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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좋아, (12/20)

12. 좋아,

“이게…… 뭐예요?”

정서원은 대뜸 내밀어진 핸드폰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꼭 할 말이 있다며 서진우 몰래 빈 방으로 끌고 오더니 웬 핸드폰인지 모르겠다.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자 이상현이 갑작스레 품으로 끌어당겼다. 밀착된 몸에서 기분 좋은 향기가 난다. 밀어내려던 정서원은 배꼽 근처를 간질이는 페로몬이 좋아 얌전히 품에 기대었다.

“서진우가 폰도 안 돌려줬다면서요. 이거 써요.”

“별로…… 쓸 일이 없는데요. 연락할 사람도 없고…….”

“하긴. 당신 친구 없을 성격이긴 하죠.”

“…….”

“서진우야 손이 덜 가긴 했겠네요. 서원 씨 갑자기 사라져도 찾을 사람이 없잖아.”

대체로 멍한 성격인 그가 이상현에게만 날을 세웠던 것이 모진 말솜씨 덕이었다는 걸 깜빡했다. 얌전하던 정서원이 눈을 치켜뜨자 이상현이 낮게 웃음을 터뜨린다. 이상현은 멀어지려는 그를 품에 가두며 관자놀이 부근에 입을 맞추었다.

“농담이에요. 삐치지 말고요. ……응?”

“……안 삐쳤어요.”

“입술은 삐죽 내밀고선. 그럼 이건 뽀뽀해 달라는 거예요?”

“아닌…….”

항변을 내놓을 새도 없이 입술이 부딪친다. 이상현은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달아나려는 허리를 붙잡았다. 눈을 마주친 채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는 이상현에게서는 장난기 한 점 느껴지지 않는다. 색욕이 번들거리는 눈빛이었다. 급변한 분위기에 주눅이 든 정서원이 유순히 입을 벌리자 뜨거운 혀가 파고들어 민감한 속을 건드려댔다.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입으로도 느낀다며 숱한 조롱을 얻어먹었던 몸답게 어김없이 쾌감이 치민다. 이상현이 구석구석 핥고 빨 때마다 붙잡힌 허리가 움찔거렸다. 찌릿찌릿하게 피어오르는 쾌감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정서원은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이상현을 피해 주춤주춤 물러났으나 얼마 못 가 그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정서원을 이상현이 잡아먹을 듯 노려본다.

“하아, 아…….”

“아…… 서원 씨. 그렇게 봐도 못 해 줘요. 우리 애들 다치면 어떡해.”

“……그렇게, 안, 봤어요…….”

“그렇게 본 건 어떤 건데. 으응?”

이상현은 제게 매달린 정서원을 가뿐히 끌어당기며 물었다. 허리를 감싸던 손은 어느덧 엉덩이 근처를 맴돌고 있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양손으로 엉덩이를 움켜쥐며 자신에게로 끌어당긴다. 밀착된 하반신에서는 그간 수없이 물고 빨아 어떤 방향으로 휘었고 핏줄은 어떻게 돋아나는지 선명한 물건이 잡혔다. 서진우가 바로 옆방에 있는데, 쾌감이 치밀고 그보다 더한 욕구가 치밀어 눈물까지 고였다. 꾹 다물린 입술이 덜덜 떨렸다.

만지고 싶어. 빨고 싶어. 넣고 싶어…… 더 진하게 문지르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노골적인 희롱을 피할 여력이 없다. 벌써 열이 오른 아랫도리에 딱딱한 것이 문질러진다. 눈앞이 새하얗게 튀는 느낌이었다. “응? 말해 봐요.” 선물로 주겠다던 핸드폰을 소파에 대충 던져 놓은 이상현이 코끝이 닿는 거리에서 속삭인다. 느른한 목소리가 혀처럼 귓바퀴를 핥아 내린다. 귀가 약한 정서원을 제대로 알고 노린 애무였다. 정서원은 온몸에 찌릿찌릿하게 번지는 쾌감이 좋아 결국 그의 어깨에 깊이 매달렸다.

“……해, 달라고…… 보는 거요…….”

“뭐 해 달라고. 당신이 해 달라는 게 한두 가지여야지.”

“이거, 이거어, 넣어 달라고……. 아! 흐으. 안 돼. 속옷 젖어요…….”

오랫동안 만져 보지도 못한 것이 바로 아랫도리에 닿으니 몸이 곧장 반응한다. 정서원은 의식적으로 허리를 띄우며 뒤를 조였다. 벌써 축축해진 뒤가 미끈거리는 게 느껴져 괜히 숨이 떨렸다. 빈틈없이 밀착해 있던 이상현에게 모조리 전해지는 사소함이었다. 잘생긴 입매에서 다소 짜증 어린 한숨이 샜다.

“아…… 억울해 미치겠네. 서원 씨. 서진우랑 둘이 있을 때 어디까지 했어요? 그 새끼가 진짜 손도 안 대고 놔뒀을 리가 없는데.”

“아, 안 했…… 아으응. 안 했어요.”

“안 했다고? 당신이 그 새끼 안 꼬셨을 리가 없잖아. 보나 마나 해 달라고 울었을 텐데 그 새끼가 가만있었다고? 응?”

“진짠데……. 만지지도, 못하게 하고…… 흑. 빨지도, 못하게 해서…….”

말을 잇던 정서원이 서럽게 입술을 깨문다. 생각해 보니까 정말 억울했다. 임신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닌데, 서진우와 이상현은 원하는 대로 그를 건드리면서도 정작 그가 몸이 달아 졸라대면 절대 안아 주지 않았다. 원치 않은 임신도 짜증 나고, 툭하면 답답한 속도 짜증 나고, 일상생활에서 하나하나 신경 써야 하는 것도 짜증이 나는데 욕구 불만까지 생겼다.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무엇 하나 없어 유리장에 장식된 인형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실제로 그것과 다를 바 없는 처지여서 정서원은 조금 우울해졌다.

“하여간 그 새끼 독해.”

이상현이 엉덩이를 세게 움켜쥐더니 바투 붙었던 몸을 떨어뜨린다. 맞닿았던 중심에서 뜨거운 열이 얼얼하게 돌았다. 정서원은 제 귓가와 목덜미를 입술로 빨아들이는 이상현에게 매달린 채 고개를 옆으로 흘렸다. 간질거리는 쾌감을 피해 물러나다 보니 다리가 소파에 걸리고 말았다. 바로 주저앉은 그에게 몸을 기울인 이상현이 자꾸만 흐르는 고개를 붙잡고 얼굴 곳곳에다 입을 맞춰댄다. 정서원은 집요한 입맞춤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흑, 간지러워요……. 그만…….”

“조금만 더. 응? 내가 나쁜 짓 하자는 거 아니잖아요.”

“으응, 아. 진우가, 화내는데…….”

“글쎄. 별로 화난 것 같진 않은데?”

의미심장한 말에 정서원이 감았던 눈을 뜬다. 맞은편 유리창으로 비치는 문에 서진우가 서 있었다. 심장이 덜컹했다. 당장에 이상현을 밀어내려고 했으나 단단한 몸은 물러나 주지 않는다. 이상현은 오히려 정서원을 붙잡고 목덜미에다 새빨간 흔적까지 남겨 놓았다. 그러다 울먹이는 눈과 마주치자 눈웃음을 친다.

“걱정 마요. 첩이랑 붙어먹는다고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뭐, 정실이 질투를 좀 하긴 하겠네.”

첩이니 정실이니, 이 상황에 무슨 농담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저 화를 낼 서진우가 무서워서 눈물이 대롱대롱 매달렸다. 이상현은 젖어드는 눈가에 몇 번 입을 맞추고는 ‘여기 숨겨 놓을 테니까 나중에 찾아가요.’ 정서원에게만 들릴 정도로만 조그맣게 속삭였다. 정서원은 혼날 걱정에 시달리느라 그게 핸드폰 얘기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필요 없는데……. 입술이 벌어지려다가 만다. 거절할 타이밍도 놓쳐 버렸다. 손가락으로 속눈썹을 슥 훑어 준 이상현이 숙였던 몸을 일으킨다. 서진우가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기어들어서 하는 짓하고는.”

“별짓 안 했는데 억울하네. 우리 서원 씨가 얼마나 정조 관념이 대단한지 쉽게 넘어오질 않아서. 서원 씨 들으면 섭섭하겠다, 진우야.”

“…….”

뻔뻔히 대답하기에는 아직 가라앉지 않은 열이 계속 하반신을 맴돌고 있었다. 정서원은 셔츠를 끌어당겨 아랫도리를 가렸다. 얼마 전에도 그럴싸한 말로 접근해 온 이상현을 믿었다가 혼이 났었는데, 바보같이 또 걸리고 말았으니 서진우를 볼 낯이 없었다.

정서원에게로 다가온 서진우가 소파 등받이에 팔을 올리며 슬쩍 허리를 숙인다. 정서원은 우물쭈물하며 서진우를 바라보았다. 섣불리 변명을 꺼내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하는 눈망울에 설움이 어른거렸다. 허벅지까지 올라간 짧은 반바지 아래로 무릎끼리 부대끼며 발끝을 오므리는 게 훤히 드러났다. 오줌이라도 마려운 것 같은 움직임이다. 정서원은 제 몸을 훑는 시선을 느끼고는 다리를 꼭 오므렸다. 문득 서진우에게서 한숨이 샌다.

“일어나, 형.”

“진우야…… 화, 화 안 났어?”

“화내 주면 좋겠어?”

“아니, 아니…….”

죽 당겨진 셔츠에 살짝 부푼 가슴과 쌍둥이를 품은 둥그런 배가 윤곽을 드러낸다. 정서원은 노골적인 시선이 둘이나 느껴져 괜히 아랫배가 간질거렸다. 몇 달간 제대로 해소한 적 없어 쌓이고 쌓인 제 몸에서 얼마나 진한 페로몬이 흐르는지도 모르는 정서원이 고개를 푹 수그린다. 손으로 짓누르고 있는 성기에서 찔끔찔끔 물이 흘렀다. 진우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나, 저기, 진우야…… 어렵게 입을 여는 정서원의 귓가가 새빨갛게 달았다.

“……못, 일어나겠어…….”

달은 몸 곳곳을 눈으로 샅샅이 만져지는 기분이 들었다. 정서원은 더욱 몸을 옹송그리며 허벅지를 꼭 맞붙였다. 소리 죽여 웃던 이상현이 “잠깐 떨어져 있었다고 네 품이 그립나 보네.”하고 서진우를 향해 놀리듯 덧붙이는 소리가 난다. 정서원은 할 말이 없어 슬리퍼를 신은 발끝만 바라보았다. 문득 시야에 또 다른 발이 잡힌다. 서진우가 얌전히 모인 무릎에다 손을 얹으며 정서원과 눈을 맞춘다. 언제 봐도 수려한 얼굴은 다행히 다정함을 머금고 있었다.

“일어나기 싫어?”

“……미안…….”

“안아 줄까?”

“……응.”

“이리 와.”

허리를 숙여 준 서진우의 어깨에다 팔을 두르자 몸이 부드럽게 떠오른다. 딴딴한 복근에 발기한 성기가 짓눌렸다. 소소한 자극마저 곧장 쾌감이 된다. 흐으, 작게 신음한 정서원이 너른 어깨에다 고개를 묻는다. 자꾸 손이 가게 만드는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소변을 가리는 것도, 식사를 하는 것도, 심지어는 자위조차 서진우의 손을 타는데. 이러다 서진우가 정말 자신을 버리면 어떡하나 걱정이 될 지경이다. 혼자서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서진우나 이상현이 자신을 애 취급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정서원은 화끈거리는 눈가를 서진우의 어깨에 꾹 누르며 더욱 가까이 달라붙었다. 서진우가 그를 안고 밖으로 나가면서 안은 등을 토닥거려 준다. 달랑거리던 발끝에서 떨어진 슬리퍼를 이상현이 들고 뒤를 따랐다.

“서원 씨는 참, 서진우 앞에서만 얌전해지네. 내숭 떠는 거예요?”

“……안 그래요…….”

“진우 몰래 뽀뽀한 게 미안해서 그래요?”

“…….”

서진우는 정서원을 거실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혀 주고 몸을 일으켰다. 지은 죄가 많은 정서원이 울상이 되어 서진우를 붙잡는다. 서진우는 소리 없이 웃고는 옆자리에 앉아 주었다. 정서원이 바로 그 품에 안겨들었다. 당장 곤란한 상황에서 도망가고 싶은 심리가 여실해 보였다. 그 꼴을 지켜보던 이상현은 입매를 비틀면서도 들고 온 슬리퍼를 정서원의 발아래에 놔주었다.

“그럼 다음에는 서진우 앞에서 해요. 진우가 당신 참 예뻐하는데, 뽀뽀 한 번 했다고 다리 풀려서 안기는 거 보면 얼마나 좋아하겠어요.”

“사, 상현 씨이…….”

“그랬어? 저 새끼가 혀를 잘 쓰나 봐? 형 보지도 그렇게 빨아 준 적 있겠네. 응?”

“아, 아니. 진우야, 나…….”

흠칫 놀란 정서원이 품에서 고개를 들며 서진우를 바라본다. 아니야, 안 그랬어. 그냥, 조금, 서 있기가 힘들어서…… 더듬더듬 흘러나온 변명을 듣는 서진우는 약간 웃음을 머금고 있다. 거짓말로도 아니라고 못하는 정서원을 한심스럽게 여기는 것 같기도 하고, 귀엽게 여기는 것 같기도 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는 손길은 여전히 다정했지만 정서원은 불안만 더해져 초조하게 눈을 굴렸다.

“뽀뽀만 했어……. 보, 지…는, 아, 안…… 흑. 안 했는데. 진짜야…….”

“형.”

“으, 응?”

“그냥 입 다물고 있어.”

길어진 머리카락을 발그스름한 귀 뒤로 넘겨 준 서진우가 눈꼬리를 접어 웃는다. 손끝이 칠칠치 못하게 벌어진 입술을 툭툭 건드렸다. “내가 지금 형한테 화내는 거 아니잖아. 괜히 화 돋우지 말라고. 응?” 눈치라곤 하나 없는 정서원은 그제야 서진우가 화났다는 걸 깨달았다. 

‘……화내고 있으면서…….’

정서원이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서진우는 말 잘 듣는 그를 위해 눈가와 콧잔등에 차례로 입을 맞춰 주었다. 이상현에게서 기가 찬 웃음이 터졌다.

“질투 한번 살벌하게 하네.”

“끼지 마.”

“퍼스트께서 그러라면 그래야지. 세컨드가 무슨 힘이 있다고.”

정서원은 끌어안는 손길에 얌전히 몸을 맡겼다. 또 싸우기라도 할 것처럼 분위기가 안 좋다. 주먹질이 오갈까 걱정이 되는데 말을 할 때마다 혼만 나니 무어라 끼어들기 어려웠다. 잘 지내는 것 같다가도 눈만 마주쳐도 살벌해지는 두 사람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기도 했다. 하지만 서진우가 화를 내고 질투를 해 주는 건 좋았다. 아직도 제게 마음이 있다는 방증 같아 가슴이 설렌다. 서진우를 바라보는 눈에 핑그르르 이채가 돈다.

“정서원만 아니었으면, 넌 이 집에 발도 못 들였어.”

“우리 관계는 서원 씨 의견이 가장 중요한 거 아닌가? 서원 씨가 날 그렇게 원하면 네가 포기하는 게 맞지. 진우야.”

“입만 산 새끼라 그런지 존나 잘 짖네, 씨발?”

“아, 때리게? 무섭네. 맞아 줄 테니까 해 봐. 너 감방 들어가 있을 동안 서원 씨는 내가 돌봐줄게. 안심하고. 응?”

둘이 싸우든 말든 초롱초롱한 눈은 내숭 한 점 없는 날것의 표정을 바라보다, 핏대가 선 목을 바라보다, 다시 비틀린 입매를 바라본다. 키스하고 싶다. 진우도 몰래 뽀뽀한 것 때문에 화가 난 거니 뽀뽀해 주면 풀리지 않을까? 정서원이 홀린 듯 손을 뻗어 서진우의 어깨에다 두른다. 그러면서 살짝 끌어당기니 사납기만 하던 얼굴이 풀어지며 정서원에게로 향한다. 정서원은 그 입술에다 가볍게 뽀뽀했다. 다물린 입술을 살짝 깨물기도 하고, 혀로 할짝거리기도 하다가, 눈을 맞춘 채로 혀를 밀어 넣는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거실에 쪽쪽 듣기 민망한 소리만 터진다. 정서원은 입술만 내줄 뿐 딱히 적극적이지 않은 서진우에게 꼭 매달려 정성껏 혀를 섞었다. 혀가 꼭 입 안에 자리한 성기 같았다. 맞닿는 족족 몸이 젖어 등줄기가 잘게 떨린다. 더 닿고 싶어 애가 탔다. 허리가 바싹 세워지고 팔은 더욱 깊숙이 감겨들었다. 어느덧 눈까지 감은 채 키스에 빠져든 정서원이 응응 야릇한 소리를 내어 가며 서진우를 보챈다. 요즘 들어 인내심이 풍전등화 같은 서진우가 너그럽게 받아 줄 리 없는 키스였다. 정서원을 떼어낸 서진우는 또 입을 맞추려 드는 그를 살며시 밀어냈다. 가로막힌 정서원이 몹시 서운한 표정을 짓는다. 뭘 잘했다고 그러는지. 서진우는 어이가 없어 화를 낼 생각도 날아갔다.

“……지금 내가 뽀뽀 때문에 삐쳤다고 이러는 거야?”

“으응…… 아니야?”

“맞아요. 우리 서원 씨 눈치가 많이 늘었네?”

서진우는 긍정하지 않고 이상현만 칭찬을 해 주니 불쑥 불안해진다. 대체로 그가 칭찬하면 되는 일이 없었다. 내가 또 괜한 짓을 했나? 울상이 된 정서원이 서진우의 손을 붙잡고 손가락 하나하나에 쪽쪽 입술을 찍어댄다. 눈치를 보는 눈에 눈물이 대롱거린다. 비위를 맞추겠다고 검지부터 약지까지 입술로 물어대는 정서원은 아주 열심이었다. 가만 지켜보던 서진우가 결국 웃음을 터뜨린다.

“말은 안 듣고, 그런 주제에 혼나는 건 싫고.”

“……잘, 잘못했어…….”

“마음 같아서는 엎어뜨리고 엉덩이라도 때려 주고 싶은데.”

“흐끅…….”

“내가 참아야지 어쩌겠어.”

