 앉은 둘이 조용히 봉투를 연다. 정서원은 질끈 눈을 감았다.
‘……너무 무서워…….’
봉투가 찢기는 소리, 종이가 스치는 소리, 팔락거리는 소리가 잇따라 났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어느 쪽에서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정서원은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고개를 들어 보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들과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왜, 왜요……?”
무슨 일이지, 다들 왜 이러지? 둘을 바라보던 정서원은 소파 테이블에 펼쳐진 종이로 눈을 돌렸다. 이상현의 결과표와 서진우의 결과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어, 어어……?”
정서원은 믿기지 않아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그래도 적힌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 어느 표를 보아도 ‘친자 확률’ 옆에 적힌 숫자가 터무니없이 낮았다. 친자 확률이란 게 이렇게 낮을 수 있는 건가? 원래 이렇게 낮은 숫자가 나오나? 이 경우는 둘 다 10%도 안 되는데 그럼 더 0.1%라도 더 높은 쪽이 애 아빠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이건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당황하여 입만 벙긋거리는 그에게 이상현이 부드럽게 눈을 맞춘다.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시선을 맞추는 이상현은 늘 그렇듯 웃고 있었으나 그게 진심이 아니란 것쯤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서원 씨, 혹시 우리 몰래 만나는 남자 있었어요?”
“아, 아니에요. 진짜 아니에요. 저, 저 안 그랬는데…….”
“잘 생각해 봐. 혹시 모르잖아, 형?”
“지, 진우야, 진짜 아니야. 나, 나 그런 적 없어. 진짠데…….”
나오는 목소리가 달달 떨렸다. 쿠션을 붙잡고 있는 손도 떨렸다. 정서원은 무섭고 당황스러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먹이기 시작했다. 믿기지 않았지만 과학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유전자를 하나하나 대조해서 나온 수치인데 잘못됐을 리가 없었다.
‘진짜, 다른 사람 앤가……? 정말 그런 건가?’
애를 밴 시기는 서진우에게 잡혀 감금당해 있던 때였다.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지만 정서원은 겁에 질려 엉뚱한 가능성을 열고 있었다.
‘내가 다른 사람이랑 자 놓고 잊은 걸 수도 있어…….’
밝히고, 정조 관념 없이 아무에게나 다리를 벌리는 걸레 같은 오메가가 자신이었으니 그럴 수도 있는 것 같았다. 또 페로몬에 취해 누굴 다리 사이로 끌어들여 놓고 깜빡 잊었던 걸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 무서워졌다. 차라리 이상현의 애였던 게 나았다. 전혀 다른 사람의 애라니, 이상현도 탐탁지 않아 하는 서진우가 그 와중에 다른 사람을 만났던 걸 용서해 줄 리가 없었다. 숨이 턱 막혔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흑, 흐윽! 어, 어떡해애…….”
“서원 씨, 진짜 아니에요?”
“아, 아아닌, 것 같은, 흑! 데에. 모, 르겠, 흐윽, 어요…….”
“확실하게 말해 봐. 진짜 아니야?”
“진우, 집에, 흐윽! 있, 있을 때라, 아닌, 것, 같은데, 흑! 근데, 결과가, 이래서어…….”
딸꾹질이 서럽게 이어진다. 정서원이 원래 눈물이 많기 했지만 이토록 서럽게 우는 건 몹시 드문 일이었다. 그는 양손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 가며 대답하다가 서진우의 품으로 당겨졌다. 다정한 손짓과 익숙한 체취가 불안한 속을 천천히 달래 준다. 그 품에서 한참 울고 있자니 문득 이상현이 입을 열었다.
“내가……. 네 샘플을 바꿔 놓긴 했는데.”
“미친 새끼야, 그딴 짓을 왜 해? 이러니까 결과가……. 아, 돌겠네.”
“혹시 너도 손댔냐?”
“…….”
정서원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두 남자의 얼굴에 낭패가 가득했다. 겨우 잦아들었던 울음이 다시 오르느라 입매가 떨린다. 그러니까, 둘 다 서로의 샘플에 장난을 쳐 놓고, 막상 제 아이가 아니자 가장 그럴싸한 가능성은 미뤄 놓은 채 다른 남자를 의심한 거였다. 정확성이 전혀 없는 결과를 가지고 말이다.
