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어쨌든,
정서원은 이상현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스스로 올라타 허리를 쓰는 법도, 키스만 나눌 줄 알던 입으로 빨아 재끼는 법도, 누군가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하는 섹스의 짜릿함도 모두 이상현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서진우와의 섹스가 달콤했다면 이상현과의 섹스는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그는 굴욕과 수치를 감수해야만 하는 상황 속에서 정서원을 괴롭히는 것을 즐겼고 언어폭력도 서슴지 않았다.
약간의 가학적 취미가 있는 이상현은 교과서에 나올 법한 단어만 즐겨 쓰던 정서원에게 단어의 다양성을 알려 줌과 동시에 그 활용법까지 알려 주기도 했다. 그리고 정서원은 바라는 것이 있을 때마다 열심히 배운 그 더러운 말들을 주워섬겼다. 그마저도 안 될 때는 입으로 몸으로 남자의 기분부터 풀어 주고 봤다. 섹스든 펠라든 한 발 빼고 난 남자는 퍽 너그러워지곤 했으니까. 그러니까, 막연하게 서진우도 그럴 것이라고 정서원은 생각했다.
제 나름의 노력이 서진우를 화나게 만들 줄은 몰랐다.
“읏, 우읍……!”
커다란 좆이 입 안을 마구잡이로 넘나든다. 서진우는 정서원의 머리채를 붙든 채로 허릿짓을 하며 목구멍까지 쑤셔 박았다. 그때마다 정서원은 생리적으로 차오른 눈물을 떨궈댔다. 앞머리까지 대중없이 붙잡힌 머리채가 괴로워하는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냈지만 서진우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짜증을 냈다.
“원하는 대로 입구멍에다 좆질 해 주고 있는데, 왜 또 질질 짜? 어?”
“으웁……!”
입으로 해 주겠다는 가증스러운 말을 내뱉던 정서원은 꽤나 능숙하게 좆을 물고 빨아댔다. 당초 흥분의 기미조차 없던 좆을 손으로 쓰다듬고 입술로 감싸며 세워 낸 것은 정서원이었다. 혀로 귀두와 선단 따위를 굴려대며 그를 올려다보던 정서원은, 서진우의 기분을 아주 좆같게 만들어 주었다. 그만큼 능숙했다. 서진우는 저와 같은 위치에서 정서원을 내려다봤던 남자가 따로 있었음을 직감했다.
- 형, 이런 거는 또 누구한테 배웠어?
짐짓 자상한 척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로 넘겨 주자 정서원이 좆을 문 채로 어물어물 웃었다. 섹스라곤 하나 모를 것 같은 단정한 얼굴로 핏줄이 사납게 곤두선 좆을 소중하게 문질러대는 정서원은 오히려 순진해 보였다.
- 기분 좋아, 진우야? 열심히 했는데…….
- 응. 잘 빨더라. 기분 참 좆같게.
서진우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머리채를 휘잡아 벌어진 입에 좆을 처박았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이따위 것을 누가 가르쳐 줬는지는 뻔한 일이었다. 서진우가 잠깐 한국을 떴던 두 달 동안, 숱하게 연락을 주고받았던 그 새끼일 것이다.
‘하필 골라도 그런 새끼를……!’
데이팅 어플에서 만났던 새끼들을 골라내 족치는 일 따위는 손쉬웠다. 지난 일주일간 좆 가볍게 놀린 새끼들을 죄다 분질러 놓는 데에 난항 따위 없었다. 허나 이상현은 달랐다. 가장 죽이고 싶은 새끼가 하필 섣불리 손댈 수도 없는 상대라니, 그와 이미 안면까지 있던 서진우로서는 더욱 좆같은 상황이었다.
“입에다 박히는 걸, 좋아하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 응? 그럼 씨발 형이 딴 새끼한테 배울 일도 없었잖아. 그치?”