미소는 늘 그렇듯 다정하고 속삭이는 말투는 나긋하며 그러쥐는 손길은 스펀지처럼 포근하다. 물론 그렇게 햇살 같은 태도로 수없이 혼쭐이 난 전적이 있는 정서원은 쉽게 맘을 놓지 못했다. 허리를 잡아 주는 커다란 손이 괜스레 의식되었다. 정서원은 맞지도 않은 엉덩이가 화끈거리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해졌다. 얼얼한 그 감각이 상상되는데 그게 싫은 건지 그리운 건지 모르겠다.

“나도 서원 씨한테 못되게 굴면 예쁜 짓 해 줄 거예요? 기껏 참았더니 억울하네.”

“얼굴 보고 숨 쉴 수 있는 것도 감사한 줄 알아.”

“아, 너 없을 때 많이 해 주긴 했지. 이거 달라고 입으로 지퍼 내리고 좆 꺼낸다고 낑낑거리는 게 참 귀여웠는데.”

“상현 씨이 제발…….”

갑자기 지목당한 정서원이 애절하게 도리질을 친다. 그래 봤자 반목하는 관계에 평화를 바라기는 어려웠다. 결국 잠자리 얘기까지 번진 대화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간다. 제 헤픈 짓을 말미암아 벌어진 싸움이니 중간에 낀 정서원만 죽을 맛이다. 다 자업자득이라 이상현을 탓할 수도 없다. 애인이 있는 걸 숨기고 이상현을 만난 것도 그였고, 외로움을 달랜다고 서진우 몰래 다른 남자를 끌어들인 것도 그였다. 이상현이 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니까 더 면구스러웠다. 잘못했어, 그러지 마세요, 안 그럴게, 하지 마세요…… 둘 사이에서 쩔쩔매던 정서원은 문득 배를 부여잡고 인상을 썼다. 배가 콕콕 쑤셨다. 책상 가운데에 줄을 그어 놓고 싸우는 애들처럼 유치하게 굴던 이상현과 서진우가 놀라 그를 살폈다. 

“형, 왜 그래? 아파?”

“괜찮아요? 미안해요. 당신 임신했는데, 서진우가 유치하게 굴어도 내가 참아야 했어.”

“으응……. 괜찮아. 조금만 쉬면 될 것, 같은데…….”

“얼굴 창백한 것 좀 봐. 안 되겠다, 이상현 넌 네 집으로 가.”

“하…… 열부 났네. 서원 씨, 괜찮아지는 것만 보고 갈게요. 응?”

와중에 또 싸우고 앉았다. 정서원은 이마를 살살 쓸어 주고 따뜻한 손으로 배를 만져 주는 걸 느끼며 안정을 되찾았다. 불안하던 맘이 가라앉자 복통도 서서히 가라앉는다. 그간 서진우와 이상현이 좋은 것만 먹이며 억지로 건강을 회복시켜 준 덕에 이 정도 스트레스는 큰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정서원은 아픈 척을 계속했다. 

“진우야, 나 누워 있을래…….”

“그래. 알았어.”

“물 갖다 줄까요?”

“……네에…….”

정서원은 속눈썹을 깜빡깜빡하며 눈치를 살폈다. 엄살은 심한 주제에 꾀병은 어설프다. 시선이 얼마나 바쁘게 오가는지 꾀병인 게 한눈에 보일 정도다. 그래도 서진우는 모른 체해 주었고 이상현도 웃기나 할 뿐 따로 말을 얹지는 않았다. 멋모르는 정서원은 더 싸우지 않는 둘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둘 다 빨리 철이 들어서 괜히 싸우지 않았음 싶었다.

* * *

종일 하는 것 없이 서진우가 쳐 놓은 울타리 안에서 영위하는 삶은 오감을 둔하게 만들었다. 위험하다며 손에 쥐는 족족 빼앗아 가니 스스로 무얼 할 수도 없다. 그렇게 몇 달을 길들여진 덕에 무기력이 온몸에 배어들었다. 이제 정서원은 오늘이 며칠이고 무슨 요일인지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어차피 어느 날이든 똑같았다. 서진우가 주는 걸 먹고, 주는 대로 입고, 나가자면 나가는 그런 인생이었다. 시계추가 멎어 버린 것 같은 일상 속에 나날이 부푸는 배만 흐르는 시간을 짐작케 했다.

안정기로 접어들자마자 임신을 한눈에 알 정도로 배가 부풀기 시작했다. 간혹 태동도 느껴졌다. 어떨 때는 온 힘을 다해 발로 뻥뻥 차댄다. 자다가도 눈이 번쩍 떠질 만큼 아플 때도 있어 어느 날은 설움을 못 참고 펑펑 울기도 했다. 

‘진우야아……. 배에, 이상한 거, 흑. 이상한 거 있어…….’

‘애들이 움직여서 많이 놀랐어?’

‘응응, 싫어어…… 흑. 흐으으……. 맨날 속도 안 좋고, 몸도 무겁고, 흑! 이젠, 잠도 못 자고…….’

‘그랬구나. 많이 힘들었어?’

서진우는 어린애 투정 달래 주듯 정서원을 얼렀었다. 정서원은 더 서럽고 억울해서 한참을 펑펑 울었다. 애를 밴 당사자가 아니니 이 고충을 이해할 리가 없었다. 배에 있을 때도 힘든데 출산과 육아는 또 얼마나 고단할지 두려워졌다. 몇 달 후면 맞닥뜨려야 하는 출산이 너무나도 무서워서, 정서원은 이상현이든 서진우든 붙잡고 왜 임신시켰냐며 때리고도 싶었다.

물론, 버림받을까 두려운 정서원은 단 한 번도 그 울증을 꺼내지 못했다. 이상현이 몰래 가져다준 핸드폰으로 중절에 대해 알아보는 게 할 수 있는 일탈의 전부였다. 이렇게 배가 불렀어도 임신을 물릴 수 있다는 사실은 실행 가능 여부와 상관없이 보루가 되어주었다.

침대에 가로누운 정서원이 부푼 배를 매만진다. 달이 찰수록 무서워졌다. 뭐가 무서운지 모를 만큼 몽땅 다 무서웠다. 정서원이 잠은 안 자고 뒤척거리기만 하자 서진우가 뒤에서 끌어안았다. 몸을 감싸는 온기가 불안한 맘을 달래 준다. 

“아직 안 졸려? 책 읽어 줄까?”

“아니…….”

다소 기분이 풀어졌던 정서원은 또 시무룩해졌다. 서진우가 읽어 준다는 책도 어차피 태교를 위한 동화책이었다. 서진우의 모든 다정함은 결국 배 속 아이를 향해 있다. 그러니까, 애를 사랑하는 것이지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었다. 정서원은 더 울적해져서 푹신한 베개에 고개를 파묻었다. 눈물이 찔끔 샜다. 

“그럼 잠들 때까지 토닥토닥해 줄게.”

“……응…….”

큰 손이 부른 배를 천천히 토닥여 준다. 엄마 힘들게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잠이 묻은 목소리는 푹 잠겨 있다. 정서원은 따뜻한 품에 감긴 채로 눈물을 찔끔찔끔 흘렸다. 우는 걸 들키지 않아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다 털어 놓고 투정을 부리고 싶다가도 그런 속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기도 했다. 병원만 가도 임신한 사람 모두 행복해 보였고, 다들 임신하고 싶어 인공수정까지 하는데 행복하지 않은 자기가 이상한 것 같았다.

‘자고 일어났을 때…… 일 년 뒤면 좋겠다…….’

그럼 이 무거운 몸도 가벼워져 있을 테고 무서운 출산 과정도 껑충 건너뛸 수 있을 텐데…… 토닥거리는 손길에 점차 눈이 감긴다. 애를 낳은 뒤에도 진우가 지금처럼 내게 관심을 기울여 줄까? 어렴풋이 의문이 떠올랐다가 가라앉는다. 두 명분을 더 짊어지고 있는 몸은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금방 잠에 들었다. 

한참 푹 자고 있자니 누군가 몸을 두드리는 느낌이 난다. 가슴에 올라앉은 손이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긴가민가하여 한참 미적거리던 정서원은 성기를 붙잡히고 나서야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상체를 바싹 붙이고 있는 서진우가 보였다. 그는 언뜻 순진해 보일 만큼 독기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려다보는 얼굴에 순수한 애정만 그득했다. 그립고 낯선 것이었다.

“형, 괜찮아?”

대가 없는 다정함을 얼마나 오랜만에 느껴 보는지 모르겠다. 정서원은 위화감을 느낄 새도 없이 가슴 뭉클한 애환에 잠겨들었다. 정서원이 입을 다문 채 서진우만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기울였던 몸을 일으킨다. 그러자 아래를 가득 채운 것이 꿈틀대는 게 느껴졌다. 정서원이 허리를 틀며 짧게 헐떡였다. 왜 지금에야 느꼈을까 싶을 정도로 깊숙이 삽입된 성기가 혼몽한 정신을 단숨에 앗아 갔다. 서진우에게로 활짝 열린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찌릿찌릿한 전율이 발끝까지 퍼져 늘어져 있던 오감이 되살아났다.

“많이 아파?”

평소보다 가쁜 숨소리가 애정을 머금고 토해진다. 정서원은 몹시 기꺼웠으나 아무 대답도 내어 줄 수 없었다. 아픔과 쾌감을 동시에 느끼느라 머리가 핑글핑글 돌았다. 비좁은 안을 억지로 벌리고 들어선 성기가 배꼽까지 들어찬 느낌이었다. 압박감에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왜 이렇게 아프지? 이상하다…… 근데, 너무 좋아. 눈물이 방울방울 샘솟는다. 서진우는 그 눈물을 곡해한 듯 당황하여 쩔쩔맸다.

“왜 그래. 아파? 힘들면 그만할까? 응?”

서진우는 대답을 재촉하는 대신 질끈 감긴 눈에다 여러 번 입을 맞춰 주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눈두덩을 감싸고 뜨거운 혀가 속눈썹을 샅샅이 훑으며 눈물을 거둬 간다. 입술이 떨어지자 정서원은 눈을 뜨며 다시 제게로 임해 준 서진우의 어깨에다 팔을 둘렀다. 미려한 얼굴과 달리 단단하게 단련된 몸은 어디를 붙잡든 든든했다. 정서원이 눈물을 삼키며 서진우의 어깨에 고개를 묻는다. 멋대로 열린 입술은 ‘아니야, 괜찮아. 더 해 줘. 계속 예뻐해 줘, 진우야.’ 구차한 애원을 늘어놓았다. 서진우는 그 애원을 기꺼이 들어주었다. 고정한 시선을 단 한 번도 딴 데로 흘리지 않은 그가 천천히 움직인다. 동시에 쾌감이 터졌다.

“형 힘든데…… 미안, 형 안이 너무 좋아서…….”

못 멈추겠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정서원은 낯선 느낌에 숨을 급히 삼켰다. 아래에 가득 찬 성기가 빠져나가고 다시 들어올 때마다 몸까지 통째로 들쑤셔지는 느낌이 났다. 아찔함에 눈앞이 하얘졌다. 묵직한 끝이 깊숙한 곳 어딘가를 건드릴 때마다 잇따라 질린 숨이 터졌다. 그렇게 숨을 토하고 들이쉬는 간격이 점차 빨라진다. 아픈데, 달아오른 얼굴로 자신만 바라보는 서진우가 좋아서 아프다는 투정을 부리기도 싫었다. 그럼 착한 서진우는 바로 그만둘 테니까. 정서원은 제게 체중이 실리지 않도록 팔을 세운 서진우에게 꼭 매달렸다. 갈퀴처럼 손톱을 세워 제게로 끌어당겼다.

문득 울적함을 달래 주던 움직임이 멎는다. 정서원은 애가 닳아 허리가 움찔거렸다. 축축이 젖은 눈으로 서진우를 바라봤으나 그는 움직여 주기는커녕 오히려 성기를 빼내었다. 빠져나간 안쪽에 질척한 잔열만 진득하게 남는다. 서진우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정서원의 아랫배를 만져 주고 있다. 시선을 따라가 보니 납작하기만 한 배가 보였다.

“역시 안 되겠다. 임신 중이잖아, 형.”

“아, 아니야. 진우야, 의사가 나, 임신 어렵다고 했는데…….”

“무슨 소리야? 여기에 이상현 애새끼 배고 있잖아.”

“아니야……. 왜, 왜 그런 말, 해…….”

나 임신 안 했어, 나 그 사람 애 안 뱄어, 진우야…… . 정서원이 팔을 잡아당겼으나 서진우가 다시 그에게 무너지는 일은 없었다. 눈물이 울컥하는 중 부푼 배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이 났다. 존재감을 알리는 것처럼 배를 힘껏 차대서 눈물이 핑 돌 정도다. 너무 짜증이 난다. 정서원은 풍만하게 차올랐던 행복이 빠르게 식는 걸 느끼며 펑펑 울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정말 눈을 떴다.

“……아…….”

눈을 뜨자마자 눈가에 찬 기운이 느껴졌다. 자면서 울었는지 물기도 잡혔다. 눈가를 대충 닦아낸 정서원은 서진우가 옆에 있음에 안도하며 배에 둘러진 손을 잡았다. 굉장히 이상한 꿈을 꿨다. 욕구가 쌓여 몽정을 할 뻔한 것 같은데, 몽정에도 불안한 심리 상태가 반영되는 모양이었다. 결국 뒷맛 찝찝한 여운만 남았다. 서러웠던 기분이 아직도 가슴을 꽉 메우고 있다. 서진우가 깨기 전에 젖은 속옷을 몰래 처리해야 하는데 되찾은 온기가 너무 아늑하여 떨어지고 싶지가 않았다. 정서원은 잠든 서진우의 손에다 입술을 비비며 놀란 맘을 진정시켰다. 몸을 돌려 잠든 서진우를 지켜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흑심이 든다.

“……진우야, 자?”

아침이 밝아 오는지 커튼 사이로 햇빛이 새어 들었다. 곤히 잠든 잘생긴 얼굴에 햇살이 스며들며 하얗게 빛이 났다. 멋대로 부둥켜안고 입술을 문지르고 싶은 충동이 든다. 정서원은 참지 않고 그렇게 했다. 입맞춤에 몰두할수록 서러웠던 맘이 사그라진다. 정서원은 상체를 세우고 고개만 살짝 숙여 아직 자는 얼굴에다 멋대로 입술을 찍어댔다. 이대로 서진우가 깨어나도 상관없을 것 같다. 대담한 맘과는 달리 침대가 흔들리지 않도록 체중을 싣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정서원은 잠깐 입술을 떼어 내고 잠든 서진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여야 들리는 작은 숨소리가 심장을 간지럽힌다. 간혹 잠든 자신을 말없이 지켜보던 서진우나 이상현의 심정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자는 거야……?”

흑심만 가득한 목소리가 개미만 한 크기로 흘러나왔다. 그러니 당연히 대답이 있을 리 없다. 팔베개를 베고 누워 있던 몸은 이제 완전히 일어나 서진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렘이 어른거리는 눈길이 잠든 얼굴을 아로새긴다. 진우는 속눈썹도 길고, 눈썹도 잘생겼고, 콧대도 높고…… 손끝으로 얼굴선을 쓸던 정서원이 천천히 시선을 내린다. 내려가는 시선을 따라 손길도 흘러내렸다. 매끈한 턱에서 뚝, 떨어져 목줄기를 타고 흐른 손길은 단단하게 짜인 근육을 지나 하반신까지 흘렀다. 순간 감탄성을 낼 뻔한 정서원이 억지로 아랫입술을 깨물며 참는다. 

‘……만지고 싶어…….’

발기한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얇은 옷감 아래로 굵직한 기둥과 툭 불거진 선단이 당장 눈에 그려질 듯 선명하다. 꼭 만져 달라고 조르는 것 같다. 건드리고 싶어서 입술이 말랐다. 고민이 많은 손끝이 허리 밴드를 살짝 들었다가 내려놓는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한다. 

‘진우도 쌓이지 않았을까……? 자, 자위…… 하는 것도, 못 본 것 같은데.’

서진우는 온종일 자신과 함께 있었다. 그동안 저처럼 못 참고 자위를 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정서원은 잠깐 자위를 하는 서진우를 떠올렸다가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반듯한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 쾌감에 열중하는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괜히 부끄러워져서 가지런히 놓인 발끝이 조여들었다. 한 번 불이 붙은 상상이 자꾸 야릇한 장난을 충동질한다. 몸 곳곳을 만져 주던 커다란 손으로 발기한 자지를 붙잡아 문지를 서진우를 생각하니 온몸에 열이 마구 돌았다. 몇 달간 한 번 손에 쥐여 주지도 않고 입에 물려 주지도 않았던 자지는 상상 속에서 점점 더 커져 갔다. 아랫배에 지펴진 불이 꺼지지 않는다. 몹시 애가 탔다. 

인내심이 약한 데다 유혹에도 취약한 정서원은 쌓이고 쌓인 욕구가 충동질하는 것을 결국 이겨 내지 못했다. 정서원이 조심스럽게 서진우의 바지를 내린다. 크게 발기한 자지가 속옷 안에 갇힌 채 자기주장을 하고 있다. 꺼내 달라고 호소라도 하는 것 같았다. 넋을 놓고 바라보던 정서원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색욕이 핑그르르 도는 눈동자가 자는 얼굴을 바라보았다가, 다시금 사타구니로 내려온다. 정서원이 마른침을 삼켰다. 

‘조금만, 아주 잠깐만 만지면…….’

머뭇거리던 손끝이 결국 속옷에 닿는다. 기다란 기둥을 여린 손길로 슥 훑은 정서원이 힐끗 서진우를 바라본다. 서진우는 아직 잠에 푹 빠져 있다. 정서원은 참았던 숨을 얕게 토해 내며 속옷 위로 손바닥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딱딱하고, 크고, 뜨겁고, 굵고…… 손바닥에 묵직하게 감기는 촉감이 너무나 황홀했다. 짙게 풍기는 페로몬이 군침까지 돌게 한다. 당장 입에 넣고 빨고 싶어서 입술이 자꾸 헛되게 벌어졌다가 다물렸다. 정서원은 아예 허리를 숙여 부푼 사타구니에다 얼굴을 비볐다. 절제할 틈도 없이 달뜬 숨이 터진다. 간질간질한 전율이 배꼽 아래에서 빙빙 돌았다. 다리 사이가 간질거려서 꼭 모아 놓은 다리가 괜히 꼼질거려졌다. 한 번 만지니 더, 더 욕심이 난다. 

‘……조금만, 조금만 더…….’