“흑! 흐앙, 너무해…….”
정서원은 자신에 대한 신뢰도가 한없이 0에 가깝다는 걸 깨닫고는 더욱 서러워지고 말았다. 그런데 자신마저 스스로를 의심했다는 사실이 더욱 서글퍼 결국에는 목 놓아 울음을 터뜨렸다. 울수록 서러워져 눈물이 끊이질 않았다. 정서원은 저를 임신시켜 놓고 믿어 주지도 않은 서진우와 이상현이 너무 미워 안아 주고 달래 주는 둘을 마구 때렸다. 몇 달간 기운이 다 빠져 솜방망이 같아진 주먹이 둘의 가슴을 때리고 밀친다.
“으아앙……! 흑, 흐앙! 어떻게, 흑, 그래애……!”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 응?”
“싫어, 미워, 진짜 싫어어……. 흐앙, 흐아앙……!”
“미안해, 진짜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형.”
한참 울던 정서원은 결국 화살을 자신에게로 돌렸다. 다 자기 탓이었다. 조금만 더 의젓했으면, 인내심이 있었다면, 애초에 다른 남자들과 잠자리를 가지지 않았다면……. 서진우든 이상현이든 다른 남자를 먼저 떠올리는 경우는 없었을 것이다. 하도 문란하게 놀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고 자업자득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해도 억울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 덕에, 정서원은 다음에 제대로 된 검사 결과가 도착했을 때는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 * *
“형, 정말 여기 있을 거야?”
정서원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서로가 보는 앞에서 샘플을 밀봉하고, 또 함께 우편을 보낸 뒤 일주일이 지나 결과가 도착했다. 서럽게 울던 정서원에게 퍽 미안했는지 서진우와 이상현은 그간 전에 없이 다정히 굴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충격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전에 없이 서럽기는 정서원도 마찬가지였다.
“알았어. 그럼 쉬고 있어. 좀 이따 올게.”
웅크린 이불 위를 쓰다듬어 주던 서진우가 몸을 일으킨다. 그가 방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정서원은 속으로 십 초를 센 뒤 슬그머니 침대에서 일어났다. 정말 방에 혼자 남게 되자 그는 곧장 문부터 걸어 잠갔다. 사실 서러운 것도 서러운 것이었지만 결과를 알고 싶지 않은 맘이 제일 컸었다. 이번에는 아예 변호사 입회하에 확인하는 거라 더 무서웠다.
“……흑.”
침대에 앉은 채 다리를 달랑거리던 정서원이 훌쩍 울음을 삼킨다. 나날이 불러오기 시작해 이제는 거의 산달이 다가오는 배는 무서울 만큼 커다랬다.
처음에는 너무나 좋아하는 서진우에게 싫다는 말을 할 수 없어서, 다정해진 서진우가 너무 좋아서, 또 괜히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다가 오해를 살까 봐. 아무 말도 못 하고 배 속에 애를 키워 왔었다. 그 결과 더 무서운 일이 생기고 말았다.
‘그냥 그때 지우자고 할걸……. 애 낳기 싫다고 할걸.’
전에는 어이없는 결과 때문에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정말 서진우의 아이가 아니었을 때를 생각하면 몸이 떨렸다. 다정하던 서진우가 삽시간에 차가워질지, 아니면 계속 다정한 척이나마 해 줄지. 막막한 앞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무서워진다.
‘진우가 날 버리면 이상현 씨가 정말 거둬 줄까?’
제 애가 아니라며 화를 내는 진우에게 매달렸다가 내쳐지고, 부른 배를 끌어안은 채 길거리를 방황하는 상상까지 끝마친 정서원은 또 다른 상상에 빠져들었다.
‘자기 애니까, 거둬 주지 않을까…….’