정서원은 배려 없는 움직임에도 입을 열어 열심히 받아 냈다. 서진우는 머리채를 강하게 휘잡고 퍽퍽 박아댔다. 방금까지만 해도 귀엽게만 보이던 고분고분한 태도에도 불길이 치솟았다. 너무 소중해서 그는 손조차 못 대던 정서원이, 못 보던 사이 다른 놈들에게 다리를 벌렸고, 꾀어내는 법까지 제대로 배워 왔다. 곱씹을수록 기가 차 웃음이 터졌고, 분노가 들끓었다. 쓸데없이 풍부한 상상력은 이상현과 씹질 하는 정서원을 세세하게 그려 냈다. 상상 속 정서원은 지금처럼 울고 있거나, 그날처럼 좋다고 울고 있거나, 아니면 자신과 섹스 할 때처럼 발그레한 얼굴로 안겨들거나…… 씨발!
서진우는 아른거리는 잔상을 지워 내듯 좆질에 몰두했다. 정서원이 서진우의 허벅지를 잡은 채 쑤셔지는 대로 퍽퍽 흔들린다. 목구멍으로 파고드는 뜨거운 귀두에 자연히 눈물이 차오르고 떨어졌다.
“웁, 하으! 우읍……!”
“크윽, 씨발…….”
이윽고 서진우는 음모가 닿을 만큼 깊숙이 박아 넣으며 허리를 털었다. 목 깊이 쑤셔진 좆에서 왈칵 정액이 토해졌다. 뱉어 낼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사정하는 좆이 꿈틀거리는 게 입 안으로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정서원은 고인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서진우의 사정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머리채를 잡았던 손에 악력이 빠지고 있다. 사정의 여운은 누구라도 잠깐이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는 모양이었다. 정서원은 성이 난 허벅지 근육 따위를 어루만지며 여운에 휘감긴 서진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사정이 끝나자 입 안에서 느긋하게 좆을 꺼내었다. 아직 풀리지 않은 좆이 꺼덕거리며 볼을 건든다. 정서원은 그것을 붙잡고 ‘배운 대로’ 깨끗하게 뒤처리를 해 주었다. 다시 입술을 모아 열심히 빨아 재끼자 서진우가 머리채를 휘어잡던 손으로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준다. 정서원은 그가 눈꺼풀을 건드릴 때마다 눈을 찡긋거리면서도 기둥부터 귀두까지 깨끗하게 빨아 재꼈다. 요도에 고인 물까지 빨아먹고 나자 서진우가 이제는 속눈썹 따위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물었다.
“이상현한테 제대로 배웠나 봐?”
“…아는 사람이야?”
정서원이 뜸을 들이다 되묻는다. 서진우가 또다시 화를 낼까 약간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응. 존나 잘.”
“…몰랐어.”
“그랬겠지. 형이 알았으면 그 새끼랑 만났겠어?”
“…으응, 아니.”
딴 놈들과는 자도 서진우와 아는 사이라면 자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서진우는 나사 하나 빠진 듯한 그 사고방식에 열을 올리던 스스로가 새삼 우스워졌다. 예전부터 정서원은 똑같았다. 인간이 무리를 지으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타고난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감출 줄도, 그럴싸하게 꾸며 낼 줄도 모른다. 흑심을 품고 발라먹기에는 참 편리한 성격이었지만 그거야 딴 놈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서진우는 제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정서원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나이트가운 달랑 한 장 입혀 놓은 몸이 서진우의 눈치를 본다. 서진우의 시선이 벌어진 앞섶 안쪽으로 기어들었다. 붉어진 목덜미, 바싹 곤두선 젖꼭지, 축축하게 젖은 불룩한 다리 사이. 서진우는 발끝으로 정서원의 가슴을 살며시 짚었다. 그리고 밀어뜨렸다.
“아……!”
발기한 성기에 대뜸 발이 올라앉자 정서원이 비명 같은 신음을 냈다. 서진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발을 놀리며 비뚤어진 심술을 양껏 드러냈다.
“형은 입으로 박히면서 느낄 줄도 알아? 쑤셔 줬다고 질질 싸대는 것 좀 봐.”
“하으응, 읏……. 진우야…….”