정서원은 아주 천천히 서진우의 속옷을 내렸다. 이미 크게 발기한 자지가 속옷에 걸렸다가, 이내 꺼덕거리며 일어선다. 몰래 못된 짓을 하던 정서원은 튕겨 나온 자지에 콧잔등을 얻어맞고 말았다. 그것도 닿은 거라고 너무 좋았다. 정서원은 기립한 자지 기둥을 손으로 붙잡고 얼굴에다 살살 문질렀다. 오랜만에 맡는 진한 체취가 아주 황홀하여 뒤가 축축이 젖어들고 있다. 이렇게 예쁜 걸 왜 감춰 놓고 보여 주지도 않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기둥을 붙잡던 손이 슬그머니 올라가 귀두를 붙잡고 울퉁불퉁한 핏대를 따라 쪽쪽거리는 입맞춤이 이어졌다. 뿌리부터 느긋하게 올라간 정서원은 다시 잠든 서진우를 살폈다. 곤히 잠든 서진우에게 미안했지만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불거진 선단이 둥근 이마를 건드렸다가 손짓을 따라 서서히 내려오더니 결국에는 입술에 삼켜진다. 가장 진한 페로몬이 온몸에 저며드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오르가즘 비슷한 쾌감이 올랐다. 가지런히 모인 발끝이 성취감을 못 이기고 오므라졌다.

‘……진우 자지, 너무 좋아…….’

바지를 내리는 순간부터 입 안에 돌던 군침이 자지를 축축하게 적신다. 정서원은 혀끝으로 귀두부터 샅샅이 핥아 먹었다. 밑동을 붙잡은 채 갈라진 틈을 혀로 할짝거리면 갈급증을 해소시켜 주는 이슬이 떠오른다. 머릿속이 휘발될 만큼 좋았다. 더 진하고 맛있는 걸 먹고 싶어 애간장이 녹아내렸다. 욕심 많은 입술이 더 깊게 삼키려고 살짝살짝 벌어질 때마다 질척한 소리가 잇따라 터진다. 아무리 깊이 삼켜도 모자랐다. 더 근본적인 욕구만 불어나 짧은 인내심이 뚝뚝 끊어졌다. 

정서원은 한껏 자지를 빨아먹으면서도 자꾸만 다리 사이가 콕콕 쑤셔서 발끝을 꾸물댔다. 꼭 맞붙이고 있는 허벅다리가 계속해서 비벼졌다. 뜨겁게 달은 안쪽에 얼얼하게 열이 도는 바람에 애가 닳고 속이 탔다. 목구멍까지 깊숙이 삼켰던 자지를 빼낸 정서원이 함빡 젖은 자지를 얼굴에다 문지르며 숨을 몰아쉰다. 크게 부른 배 때문에 틈틈이 허리를 세워 숨을 돌려야 했다. 계속 입에만 물고 있고 싶은데 영 따라 주지 않는 몸 상태 때문에 몹시 서러워졌다. 정서원은 몸이 불편한 상황에서도 오히려 못된 욕심이 마구마구 피어올랐다. 아직 잠든 얼굴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눈물이 돈다. 자지를 쪽쪽 물고 빠느라 젖은 입술이 하얀 치아에 연신 깨물렸다. 

‘……넣고, 싶은데…….’

입 안에다 문지르는 것도 이렇게 좋은데, 더 깊숙한 안에다 문지르면 얼마나 좋을지. 서진우나 이상현의 기다란 손가락으로도 닿지 않는 안쪽에서 터지는 쾌감이 그리워 눈물이 났다. 자린고비도 아닌데, 감춰 놓고 보여 주지 않는 걸 상상하며 당장의 욕심을 삼켜야만 했던 시간이 사무쳤다. 간혹 셋이 함께 침대에 오를 때면 양손에 하나씩 쥐고 내키는 대로 고개를 돌려 가며 마음껏 핥아먹고 싶은 걸 참느라 손발이 저릴 정도였다. 

정서원은 한 손에 잡히지도 않는 자지를 잡고서는 수렁 같은 욕심과 짤막한 이성 사이에서 갈등했다. 이 기다랗고 굵직한 것이 제 다리 사이를 가르고 들어오는 감각을 수없이 상상해 왔었다. 처음 삽입할 때는 조금 아프지만 서서히 풀어지며 익숙해지면 곧장 눈앞이 아득해지곤 했다. 열이 올라서 뜨겁고, 달떠서 축축한 곳에 자지가 푹푹 드나들며 일으키는 쾌감이 너무나 그리웠다. 굵직한 선단이 깊은 안쪽 어딘가를 건드렸을 때 정수리까지 찌릿찌릿해지는 황홀함도 그리웠다. 떠올릴수록 애가 닳는다. 답이 정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던 갈등은 결국 더 못된 짓을 하는 걸로 결론이 났다. 

‘진우야, 미안해……. 자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조금만, 조금만…… 정서원이 끝도 없는 욕심을 속삭이며 서진우의 위로 기어 올라간다. 곤히 잠든 서진우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샅 위에 올라앉자 절로 신음이 샌다. 푹 젖은 엉덩이에 팔뚝만 한 것이 스쳤다. 살짝 들린 엉덩이가 쾌감과 설렘을 못 이기고 달달 떨린다. 배가 크게 부른 덕에 이젠 집에서 따로 하의를 입지 않아 얇은 속옷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내내 그리던 것이 맞닿았다. 펑퍼짐한 상의를 조금 걷는 것만으로 살결에 바로 문질러지는 느낌이 났다. 가슴이 떨려 죽을 것 같았다. 억지로 세워 놓은 허리가 잘게 떨렸다. 정서원은 무릎을 세운 채로 서진우를 바라보며 스스로 속옷을 걷었다. 미리 벗어 놓을걸, 마음이 너무 급해 생각도 못 했다.

잠든 서진우를 바라보는 얼굴에 발갛게 홍조가 돈다. 정서원은 그에게서 눈도 떼지 못한 채 허리를 들며 서진우의 자지를 붙잡았다. 마음이 급했다. 젖은 엉덩이에다 맞추고 허리를 내려앉히는데 자꾸만 선단이 미끄러진다. 

“……으응응. 앗.”

진우가 깨기 전에 해야 하는데…… 예전엔 잘됐는데 왜 갑자기 안 되는 거야. 정서원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삽입이 속상해서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서진우가 해 주면 좋겠다. 그가 자신의 엉덩이만 잡아 벌려 줘도 잘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서원은 자꾸 헛도는 자지를 붙잡고 몇 차례나 스스로 삽입을 시도하다가 겨우 선단 끄트머리를 삼켰고, 그대로 허리부터 내려앉혔다. 단번에 배꼽까지 꿰뚫렸다. 제대로 풀지 못해 아프고 배꼽 근처가 얼얼해지는 서툰 삽입이었으나 그는 그 삽입만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응! 흐아앙…….”

몇 달 내내 허전함만 감돌던 아랫배가 한순간에 찢어질 듯 팽창한 느낌이다. 글썽글썽 떠올랐던 눈물이 서진우에게로 뚝뚝 떨어졌다. 오랜만의 교합은 강렬한 오르가즘만큼이나 기나긴 여운을 남겨 무너지려는 몸을 세워는 것만도 힘들었다. 정서원은 침대에 겨우 몸을 기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잘 때도 반듯하게 잘생긴 얼굴에다 멋대로 입을 맞추고 여운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몰래 따먹는 처지에는 사치였다. 정서원은 여운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허리부터 놀렸다. 

“흐응, 응…… 우응.”

깊숙이 삽입된 채로 허리를 빙글 돌리자 그토록 애가 닳았던 곳에 단단한 자지가 툭툭 닿으며 쾌감이 터진다. 더 빨리, 더 세게 문지르고 싶었다. 정서원은 팔을 뒤로 짚고서는 다리를 더욱 활짝 벌려 자지를 더욱 깊숙이 삼켰다. 부른 배 때문에 무거운 몸은 홑몸인 때만큼 유연하게 움직이지 못했지만 제 좋은 곳을 겨냥하고 자지를 푹푹 찍어대는 반복 운동은 노련히 해냈다. 활짝 펼쳐진 가랑이에 쓰임새가 없는 예쁜 자지가 흔들리고 더 아래 구멍으로는 큼직한 자지가 연신 드나들었다. 서진우에게 보인다는 생각만 해도 부끄러운 자세였으나, 다행히 그는 깊게 잠들어 있었다. 

“앗, 으응…… 응, ……흐으으…….”

정서원은 거리낄 것 없이 허리를 움직였다. 안쪽 깊숙이 닿을 때마다 눈앞에 별이 튄다. 자꾸 큰 소리가 터지려는 걸 참느라 숨이 찰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허리를 멈출 수가 없었다. 눈물이 차오르는 족족 떨어지고 깨물린 입술에서는 가느다란 신음이 줄줄 샜다. 가장 황홀한 기분에 취해 둔해진 이성은 곧 참는 것도 까맣게 잊고 내키는 대로 헐떡이기 시작했다.

“아응, 아! ……흐앙. 앙. 진우야아 너무, 커……. 흑, 기분 좋아아…….”

멋대로 줄줄 새는 말을 어떻게든 감추고 싶었으나, 양팔은 무거운 몸을 지탱하느라 바쁘고 입술은 신음을 터뜨리기 바빴다. 자지가 푹푹 배꼽까지 찍힐 때면 이성이 절정 근처까지 날아갔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자지가 워낙 굵직하고 길쭉하다 보니 밑동까지 처박지 않아도 황홀해 미칠 것 같았다. 

진우야, 좋아, 나 기분 좋아, 어떡해…… 정서원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든 서진우를 바라보며 허리를 열심히 움직였다. 그제야 자는 서진우에게 못쓸 짓을 하고 있다는 실감이 났지만,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외려 서진우를 보니 더 흥분이 되어 허리를 놀리는 움직임만 더욱 바빠지고 말았다. 정서원은 서진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진우가 알면 실망할 텐데, 내가 이렇게 밝히는 줄 알면 경멸할 텐데…….’

그런 사소한 걱정으로는 치미는 욕정을 불식시키지 못했다. 이대로 멈추기에는 기분이 너무 좋다. 몇 달간 벌어진 적 없는 비좁고 깊은 안쪽까지 채워 주는 덕에 야릇한 충만감마저 느껴진다. 좋아, 너무 좋아…… 혀끝에 달짝지근한 소리가 맴돈다. 입꼬리를 꾹 잡아당겨 소리를 참으려고 해도 참을성 없는 입술은 제 헤픈 다리처럼 자꾸만 벌어지려 들었다. 떨리는 입술 사이로 할딱거리는 소리가 연신 새어 나왔다. 푹 젖은 곳을 퍽퍽 쑤시는 통에 질척질척 야릇한 마찰음도 끊이질 않았다. 

“으아앙……! 흑, 아앗……!”

잘생긴 얼굴은 딸감으로, 그만큼 잘생긴 자지는 제 자위용으로 사용하던 정서원이 문득 자지러지는 신음을 터뜨린다. 언뜻 닿은 안쪽에서 터진 짜릿함에 온몸이 떨렸다. 그는 더 참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멋대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앗! 아앙, 아……! 좋아, 진우야아…… 힉! 기분 좋아아…… 흐앙!”

눈물을 뚝뚝 흘리는 눈은 황홀경을 몸소 형상화한 것 같았다. 눈물에도 형체를 입힐 수 있다면 발갛게 무르익은 하트가 뚝뚝 떨어지고 있을 것이다. 정서원은 점차 몰래 하고 시치미를 뚝 떼려던 당초 의도를 상실해 갔다. 몇 달을 그토록 애타던 쾌감이 족족 터지니 흐르는 쾌감을 주워 담기도 벅찼다. 침대를 짚고 있는 손이 꾹 오므라지고 발끝이 조여진다. 빨리 절정에 이르고 싶은 맘과 더 오래 느끼고 싶은 맘이 뒤섞였다. 그는 잠깐 숨을 고르다가 조금 더 느긋하게 허리를 돌렸다. 

“진우야, 진우야아…….” 

소곤거리는 목소리에 애교가 듬뿍 섞인다. 기분이 좋은 만큼 그동안 참았던 게 너무 서럽고 억울해진다. 이렇게 좋은 걸 왜 안 해 줬는지. 무작정 참으라고만 하던 서진우가 미워졌다가 또 금세 좋아졌다가, 조금 미안해지는 과정에 설렘이 넘실거렸다. 정서원은 허리를 약간 세우고는 한 손으로 무거운 배를 받친 채 다시 움직였다. 조금 전과 다른 곳이 찔리니 아까와는 결이 다른 쾌감이 솟아올랐다. 질끈 감긴 눈두덩이 파들파들 떨린다. 정서원은 천천히 눈을 뜨며 잠든 서진우를 바라보았다. 자는 사람에게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 건데, 나도 아는데…… 근데 너무 좋아.

“흐앙…… 밝히는, 애인이라서어…… 미안…… 아, 앙! 으응응!”

미안하다고 조잘거리는 중에도 직접 기분 좋은 곳에다 자지를 갖다 문지르는 몸짓은 멈추질 않는다. 정서원은 눈물을 뚝뚝 흘려가며 허리를 놀렸다. 배가 무거워졌다곤 하지만 원래 유연했던 몸은 스스로 욕심을 채우는 데에 모자람이 없었다. 진우야, 미안해…… 진우야, 나 너무 좋아…… 숨기려는 의도를 상실한 입술은 서진우를 향해 연신 혼잣말을 보내고 있다. 함빡 젖은 아래를 매끄럽게 가르고 들어서는 자지가 너무 좋았다. 불거진 귀두가 비좁은 안을 꾹꾹 눌러대는 것도 좋았다. 잠든 서진우는 모질게 굴던 때와 달리 독기라곤 하나 없는 순진한 얼굴이라 다정하던 그를 멋대로 떠올리기에도 좋았다. 달뜬 몸에 순식간에 쾌감이 내달렸다.

“지, 지누으, 앗! 으앙, 진, 우야아……!”

한 번도 제 역할을 해 본 적 없는 자지에서 맑은 정액이 오줌 줄기처럼 쏘아진다. 온몸에 오르가즘이 찌릿찌릿하게 번지느라 숨을 쉴 때마다 경련하듯이 떨렸다. 자지를 밑동까지 삼킨 내벽이 강하게 조여들자 곤히 잠든 서진우의 얼굴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정서원은 가쁜 숨이 터지는 입을 틀어막고 무너지려는 몸에 힘을 주고 버텼다. 그래 봤자 이미 잠에서 깨어난 서진우를 피할 수는 없었다. 정서원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등허리까지 떨어 가며 흐느꼈다. 

“……형?”

“미, 미안해애……. 나 못, 못 참겠어서…….”

서진우는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 게 아닌 것 같았다. 잘생긴 미간을 찡그린 채 눈을 몇 번 깜빡이던 그가 한참 뒤에나 한숨을 터뜨린다. 그러더니 달달 떨리는 정서원의 허리를 붙잡아 준다. 정서원은 거부하지 않고 서진우의 팔 힘에 기꺼이 기댔다. 팔뚝에 손을 짚은 채 허리를 들어 올리자 흠뻑 젖은 내벽과 자지가 비벼지며 이상야릇한 소리가 샌다.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려 왔다. 활짝 펼쳐져 있던 다리가 꾸물꾸물 오므라들고 내내 서진우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던 시선이 시트를 배회한다. 그러자 곧장 단단한 자지가 깊숙이 처박혔다. 

“흐앙……!”

정서원이 붙잡은 팔뚝에다 손톱을 세운다. 서진우를 보니, 흐릿한 시야에 보이는 얼굴은 웃음기 한 점 머금고 있지 않았다. 그제야 혼날 짓을 했다는 자각이 들었다. 정서원이 겁에 질려 눈물을 펑펑 쏟았다.

“자, 잘못했어……. 화내지, 마. 흑, 미안해애…….”

“자는 사람 잘 따먹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사과하는 거야? 왜, 더 안 따먹고.”

“그게 꿈에, 자는데, 나, 진우, 나와서어……. 다, 다신 안 그럴게, 으앙…….”

“어디서 못된 짓만 배워 왔어. 어?”

“미, 미아안……. 으앙! 앗. 아아앙! 진우야아……!”

사과를 조잘대던 입술에서 달뜬 신음이 터지기 시작한다. 서진우는 정서원이 상상했던 그대로 엉덩이를 붙잡아 벌리며 젖은 안에다 자지를 처박아 주었다. 혼자 애쓰지 않아도 이제 알아서 기분 좋은 곳에 자지가 닿는다.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쾌락이었다. 정서원은 서진우의 팔뚝에 손톱을 세운 채 박히는 대로 앙앙 자지러졌다. 

“으앙, 앙! 지, 진우야아……! 잘못했어…… 흐앙, 서원이가아, 자, 잘못했…… 아아! 흑, 흐아앙…….”

이미 한발 늦은 사과가 신음과 함께 잇따라 흘러나온다. 미안해, 잘못했어, 진우야…… 눈물이 넘실거리는 얼굴이 서진우를 바라보며 흐느끼고 있다. 달짝지근한 숨을 머금은 사과는 별달리 진정성이 없어 보였다. 정서원은 그가 화가 난 줄 알고 어쩔 줄 모르는 모양이었으나 마냥 화를 내기에는 제법 귀염성이 있는 말썽이었다. 아침부터 다리를 활짝 벌린 채 맞이해 주는 연인이 어디 흔할까. 잠든 사이에 자지를 물고 빨아 세워 놓고 그 위에서 부푼 배를 붙잡은 채 허리를 흔들어댔을 정서원을 상상하니 서진우는 헛웃음까지 날 정도였다. 오히려 보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서진우는 오랜만에 들어선 안쪽이 자지를 감싸는 거나, 박을 때마다 꾹꾹 조여드는 거나, 어느 쪽이든 아주 황홀하여 빼고 싶지 않았다.

“뭐가 미안해. 형이, 자는 사람 좀 따먹을 수도 있는 거지. 응?”

“잘못했어어…… 아, 으앙! 히이잉, 진우야아…… 으응!”

아주 오랜만에 맛보는 안은 감도가 더욱 훌륭했다. 박는 족족 자지러지며 울어대니 기특하여 칭찬해 주고 싶을 지경이다. 정서원은 어느덧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며 서진우의 좆질에 맞추고 있다. 잘못했어, 미안해, 안 그럴게…… 얼마 남지 않은 사과의 진정성이 바닥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서진우가 문득 움직임을 멈춘다. 정서원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그를 바라본다. 서진우는 제 팔을 붙잡은 손에다 부드럽게 깍지를 껴 주며 웃었다. 

“잘하네. 혼자 해 봐.”

“지, 진우야아…….”

“부끄러워? 그럼 자는 척해 줄까?”

“싫어……. 계속 봐 줘….”

“내가 계속 봐 주는 게 좋아?”

“응응…….”