정서원은 이제 이상현의 집에서 쌍둥이를 키우다가 그와 함께 초등학교 입학식에 가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마흔이 얼추 된 이상현을 떠올려 보던 정서원은 문득 우울해졌다. 그때쯤 되면 서진우도 새로운 오메가를 만나 결혼을 준비하고 있을 것 같아서였다. 정서원은 기껏 닦아 낸 눈물이 다시 샘솟아 결국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흑, 흐응…….”
무섭고 불안하고 초조해서 죽을 것 같았다. 한참을 울고 있는데 느닷없이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철컥철컥, 문소리가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화들짝 놀란 정서원이 허둥지둥 발을 굴린다.
“형? 자는 거야?”
똑똑, 이번엔 노크 소리가 난다. 정서원은 너무 무서워져서 어디로든 숨고 싶어졌다. 급한 발걸음이 창가로 향했다가 아득한 야경이 펼쳐진 걸 보고는 주춤주춤 물러난다. 도망가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울먹거리던 그가 커다란 옷장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움직였다. 배가 불러 뒤뚱거리는 몸이 스스로 옷장으로 들어선다.
“형, 들어갈게.”
서진우는 열리지 않는 문과 굳이 씨름하지 않았다. 마스터키를 가져온 그가 정서원이 잠가 놓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선다. 불이 밝혀진 방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정서원이 이불을 뒤집어쓴 채 시위하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서진우는 당황도 않고 정서원이 숨은 곳을 단번에 찾아냈다.
옷장 앞에 다다른 그는 덩그러니 놓인 슬리퍼 한 짝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닫힌 문에 삐죽 나온 옷을 보니 웃음까지 샜다. 찾지 말라는 건지, 찾아 달라는 건지. 그는 곧장 옷장 문을 열었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정서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 진우야아…….”
정서원이 부른 배를 감싼 채로 결국 눈물을 쏟기 시작한다. 서진우는 웅크린 정서원의 앞에 마주앉으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문은 왜 잠가 놨어. 옷장엔 왜 숨어 있고. 나 꼴도 보기 싫을 만큼 미웠어?”
“흑, 아니, 아니이…….”
“왜 그렇게 울어. 응? 나 속상하라고 그러는 거야?”
다정한 손길이 눈물이 흐르는 족족 거둬 간다. 정서원은 푹 젖은 눈으로 서진우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떨리기만 하는 입술에 서진우의 입술이 닿았다.
“누구 앤지 알게 되는 건 무서우면서 옷장에 숨는 건 안 무서워?”
“싫어…… 나, 나 안 들을래……. 말하지 마…….”
서진우는 제게 꼭 매달리는 몸을 부드럽게 안아 주었다. 듣기 싫다며 펑펑 울면서도 말하려는 입을 막느라 계속 입을 맞춰대는 정서원은 필사적이기까지 했다. 그 모습이 아주 귀엽고도 안쓰러워서, 서진우는 더 끌지 않고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내가 우리 애들이라고 했잖아. 왜 안 믿었어.”
책망하는 줄 알았던 정서원은 서진우를 한참 바라보다 전혀 다른 얘기임을 깨달았다. 눈물이 매달린 눈이 크게 떠졌다.
“……우, 우리, 애야……?”
“응, 우리 애들이래. 그러니까 그만 울어.”
“지, 진짜로, 진우 애, 맞아?”
“그래. 형 배에, 우리 애들 자라고 있는 거 맞아.”
한순간에 긴장이 풀렸다. 서진우에게 꼭 매달려 있던 몸이 카펫이 깔린 바닥에 풀썩 주저앉는다. 울음기 가득한 얼굴에 안도가 차오른다. 서진우의 품에 안겨서도 내내 달달 떨리던 몸이 그제야 잦아들기 시작했다. 임신을 안 순간부터 가슴속을 내리누르고 있던 근심이 말 한마디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진우 애가 맞았다, 결국 우리 애가 맞았다. 어물어물 웃던 그는 너무 안도한 나머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흐윽, 흑! 흐아앙…….”