“그래서……. 오늘 이렇게 앙큼한 짓을 한 이유가 뭐야. 응? 바라는 게 있었을 거 아냐.”
“앗, 아으응. 그냥, 그냥……. 아앙!”
속살이 언뜻 비칠 만큼 하늘거리는 천이 서진우의 발끝을 따라 매끈한 주름을 만들어 낸다. 젖어드는 천 아래로 흥분한 윤곽과 색이 어렴풋하게 드러났다. 발끝으로 가해지는 자극은 섬세하지 못했다. 아픔과 쾌감을 넘나드는 감각에 정서원이 정신없이 헐떡였다. 그러면서도 서진우를 밀어내지 않고 얌전히 자빠진 채 발길을 받는다. 쾌감에 축축하게 젖은 눈이 서진우에게 꽂혔다. 서진우는 재차 피가 몰려들면서 뜨거워진 좆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정서원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정서원이 살짝 허리를 휘며 흐느꼈다.
“흐으응……. 좋아, 진우야…….”
“왜, 형. 바라는 거 없어? 그냥 배운 거 한 번 써먹고 싶었던 거야?”
“아응, 아아니……. 네가 너무 안 와서, 너무, 외로워서……. 나, 나한테, 질린 줄 알고……. 아흐윽!”
사정하며 움찔대는 정서원을 보던 서진우가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우연한 말 몇 마디로 그를 다루는 정서원이, 그 말 몇 마디에 끓어오르던 질투가 잦아드는 스스로가 우스워서다. 서진우는 냉랭할 만큼 무심하게 일갈했다.
“일어나.”
“하아, 읏…….”
제대로 일어나질 못하는 정서원을 붙잡아 일으킨 그가 다짜고짜 테이블에 엎어뜨린다. 대충 밀어 뒀던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놀란 정서원이 손을 뻗어 그릇들을 끌어안자, 뒤에서 나이트가운이 걷히고 곧장 삽입이 시작됐다.
“아……!”
서진우는 커다란 귀두부터 쑤셔 넣고는 단숨에 끝까지 짓쳐 들었다.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비명 같은 신음이 흘렀다. 목구멍까지 쑤셔대던 움직임에도 순종하던 정서원이 고개를 내저으며 흐느꼈다.
“아파, 진우야……! 아, 흐읏!”
“씨발, 형……. 정서원, 서원아…….”
묻고 싶고, 추궁하고 싶은 것이 아직 산더미였다. 그가 정서원을 조금만 덜 사랑했더라도 더 맘껏 몰아붙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원래부터 그다지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울고불고 애원하던 놈들에게도 전혀 들지 않았던 측은지심이 왜 이럴 때만 넘쳐나는지. 아마 앞으로도 계속 이럴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불쾌한데도, 가슴 한구석이 뜨겁게 달궈지는 느낌이었다.
서진우는 얌전한 정서원의 안으로 파고들면서도 진한 패배감을 느꼈다.
* * *
서진우는 오랜만에 품는 몸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화풀이처럼 시작되었던 섹스는 점차 다정해지고 부드러워졌다. 발긋한 귓가부터 목덜미, 박을 때마다 움찔거리는 완만한 등줄기, 빳빳하게 세운 젖, 그리고 한 번 써 보지도 못하고 물만 질질 싸지르는 좆까지. 그는 곳곳을 어루만지며 정서원의 성감을 끌어올렸다. 테이블에 짓눌린 채 전희도 없이 그를 받아들여야 했던 정서원으로서는 반가운 변화였으나 끊이지 않는 쾌락은 사고마저 날려 버렸다.
“앗, 아. 으응……!”
살갗만 간질이던 나이트가운은 이미 바닥을 나뒹굴고 있다. 정서원은 몇 번째인지도 가물가물한 교합에 맥없이 헐떡였다. 서진우의 어깨에 간신히 둘러놓은 팔이 자꾸만 미끄러지려들었다. 떨어질까 두려워 허리를 감싼 다리를 조여 매자 예민한 배 속이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러잖아도 매달린 자세 탓에 깊숙이 박혀있던 좆이 배 속으로 선명히 그려지는 것 같았다.