부끄러운데도 좋았다. 더 봐 주길 바랐다. 열기가 도는 눈으로 구석구석 안 닿는 곳까지 핥아 주길 원했다. 애가 탄 허리가 움찔움찔 떨린다. 정서원이 깍지를 낀 손에 의지하며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움직여 주지 않는 서진우를 대신해 직접 자지를 삼켜 내벽에 문지르자 시선이 노골적으로 꽂혔다. 쾌감과 함께 간질간질한 전율이 흘렀다. 뒷덜미에 열이 올랐다. 정서원은 다리를 더욱 벌리며 깊숙이 삽입하고 문지르려 애를 썼다. 그 몸짓이 점점 빨라진다. 묵직한 자지가 속을 건드릴 때마다 터지는 쾌감이 아랫배를 뜨겁게 달군다. 그러나 아까 서진우가 붙잡고 처박아 주던 때만큼 좋지는 않았다. 애가 탄다. 

“흐응…… 읏, 아아아……!”

정서원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허리를 돌려 가며 제 좋은 곳을 찾아 문질러댔다. 그것도 부족한지 체중을 실어 밑동까지 깊숙이 박아댄다. 하얀 엉덩이가 찰떡처럼 뭉개졌다가 탄력 있게 모양이 잡히길 반복한다. 정서원은 그대로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며 서진우를 바라보았다. 황홀함이 어른거리는 눈이 감길 때마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말을 타는 듯한 몸짓이 끊이지 않는다. 눈물이 떠오른 눈에 달콤한 애교가 듬뿍 배었다. 

“우리 형이 왜 또 그렇게 볼까. 응?”

“으응응…… 나 진우가 해 주는 게, 더……. 기분 좋은데…….”

“응, 그런데?”

정서원은 몹시 애가 타는지 애꿎은 입술을 물어댔다. 축축하고 뜨거운 속살이 자지를 꽉 조여 문다. 서진우는 당장에 그를 자빠뜨리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조여드는 안에다 자지를 처박고 싶었지만, 참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는 자제력이었다. 기껏 쌓아 놓은 인내심을 무너뜨린 정서원은 그저 서러운 듯 눈물만 깜빡이고 있다. 그간 서진우가 얼마나 참았는지 따위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서진우에게서 한숨이 새자 정서원이 몸을 움찔한다. 그는 제 어설픈 몸짓을 지적받은 거라 생각했는지 허리를 세우며 뒤를 바싹 조였다. 그러더니 울먹울먹 서진우를 바라보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화, 화내지 마……. 나 열심히, 할게…… 으응?”

배가 한껏 부른 정서원이 서진우의 위에서 열심히 움직인다. 굵직하고 기다란 자지가 비좁은 안을 빠져나왔다가 다시 처박히길 반복했다. 방아를 찧는 엉덩이 아래로 자지가 삼켜지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정서원은 깍지를 낀 손을 더 꼭 쥐며 할딱할딱 흐느껴댔다. 지켜보던 서진우가 내려앉는 움직임에 맞춰 허리를 쳐올린다. 아! 정서원이 곧장 자지러진다. 움찔대는 안으로 자지가 푹푹 처박혔다.

“우리 애들은 아직 형 배에서 코 자고 있을 텐데. 형은 엄마란 사람이, 아침부터 야한 짓이나 하고. 응?”

“싫어어, 하지 마…… 아! 으앙! 진우야아…… 히이잉. 좋아, 그거어, 좋아아……!”

“아…… 우리 형 신음이 너무 커서 애들 다 깨겠네. 벌써, 애들 성교육부터 시키려고?”

“아냐, 아니야……! 앙! 진우야 나, 거기……! 더, 더어…… 아아앙!”

깊숙이 처박힐 때마다 정서원이 위아래로 흔들린다. 서진우는 쾌감에 흐무러진 얼굴을 바라보며 잡은 손을 꽉 쥐었다. 그러지 않으면 이성을 잃고 박아댈 것 같았다.

“흐으…… 내 좆 닿는 곳에, 우리 애들 있는 거 느껴져? 여기에, 형이 내 새끼 배고 있잖아.”

“아으응! 앗, 아앙……! 몰라, 몰라아…… 앙! 기분 좋아, 진우야아!”

밑동까지 깊이 삽입된 자지는 그러잖아도 기다랗고 굵직하다. 정서원은 정말 서진우의 자지 끝에 아기집이 걸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등허리가 오싹해졌다. 긴장을 머금고 굳은 몸에 서진우가 자지를 처박아댄다. 정서원은 의지할 곳이 없어 깍지 낀 손만 꼭 붙든 채로 앙앙 자지러졌다. 진우야, 진우야아…… 이름을 조잘거리던 입술은 결국 다시금 찾아온 절정과 함께 멎었다. 이번에는 씨 없는 물을 뿌리는 일조차 없었다. 대신 아기씨가 가득 담긴 씨물이 뜨거운 안을 적셔 주었다. 정서원은 고개를 길게 젖히고 몸을 바르르 떨었다. 기다란 목줄기가 기나긴 오르가즘과 함께 떨렸다. 

“흐앙……. 으응, 응…….”

“기분 좋아?”

“응응…… 너무 좋아아……. 진우 자지 너무 좋아…….”

“다음부터는 혼자 그러지 말고 나 깨워. 응? 형 혼자 힘들잖아.”

“이제, 넣어 줄, 거야? ……손가락 말고…….”

딴 때도 이렇게 똑 부러지게 굴면 얼마나 좋을까. 괜히 심술이 났지만 그래도 서진우는 저를 애절하게 바라보는 얼굴이 맘에 들어 짓궂게 굴지 않고 대답해 주었다. “응, 이제 안정기니까.” 정서원이 눈매까지 휘어가며 환하게 웃는다. 여운이 가시지 않은 얼굴에 모처럼 생기가 돌았다. 그러다가 문득, 시선을 내리깔며 머뭇머뭇 입을 우물거린다. 정서원은 아주 어려운 부탁을 하는 것처럼 촉촉한 눈으로 서진우를 바라보았다.

“진우야, 나……. 더…… 하고 싶은데…….”

그게, 오랜만에 해서…… 나 진우 깨기 전에 조금밖에 안 했어, 진짜, 정말로……. 이것저것 변명을 주워섬길수록 설득력이 떨어지는 걸 아는지 모르겠다. 서진우도 그 후 이어지는 말이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지금 정서원에게 궁금한 부분이 있다면 오로지 이어진 몸뿐이었다. 그는 정서원의 몸을 조심스럽게 눕히며 아직 삽입되어 있던 자지를 천천히 빼내었다. 파고든 손가락이 정액을 부드럽게 긁어낸다. 떨어지는 정액은 티슈에 닦여 나갔다. 정서원은 거의 울 것처럼 서진우를 바라보다가, 그가 탁상에서 콘돔을 꺼내자 눈을 크게 떴다.

“더 해 줄 거야?”

“응. 왜, 힘들어?”

“아니, 아니. 좋아서…….”

콘돔을 구경하는 건 훨씬 오랜만인 것 같다. 정서원은 포장용지가 찢기고 투명한 고무가 붉어진 선단을 덮는 걸 넋 놓고 바라보다가, 뒤늦게 손을 잡았다. 서진우의 시선이 그를 향한다. 정서원이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그냥, 하는 게 더, 좋은데…….”

“…….”

그가 그렇다니 서진우는 토를 달지 않았다. 그저 수없이 알아봤던 체위를 여럿 시험해 봤을 뿐이다. 드러누운 채 다리만 살짝 들어 올려 박기도 하고, 그 후 마주 본 채로 또 박고, 다음에는 안아 든 채로 박고. 생자지가 좋다는 입에다 박아 주기도 했다. 첫 사정 이후 안에다 싸 주지 않는 서진우에게 ‘그럼…… 입에다 해 줘…….’하고 조른 덕이었다. 

정서원은 더 나올 것이 없어 맑은 물만 찔끔거릴 때까지 원하는 만큼 절정을 맛보았다. 튕기는 법이 없는 입 구멍 덕에 아침부터 빈속에 정액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황홀감이 배에서부터 뿌듯하게 차올랐다. 온몸이 진탕 적셔진 정서원은 나중에는 아예 혀가 풀어져 다 뭉개진 발음으로,

“으응응, 더어…… 지누 자지, 마시써…….”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졸라댔다. 다 절정에 이르고 나서는 여운이 가시지도 않은 채 입을 벌려 자지를 쪽쪽 빨기도 했다. 욕심 많은 입은 위든 아래든 한 번 머금을 때마다 좀처럼 놓아주질 않았다. 결국 서진우가 억지로 빼내면 ‘나, 나 별로야……?’하고 울상을 지으며 더 잘 빨 테니까 화내지 말라고 울먹였다. 하나같이 성욕을 줄이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뿐이었다. 서진우는 수없이 상상했던 몸을 몇 번이나 열어젖혔다. 뜨겁고 부드럽게 풀어진 몸은 마치 그를 위해 준비된 것처럼 어디를 어떻게 품든 금세 적응하여 흐무러졌다. 

옆으로도 울고, 뒤에서도 울고, 위에서도 펑펑 울던 정서원이 문득 부른 배를 양손으로 붙잡고 훌쩍거린다.

“흐아앙, 흑, ……지누야아…… 나, 배에서 꿈틀, 해써…….”

“꿈틀했어?”

“으응, 으…… 이상해애……. 흑.”

“우리 형 기분 좋은 거 애들도 아나 보네.”

울지 마, 응? 서진우는 칭얼대는 정서원을 안아 주며 달랬다. 정서원이 팔을 뻗어 안겨들었다. 둘은 오늘이 정기검진 날이라는 것도 잊은 채 침대에서 한참을 더 뒹굴었다. 집이 빈 시간에 맞춰 찾아오는 가사도우미가 침실에 들어서려다 사라졌지만 정서원은 아무것도 모르고 할딱할딱 울며 더 조르기나 했다. 몇 달만의 섹스는 결국 먼저 탈진한 정서원이 곯아떨어지는 걸로 끝이 났다.

* * *

정서원은 요즘 기분이 그럭저럭 괜찮았다. 욕구불만이 해소되니 울증도 가벼워진 것 같았다. 갑자기 짜증이 나거나 뜬금없이 눈물이 나는 일도 줄었다. 이제는 하지도 못할 중절에 대해 알아보지도 않았다. 여전히 임신이 싫었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도 싫었지만, 말 그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낳기 싫다는 말을 하지 못해 배가 부를 때까지 끙끙 앓기만 했던 정서원이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정서원은 한동안 핸드폰을 숨겨 놓은 게스트룸에 발도 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선지 요즘은 부쩍 내외를 하기 시작했다.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하는 천치가 되어서 서진우를 만족시켜 줄 때는 언제고, 이제는 목욕도 환복도 알아서 하겠다며 속을 썩였다. 덕분에 서진우는 검진이 있는 날 아침부터 도망 다니는 정서원의 뒤를 따라다녀야 했다. 그래 봤자 배가 불러 뒤뚱거리는 걸음으로는 서진우를 완전히 따돌릴 수 없었다. 더 쫓으면 정서원이 자빠지기라도 할까 ‘형 왜 그래…… 씻고 옷 갈아입어야지. 응?’하고 말로만 설득하던 서진우가 결국 소파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 백기를 든다. 

“형! 뛰지 마. 넘어져. 나 가만있을게. 응?”

“하아, 흐…….”

“그거 걷고 힘들어할 거면서 왜 그랬어. 나 속상하게…….”

“그치만…….”

물론, 백기를 든 척이었다. 서진우는 정서원이 안도하고 숨을 몰아쉬자마자 다가가 팔을 붙잡았다. “소, 속였어…….” 정서원이 배신감에 젖은 눈으로 울먹였으나 서진우에게는 임신한 정서원을 챙겨야 한다는 그럴싸한 명분이 있었다. 서진우는 잡힌 손을 팔락팔락 무력하게 흔들어대는 정서원을 끌어안고 “왜 피해, 나 속상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그래?”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젖이 돌기 시작하면서 가슴을 보여 주지 않으려는 거야 익숙했지만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피한 적은 없어 속이 탔다. 반듯한 얼굴에 걱정이 어른거리자 정서원이 그제야 저항을 멈춘다. 입술을 꾹 다물고 눈을 내리까는 모습은 불만스럽다기보다는 울적해 보였다. 

“왜, 응? 오늘 그냥 나가지 말까? 병원가기 싫어?”

“……그게, 아니라…….”

“응. 그게 아니라?”

“…….”

푹 내리깐 속눈썹 아래에 눈물이 대롱거린다. 정서원은 울지 않으려는 듯 눈도 깜빡이지 않다가 결국에는 뚝뚝 눈물을 떨구었다. 서진우가 붙잡았던 팔을 놓고 젖은 눈가와 뺨을 다정히 쓸어 준다. 몹시 조심스러운 손길에 비해, 지금껏 잡고 있던 팔뚝에는 손자국이 새빨갛게 남았다. 

“우리 형을 누가 울렸을까. 말해 줘야 내가 혼내 주는데.”

“흑. 흐앙……. 진우야…….”

멋모르는 정서원은 여전히 상냥해 보이는 태도에 안도하여 맘껏 응석을 부려댔다. 울고 싶은 만큼 펑펑 울어대는 그를 서진우가 부드럽게 달래 준다. 아무리 닦아 주어도 또 차오르는 눈물 덕에 올려다보는 눈동자에는 아직 설움이 가득했다. 

“나……. 나 배가, 자꾸 나와서…….”

“응, 그랬어.”

“……다른 덴 안 그런데, 배만…… 자꾸 나오니까…….”

울음이 치미는지 입술을 깨문다. 정서원은 말을 고르는 듯 울먹울먹 눈물만 글썽이다가 결국 걱정을 실토했다.

“……징그럽, 잖아…….”

“예쁘기만 한데 누가 그래. 혼내 줘야겠네.”

“맨날, 더, 더 커지기만 해서……. 흑. 이러다 터지면 어떡해?”

“선생님이 그랬잖아. 다른 쌍둥이 엄마들은 배가 더 큰데, 형은 작은 편이라고.”

“흐윽. 싫어…… 더 커지면 어떡해. 나 무서워, 진우야…….”

필사적으로 자신을 피하는 정서원을 보며 뒤틀렸던 속이 금세 풀어진다. 다신 꺼내 놓지 않고 자신을 피하지 못하도록 묶어 놓겠다는 음습한 다짐마저 녹아내렸다. 서진우는 양손에 잡힌 뺨을 살살 어루만졌다. 뺨이 살짝 눌리며 입술이 비죽 나와 벌어진다. 서진우는 그 입에다 쪽쪽 입을 맞추고는 시선을 마주했다.

“내가 싫어할까 봐 안 보여 주는 거였어?”

“미안…….”

“내가 그런 걸로 형 싫어하는 좀생이 같아? 서운하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앞으로는 그러지 마. 응? 숨기지 말고. 걱정했잖아.”

“응, 으응. 앞으로는 꼭, 얘기할게…….”

딱 서진우가 보여 주는 만큼만 아는 정서원은 안도하며 서진우의 품으로 기어들었다. 오히려 나쁘게 오해해서 미안하다는 사과까지 했다. ‘앞으로는 뭐든 꼭 말할게, 괜히 걱정 안 시킬게…….’ 서진우는 제 품에서 종알거리는 그가 귀여워서 한참을 놓아주지 않았다. 너무 귀여워서 어디 내놓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 * *

“척추 간격 일정하고…… 혹도 없네. 다행이에요.”

오늘은 초음파 검사를 받았다. 심장, 뇌, 입, 손발을 거칠 때마다 주치의는 아주 친절히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지만 정서원은 통 관심이 없어 설명을 듣는 서진우만 바라보았다. 양손으로 꼭 감싸 준 손이 따뜻했다. 손끝을 꾸물거리자 화면을 바라보던 서진우가 시선을 내려 준다. 서진우는 작게 웃더니 잡은 손에다 입을 맞춰 주었다. 

“장기도 모두 정상이야. 양수도 좋고 태반도 좋으니 안심해도 돼.”

“이제 애들 걱정 안 해도 돼요?”

“응. 이제부터는 적당히 운동량 늘리시게 해. 요가도 괜찮지.”

서진우는 몹시 안심한 듯 환히 웃었다. 누워 있는 정서원의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넘겨주는 손길에 애정이 담뿍 담겼다. 정서원은 어물어물 서진우를 따라 웃었다.

“다행이다. 우리 애들 잘 자라고 있대.”

“응.”

“내가 앞으로 더 잘할 테니까, 형은 아무 걱정도 하지 마. 응?”

아무 감흥도 없었는데 서진우가 이리 좋아하니 다행인 것 같기도 하다. 정서원은 의무적으로 ‘나도 기뻐’, ‘나도 잘할게’같은 대답을 늘어놓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영양 부족에, 좋지 못한 건강 상태, 심한 스트레스 속에서도 용케 자리를 잡은 애들을 칭찬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아직 누구 아이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정서원으로서는 복잡스럽기만 했다. 아이를 낳으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데, 착잡한 속도 모르는 서진우는 그저 기뻐하며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춰댔다. 서진우의 씨라고 생각하면 몽땅 속 편한 일이었지만, 그것도 유전자 검사라는 문물이 없을 때 이야기다. 지금은 아픈 정서원을 배려한답시고 미루고 있었지만 서로 자기 아이라 우기는 이상현과 서진우를 본다면 결국 언젠가는 검사를 하게 될 게 뻔했다. 정서원은 앞날이 막막해져 금방 또 울적해지고 말았다.

‘혹시라도 진우 애가 아니면……. 나 버려질까…….’

무릎 꿇고 빈다면 진우가 불쌍히 여겨서 받아 줄까? 요즘 다정한 서진우를 보면 그래 줄 것 같기도 했지만, 딱히 자신에게 다정한 게 아니라 애들한테 다정하다고 하는 게 맞았다. 정서원의 몫으로 내어진 서진우는…… 그를 발가벗겨 놓고 침대에 묶어 놓은 채 기르던 그때 그 서진우였다. 배가 크게 불러도 여전히 예쁘다고 해 준 서진우에게 주제도 모르고 설레었던 맘이 사늘히 식는다. 겨우 편해졌던 맘이 순식간에 울적해졌다.

정서원은 짧은 상담까지 마친 후에야 병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병원에 올 때마다 기가 죽는 정서원을 서진우가 살뜰히 챙긴다. 축 처진 어깨를 감싼 채 병원을 빠져나가던 그는 계단에 이르러서는 손까지 잡아 주며 에스코트를 자처했다.

“계단 조심해서 천천히 내려와.”

“으응.”