서진우는 그를 끌어안고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못 믿어서 미안해, 내가 미안해애.” 울음마다 나오는 사과에 설움이 잔뜩 배 있다. 서진우는 펑펑 우는 얼굴을 닦아 주고, 뽀뽀해 주고, 또 안아 줬다가, 살며시 눈을 맞췄다. 그러고는 제 옷자락을 꼭 붙들고 있던 손을 잡았다. 곧게 뻗은 손가락에 반지가 닿았다. 서진우는 얌전한 손에다 반지를 끼워 주었다.
“나중에 주려고 했는데 형이 너무 울어서 지금 줘야겠다.”
“이, 흑! 이거, 뭐, 뭐야……?”
딸꾹질을 터뜨리는 그를 보며 서진우가 웃는다.
“응. 약혼반지.”
“약혼, 반지……? 왜, 왜 주는 거야……?”
“나랑 결혼하기 싫어?”
“결혼? 나, 나랑, 흑! 결혼, 할, 거야?”
아직도 얼굴에 울음기가 가득하다. 왜 자신과 결혼하겠다는 건지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인 것 같기도 했다. 서진우는 조금 어이가 없고 우스워서 우는 얼굴을 붙잡고 시선을 마주한다. 젖은 눈에 온통 자신이 담겼다. 맹목적인 시선이 맘에 들어 그는 젖은 눈꺼풀에다 나란히 입을 맞춰 주었다.
“결혼도 안 하고 애를 키울 순 없잖아.”
“그, 그치만, 나, 흑! 나 말도, 안 듣고, 나쁜 짓만, 했는데…….”
“이제부터 말 잘 듣는다면서. 거짓말이었어?”
“아니! 아니이…… 흑, 그치만, 나, 또, 또 나쁜 짓할까 봐…….”
서진우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만 울어, 응?”
정서원이 입을 벌렸다가 얌전히 다물었다.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서진우는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아이도 서진우의 아이였다. 내내 복잡하게 꼬여 있던 질문이 한꺼번에 풀어졌다. 가슴에 뜨끈뜨끈한 것이 차오르고 있다. 정서원은 얼굴에 번지는 웃음을 막을 수 없었다. 그가 환하게 웃었다.
“으응…….”
* * *
서진우에게 안겨 거실로 나오자 이상현이 보였다. 그는 변호사를 먼저 돌려보내고 정서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 아이임을 재차 확인한 서진우는 기분이 나아졌는지 ‘세컨드’ 따위의 고집은 너그럽게 봐주었다. 울음기가 걷힌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손길도, 다소 짜증스러워하면서도 못 본 척해 주었다.
“얼마나 울었으면 얼굴이 이래요?”
이상현은 발개진 얼굴을 만지며 웃음을 터뜨렸다. 친자 검사가 끝이 났는데도, 이상하게 여유로운 태도였다. 정서원은 너무 울어 무거워진 눈꺼풀을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서진우 애란 게 그렇게 기뻤어요?”
“……네에…….”
“목소리도 다 쉬었네. 적당히 좀 기뻐하지 그랬어요.”
얼굴을 어르던 손이 살그머니 내려와 손을 붙잡는다. 이상현은 유독 검지를 집요하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가 잡은 손끝에다 입을 맞추었다. 길게 내리깔렸다가 다시 올라가는 속눈썹이 손가락에 닿았다. 간지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 정서원이 잡힌 손끝을 움찔거리자 이상현은 눈을 마주한 채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때까지 이걸 어떻게 참지.”
의미를 알 수 없는 혼잣말을 하던 이상현이 불현듯 정서원의 뺨을 붙잡는다. 그러더니 짧게 입을 맞췄다. 너무 잠깐이어서 키스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이상현은 서진우가 정서원을 품에 숨기기도 전에 선뜻 물러났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그저 인사라기에는 지나치게 함의적인 어조가 나긋나긋하게 흘러든다. 부드럽게 웃는 얼굴이 처음 보는 것처럼 어색했다. 정서원은 서진우의 품에 갇힌 채로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
………….
…………….
천장이 높은 홀에 샹들리에가 눈부시게 반짝인다.