“하으, 그만……. 힘들어, 앗, 히끅.”
힘들다면서 아래는 힘껏 조여 문다. 서진우가 묵직한 숨을 토하더니, 제게 매달린 정서원을 꽉 붙잡아 받치고는 허리를 쳐올렸다. 그는 마치 정서원의 입에서 외로웠다는 말이 다시는 안 나오길 바라는 사람처럼 굴었다. 고집스럽고 끈질겼다. 정서원은 쳐올리는 대로 흔들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떨어질까 조마조마한데도 계속되는 섹스로 열린 몸은 쑤셔지는 족족 부지런히 쾌감을 일궈냈다. 야릇한 긴장감이 발가벗은 몸을 감쌌다. 정서원은 매달린 등짝에다 손톱자국을 내며 길게 신음했다.
“하아! 진우야아 힘들어, 제발, 침대에서……. 응?”
“침대로 가서 박아 줘?”
“으응, 응! 이거 말고…… 아흐응!”
조르고 보채는 짓이 아주 일품이다. 힘들다며 싫다는 말을 조잘대는 얼굴은 모순되게도 쾌락에 한껏 젖어 있었다. 서진우는 가늘게 떨리는 턱에다 키스하며 정서원을 둘러멘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발, 한 발 옮길 때마다 정서원이 앓는 소리를 낸다. 끝까지 삽입된 좆 끄트머리가 가장 짜릿한 극점을 문질러댔다. 결국 그는 침대에 당도하기도 전에 절정에 올랐다.
“아, 아아…….”
정서원은 고개를 꺾은 채 흐느꼈다. 욕심껏 좆을 삼킨 구멍이 움찔움찔 선단을 조여 문다. 기분 좋다고 온몸으로 흐느끼는 정서원을 서진우가 반들거리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눈빛에 욕망이 득실거렸다.
“기분 좋았어? 박아 주지도 않았는데 갈 만큼?”
“응, 응…… 좋아…….”
“이렇게 밝혀서 어떡하지, 형?”
“미안해애…… 근데, 너무 좋아서…….”
서진우가 그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히며 몽롱한 얼굴에다 키스한다. 이마, 눈썹, 눈꺼풀, 뺨, 콧대, 입술, 턱. 가리지 않고 영역 표시를 하듯 입술을 찍어댄다. 정서원은 무작정 퍼붓는 키스조차 황홀한지 어깨를 끌어안아 먼저 입술을 맞대었다. 생명줄처럼 부여잡고 있느라 내내 허리를 감싸고 있던 다리가 나른한 여운과 함께 풀렸다. 서진우가 나른하게 풀린 다리를 붙잡으며 녹진녹진한 안으로 다시 짓쳐들었다. 깊은 안쪽까지 파고든 좆이 매섭게 부풀기 시작했다.
“으응……!”
입술로 가로막힌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샜다. 눈을 감은 채 감미롭게 키스하던 정서원이 조금은 원망스러운 듯 서진우를 바라본다. 도망치고 싶어 하는 눈치이기도 했다. 서진우가 찡그린 코끝에 달래듯 키스한다.
“더 기분 좋게 해 줄게. 형 그런 거 좋아하잖아, 응?”
“진우야, 나 힘들어…….”
“형이 내 좆 물고 안 놔주는 걸 어떡해. 봐, 지금도 씹어대고 있잖아.”
“아으응, 싫어……. 이거 아프단 말야…….”
서진우는 얕게 좆질 하며 울먹이는 반응 따위를 들여다보았다. 박아 넣고 흔들 때마다 솔직하게 무너지는 표정이 좋았다. 기분을 풀어 준답시고 얌전히 받아들이는 것도 예쁘다. 그걸로 서진우의 기분이 풀리리라 생각하는 단순한 정신머리도 귀여웠다. 정말 섹스로 제 기분을 풀려면 몇 년은 나가지 않고 다리나 벌리고 있어야 할 텐데.
서진우가 붙잡던 다리를 놓고 시트를 배회하는 손을 깍짓손으로 잡는다.