정서원이 부른 배를 잡은 채 조심조심 발을 내디딘다. 이제 배가 커져서 발밑을 잘 살펴야만 했지만 지금은 고작해야 계단 몇 개가 전부였다. 이렇게 유난을 떨 정도는 아니었다. 정서원이 계단 중간에서 우뚝 멈춘다. 그보다 한 칸 아래 서 있던 서진우가 같아진 눈높이에서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부드럽게 접힌 눈매는 선의와 배려로 가득했다. 결국 먼저 꼬리를 만 정서원이 시선을 내리깔며 잡은 손을 살짝 흔들었다.

“……그냥, 내려가도 되는데…….”

“다음에. 형 걷는 거 보면 불안해서 안 되겠어.”

“…….”

자꾸 애 취급하고…… 불퉁하게 칭얼거렸던 정서원은 문득 새삼스러운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제는 정말 서진우 없이는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는데, 돌봄이 필요한 철부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부끄럽게도 몽땅 사실이었다. 정서원이 아무 말 못 하고 서진우의 손만 꼭 붙잡고 있자 서진우가 애 어르듯 속삭인다. “안아 줘?” 정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겨우 몇 칸 남지 않은 계단을 서진우의 품에 안긴 채로 내려왔다.

검진을 하는 날이면 병원 주변 공원에서 산책을 하는 수순이 정해져 있다. 서진우는 정서원을 안고 공원까지 옮겨 주었다.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걸음마다 꽂힌다. 하도 안겨 다니는 일이 많다 보니 바깥에서는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깜빡했다. 그제야 부끄러움을 느낀 정서원이 서진우의 품에 고개를 묻으며 소심하게 조른다.

“진우야, 나 그냥 걸을래……. 내려 줘.”

“조금만 가면 돼.”

“……사람들이 쳐다봐서…… 부끄러운데…….”

“우리 형은 부끄러운 것도 많아.”

대수롭지 않은 듯 웃은 서진우는 공원 입구에서야 정서원을 내려 주었다. 오랜만에 보는 공원은 가을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꽃이 흐드러졌고 나무는 단풍이 들었다. 바람도 선선하게 불어와 카디건 없이는 조금 쌀쌀할 것 같았다. 몇 달 전만 해도 당연하던 풍경인데 이제는 한 달에 몇 번 허락되지 않는다. 홀딱 벗겨져 방에 갇혀 있던 때에 비하면 호사였지만 목줄을 틀어쥔 서진우의 허락 없이는 바깥 외출이 불가능한 건 여전했다. 정서원은 카디건을 여미며 보도블록이 깔린 길을 거닐었다. 신발을 신고 맨바닥에 발을 디디는 것도 너무 오랜만인 것 같아 기분이 새로웠다.

“날씨 좋다, 진우야.”

“너무 빨리 걷지 마. 넘어져.”

“응.”

대답은 그렇게 해도 기분이 들뜨는 건 어쩔 수 없다. 제 힘으로 지면을 내딛는 느낌이 활력을 충만하게 채웠다. 서진우의 손을 잡은 채 공원을 한 바퀴 돌던 정서원은 곧 시무룩해졌다. 들어섰던 공원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짧은 산책은 늘 이 크지 않은 공원을 한 바퀴 도는 걸로 마무리되곤 했다. 간혹 서진우와 외식도 하고, 쇼핑도 하긴 했지만 그것조차 한두 시간을 넘긴 적이 없었다. 정서원이 서진우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끈다. 서진우가 정서원을 바라본다. 정서원은 조금 주눅이 든 채로 어물어물 말을 꺼냈다.

“진우야……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돼?”

“바람이 차잖아. 감기 걸려. 형 발도 아프고.”

“그래도…….”

대답은 늘 그렇듯 부드러웠지만 늘 그렇듯 단호하기도 했다. 정서원은 아주 소심하게 말대꾸를 했다.

“……선생님도 이제부터는 운동량을 늘리는 게 낫다고 하셨는데….”

“테라스에 잔디 깔아 놨어. 꽃도 심고, 나무도 심었고. 응? 집에 가서 하자.”

“……으응…….”

“형도 우리 집이 더 좋잖아. 그치?”

“……응, 좋아.”

너무 대수롭지 않게 말해서 그 말에 담긴 속뜻도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앞으로는 이렇게 공원을 산책할 일도 없어질 모양이었다. 불만을 느낄 새도 없이 찾아온 무력감이 팔을 늘어뜨렸다. 당겨진 손에 힘이 빠져나가자 서진우가 그 손을 잡아 이끈다. 정서원은 순순히 이끌려 갔다.

얌전해진 정서원은 그대로 조수석에 앉혀졌다. 서진우는 주차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샌들을 벗겨 주고 맨발을 주물러 주었다. 굳은살 하나 없는 말랑한 발이 조금 걸었다고 빨개져 있었다.

“얼마나 걸었다고 이래. 속상하게.”

“……안 아픈데…….”

“걸을 때 힘들지 않았어? 살은 빠졌는데 배만 커져서 걱정이네…….”

한숨을 쉰 서진우가 그대로 마사지를 해 주기 시작한다. 발을 주물러 주던 손이 이제는 발목부터 종아리까지 느긋하게 주무른다. 산책 때문에 울적해 있던 정서원은 서진우가 너무 걱정스럽게 쳐다보자 외려 자기가 놀라고 말았다. 걱정시킨 게 미안하고, 너무 심란해하는 서진우가 걱정되어 어쩔 줄 모르겠다. “형 걷는 것도 아슬아슬해 보인단 말야.” 무릎 위에 놓인 손이 꾸물거리는 게 다 보이는데도 서진우는 걱정스러운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가 속눈썹을 내리깔고 있다가 정서원을 올려다보며 “형, 이제는 외출을 좀 줄일까?”하고 대답을 종용한다. 정서원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그렇게 하자.”

“정말 몸 괜찮은 거 맞지, 형?”

“응응……. 배도 안 아프고, 발도 안 아파. 정말 걱정 안 해도 되는데…….”

“우리 형은 맨날 괜찮다는 말만 하니까 내가 안심이 안 돼.”

“정말 괜찮은데…….”

정서원이 당황하여 눈을 깜빡거린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서진우의 말대로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은 것도 같다. 종아리가 뻐근하고, 발이 욱신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정서원이 서진우를 바라본다. 분명 내려다보고 올려다보는 구도인데도 오가는 말은 상하가 뒤바뀌어 있다.

“그럼…… 진우 걱정 안 되게 내가 말 잘 들을게.”

“그래. 오늘처럼 나 피해 다니지도 마?”

“응…….”

서진우는 그제야 환히 웃으며 복숭아뼈에다 입을 맞췄다. 내가 잘해 줄게, 형. 오금을 어루만지던 손이 품이 넉넉한 바지 속까지 파고들며 허벅지를 매만졌다. 입술도 손길을 따라 점점 위로 올라가 허벅지의 통통한 부분까지 올라앉았다. 내리깔린 속눈썹이 기다란 음영을 남긴다. 그를 한참 바라보던 정서원은 문득 주차장에 들어서는 인기척을 느끼고 허둥지둥 잡힌 발을 빼냈다.

“지, 진우야. 집에 가자…….”

“응. 집에 가자.”

몸을 일으킨 서진우가 허리만 숙여 정서원에게 입을 맞췄다. 차체에 오른팔과 문을 붙잡고 있는 팔 때문에 꽁꽁 갇힌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정이 된다. 유순히 입을 벌려 입술을 받아들인 정서원은 어느덧 외부라는 것도 잊은 채 키스에 빠져들었다. 혀가 진하게 엉기며 질척이는 소음을 낸다. 샌들이 벗겨진 발이 오므라들었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허리가 바싹 들리며 서 있는 서진우에게 매달리게 될 때쯤, 서진우가 안겨드는 그를 살며시 밀어낸다. 부드럽게 웃는 얼굴엔 약간의 난처함도 없다.

“가는 길에 뭐 사 갈까? 먹고 싶은 거 있어?”

“……으응. 아무거나 괜찮아.”

“신사역에 가서 초밥 사갈까? 형 그 집 좋아했잖아.”

“응. 좋아…….”

말을 하는데 슬슬 졸음이 쏟아졌다. 진우의 말대로 오늘 조금 무리해서 걸었던 모양이다. 정서원은 슬그머니 눈을 감았다. 서진우가 웃는 소리가 났다.

“눈도 못 뜨네. 졸리면 자고 있어. 도착하면 깨울게.”

서진우는 안전벨트까지 매어 주고는 불시에 또 입을 맞췄다. 정서원은 잠깐 잠이 깼다가, 서진우가 운전석에 앉았을 때 다시 졸음이 몰려와 눈을 감았다. 임신을 하면서 잠이 많아졌다. 할 수 있는 게 잠자는 것밖에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정서원은 욕조에서 눈을 떴다. 찰박거리는 물소리와 향긋한 입욕제 냄새가 났다. 비몽사몽간에도 젖은 머리칼을 넘겨 주며 이마에다 쪽쪽 입을 맞춰 주는 게 느껴졌다. 서진우가 옷을 입고 있는 것도 깜빡하고 안겨들 뻔했다. 정서원은 졸린 눈을 가물거렸다. 서진우는 그가 잠을 깨는 과정을 웃으며 지켜보았다.

“나 깨우지……. 운전하느라 피곤할 텐데.”

“형 가벼워서 힘들지도 않아.”

“……그래도, 혼자 씻을 수 있는데…….”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응?”

머리칼을 넘겨 주던 손이 뺨을 감싼다. 정서원은 그 손에 고개를 기댔다. 커다란 손이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감싸 주는 느낌이 포근했다. 자질구레한 모든 수발을 자신이 들겠다며 완강히 구는 서진우에게 더 말을 붙일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스스로 뭘 하겠다고 나서면 오히려 그를 피곤하게 만들 것 같았다. 자신은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두는 게 나았다.

목욕을 끝마친 후에는 서진우가 나신을 닦아 준다. 그는 폭신한 타월로 온몸 곳곳 안 닿은 곳이 없을 만큼 꼼꼼히 닦아 주고는 넉넉한 상의를 입혀 주었다. 정서원은 목욕 후의 나른함에 깜빡깜빡 졸다가 키스를 받고 잠에서 깼다. 

“많이 졸려?”

“으응…….”

“초밥 사 온 거 먹고 자자. 배고프잖아.”

“응.”

서진우는 정서원을 이끌고 소파에 앉혔다. 금방 사 온 초밥은 아주 신선하고 맛있었다. 다 삼키고 나서도 입 안에 생선 비린내가 조금도 맴돌지 않아 술술 넘어갔다. 임신 초에는 먹고 싶던 것도 막상 식탁에 오르면 냄새가 역겨워 못 먹은 적도 많은데, 이제는 그런 일이 줄어들었다. 얌전히 입을 벌려 서진우가 주는 대로 받아먹던 정서원은 금세 배가 불렀다. 저를 먹이느라 통 먹지 못한 서진우가 신경 쓰였는지 “내가 먹여 줄게.”하고 손을 내민다. 서진우는 웃으며 젓가락을 내주었다. 오랫동안 아무것도 쥐지 못해 굳은살이 다 빠진 손에 젓가락이 끼워졌다. 정서원은 거의 반년 만에 스스로 젓가락질을 해 보았다. 그러나 스푼 사용마저 서툴러진 그가 젓가락질이라고 능숙할 리 없다. 정서원은 어설픈 젓가락질로 초밥만 헤집어 놓다가 결국 시무룩하게 젓가락을 내렸다. 

“이런 거 안 해 줘도 돼.” 

웃음을 터뜨린 서진우가 정서원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이마에다 입 맞춘다. 정서원은 기가 죽어 가만히 고개나 끄덕였다. 

배가 부르니 또 슬슬 잠이 온다. 신체 시계가 몹시 단순해진 느낌이었다. 정서원은 뒷정리를 하는 서진우를 바라보다가 또 까무룩 잠이 들었다. 서진우가 깨우지 않고 침대로 옮겨 놨는지 다시 눈을 떴을 땐 포근한 이불이 몸을 감싸고 있다. 커튼 사이로 언뜻 보이는 하늘은 어둑어둑했다. 한참 눈을 깜빡이며 졸음을 쫓던 정서원이 겨우 몸을 일으킨다. 그는 잠이 깨자마자 곧장 보호자부터 찾았다.

“……진우야…….”

이 집은 너무 넓었다. 서진우에게 목소리가 닿지도 않고 서진우의 기척을 느낄 수도 없었다. 곁에 없더라도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 알아도 한결 나을 텐데, 정서원은 혼자 있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문득문득 두려움이 치밀었다. 급하게 슬리퍼를 찾느라 머리맡을 발끝으로 더듬거리자 센서 등이 켜지며 어둔 침실이 밝아졌다. 뒤뚱거리며 나간 거실에는 통화 중인 서진우가 서 있었다. 조마조마하던 가슴이 순식간에 진정됐다. 정서원이 서진우에게 다가가 허리를 끌어안는다. 통화 중이던 서진우가 허리에 감긴 팔을 쓰다듬어 주었다.

“네. 전화는 아까 드렸어요. ……어쩌겠어요. 애는 이미 생겼는데.”

몸을 틀어 정서원을 끌어안은 서진우가 조심스럽게 소파에 앉혀 놓는다. 정서원이 감은 팔을 풀어 주지 않아 서진우도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그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퍽 간절했다. 서진우가 손을 내주니 정서원이 양손으로 붙잡고 얼굴을 비벼댄다. 체취라도 느끼려는지 간질간질한 숨결이 손바닥을 여러 번 스쳤다. 가만 내버려 두자 이번에는 손바닥을 뺨에 대고 문지르며 서진우를 바라본다. 서진우는 그 헤픈 눈에 온전히 자신만 담기는 것이 좋아 다정히 웃어 주었다.

“학교는 그만두기로 했어요. 형도 그게 좋다네요.” 

눈을 마주한 채 묘한 전화가 계속되는데도 정서원은 눈을 감고 키스나 조른다. 서진우가 전화를 조금 떨어뜨리며 쪽쪽 입을 맞춰 주었다. 수화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정서원은 서진우의 허벅다리에 이마를 비비며 잠투정 같은 어리광을 부렸다. 서진우가 그를 쓰다듬어 주면서 통화를 계속했다.

“나중에 찾아뵐게요. 네. 그때 더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파고든다. 정서원은 듣기 좋은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서진우가 곁에 없다는 걸 확인했을 때 달아났던 잠이 거짓말 같았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 왜 이리 안심이 되는 건지, 아직도 외출한 서진우가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하던 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정서원이 가물가물 눈을 깜빡거리는 사이, 전화를 종료한 서진우가 이마를 살살 건드린다.

“졸려? 더 잘까?”

“같이 잘 거야?”

“아직 자긴 이른데. 형 저녁도 먹어야지.”

“……먹기 싫어…….”

아직 배 안 고픈데…… 소심한 반항에 서진우가 웃는다. 그는 손끝으로 정서원의 얼굴을 마음대로 건드렸다. 검지가 둥근 이마를 내려와 눈두덩을 건드리자 정서원이 얌전히 눈을 내리깔고 얼굴을 내어 준다. 서진우는 손끝에 걸리는 간질간질한 속눈썹을 매만지다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형, 나한테 숨기는 거 없어?”

“으, 응?”

“나한테 숨기는 거 없냐고.”

갑자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정서원은 감긴 눈을 깜빡거리다가 서진우의 손이 자꾸 속눈썹을 건드리자 결국 얌전히 눈을 감았다. 손길이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는 항상 모든 추궁을 다정하게 시작하고 부드럽게 끝을 냈다. 녹을 것처럼 상냥하다가도 불쑥 무서워지기도 했다. 정서원은 당황으로 어질어질한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숨긴 일, 잘못한 일, 혼날 일……. 다행히 한 가지가 떠올랐다. 

“사실…… 응접실에, 진우 어머니가 주신 난 있잖아……. 그거, 내, 내가 죽였어…….”

“…….”

“물을 많이 주면 안 되는 건지 몰라서……. 미안해, 어머니가 주신 건데…….”

문득 서진우에게서 한숨이 샌다. 그는 속눈썹을 건드리던 손을 거두고는 정서원의 옆머리를 쓸어 주었다. 정서원이 눈치를 보다 살며시 눈을 뜬다. 이게 아니었나? 그런데 더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애초에 갇힌 처지라 딱히 저지를 수 있는 일도 없었고 숨길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정서원은 울상이 되어 과거를 더 되짚어 보았다. 서진우가 화를 내기 전에 떠올려야 하는데 마땅히 생각나는 잘못이 없다. 으응…… 한참 생각하던 정서원이 탄성을 터뜨린다.

“아! 진우 셔츠 다림질하려다 태웠, 었어……. ……미안…….”

“응. 또?”

“……혼날까 봐, 그거, 소파 밑에 숨겨 놨어…….”

누가 치우지 않았다면 아마 까맣게 흔적이 남은 셔츠가 소파 밑에 굴러다니고 있을 것이다. 스타일러가 따로 있는 걸 알면서도 혼자 보내는 시간이 심심해 시도했던 건데, 지금 생각하니 정말 괜한 짓이었다. 정서원은 기가 죽어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잊고 있던 게 하나둘 떠오르자 서진우를 보기가 무서워진다. 그런데, 이것도 서진우가 바라는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아무 말 않고 정서원만 내려다보고 있다. 옆머리를 감싼 손이 툭툭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정서원은 이젠 진짜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그리고……. 울먹이는 눈이 서진우의 눈치를 살핀다. 이건 정말 말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서진우는 이미 다 알고 있으니 감춰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상현 씨가…… 젖, 돈다구……. 그냥 두면 아프대서……. ……빨아 줬어…….”

“하…… 이제 젖도 나와? 그걸 왜 이제 말해?”

“미, 미안해애……. 나온 지 얼마, 안 됐어…… 진짜로…….”

“…….”

“미안해, 숨겨서 미안해애…….”

어째 가슴에서 단내가 나는 것 같더라니, 제게는 부끄럽다며 잘 보여 주지도 않는 주제에 이상현에게는 젖까지 먹여 줬나 보다. 서진우는 기가 차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입을 다물자 정서원만 초조해진다. 결국 눈물까지 떨군 정서원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쩔쩔맸다. 차마 서진우를 잡지 못한 손이 허공에서 꾸물거린다. 젖은 눈동자는 서진우를 바라봤다가 바닥을 바라봤다가, 또 올라오기를 반복했다. 서진우는 질투를 다스리려 노력하며 정서원을 바라봤다. 그러나 입에선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가 토해졌다.

“그래, 이상현 그 씨발 새끼. 그 새끼랑 뭐 숨기는 거 없냐고.”

“어, 어? 뭐……?”