호텔에서 열린 피로연은 가까운 친인척들만 모이는 자리였음에도 많은 인원이 모였다. 애를 낳은 뒤로는 집밖으로 나가지도 않던 정서원은 이렇게 사람이 모이는 장소가 불편하고 힘들었다. 아침부터 자리에 맞게 꾸미고 입느라 몸이 피곤하기도 했다. 이상하게 보이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내내 온몸에 막을 덧씌운 기분이었다. 부담감이 목줄이 되어 숨통을 조였다. 서진우의 옆만 따라다니며 한마디도 않고 웃는 흉내만 냈는데도 어질어질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정서원이 숨을 헐떡거리자 서진우가 부드럽게 어깨를 끌어안는다. 남들에게 보이지 않게 가려 주는 것임을 알기에 정서원은 얌전히 고개를 묻었다. 익숙한 체취가 울렁이는 속을 그나마 달래 주었다.
“형, 많이 힘들어? 오늘 너무 일찍 일어났지.”
“……으응…….”
“애들은 나중에 내가 데리고 갈 테니까 들어가서 쉬어.”
흘깃 시선을 올리니 돌도 안 지난 아이들이 한복을 곱게 입은 채로 부모님의 품에 안겨 있었다. 오늘은 부모님이 데리고 가시지 않을까? 진우와 둘만 있고 싶었다. 애들을 보던 시선이 곧장 서진우에게로 돌려진다. 올려다보는 눈에 아까와는 전혀 다른 절절함이 맺혔다. “진우야, 같이 가 주면 안 돼?” 소곤소곤 조르는 목소리는 언뜻 울적함을 머금고 있기도 했다. 슬픔을 못 이기고 조르긴 했지만, 서진우가 곤란한 표정을 짓자 정서원은 곧장 괜찮다며 말을 바꿨다. 서진우가 시무룩한 얼굴에다 입을 맞춰 주며 달랜다.
“미안해. 지금 가시는 분들 배웅해 드리고 금방 갈게. 응?”
“……응…….”
혼자 있긴 싫은데……. 정서원은 우울하고 슬프고 아주 서럽긴 했으나 서진우를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품에서 한참 미적거리며 서진우를 곤란하게 만든 그는 결국 혼자 자리를 떴다.
정서원은 홀을 빠져나와 미리 잡아 두었던 호텔 방으로 들어섰다. 타이를 풀어 헤치고 단추도 몇 개나 풀어 놓았다. 그래도 모자라서 미니바에 있는 생수 한 통을 다 마셨다. 침대에 누워 숨을 몰아쉬고 있자니 답답증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불안하게 쿵쾅거리던 가슴이 천천히 제 속도를 찾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바깥이 무서워졌는지 모르겠다. 속이 울렁거려서 도망가고 싶고 어디론가 숨고 싶어졌다. 서진우 없이 혼자 밖에 방치되었을 때는 5분도 못 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서진우는 그걸 산후우울증이라 표현했지만 정서원이 느끼기에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피곤한 몸이 침대에 포근하게 녹아든다. 금방 쏟아지려던 잠은 갑자기 울린 초인종에 멀리 달아났다. 서진우가 온 모양이다. 정서원은 서둘러 현관으로 향했다.
“진우야…….”
그는 곧장 문을 열고 너른 품으로 기어들었으나, 몸에 감기는 사소한 감촉이 달랐다. 고개를 올리니 예상치도 못했던 인물이 서 있었다. 이상현이었다.
“잘 지냈어요?”
갑자기 사라지니까 걱정돼서 따라왔어요, 다정하게 속삭인 이상현이 정서원을 살짝 안았다가 놓는다. 약혼식 자리에서 한 번, 가족 식사 자리에서 한 번 보긴 했었지만 개인적으로 만난 건……. 딱히 처음이 아니긴 했다. 정서원은 조금 놀랐다가 금세 진정했다.
“이상현 씨…….”
“누군지 확인도 안 하고 문 여는 습관 좀 버려요. 나쁜 사람이면 어쩌려고?”