“나 사랑한다고 해 줘.”
“으응…… 사랑해…….”
“응, 나도.”
서진우는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말하는 정서원을 바라보며 제 정액으로 흠뻑 젖은 속살을 갈랐다. 갈증은 노팅으로도 가라앉지 않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좆이 정서원의 안에서 몸을 부풀리며 씨를 쏟아붓는다. 무르익다 못해 흐무러진 정서원이 헐떡이며 몸을 뒤척인다. 도망치려 드는 부질없는 몸짓이 사랑스럽다. 개처럼 혀끝을 물고 흐느끼는 입술을 이로 물고 혀로 빨아 올렸다. 그가 힘들다며 보채는 소리가 혀를 빨아 재끼는 입술로 스며든다. 서진우는 곧장 울 것 같은 정서원을 정성껏 보듬었다. 지난 일은 몽땅 잊은 듯 다정하고도 일방적인 위로였다.
* * *
서진우는 잠든 정서원을 끌어안은 채 비서에게 문자를 보냈다. 정서원이 입을 만한 옷을 가져오라는 주문이었다. 그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겸사겸사 다녀오고 싶었지만 웬일인지 몸을 일으키려고만 하면 칭얼댔다. 덕분에 일어나서도 한참 동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혼자서는 잠도 못 자고. 내가 하나하나 챙겨 줘야 돼, 형?”
서진우는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매만지다 입을 맞췄다. 정서원이 몸을 뒤척이며 품으로 파고들었다. 지난 며칠의 방치가 먹히기는 했는지 잠들어서도 애착을 떨어대는 모습이다. 서진우는 밝은 햇살을 받으면서도 잠에서 깰 줄 모르는 정서원을 한참 바라보았다.
근 며칠 동안 정서원은 밤만 되면 기대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곤 했다. 얄팍한 속으로도 죄책감은 느끼는지 말은 못 하고 눈치만 보는 것이 퍽 우스웠다. 모른 척했더니 앙큼한 짓으로 꾀어내려 들었다. 어떻게든 비위를 맞추겠다고 무식하게 박아대는 몸짓에 허리를 흔들던 모습이 훤했다. 다그치면 다그치는 대로 이상현과 놀아났노라 미련하게 대답하기도 했다. 부정은 저질러도 거짓말은 고할 줄 모르는 순진한 성격이 미련하기 짝이 없었다.
정서원 앞에서 욕심껏 굴어도 되는 상황은 영 익숙해지지 않는다. 정서원의 사소한 행동에서 다른 놈의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눈앞이 시뻘개졌지만 그뿐이었다. 욕설을 내뱉고 함부로 대해 봤자 그는 진심으로 모질 수 없었다. 곱씹을수록 두 달 전의 선택이 내내 후회만 됐다.
“형 혼자 두지 말 걸 그랬지?”
잠든 입은 대답이 없다. 서진우는 볕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옆선을 손끝으로 찬찬히 쓸었다. 애틋함과 질투를 오가는 가슴이 뻐근했다.
서진우는 품속의 정서원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를 꼭 붙들고 있던 손이 일어나는 서진우를 따라 올라갔다가 떨어졌다. 서진우가 덩그러니 떨어진 손을 곱게 놓아주고는 방을 나섰다.
침대로 자빠뜨린 후에도 펑펑 울 때까지 사정을 시키느라 정서원은 혼절까지 했다. 차마 표출하지 못했던 질투가 짓궂은 장난으로 발전했었다. 덕분에, 어젯밤은 제 침실로 데려와 재웠다. 몇 주든 몇 달이든 맘이 내킬 때까지 내보내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정서원은 항상 그의 모든 결심을 손쉽게 무너뜨렸다. 서진우의 감정에 질투, 분노, 집착, 그런 광기 어린 단어 따위를 붙이는 게 무색할 정도로.