서진우가 탁상에 놓여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든다. 묘하게 익숙한 형체였다. 이걸 왜 보여 주지? 울먹거리던 정서원은 그게 이상현이 몰래 건네주었던 것이란 걸 뒤늦게 깨닫고 딸꾹질을 터뜨렸다. 배터리가 다한 이후 게스트룸 어딘가에 놓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정서원은 제가 검색했던 내역을 잘 삭제했는지 되짚어 보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서진우에게 떳떳지 못한 생각을 들켰을까 봐 왈칵 겁이 났다. 

“핸드폰 받았던데. 응?”

“지, 진우야아. 나, 그게.”

서진우는 변명을 들어 주지 않았다. 

“나 몰래 다정하게 연락도 했더라. 재밌었어, 서원아?”

나직한 목소리가 이름을 부르자 학습된 것처럼 온몸이 굳는다. 진우가 잔뜩 화가 났다. 무서워서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정서원은 입술을 꾹 깨문 채로 핸드폰을 확인하는 서진우를 힐끗거렸다. 유리알처럼 예쁜 눈동자가 텍스트를 읽을 때마다 아래위로 오르내린다. 엄밀히 따지자면, 정서원은 답장 한 번 보내지 않았고, 전화에도 한 번 응하지 않았으나, 이미 숱한 전적은 사소한 계기로도 신뢰를 앗아 갔다. 알고 있음에도 의심이 드는 것이다. 서진우는 핸드폰에 저장된 유일한 상대인 이상현이 보낸 메시지와 전화를 샅샅이 훑어보다 결국 조소를 터뜨렸다.

“보고 싶다, 자다가도 생각난다, 언제쯤 내게 올 거냐…… 씨발, 아주 지랄을 해요.”

핸드폰이 거실 바닥으로 내던져진다. 바닥을 미끄러진 핸드폰은 대리석 벽에 부딪치며 산산이 부서졌다. 둔탁한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정서원은 결국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입을 꼭 틀어막은 손등으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서진우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 손을 천천히 떼어 주었다. 마주한 눈동자가 사늘했다. 

“서원아, 이상현이랑 둘이 도망이라도 가려고 했어?”

“아, 아니! 흑! 아, 니야. 진짜, 아니야.”

“아니기는, 씨발. 뒤로 딴짓하는 거 한두 번 봐? 정서원, 나 진짜 화내기 전에 제대로 말해.”

오전만 해도 다정하던 그가 불같이 화를 내니 정서원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울음이 멎질 않아 한마디 입을 떼기도 어려웠다. 긴장으로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간다. 꿈틀거리는 배 안쪽이 콕콕 쑤시고 아파서 숨을 쉬기도 어려워진다. 정서원이 양손으로 배를 감싸자 서진우가 눈물을 닦아 주려는 듯 손을 뻗는다. 정서원은 잔뜩 겁에 질려 눈을 질끈 감으며 몸을 움츠렸다. 옹송그린 몸이 달달 떨렸다. 또 뺨이라도 때리는 줄 알았나 보다. 서진우가 작게 혀를 차고는 한결 자상해진 손길로 젖은 속눈썹을 쓸어 준다. 칼날 같던 눈빛도 풀어졌으나 우느라 정신이 없는 정서원에게는 느껴지지 않는 변화였다.

“말해 봐.”

“나, 나……. 어차피, 연락할 데도 없고…… 그래서……. 괜, 괜찮을 줄, 알고….”

“그럼 왜 숨겼어. 나 두고 둘이 재미라도 보려고?”

“아니! 아니야아…… 흑, 진짜 아니야. 진우야, 잘못했어어…….”

나쁜 짓 안 했어, 진우야, 나 이상현 씨 연락 하나도 안 받았어…… 정서원은 눈물을 닦아 주는 보람도 없이 펑펑 울어 가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애초에 부정을 추궁 받고 싶지 않았다면 이따위 걸 받지 말았어야 했다. 더 근본적으로 따지자면, 출장간 사이 몰래 붙어먹는 짓도 하지 않았어야 했다. 서진우는 정서원의 나사 하나 빠진 사고방식을 억지로 되새기며 그에게 악의가 없었음을 상기시키려 노력했다. 멍청하고 유혹에 약해 이상현의 장난질에 쉽게 넘어가는 머저리 같은 그를 이해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젖은 뺨을 만져 주던 서진우가 몸을 일으킨다. 정서원이 놀라서 고개를 든다. 서진우는 소파에 주저앉은 정서원을 잠깐 바라보다가 한숨과 함께 몸을 돌렸다. “진, 진우야…….” 울먹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으나 서진우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화를 내다가도 울면 달래 주고, 혼을 내다가도 애원하면 들어 주고, 임신을 했더니 다정해졌던 서진우가 이젠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상실감이 명치를 때린다. 누군가 발목을 움켜쥐고 아래로 끌어당기는 듯 절망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대로 그가 등을 돌리고 떠나면 영영 끝일 것만 같았다. 정서원이 허둥거리며 소파에서 일어난다. 

“가지 마! 제발, 진우야아…….”

기우뚱 쓰러진 몸이 카펫 위에 자빠졌다. 폭신한 카펫이라곤 하나 부푼 배를 부닥친 몸은 금방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 통증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정서원은 핑그르르 도는 시야를 겨우 다잡고는 손끝에 닿은 서진우의 바지 자락을 꼭 붙잡았다. 가느다란 손이 더듬거리며 다리를 꽉 붙든다. 정서원은 곧장 기어가 간신히 붙잡은 다리를 양팔로 끌어안았다. 진우야, 잘못했어…… 애원하는 얼굴이 바지에 꾹 문질러진다. 떨리는 입술은 아무 곳이나 닿는 대로 입을 맞춰댔다. 서진우는 정서원이 유순히 입을 벌려 그를 받아들이거나 먼저 키스를 조르는 걸 좋아했다. 지금도 먼저 키스를 졸랐을 때처럼 눈매를 부드럽게 접고 웃어 준다면 좋겠다.

“진우야, 나, 나 예뻐했잖아…… 예쁘다고 했잖아…… 제발 계속 예뻐해 줘. 응? 응? 나, 애도 가졌잖아……. 진우야…… 제발.” 

정서원은 꼬리가 있다면 열심히 흔들 기세로 서진우에게 갖은 애교를 부렸다. 벽면만 바라보던 서진우의 시선이 겨우 그에게로 돌아왔다. 정서원이 원하던 부드러운 얼굴은 아니었다.

“씨발. 안 일어나? 정서원. 지금 애새끼 갖고 나 협박해?”

“자, 잘못했어. 진우야, 나 말 잘 들을게. 예쁜 짓만 할게, 시키는 대로 다 할게. 버리지 마, 나 미워하지 마…… 흐윽, 흑.”

“기만할 거면 패턴이라도 좀 바꿔보지 그랬어. 응? 하도 들어서 이젠 감흥도 없잖아.”

“나, 그냥…… 그냥, 예전처럼 묶어 주면 안, 안 돼? 그냥, 나 가둬 줘. 묶어 줘. 다 해도 되니까 나, 나 버리지만 말아 줘…… 진우야, 제발…….”

정서원이 다리에 꼭 매달린 채 눈물을 펑펑 쏟아 낸다. 미안해, 잘못했어, 안 그럴게, 다신 안 그럴게. 울음 때문에 뭉개진 발음으로 용서를 구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얼마나 세게 붙잡고 있는지 다리에 손톱이 박혀들었다. 서진우는 자신을 올려다보며 흐느끼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커다랗게 부푼 배를 바라보았다. 제발 버리지 말라는 애원도 들렸다. 복잡하게 꼬인 속을 풀어 주기보다는 진득하게 녹여 버리는 것들이었다. 무엇 하나 명쾌하지 않는데도 애써 다잡은 속이 녹아내려 모질게 굴 수가 없었다. 뿌리치지도, 안아 주지도 못한 채 한참 서 있기만 하던 서진우가 결국 한숨을 내쉰다.

“씨발…… 내가 등신이지.”

서진우는 제 다리에 매달려 있는 팔뚝을 붙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후들거리는 몸이 서진우의 손에 의지하여 간신히 선다. 정서원은 서진우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울음을 터뜨리며 품으로 기어들었다. 품에 콕 처박힌 고개에서 잘못을 비는 말과 서진우를 부르는 소리가 연신 새어 나왔다. 멋대로 안겨든 몸은 혹한에 홀로 던져진 것처럼 달달 떨리고 있다. 서진우는 등을 안아 주려다 말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다가 손을 거뒀다. 자꾸만 맘이 약해졌다.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고 싶은데 숨이 넘어갈듯 우는 꼴을 보자니 그럴 수가 없었다. 정서원은 늘 그가 제대로 화를 낼 수도 없게 만들었다. 서진우는 달달 떨리는 몸을 안아 주었다.

“진우야, 가지 마, 잘못했어. 나 버리지 마아…….”

“내가 형을 어떻게 버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애…… 나 버리지 마. 잘못했어…….”

“그만 울어. 응? 화 안 낼게. 내가 심했어.”

큰 손이 웅크린 등을 천천히 쓸어 준다. 서진우는 동그란 가마에다 여러 번 입술을 맞추며 정서원이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떨리는 몸은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이상하다. 서진우는 제 품으로 파고든 몸을 억지로 떼어 내고는 정서원을 바라보았다. 발개진 얼굴이 식은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으로 흠뻑 젖어 있다. 이마를 쓸어 보자 손바닥에 식은땀이 흥건하게 배어 나왔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서진우는 양손으로 정서원을 붙잡으며 자꾸 감기는 눈과 억지로 시선을 맞췄다.

“형. 왜 그래? 어디 아파, 배?”

“아니, 아냐…… 나 괜찮아, 진우야…… 안 아파…….”

“씨발, 거짓말하지 말고!”

“……배, 배가…….”

떨리는 손이 크게 부푼 배를 짚는다. 서진우는 무엇 때문에 화를 냈었는지도 잊을 만큼 순식간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불길한 상상이 벙벙한 머릿속을 스친다. 서진우는 소파에다 정서원을 앉히고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잖아도 심약한 그를 너무 심하게 몰아붙였다. 임신 중인데, 가뜩이나 몸도 안 좋은데. 겁이 많은 그를 알면서도 무섭게 만들고 말았다. 

119를 입력하던 손끝이 떨린다. 빨리 올까? 그사이에 더 큰일이 나면? 서진우는 곧장 테이블 위 차키를 집어 들었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보다는 직접 운전해서 옮기는 게 빠를 것 같다. 서진우가 늘어진 몸을 가뿐히 안아 든다. 울음기가 잦아든 얼굴은 어느덧 파리하게 질려 가고 있었다. 이러다 잘못되기라도 할까 불안해서 눈을 못 떼겠다. 

“조금만 참아, 응? 병원 갈 거니까.”

“나, 진짜…… 괜찮은데…… 귀찮게, 해서 미안해…….”

“그런 말 하지 좀 마. 어?”

아직도 떨림이 잦아들지 않는다. 송골송골 맺히는 식은땀도 그대로였다. 주차장에 도착한 서진우는 바로 차 문을 열고 정서원을 눕혔다. 자세가 바뀌자 통증이 심해졌는지 정서원이 서럽게 흐느낀다. 괜찮다는 말만 하던 입술에서 처음으로 아프다는 소리가 새었다. 서진우가 자신을 꼭 붙잡는 손을 맞잡아 주었다.

“병원 갈 거야. 형 괜찮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흐으윽……. 흑. 으응, 응.”

서진우는 창백해진 얼굴에다 입을 맞춰 주고는 운전석에 올랐다. 시동을 거는 손이 떨린다. 불안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한 그가 다시금 핸들을 틀어쥔다. 큰일이 아니어야만 했다. 어떤 일이든 정서원에게 티끌만큼의 해도 끼치지 못하는 일이어야만 했다. 서진우는 그 어느 때보다 격동하는 가슴을 느꼈다.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는 머릿속이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생각할수록, 잠깐이나마 등을 돌렸던 순간이 믿기지 않을 만큼 숨이 죄였다. 어차피 놓지도 못할 주제에, 흉내라도 내보자고 했던 게 우스운 꼴이 되고 말았다. 

간신히 떨림을 진정시킨 서진우가 시동을 건다. 둘을 태운 차가 주차장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 * *

다행히도 그가 상정한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태동 검사를 하고 피검사와 초음파까지 받게 한 서진우는 모든 검사 결과가 양호하자 그제야 검사에 대한 의심을 거두었다. 정서원에게도, 아이에게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다만 자궁 수축과 조산기가 있어 입원하여 경과를 보는 게 좋겠다는 소견이 나왔을 뿐이다. 서진우는 도저히 맘을 놓을 수 없어 정서원에게서 눈을 뗄 수도 없었다. 배를 부여잡은 채 낑낑거리는 정서원은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보였다. 마른 팔에 링거를 매달고 있는 모습도 몹시 나약해 보여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추궁 몇 마디 했다고, 잠깐 등을 좀 돌렸다고 이렇게 무너지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 정도로 연약해져 있을 줄은 몰랐다.

무조건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가장 좋은 특실에 입원시킨 서진우가 가물거리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정서원을 조심스레 쓰다듬는다. 정서원은 다정한 손길이 좋아서 늘어지려는 의식을 억지로 다잡았다. 

“……진우야…….”

“응.”

“안, 갈 거야……?”

“형 두고 어딜 가.”

“진짜……?”

검사를 받는 중에도 옷자락을 잡고 놔주지 않았던 정서원이 재차 묻는다. 서진우는 잡은 손을 살짝 끌어 입을 맞췄다. 기력이 다 빠진 손이 꼭 버들잎 같았다. 

“옆에 계속 있을 거야. 형이 싫다고 해도 붙어 있을 거니까 푹 쉬어.”

“……으응. 나 때문에 괜히, 고생하게 해서 미안…….”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자. 응? 그래야 내가 마음을 놓지.”

가물가물 깜빡이는 눈에 눈물이 고인다. 정서원은 잠들기 싫은 눈치였으나 겨우 긴장이 풀린 몸은 수마에 잠기고 있었다. 

“……가면 안 돼…….”

“그래.”

“……가지 마…….”

가지 말라는 말만 반복하던 정서원이 겨우 잠들었다. 서진우는 미동도 없이 잠든 그를 바라보다 색색 숨소리가 나기 시작하자 비로소 안심했다. 살결에 닿을 듯 말 듯 조심스러운 손길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 준다. 자세히 보니 펑펑 우느라 발긋해진 눈가에 눈물이 말라붙어 있다. 눈물 한 번 닦아 주지 못했던 게 그제야 맘에 걸린다. 

‘이상현이 개수작 부릴 거 예상 못 한 것도 아니었는데.’

호시탐탐 잡아먹을 기회만 노리고 있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단지 마냥 얌전한 것 같다가도 뒤를 캐 보면 전혀 딴짓을 하고 있는 정서원을 발견할 때마다 속이 탔다. 이미 틀어진 신뢰 관계에서 새삼 배신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가 자신을 엿 먹이려는 의도가 없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렇다. 참 공교롭게도 정서원에게는 늘 악의가 없었다. 단지 천성이 지나치게 낙관적인 탓에 남을 쉽게 믿고 깊이 생각지 않는 버릇이 들어 있을 뿐이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늘 생각이 짧았다. 누군가 강하게 밀어붙이면 휩쓸리고 마는 우유부단함까지 가졌으니 간수하기에 이토록 까다로운 사람도 없었고, 꾀어내기에 이토록 수월한 사람도 없었다. 

서진우는 손끝으로 정서원의 눈가를 쓸어 주었다. 뜨끈한 체온이 옮겨 붙는다. 이 눈에 반짝반짝 이채를 띤 채로 바라볼 때면 정서원에게 오직 저밖에 없다는 착각마저 들곤 했다. 하지만 그건 외도를 처음 발견했던 무렵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눈을 하고서는 외롭다며 다른 놈을 만나고 다녔다. 그러니 의심이 된다. 믿을 수가 없다. 마음 같아서는 차라리……. 서진우가 한숨을 토한다.

“가두면 시들고, 놔주면 딴 짓하고. 내가 형을 어떻게 해야 돼, 응?”

그는 그렇게 속삭이면서도 잠든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정서원이 애를 지우는 법까지 찾아봤던 건 다소 충격이었다. 불안해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였을 줄은 몰랐다. 지금껏 혼자 끙끙 앓았을 걸 생각하니 유독 우울해하던 모습이 이해가 된다. 그게 안쓰럽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했다. 갖가지 생각이 드는 속이 복잡스럽게 엉긴다. 

한참 정서원을 바라보던 서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잡힌 손을 보고는 그만둔다. 그는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고는 무수히 쌓인 메시지에 답장을 보냈다.

* * *

정서원은 꼬박 하루를 잤다. 중간중간 추가 검사를 하느라 잠을 설쳐 제대로 잠들지 못한 탓이 컸다. 아침과 점심을 물리고 오후 늦게야 겨우 눈을 뜬 정서원이 습관처럼 서진우를 찾는다. 다행히 서진우는 자리를 뜨지 않고 옆에 있어 주었다. 잡힌 손을 꼭 잡으며 흐릿한 눈을 깜빡이던 그가 서진우를 보고는 깜짝 놀란다. 어제만 해도 말끔하던 얼굴에 반창고가 여러 개 붙어 있었다. 정서원이 놀라 손을 뻗자 서진우는 친절하게도 허리를 숙여 주었다.

“일어났어? 몸은 어때. 괜찮아?”

“진우야, 너…… 얼굴이, 왜, 왜 그래? 누구랑 싸웠어?”

“아…… 이거. 괜찮아. 형은 신경 안 써도 돼.”

걱정하던 얼굴에 철렁 슬픔이 스친다. 상처를 매만지던 손이 제 주제를 깨닫고 오므라들자 외려 서진우가 붙잡아 뺨에 갖다 댄다. “그렇게 상처받으면 내가 맘이 아프잖아.” 속삭이는 그는 아주 부드러운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정서원은 서진우가 자신에게 아직 화가 난 건지 풀린 건지 감이 오지 않아 잡힌 손을 그대로 두었다. 다만 시선이 조금 빗겨났다. 서진우가 얌전한 얼굴에다 입을 맞췄다.

“배고프지.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는데.”

“……응…….”

“일단 밥부터 먹자. 기운이 하나도 없네. 속상하게.”

서진우는 갓 일어난 정서원에게 물을 떠다 주고, 밥을 떠먹여 주고, 편히 소변을 볼 수 있도록 화장실에선 성기까지 잡아 주었다. 수치가 안정되면서 검사는 끝났고, 링거의 내용물도 바뀌었다. 그 모든 변화가 이루어질 때 잠에 푹 빠져 있었던 정서원은 제 몸 상태가 어떤지 알 수가 없어 조금 불안해졌다. 딴딴해진 배가 속에서부터 강하게 땅기는 듯한 통증은 링거를 맞은 후 잦아들었지만 정작 배에 들어앉은 애들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잘못된 건 아니겠지? 그럼, 붙잡을 명분도 없어지는데…….’