객관적으로 ‘나쁜 사람’인 전적이 있는 이상현이 선한 눈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정서원을 끌어안고 안으로 들어섰다. 밀착한 몸에서 익숙한 체취가 흐른다. 정서원은 나른함을 못 이기고 품에 기대었다. 피로연에 참석하러 왔었는지 이상현은 평소보다 격식 있는 차림새였다. 화려하던 넥타이, 시계, 구두 모두 클래식한 디자인으로 바뀌어 있었다. 정서원은 멍하니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진우 금방 온다고 했어요.”
“내가 그 새끼 얼굴이나 보자고 온 줄 알아요?”
“아…….”
하긴, 사이도 안 좋은 진우를 굳이 보러 올 필요가 없다. 반들반들 잘생긴 구두코를 구경하던 정서원은 제 얼굴을 진득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이상현이 눈웃음을 쳤다.
“오늘 예쁘게 하고 왔네요. 나 가슴 떨리게.”
“……아, 진우가…….”
“서진우가 골라 줬어요?”
기다란 손가락이 풀어 헤쳐진 옷깃으로 기어든다. 정서원은 간지러워 고개를 돌렸다. 긴장하며 숨을 삼킨 탓에 빗장뼈가 도드라졌다.
“아흐…… 네에. 진우가 골라 줬……. 앗.”
“신랑이 입혀 놨다고 하니까 더 벗기고 싶어지네.”
“으응, 안 돼요……. 진짜, 금방, 온다고 했는데…….”
정서원은 나른하게 풀리는 몸을 이상현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버텼다. 이상현의 손이 속살을 건드릴 때마다 쾌감이 번진다. 학습된 것처럼 몸이 절로 열렸다. 주춤주춤 물러나던 그는 결국 침대에 쓰러졌다. 피로연 날 갓 결혼한 신부를 침대에 눕히고 신랑이 입혀 놓은 옷을 벗기는 손은 배덕을 한껏 즐기는 듯 퍽 느긋하다. 정서원에게서 달뜬 숨이 터진다. 이러면 진짜 안 되는데…… 흐느끼던 그가 셔츠 단추를 배꼽까지 풀던 손을 붙잡고는 이상현을 올려다본다.
“안 돼, 진짜 혼나요…….”
“내가 대신 혼나 줄게요. 당신 무섭게 못 하게. 응?”
“거짓말…… 앗!”
이상현은 정서원의 손을 내치지도 않은 채로 기어코 단추를 다 풀어 냈다. 그러더니 양손으로 천천히 앞섶을 벌린다. 드레스셔츠가 어깨를 지나 팔뚝까지 걷히면서 향긋하게 여문 속살이 드러났다. 아이를 낳은 몸은 더 부드럽고 손에 뿌듯이 차올라 기분 좋게 감기는 맛이 있었다. 아직 젖이 도는 가슴도 부푼 그대로였다. 품에 고개를 묻으니 예전보다 훨씬 진해진 젖내가 풍겼다. 이상현이 참지 못하고 이를 세우자 정서원이 고개를 젖히며 길게 흐느꼈다.
“오늘 당신 봤을 때부터, 이러고 싶은 걸 얼마나 참았는지 몰라요. 서진우 옆에서 온갖 얌전은 다 떠는데 뒤로는 딴 놈 좆이나 받다가 친자 검사까지 했던 거 사람들이 알면 얼마나 놀라겠어. 응?”
“으응응…… 싫어…….”
무르익은 몸은 건드리는 대로 봉오리를 터뜨리듯 활짝 열렸다. 정서원은 제 몸 곳곳에 쾌감을 새겨 놓는 손길에 정신없이 헐떡였다. 안 되는데, 진우가…… 아, 근데, 너무 좋아. 이성과 욕망 사이를 한 번 오갈 때마다 몸에 두르고 있던 것들이 하나둘씩 벗겨졌다. 타이, 드레스셔츠, 팬츠. 어느덧 속옷 한 장까지 다 벗겨진 정서원은 오늘 나눈 결혼반지 하나만 손가락에 두르고 있었다. 정서원이 결혼반지가 반짝거리는 손으로 이상현에게 매달렸다.
“그만해요…… 안 돼, 흑. 진우 화나면 무섭단 말예요…….”