그가 막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는 비서가 현관 밖에서 대기 중이었다. 전달받은 쇼핑백에는 브랜드부터 스타일까지 서진우 취향의 옷이 가득했다. 오늘은 정서원을 데리고 외출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당장, 어쩌면 훗날에도 내보낼 생각은 없지만 어쨌든 숨통은 트여 줘야 했다.
쇼핑백을 소파에 두고 드레스룸으로 향하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화면에 보기 싫은 이름 석 자가 떠 있었다. 이상현, 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애초에 데면데면한 관계다. 정서원을 사이에 둔 좆같은 관계를 알게 된 후로는 더. 그런데 이 새끼가 무슨 볼일인지. 서진우는 치미는 짜증을 억누르며 전화를 받았다.
“왜.”
- 말이 짧아졌네. 화 많이 났나 봐?
“같잖은 소리 할 거면 꺼져.”
수화기 너머로 웃음소리가 터졌다. 서진우가 정말로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 이상현이 말을 잇는다.
- 서원 씨가 대단하긴 하네. 너도 먹고 나까지 잡아먹은 거 보면.
“용건만 말해. 씨발 헛소리하지 말고.”
- 해결 볼 일 있잖아. 나랑, 서원 씨랑. 뭐…… 너도.
“…….”
전화로 입씨름할 것 없이 그냥 찾아가서 죽여 버릴까. 집안끼리 엮이고 혈연으로 묶인 사이라는 허름한 방패막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서진우는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숨을 골랐다. 거친 숨소리는 점차 잦아드는데 까맣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형형하게 달아오른다.
“죽여 달라고 전화한 거야?”
- 하하! 그럴 리가. 좀 보자고. 네가 하도 꽁꽁 숨겨 놔서 찾는 데 꽤 걸렸거든.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그런데 문득 인터폰이 울린다. 거실에 걸린 인터폰에 느물거리며 웃는 이상현의 얼굴을 담긴다. 뒤로 보이는 배경은, 건물 입구도 아닌, 그의 집 현관 바로 앞이었다. 철저한 보안으로 입주자 외엔 출입이 불가능한 곳이다. 서진우가 기가 차 웃었다.
“네가, 씨발, 여길 왜 와?”
- 너네 밑층 비었더라. 내가 샀어, 거기. 입주자만 들어올 수 있대서 말이야.
“하, 미친, 이상현, 이 씹새끼가.”
- 문 좀 열어 봐. 이웃끼리 인사나 하자?
다시 벨이 울린다. 수화기에서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구멍동서끼리 야박하게 굴지 말고. 진우야.
* * *
뻔뻔스럽게도 찾아왔다. 이상현은 제 집인 양 능청스럽게 들어와서는 권하지도 않은 자리에 멋대로 앉았다. 가죽 소파에 등을 기대며 늘씬하게 뻗은 다리를 꼬는 모습이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멱살을 말아 쥐고 흠씬 패주고 싶었다. 방에서 곤히 자고 있을 정서원만 아니었다면 진작 그랬을 것이다.
이상현은 형형한 서진우의 눈빛을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인상 풀어라. 너 서원 씨 앞에서도 그러냐?”
“닥치고, 용건만 말해.”
이상현 입에서 나온 정서원 이름 한마디에 이가 악물린다. 서원 씨, 하며 간지럽게 굴리는 호칭이 익숙해 보이는 것마저 좆같았다. 서진우는 주먹을 몇 번 꽉 쥐다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그의 내면은 폭력과 비폭력 사이를 오가며 치열한 다툼 중이었다. 한 대만, 아니 더도 말고 딱 백 대만 패고 싶다. 그가 없던 시간 동안 정서원의 옆에 이상현이 있었을 것을 생각하면 당장 불길이 치솟았다. 이상현의 반반한 얼굴에다 주먹을 꽂아 넣는 상상 따위를 하느라 쉴 새 없이 꿈틀대는 근육에 손톱 자국이 빼곡하다. 이상현이 반반한 얼굴로 씩 웃었다.
“좀 질투 나네.”
“네가, 뭔데, 질투를 해.”
“아, 너 없을 때 서원 씨 빈 구멍 채워 준 걸로는 부족한가?”