물어보고 싶었지만, 얼굴에 난 상처의 이유조차 얘기해 주지 않는다. 정서원은 하룻밤 만에 아주 멀어진 서진우를 보자 가슴이 찌릿찌릿 저렸다. 다 제 잘못이었다. 몇 번이나 서진우의 말을 어겼으니 미움을 받는 것도 당연했다. 차라리 임신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어디든 매를 맞거나 벌을 서서 서진우의 화가 풀릴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을 텐데. 아이 때문이라도 곁에 남아 주는 서진우가 좋은지, 상벌이 확실하여 헷갈리게 굴진 않던 서진우가 좋은지, 정서원 스스로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다시 침대에 눕혀진 정서원이 우물쭈물 시선을 내린다. 기가 죽은 얼굴에 우울함이 어른거렸다. 옆에 앉은 서진우가 이마를 쓸어 주자 속눈썹이 천천히 들리며 눈동자가 드러난다. 서진우는 그 눈을 보며 물었다.

“아직도 아파?”

“……아, 아니. 그냥…….”

“그냥?”

“……그냥, 조금…….”

“속상해서 그렇구나. 그래서 이렇게 풀이 죽었어?”

서진우는 다정히 눈웃음을 지었다. 그가 앞머리를 걷어 내고는 드러난 이마에다 쪽 입을 맞춘다. 

“내가 남처럼 굴어서 슬펐어?”

“……응…….”

“우리 형은 쓸데없는 생각만 많네.”

“……미안…….”

방황하던 눈동자가 결국에는 푹 내리깔린다. 서진우가 다정히 달래 주었지만 그게 정말 다정함인지 아닌지 이제 구분이 되지 않았다. 호되게 혼이 나고 나니 그걸 알게 되는 것도 무서워졌다. 정서원은 울렁거리는 속을 억지로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베개에 고개를 묻었다. 웅크린 어깨를 서진우가 말없이 쓰다듬어 준다. 그 꾸준한 위로가 그나마 불안을 삭여 주어서 정서원은 훌쩍훌쩍 눈물을 흘리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선잠은 오래가지 못했다. 자그맣게 대화하는 소리가 귓가로 계속 흘러든다. 의사가 왔나? 잠결에 뒤척이던 정서원이 습관처럼 입을 벌린다. 

“진우야…….”

불렀더니 누군가 그의 옆에 다가와 앉는다. 뒤늦게, 다른 사람과 대화하던 진우를 부르는 게 심한 응석이란 걸 깨달았다. 그래도 정서원은 제게 다가온 온기를 놓고 싶지 않아 더듬더듬 손을 뻗었다. 손끝에 코트 자락이 감겼다. 외출을 했던 걸까. 색색거리는 숨결로 희미한 체취가 스며들었다. 눈을 감은 채 다시 잠에 빠질 준비를 하던 정서원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이상현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서진우처럼 얼굴에 반창고를 달고 있었다. 

“몸은 괜찮아요?”

“……네…….”

“잠깐 못 본 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됐네.”

정서원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따지자면 잠깐 못 본 사이에 얼굴에 반창고를 달고 온 이상현을 더 걱정스러워해야 하는 게 맞았다. 그는 정서원의 턱을 쥔 채 살살 돌려가며 얼굴을 살폈다. 살짝 긁힌 흔적이라도 있다면 할 수 있는 법적 조치는 다 동원하여 서진우에게서 떨어뜨려 놓을 생각인 걸 아는지 모르는지, 정서원은 그가 살피는 대로 그저 내버려 두었다. 

‘어디서 맞고 다닐 사람은 아닌데…….’

태평한 생각을 하는 입이 살짝 벌어졌다가 다물린다. 그러고 보니 서진우도 얼굴에 상처를 달고 왔었다. 우연이라기엔 절묘하다. 설마 둘이 싸웠나? 놀라 눈을 크게 뜨자 이상현이 소리 내어 웃는다. 그가 침대 위로 허리를 기울이더니 코끝이 닿는 거리에서 시선을 맞춘다. 그림자가 드리운 얼굴에 여유를 한껏 두른 미소가 떠올랐다.

“나 입 안쪽이 터졌거든요. 당신 애인한테 맞아서.”

“……진우가 때렸어요?”

“그러니까 당신이 핥아 줘요. 빨리 낫게.”

이해되지 않는 논리의 비약에 입을 살짝 벌렸던 정서원이 허둥거리며 입을 가린다. 이상현의 웃음이 진해졌다. 그러나 딱히 밀어낼 필요는 없었다. 바로 등 뒤로 다가온 서진우가 직접 그를 떨어뜨렸다. 

“개수작부리지 마.”

“이렇게 딱딱하게 구니까 서원 씨가 너 무서워하는 거야. 뭘 어쨌길래 병원까지 오게 만들어?”

“어어…….”

서로 노려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다. 이제는 병원에서도 싸우려나 보다. 정서원이 당황하여 몸을 일으키려다가 배가 꾹 당기는 느낌에 앓는 소리를 터뜨린다. 다행히 둘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한다. 자해 공갈단도 아닌데 아픈 몸이 감사할 지경이었다. 

“아직 아파? 의사 불러올까?”

“아니…… 그냥 조금 아픈 거야. 괜찮아.”

“괜찮은 거 맞아요? 애가 애를 가지니까 불안해 죽겠네.”

“……애 아닌데…….”

“하긴. 이렇게 야한 애새끼가 어디 있어, 그렇죠?”

“…….”

정서원은 대답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로 서진우가 물을 건네준다. 양손으로 받아 들려던 그는 팔에 링거가 주렁주렁 매달린 걸 깨닫고는 한 손으로 받아 들었다. 물을 마시는 동안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둘과 함께 있는 게 이토록 불편한 건 처음이었다. 

“출출하지 않아요? 서원 씨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는데.”

“아, 감사합니다……. 근데 배가 불러서…….”

“잘 자다 너 때문에 깬 거잖아. 형, 조금 더 잘래?”

눈동자가 불안하게 둘 사이를 배회한다. 아직 졸음기가 남아 있긴 했지만 잠들었다간 또 둘이 싸우기라도 할 것 같았다. 잘 보면 상처 처치가 비슷한 게, 아마 병원이든 그 근처든 싸우다 이곳에서 나란히 치료를 받은 듯했다. 상상만 해도 몹시 난감해진다. 정서원은 제 허물을 말미암아 발생한 모든 사태에 책임감을 느꼈지만 늘 그렇듯 제대로 된 해결법을 알고 있진 못했다. 

“아니, 나 그냥…… 안 자도 돼.”

그렇게 고집을 부린 정서원은 억지로 눈을 뜬 채 둘이 싸우나 안 싸우나 감시하다가, 얼마 못 가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색색 잠이 들었다.

* * *

미적미적 병원에 눌러앉은 지 딱 일주일이 되는 날이다. 그 곁을 서진우가 항시 지켜 주었고, 이상현은 매일같이 병문안을 와 매번 다른 선물을 안겨 주었다. 틈만 나면 으르렁대는 짐승 두 마리와 한 우리에 갇힌 기분이었으나 웬일인지 둘은 그날 이후 서로 알은 척도 않았다. 오히려 이유 모를 여유가 감겨 있어 정서원은 더욱 불안해졌다. 다 큰 남자 둘이서 주먹질까지 했던 게 무색할 정도였다. 이렇게 의젓한 사람들이 아닌데, 대체 어떤 합의가 오간 건지 모르겠다.

“몸은 좀 괜찮아졌어요?”

“그냥…… 조금요.”

“조금 괜찮은 걸로는 안 되는데.”

낮에 한 번 얼굴을 비쳤던 이상현은 저녁에 다시 찾아왔다. 호두파이를 손에 든 채였다. 때마침 서진우가 자리를 비운 때 찾아온 그는 아픈 정서원을 위해 손수 잘라다 입에 넣어 주었다. 아픈 건 배였지 손이 아니었다. 그나마도 요즘은 엄살이 태반이었다. 서진우에게 아주 좋은 버릇이 들여진 정서원은 떨떠름해하면서도 입술을 건드리면 얌전히 입을 벌렸다.

“제가 먹을 수…… 있는데…….”

“요즘은 잘 먹는 거 맞아요? 이렇게 먹여도 살이 하나도 안 찌네.”

“으음, 네…….”

“서진우가 얼마나 피를 말렸으면 임신했는데도 이래요.”

이상현은 링거가 연결되지 않은 팔뚝을 매만지며 걱정을 토로했다. 예전에 비해서 오히려 마른 것 같다며 주물럭거리는데 묘하게 간지럽다. 정서원은 시선을 피하며 입에 남은 파이나 우물거렸다. 입술을 다문 채 열심히 우물우물 움직이는 걸 한참 지켜보던 이상현이 외투 안쪽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낸다. 무얼 하나 멀뚱멀뚱 지켜보던 정서원은 조금 놀랐다. 케이스 안에 다이아가 큼직하게 박힌 반지가 담겨 있었다. 병원의 별것 없는 조명에서도 빛이 튀는 것처럼 반짝이는 섬세한 반지였다.

“맘에 들어요?”

“네, 예쁘네요.”

“다행이네.”

이상현은 아까까지 매만지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뻣뻣한 손가락에 고리가 닿았다. 놀라서 손끝을 오므리자 이상현이 가볍게 잡고는 반지를 끝까지 밀어 넣는다. 핸드폰을 받은 걸로도 그렇게 무섭게 굴었는데 반지를 들키면 또 무슨 소리를 들을지 덜컥 겁이 났다. 정서원은 반지를 빼려 했지만 이상현이 손을 꼭 잡고 놔주지 않았다. 그는 정서원이 말하지 않은 두려움까지 꿰뚫어 보았다.

“서진우 참 못됐죠? 당신 임신한 거 뻔히 알면서 입원까지 하게 만들고. 내가 문자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당신 잘못된 줄 알았잖아.”

“……이건, 그냥……. 넘어져서 그런 거예요. 진우 잘못 아니에요.”

“나 없는 동안 세뇌라도 받았어요?”

이상현은 기가 찬 듯 웃더니 자신이 끼워 놓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정서원은 깊숙이 들여다보는 눈빛이 무서워서 시선을 피했다.

“사실 임신한 것도 싫잖아요. 그런데 서진우가 좋아하니까 참는 거고. 감금당하는 것도 자기가 잘못한 거라면서 참고. 이게 정상은 아닌 건 알죠?”

“……별로 그러지는…….”

“봐, 이제는 나한테도 싫은 소리 못 하잖아.”

우아하게 뻗은 손가락이 뻣뻣하게 굳은 손가락을 어루만지고 있다. 이상현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자신과 시선도 마주하지 못하는 정서원을 바라보았다. 부채꼴로 펼쳐진 속눈썹이 푹 내리깔린 채 삼박거렸다. 예전에는 맹한 주제에 성질은 있어서 건드리는 재미가 있었다면 이제는 아주 순한 관상초를 보는 기분이었다. 식물에 팔다리가 달려 있진 않으니까.

“정말 나가고 싶지 않아요?”

“……네…….”

“서원 씨가 원하면 나갈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어요.”

“…….”

정서원이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젓는다. 그럴 것이라 예상했기에 이상현은 더 되묻지 않았다. 다만 조금 안타까워졌다. 그때 정서원이 제 발로 기어들어 오는 걸 기다릴 필요가 없었는데. 이렇게 체념도 순응도 빠른 사람인 줄 알았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서진우는 그보다 정서원을 더 잘 알고 있었다.

이상현이 만지작거리던 손을 떼어 낸다. 정서원은 온기가 남은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내어 이상현에게 내밀었다.

“가져요. 이번에는 서진우 주지 말고.”

“……들키면 혼나는데…….”

“그러니까 잘 숨겨야죠. 폰보다는 작잖아. 이것도 못 숨기진 않죠?”

어디다 숨기지? 그냥 진우에게 솔직하게 말할까? 하지만 말했다가 더 혼나면 어쩌지…… 정서원은 손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반지를 난감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한참 고민하던 그가 반지를 베개 밑에다 밀어 넣자, 이상현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까 들키지. 지금 엄마 몰래 야한 책 숨겨요?”

“……둘 데가 없단 말예요…….”

몹시 억울한 듯 항변하는 그에게 이상현은 고민하는 척을 하더니 당분간 들키지 않을 만한 곳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아주 친절하게 도와주겠다고도 속삭였다. 물론, 그곳은 신체 내부였기 때문에 정서원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세상 어느 누가 그런 곳에 숨길 생각을 하는지 모를 일이다. 정서원은 한동안 태만하던 머리를 열심히 굴려 이상현이 만족할 만한 장소를 떠올린 후에야 가랑이를 가린 손을 떼어 낼 수 있었다.

* * *

퇴원이 미적지근하게 미뤄지고 있다. 아프다며 꾀병을 부리는 정서원 덕분이었다. 그는 모든 검사 결과가 양호하게 나왔음에도 배가 당기는 것 같다며 아픈 척을 했다. 서진우는 정서원이 그럴 때마다 부드럽게 끌어안고 달래 주었다. 그날 무섭게 화를 내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라 정서원은 더더욱 퇴원하고 싶지가 않아졌다. 더는 아프지 않은 그에게 어떤 식으로 굴지 생각만 해도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이제는 울어도 봐주지 않는 데다 용서를 빌어도 봐주지 않는데 어떤 방법으로 붙잡아야 좋을지도 막막했다. 퇴원을 하면, 혹은 아이를 무사히 낳으면 정말 버려지지 않을까? 정서원은 함께 잠을 드는 순간에도 옷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진우야, 안 갈 거지……?”

“응.”

“나…… 안 버릴 거지?”

“응, 안 버려.”

매일 밤마다 원하는 답을 들으면서도 정서원은 안심하지 못했다. 끝까지 옆에 있어주는지 확인하기 위해 서진우가 잠들기를 기다렸으나 매번 먼저 잠드는 바람에 확인할 수 없었다. 덕분에 아침에는 화들짝 놀라며 일어나기도 했다.

정서원은 눈을 감고 머리를 말려 주는 서진우의 손길을 느꼈다. 배가 커져 거동이 불편한 정서원을 서진우는 병원에서도 아주 살뜰히 보살펴 주었다. 특실에 입원한 게 다행이었다. 제 의지만으로는 소변을 보지 못해 애인에게 잡아 달라고 조르는 꼴을 누군가에게 들켰다면, 다 낫지 않은 상태에서도 펑펑 울며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생떼를 부렸을 것이다. 바깥사람들과 접촉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는 제 상태가 정상적이진 않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서진우가 이젠 보송보송하게 마른 머리를 살살 빗어 주기 시작한다. 꾸벅꾸벅 졸던 정서원은 문득 저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형, 오늘은 좀 어때. 괜찮아?”

“응……. 아, 아니. 나…… 조금, 아픈 것 같아…….”

“아직도 아파? 어떡하지, 병원을 옮겨야 하나.”

“……그치만, 그렇게 심하진 않고….”

그냥, 조금만 쉬면 나을 것 같아…… 거짓말은 아무리 해도 입에 붙지 않았다. 정서원은 변명이 길어질수록 아귀가 맞지 않는 것 같아 결국 입을 다물었다. 머리를 빗어 주던 서진우가 웃음을 터뜨린다. 그는 둥근 가마에다 입을 맞추고는 웅크린 어깨를 안아 주었다. 포근함이 몸을 감쌌다. 정서원은 간질간질한 충만감에 안정을 느끼며 몸을 감싼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형.”

“으, 응.”

“우리 친자 검사 신청했어. 곧 결과 올 거야.”

서진우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뚝 멈춘다. 색색 안정적으로 내뱉던 숨도 잠깐 멈추었다가, 서진우가 가슴을 쓸어 주자 천천히 토해지기 시작한다. 그는 한순간에 뻣뻣하게 굳어 버린 정서원을 다정히 달래 주었다. 그러나 속삭이는 말마저 달콤하진 않았다.

“형 불안해했잖아. 그래서 애 떼는 법 찾아본 거 아니야?”

“지, 진우야…… 나…….”

“이번에 확실하게 결과 나오면 형도 안심될 거야. 쓸데없는 생각도 안 들고.”

“…….”

품에 쏙 안긴 몸은 미동도 없다. 정서원은 질끈 눈을 감은 채로 감긴 눈두덩을 떨고 있었다. 퍽 안타까운 모습이라 서진우는 더 다정히 안아 주었다. 그가 안심할 수 있도록 머리를 쓸어 주고 귓바퀴와 목덜미에 차례로 입을 맞춰 주기도 했다. 그러게 왜 제 말을 안 믿었는지 모를 일이다. 서진우는 옆에 앉으며 아직도 웅크리고 있는 몸을 제게로 돌렸다. 정서원이 순순히 딸려 왔다.

“형은 싫어?”

“……아, 니…….”

“그럼 웃어야지. 좋은 일이잖아.”

“……으응…….”

정서원은 딱딱하게 굳은 입술을 억지로 움직여 웃는 흉내를 냈다. 뺨을 잡혀 고개를 돌릴 수도, 시선을 피할 수도 없었다. 난생처음 웃는 것처럼 어설픈 웃음이었음에도 서진우는 “웃으니까 예쁘네.”하고 애정을 속삭였다. 무서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정서원은 글썽거리는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뜻대로 되진 않았다. 뺨을 감싼 손이 속눈썹을 살살 쓸어 준다. 젖은 눈가에 입술이 떨어졌다.

“그렇게 기뻐? 진작 할 걸 그랬다. 내가 형 맘을 너무 몰라 줬네.”

대답을 하면 목소리가 떨릴 것 같아서, 정서원은 그저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다음 날, 정서원은 드디어 퇴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배가 아픈 것 같고, 머리가 어지러운 것 같다던 사람이 아침이 되자 모든 증상이 없어졌다. 정서원은 병실에 있는 2주 동안 더 부른 배를 감싸 안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검사에 대해 듣는 순간부터 종일 그 걱정만 하느라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나지 않았다.

“그게 그렇게 좋았어요? 아픈 게 싹 나았네.”

저녁에 찾아와 퇴원 선물이랍시고 브래지어를 내민 이상현이 눈매를 접어 웃는다. 정서원은 대답하고 싶지 않아 억지로 손에 쥐어진 A컵 사이즈 브래지어만 바라보았다. 멍한 중에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난다. 가슴을 집요하게 괴롭히던 그 때문에 퉁퉁 붓고 아팠던 날, 싫증을 내자 브래지어를 사 주겠다며 느물거렸었는데. 결국에는 정말 받고 말았다. 차라리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멀쩡히 학교도 다니고 혼자 길을 맘껏 걸어 다닐 수도 있고, 혼자 뭐든 할 수 있었던 때로. 다가올 앞일 따위 몽땅 접어두고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졌다.