“신혼 방에서 붙어먹는 것도 아닌데 속 좁게 화를 내겠어요?”
“으응, 허락 받아야…… 안 돼, 거기 만지지…… 아아앙.”
하얀 몸 군데군데에 열이 피어오른다. 정서원은 이상현의 몸 아래 깔린 채 허리를 비틀었다. 정신이 몽롱해져 갔다. 억지로 부여잡고 있던 이성은 아래를 문질러 줄 때마다 깜빡거리며 점멸하기를 반복했다.
“흐앙, 앗, 아응…….”
이상현이 하반신을 꼭 붙인 채로 허리를 움직이기라도 하면 눈앞이 하얘졌다. 안 돼, 하지 마, 그만…… 습관처럼 조잘거리던 말이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이성이 점점 짧아졌다. 뒤척이던 몸은 어느새 뒤를 완전히 내주고 있었다. 젖어든 안에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싶어서 애가 탄다. 얼얼한 감각이 안쪽을 맴돌고 있다. 이상현은 싫다는 그를 기어코 나신으로 만들고 이리 달뜨게 해놓고도 직접적인 애무를 해 주지는 않았다. 흑, 정서원이 설운 숨을 토했다.
“상현 씨이, 저, 어떻게, 좀…….”
“진우 올 때까지 참는다면서요? 허락 받아야 된다고. 응?”
“그치만, 그치만…….”
참지 못하고 애원을 쏟아 내기도 전에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정서원은 깜짝 놀라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다. 뭐라도 한 장 입고 싶었지만 이상현이 몽땅 바닥에 떨어뜨려 놓아서 그럴 수도 없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소리가 들릴수록 발끝이 조여들고 깨문 입술이 떨렸다. 또 들키고 또 혼이 날까 겁이 나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이상현이 웃으며 지켜본다. 정서원만 홀딱 벗겨 놓은 그는 당장 피로연장에 다시 내려가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말끔했다. 그래서 서진우가 침실로 들어섰을 때도 웃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서원 씨, 당신 남편 왔네요.”
정서원이 이불을 뒤집어쓴 채 나오지 않자, 그는 꼭 포장해 놓은 선물을 열어 주듯 이불에 감겨 있던 정서원을 서진우에게 내보였다. 꼭 감겼던 이불이 떨어지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이 훤히 드러난다. 이상현은 긴장하여 뻣뻣하게 구는 새신부를 직접 코치까지 해 주었다.
“뭐 해요? 새신랑 오셨으니까 예쁘게 반겨야죠.”
“아, 흐앙…… 안 돼, 싫어어.”
그의 싫다는 말처럼 신뢰가 가지 않는 말도 없을 것이다. 이상현은 달아나려는 정서원을 가뿐히 품에 안더니, 움츠러드는 다리를 잡아 펼쳐 주었다. 삐딱하게 선 채 말없이 지켜보는 서진우에게로 발갛게 달아올라 푹 젖은 속살이 열렸다. 정서원은 어쩌지도 못하고 서진우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닿는 것만으로도 달뜬 안에서 찔끔 물이 흘렀다. 피로연에 참석하느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려입은 모습도 너무 좋아서 숨이 떨렸다. 조금 전까지 안겨 있던 저 품에 매달리고 싶어서 애가 탔다. 발끝이 꼭 오므라든다.
“미치겠네.”
힘들어하던 정서원을 달래 주려 급히 올라온 서진우가 짧게 한숨을 토한다. 그러더니 이상현을 노려본다.
“어른들 다 계신 날에 무슨 짓이야. 돌았어?”
“그래서 기다려 줬잖아. 응? 진우야, 속 좁게 굴지 좀 마. 서원 씨 무서워하는 거 안 보여?”
서진우와 눈이 마주치자 정서원은 아랫배에 쾌감이 움찔 튀었다. 허락도 없이 나쁜 짓을 해서 걱정이 되는데도 무작정 안겨서 조르고 싶은 욕심이 치밀었다. 벌어진 다리가 달달 떨렸다. 이상현은 제가 놓았음에도 다물리지 않는 몸을 어르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서원 씨, 진우 화났는데 풀어 줘야죠.”
정서원이 더듬거리며 서진우에게로 기어간다. 침대 밑으로 내려가, 격식 있는 정장에다 구둣발도 여전한 남자 둘 사이에서 발가벗은 채 네발로 기었다. 네발을 움직일 때마다 엉덩이가 살살 흔들렸다. 정서원은 개와 진배없는 꼴로 서진우의 발치까지 기어가서는 단단한 다리에다 얼굴을 비벼댔다. 울먹이는 눈이 서진우를 보며 허락을 구하고 있다. 떨리는 입술은 무얼 하고 싶은지 자꾸만 벌어졌다 다물리길 반복한다.
“진우야아…… 나, 하고, 싶, 어…….”
“이상현이랑 둘이 붙어먹고 싶다고, 형?”
“아니, 아니이…… 진우랑, 셋이…….”
다리에 감겨 있던 손이 슬그머니 바지춤에 닿았다. 정서원은 손바닥에 스치는 감촉에 눈물까지 떨어뜨렸다. 너무 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뭐든 하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을 정도로 애가 닳아 눈물이 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말 ‘신부’로서 존중받고 예쁨 받았던 정서원이 스스로 꼬리를 살랑거리며 납작 기어 순종한다. 답답한 벨트를 풀어 주고 속옷에 갇혀 있는 자지를 꺼내 편안하게 해 주고 싶었지만, 아직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충동을 겨우 참은 그는 단단한 사타구니에다 뺨을 대고 코를 묻으며 서진우의 허락을 간절히 빌었다.
“오늘 너무 힘들었는데……. 나, 싫은 것도 참고, 열심히 했는데…….”
“그래서.”
“흐윽, 으으응. 진우야아……. 제발, 나 힘들어어…….”
“똑바로 말해야지, 서원아.”
코끝에 제 알파의 진한 체취가 스며든다. 정서원은 얼굴에 닿는 존재감만으로 엉덩이가 흠뻑 젖어들었다. 짓궂게 대답을 피하는 서진우가 원망스러우면서도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달달 떨리는 입술이 되는 대로 줄줄 애원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서원이 보지가, 젖어서…… 미끌미끌해서어, 닦고 싶은데, 손이 안 닿, 아요…….”
“그럼 어떻게 해 줄까?”
“진우, 여보 자지로, 서원이 보지에 푹푹 넣어서…… 넣어서, 흑, 기분 좋게에…… 아, 아니이, 깨끗하게, 닦아 주세요……. 응?”
“서원이 보지 더러워져서 닦아 줘야 돼?”
“응응, 진우가 닦아 줘야 돼…….”
서진우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정서원은 제 머리를 쓰다듬는 손을 느끼면서도 서진우가 혹시나 변덕을 부려 혼도 내지 않고, 상도 주지 않을까 무서워졌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애교를 부렸다. 다리에 꼭 매달려서는 단단해진 사타구니에다 쪽쪽 입술까지 맞췄다.
“진우야아……. 응? 제발, 여보…….”
그러잖아도 짧았던 인내심은 꾸준한 자각으로 외려 더욱 짤막해졌다. 원래 난 그랬으니까, 쉽게 벌리고 쉽게 주고, 너무 밝혀서 아무나 끌어들이니까…… 원래 스스로 그런 존재라고 깨우치니 맘이 편했다. 참을 필요도 없고 구태여 아닌 척할 필요도 없었다. 잘 조르기만 하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황홀해졌다. 기분이 좋아졌다. 내내 몸을 휘감고 있는 울적함도 단번에 날아갔다.
정서원은 제 몸을 안아 드는 서진우에게 양팔로 매달렸다. 몸이 침대에 내려앉았고 누구 것인지 모를 손길이 민감한 부위를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숨이 찼다. 기분이 간질간질하여 웃음이 자꾸 샜다. 금세 쾌락에 취한 정서원이 다리를 벌리며 어물어물 미소를 지었다.
“아기집에 아기씨 잔뜩, 뿌려 주세요…….”
눈물이 맺힌 눈꼬리가 예쁘게 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