이상현은 말없이 브래지어만 바라보는 그를 지켜보다가 손을 잡아 주었다. 옆에서 감시하는 서진우의 시선이 느껴진다. 제 것인 양 구는 서진우를 볼 때면 짜증이 치밀었지만, 어차피 오래가지 못할 자신감이었다.

“요즘 가슴이 좀 나온 것 같길래. 수유 브래지어래요. 나도 이런 건 처음 사 봐.”

“…….”

“그러고 보니 서원 씨 이거 차는 법은 알아요? 내가 알려 줄까?”

“개수작 부리지 마.”

“우리 진우 새끼 이렇게 속이 좁아서 어떡하나……. 걱정 마, 끼워 줄 테니까.”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벌써 배분을 논하고 있다. 정서원은 브래지어의 폭신한 패드를 괜히 손으로 눌러가며 울적함을 달랬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데 온갖 상념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이러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불안하고 초조한 맘이 내내 가라앉질 않아 뭐든 다른 것에 골몰하고 싶었다. 타개책으로 단 한 가지만이 떠올랐다. 푹 내리깔렸던 속눈썹이 들리며 불안에 젖은 눈동자가 드러난다. 정서원은 손끝으로 이상현의 손을 살그머니 감아쥐었다. 그리고, 제게로 끌어당겼다. 순순히 무너져 준 이상현이 울 것 같은 눈가를 쓸어 준다.

“상현 씨…….”

“응, 왜요.”

“이거, 차는 법…… 가르쳐 주세요.”

“……지금 나 유혹하는 거예요?”

정서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더니 넉넉한 상의를 주섬주섬 걷어 올리며 부른 배와 살짝 부푼 가슴을 그대로 내보였다. 햇빛을 제대로 보지 못한 새하얀 몸이 드러났다. 따로 옷자락을 쥐고 있지 않은데도 부풀어 오른 가슴에 상의가 걸려 내려가질 못한다. 정서원은 그 가슴 위에다 브래지어를 올려놓았다. 제대로 채워지지 않은 패드가 가슴 위를 자꾸 헛돈다. 언뜻 정서원 스스로 가슴을 주물러대는 꼴이었던지라 유혹하는 의도에 이토록 걸맞을 수 없었다. 노골적인 시선이 가슴에 맺힌다. 괜히 숨이 가빠진다. 정서원은 그대로 소파에 몸을 기대고는 유연한 다리를 가슴께까지 들어 올렸다. 팬티 한 장만 벗기면 당장 삽입하여도 이상하지 않은 자세다. 몸 곳곳으로 시선이 꽂혀든다. 야릇한 고양감이 등줄기를 탔다. 당장 박히고 싶었다. 지금보다 더 큰 자극을 받고 싶었다. 내내 그를 괴롭히던 상념 따위는 휘발된 지 오래였다. 정서원이 이상현의 옷자락을 살살 잡아끈다.

“얼른요…….”

“아, 미치겠네.”

이상현은 정서원이 올려놓은 브래지어째로 가슴을 감싸 쥐었다가, 젖내 나는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반듯한 콧대가 봉긋한 살을 지그시 누른다. 속살에 스치는 숨결이 좋았다. 정서원이 제 가슴에 파묻힌 이상현을 끌어안으며 헐떡인다. 본래 어떤 의도로 유혹을 하였는지도 이젠 희미하다. 활짝 열린 다리 사이로 기어드는 손길에 허리가 잘게 떨렸다. 그런데 문득 거친 손이 고개를 휘어잡았다. 정서원은 잔뜩 화가 난 서진우를 보고는 순간오르가즘 비슷한 전율을 느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쾌감이었다.

“흐으읏…….”

“씨발…… 형, 뭐 하는 거야. 내 앞에서 저 새끼한테 다리나 벌려?”

“무서워라. 서원 씨, 이런 거랑 어떻게 같이 살아요?”

조롱하듯 웃은 이상현이 살이 오른 가슴에다 입을 맞춘다. 정신을 차려 보니 다리 사이가 허전했다. 아주 노련한 그는 잠깐 사이에 팬티까지 벗겨 낸 모양이었다. 정서원은 부른 배 때문에 가까이 끌어당길 수 없는 게 몹시 아쉬워졌다. 매달려 안기고 싶어 손끝을 어쩌지 못하겠다.

“당신은 새끼 배서 이렇게 배도 부르고 젖도 나오는데, 저 새끼는 질투하느라 제대로 돌봐주는지 모르겠네.”

“으응, 아……. 아니야, 진우, 저한테 잘해 줘요……. 앗, 아…….”

“그래요. 잘해 줘서 밤중에 입원도 시키고, 조산할 뻔하기도 하고. 참 잘해 주네?”

커다란 손이 작은 가슴을 그러쥔다. 이미 젖을 도는 가슴을 몇 번이나 만졌던 이상현은 어렵지 않게 젖을 짜냈다. 분홍색 유두에 젖이 하얗게 맺혔다. 이상현이 도톰한 유두에다 혀를 대더니 이내 입술로 빨아들인다. 젖을 빠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정서원은 쾌감을 못 이기고 이상현을 끌어안으려다가 서진우에게 손까지 잡히고 말았다.

“아! 으응응……. 아, 아파…….”

그는 화가 단단히 난 서진우를 바라보며 얕게 흐느꼈다. 의식적으로 힘이 빠져나간 손은 오히려 간지러울 정도로 부드러웠다. 정서원이 도리어 그 손을 끌어당기며 서진우를 조른다. 눈물이 글썽거리는 얼굴은 서럽고 슬퍼 보였으나, 이유가 이유인 만큼 보채는 데에는 아주 탁월했다. 그는 끌어당긴 손에다 얼굴을 문질렀다. 애교가 듬뿍 밴 소리가 흘러나왔다.

“흐앙…… 앗! 으응, 진우야아.”

“…….”

“하자아, 응? 진우야 나, 하고 싶어…….”

서진우가 머리를 쓸어 올린다. 한숨이 샌 얼굴은 한결 풀어져 있었으나 분노와 비슷한 격정을 품고 있었다. 이상현이 웃음을 터뜨리더니 정서원을 살짝 안아 올려 서진우의 허벅지에 얼굴을 기대게 해 주었다. 가로누운 몸이 다시금 활짝 열렸다. 높게 들어 올린 한쪽 다리가 이상현의 어깨에 걸린다. 벨트가 끌어지고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정서원은 기대감 따위로 몸을 떨며 단단한 허벅지에다 뺨을 문질렀다. 서진우를 꼭 잡고 있던 손이 더듬거리며 바지춤으로 기어들었다. 바지를 내리고 커다란 자지를 붙잡자, 미끈거리는 아래에 묵직한 것이 닿았다. 이상현은 임신한 몸을 배려한 것인지 아주 천천히 들어섰다. 정서원이 자지를 붙든 채로 울음 같은 신음을 터뜨렸다.

“아……! 흐으, 앙, 아앙…….”

“오랜만에 해서 그런가……. 당신 속 왜 이렇게 좁아졌지, 응?”

“아으응! 상현 씨이, 더, 더 빨리……. 세게…… 으앙!”

“하아……. 너무 좁은데. 서원 씨 이제 두 개는 한 번에 못 넣겠어요.”

이상현은 너무 좁아서 아프다는 불평을 하면서도 정서원의 요구를 아주 착실히 들어 주었다. 더 빨리 해 달라면 빠르게 해 주었고, 세게 해 달라면 세게 박아 주었다. 수없이 몸을 섞어 왔던 탓에 이상현은 어디를 어떻게 해야 좋아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펠라를 시도할 여유조차 나지 않았다. 황홀감에 눈앞이 흐려졌다. 붙잡은 자지를 뺨에 문지르며 헐떡이던 정서원이 문득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주는 손길을 느끼고는 시선을 든다. 그리고 그는 서진우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빠르게 절정으로 떨어졌다. 오르가즘을 느끼는 하얀 몸이 바들바들 떨린다.

“기분 좋아, 형?”

“아응응…… 좋아, 너무 좋아아…… 진우야…….”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어요? 이렇게 좋아하는데, 응? 서러웠겠네.”

“네에, 슬펐어요…… 흑. 우울하고, 짜증 나서어…… 으응!”

여운이 가라앉은 몸에 다시금 자지가 드나들기 시작한다. 정서원은 발끝을 조이며 자지러지듯 흐느꼈다. 퍽퍽 박힐 때마다 이상현의 어깨에 올라앉은 다리가 팔락거리고 쇄골까지 올라간 브래지어가 흔들린다. 손바닥만 한 가슴이 찰랑거리는 건 당연했다.

“그럼 지금은, 좋아요?”

“네, 네에…… 너무 좋아요, 흐앙! 행복해애…… 앗, 아, 으앙.”

“그렇다는데 섭섭하겠다, 서진우?”

“딜도로 쓰라고 준 건데 성능이라도 좋아야지.”

눈물이 펑펑 샘솟는다. 둘의 신경전 따위에는 진작 관심이 꺼졌다. 정서원은 온몸을 채우는 짜릿함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놓고 싶지가 않다. 붙잡고 있던 자지가 손바닥 안에서 단단하게 기립하고 있다. 입에 가득 채우고 싶은데 자세가 잡히지 않아 애꿎은 콧잔등에 좆물이 진하게 묻었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물에서 알파의 체취가 잔뜩 풍겼다. 황홀함에 허벅지 안쪽으로 힘이 들어간다. 얼굴에 싸 달라고 할까? 입에도 싸 달라고 하고 싶다. 아랫배가 가득 찬 느낌이 들 정도로 빼지 말고 계속 싸 주었으면 싶기도 했다. 하나하나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애가 닳았다.

“빨고 싶어?”

“응, 응…… 빨고 싶어어……. 넣어 줘, 진우야…… 앙!”

“이렇게 욕심이 많아서 어떡하지, 우리 서원이.”

“미아안…… 앗, 으앙! 미안해애…….”

서진우는 친절하게도 정서원의 입 안에 직접 자지를 쑤셔 박아 주었다. 그것만으로 부푼 배 아래에 자리한 자지에서 찔끔찔끔 물이 샌다. 정서원은 어쩔 줄 모르고 응응 흐느끼다 소파를 꽉 붙들었다. 그 손을 이상현이 잡아 깍지를 낀다. 그러고는 마땅한 쓰임새도, 사용감도 없는 자지도 붙잡는다. 정서원이 좆을 문 채로 자지러졌다. 

“우으응! 응……!”

“또 질질 싸네. 어차피 씨도 없는 걸 왜 뿌려요? 응?”

깍지를 낀 손이 쾌감을 못 이기고 꾹 오므라지며 이상현의 손등에다 손톱자국을 남긴다. 이상현은 강하게 조여든 내벽 깊숙이에 허리를 튕겼다. 그럴 때마다 정서원은 열심히 물고 빨려던 입을 멈추고 자지러지는 소리를 흘렸다. 강렬한 쾌감을 느끼는 중에 아이를 둘이나 품은 배가 꿈틀거렸다. 깊숙이 처박고 있던 이상현은 정서원보다도 먼저 태동을 느꼈다. 그가 눈매를 접으며 부드럽게 웃는다.

“이러니까 박을 때마다 애들한테 뽀뽀해 주는 기분 나네……. 그렇죠?”

“응응, 우으응……!”

“미친 새끼…… 좆같은 소리 좀 하지 마.”

“진우야, 애들 다 듣는데 말 곱게 써야지. 안 그래요, 서원 씨?”

정서원은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입이 꽉 들어차 있기도 했고 정신이 없기도 했다. 둔해진 머리로는 과도하게 쏟아지는 쾌감을 감당하기에도 역부족이었다. 그저 다가오는 절정을 더 빠르게, 기분 좋게 느끼고 싶을 뿐이다. 

“내가 박아 주는 걸로는 부족했나 보네?”

얌전하던 엉덩이가 욕심을 못 이기고 살살 움직인다. 그와 동시에 나직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이상현은 깍지 낀 손을 제게로 당기며 탄력 좋은 몸에다 자지를 꽂아 넣고 흔들었다. 퍽퍽 소리가 나면서 가로누운 몸이 박히는 힘에 밀려났다가 당겨져 돌아오길 반복했다. 귀두만 간신히 삼키고 있던 좆이 입술에서 튕겨져 나오며 발그스름한 볼을 때린다. 정서원은 자유로워진 입으로 앙앙 흐느꼈다. 

“흐아앙! 상현 씨이, 앗! 아응, 좋아요……! 기분 좋아아……!”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응?”

“거기이…… 앙! 상현 씨가, 박아 주는 데가아, 서원이 보지가아…… 아! 으으응!”

어쩔 줄 모르고 흐느끼던 정서원이 곧장 절정에 다다른다. 깊은 안쪽에 진한 정액이 쏟아지는 게 느껴진다. 등줄기부터 정수리까지 찌릿찌릿하게 치솟는 쾌락을 못 견딘 몸이 움찔, 움찔, 한참을 떨렸다. 서진우의 허벅지에 고개를 묻느라 드러난 쭉 뻗은 목선은 유독 긴 오르가즘을 느끼는 내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아으응…….”

이상현이 삽입되어 있는 것을 빼내느라 움직이자 정서원이 또 신음을 흘린다. 꽉꽉 조여드는 내벽은 빼내는 몸짓에도 알아서 젖어들었다.

“서원 씨 보지는 이렇게 잘 물면서 입은 형편없어졌네. 내가 잘 가르쳐 줬던 것 같은데, 응?”

“하으으……. 죄, 죄송해요……. 기분, 좋아서…….”

“진우한테 사과해야죠. 형편없이 빨아서 죄송합니다, 하고.”

이상현은 그렇게 말하며 정서원의 고개를 서진우에게로 돌렸다. 정서원이 아직 쾌락에 흠뻑 취한 얼굴로 서진우를 바라본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얼굴에 흥분이 돌고 있다. 그는 순하고 얌전한 얼굴로 순종했다. 

“형편없이, 빨, 아서어…… 흑, 죄송합니다아…….”

“…….”

“너무 못해서 화났나 보네. 서원 씨, 당신 진우 화 풀어 줘야죠?”

정서원이 울먹거리며 쩔쩔맨다. 입술을 깨물고, 서진우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리다가, 벌어져 있던 다리를 더욱 활짝 열어 더듬더듬 아래로 손을 뻗는다. 무얼 하나 지켜보던 서진우는 헛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정액이 흐르는 구멍을 제 손으로 직접 벌린 정서원이 조르기 시작한 탓이다.

“진우야, 나, 나아…… 서원이 보지, 로는, 잘, 잘할 수 있는데…….”

그러더니 응석을 부리듯 발기한 좆에다 얼굴을 비빈다. 잠깐 감겼던 눈꺼풀이 올라가며 색욕이 그렁거리는 눈이 그를 향했다. 이상현에게 배운 것과 자신에게 배운 것을 아주 잘 활용해 먹는 정서원은 참, 여러모로 대단했다. 도저히 화를 낼 수가 없다. 그러나 정서원은 대답이 늦어지자 불안을 못 이기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화, 화내지 마아……. 응? 나, 상현 씨한테, 잘, 조인다고 칭찬받았는데……. 나, 걸레지마안, 진우 자지 잘, 조일 수 있는데…….”

이상현에게서는 웃음이, 서진우에게서는 한숨이 샌다. 기어코 서진우에게서 화를 이끌어 낸 정서원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눈물을 훌쩍거리다가 갑작스레 몸이 들리자 화들짝 놀랐다. 눈높이가 같아진 서진우는 사늘한 얼굴이었다. 왜, 왜 화를 내지……? 나름대로 화를 풀어 준답시고 노력하던 정서원은 무섭고 서러워져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가슴께에 올라앉은 양손이 꾸물꾸물 오므라졌다.

“진, 우야아……. 흑, 무서워……. 잘못했어, 화내지 마아…….”

“형이, 화난 거 풀어 주겠다며. 해 봐.”

짓씹는 듯한 발음이었다. 정서원은 겁에 질린 채 서진우가 반쯤 세워 준 몸을 일으켜 스스로 그의 다리 위에 올라탔다. 부른 배 때문에 마주 보는 자세를 할 수 없었다. 이상현을 바라보며 자지를 붙잡고, 푹 젖어 미끈거리는 구멍에 맞추자 허리를 내려앉힐 필요도 없이 자지가 처박혔다. 아찔한 쾌감이었다. 앞으로 무너지려던 몸을 이상현이 잡아 준다. 정서원은 이상현의 품에 몸을 기댄 채로 서진우에게 뒤에서 강하게 꿰뚫렸다.

“흐아앙! 아앙…… 흑, 진우야아, 아앙, 앙!”

“정서원, 제대로 해야지. 이래서, 씹, 화가 풀리겠어? 응?”

“미, 미안해애……! 아앙, 너무 커서어, 기분 좋아서어…… 히이잉.”

“허리 똑바로 세워.”

“응, 으응! 미안해…… 아! 으아앙, 진우, 흑, 아앙!”

진우가 갑자기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정서원은 무섭게 구는 서진우가 두려웠으나, 푹푹 박아 주는 대로 착실히 달아올라 앙앙 흐느껴댔다. 그리고 곧장 무얼 무서워했는지, 또 뭐가 서러웠는지도 잊을 만큼 기분이 좋아져 제대로 허리를 세우지 못한다고 엉덩이를 찰싹 얻어맞았다. 이미 엉덩이를 맞으면서 쌌던 기억이 있는 몸은 그것도 좋아 진탕 흐무러지고 말았다. 

“으앙! 앙, 진우야아, 좋아…… 그거 좋아아……!”

“엉덩이 맞는 게 좋아, 서원아?”

“응응, 좋아요…… 기분 좋아서어, 보지가 막, 막, 움찔, 거려…… 앗, 흐앙앙!”

명치를 꿰뚫는 쾌감이 내내 정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정서원은 앞뒤로 좆을 문 채 몇 번이고 절정에 이르렀고, 결과적으로는 서진우의 화를 풀어 주게 되었다. 이상현이 칭찬했던 만큼이나 서진우를 잘 물고 빨아 준 덕이다. 원하는 대로 얼굴과 입과 안쪽에 정액을 가득 받은 정서원은 흐릿한 머릿속으로 생각이란 걸 했다. 

‘진우 애가 아니면, 이것보다 더, 무섭게 화내겠지……? 그때는 어떡하지?’

지금처럼 화를 풀 기회라도 준다면 좋겠다. 그렇다면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서원은 몸을 닦아 주는 손길을 느끼다가 눈물이 흥건한 눈을 내리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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