친절한 이상현은 상상을 현실로 만들 구실까지 주었다. 의도대로 놀아난다는 걸 알면서도 한 대 갈기지 않고선 못 배기겠다. 그가 이상현에게 다가서기가 무섭게 뒤에서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돌아보니 입을 옷이 없어 시트를 둘둘 만 정서원이 물끄러미 서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진우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정서원에게 팔을 벌려 주며 부드럽게 웃었다.
“형, 일어났어?”
“으응.”
비척비척 다가온 정서원이 얌전히 품에 안긴다. 아직 잠이 덜 깬 듯 몽롱한 표정이다. “진우야…….” 잠투정을 부리는 소리로 저를 불러대는 걸 듣고 있자니 이상현의 개소리로 더럽혀진 귀가 깨끗이 씻겨 나가는 기분이다.
“……아.”
실컷 품에서 비비적거리던 정서원이 갑자기 멈칫하더니, 앞섶을 여미며 은근슬쩍 몸을 옹송그린다. 이상현과 눈이 마주친 반응이었다. 서진우는 대놓고 이상현을 피하는 정서원이 뿌듯해서, 또 그 도피처로 제 품을 선택한 것이 흡족해서 환하게 웃으며 안아 주었다. 너그러운 척 감싸고도는 품은 사실 이상현에게 내보이기 싫다는 질투에 가까웠다.
“왜 나왔어. 안에 있지.”
“일어났는데 네가 없어서…… 맘대로 나와서 미안…….”
“나 기다렸어?”
“응…….”
서진우는 정서원의 이마에 뽀뽀하고 부스스한 머리카락에 입술을 비비며 야릇한 충족감을 느꼈다. 좆같은 이상현만 없다면 더 완벽했을 것이다.
“서원 씨, 오랜만에 보는 건데 알은척도 안 하네요. 섭섭하게. 진우 왔으니까 볼일 다 봤다 이거예요?”
서진우의 품에 숨었던 정서원이 제 풀에 찔려 주춤주춤 몸을 빼려 든다. 물론 서진우는 놔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정서원에게 흑심 하나 안 보이는 화사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지난 며칠간 묘하게 차갑던 그가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미소였다. 정서원은 잠깐 넋을 잃었다가 숫저운 얼굴로 헤실헤실 따라 웃었다.
서진우의 유치한 독점욕 따위를 가만 바라보던 이상현이 불현듯 다정한 웃음을 그린다. 밀어나 속삭일 법한 부드러운 입매에서 나온 말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서원 씨, 왜 말 안 했어요?”
“네, 네?”
“우리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진우랑 이미 만나고 있었다면서요. 나중에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우리 서원 씨가 사람 마음 갖고 장난칠 사람은 아닌데……. 그렇죠?”
어느덧 다리를 꼬고 앉았던 자세마저 바뀌어 있다. 이상현은 고개를 살며시 기울이며 눈썹 끝을 떨어뜨렸다. 처연한 모습이다. 찌르르. 죄책감이 지은 죄 많은 정서원의 사지를 찔러댄다. 무슨 헛소리를 하나 지켜보던 서진우가 냉랭하게 웃었다.
“쇼하네, 저 새끼?”
이상현은 무시했다.
“나 원래 애인 있는 사람이랑은 안 만나요, 일이 더럽게 돼서. 그런데, 서원 씨 덕에 처음으로 예외가 생겼네요. 것도 하필 진우랑요. 참, 공교롭게.”
“아…… 그게, 저…… 죄송해요.”
“네, 죄송하죠?”
“네? 네에…….”
“형, 듣지 마. 들을 필요 없어.”
서진우가 또 순진하게 넘어가려는 정서원을 품에 가두고 귀를 막았다. 그래 봤자 넓고 조용한 거실에 울리는 목소리를 막을 순 없었다.
“서원 씨, 절 갖고 노셨으면 책임을 지셔야죠.”
“……네. 죄송합니다. 뭐든, 책임질게요.”
“형, 들을 필요 없다니까. 쟤 정신병자야, 응? 야, 이상현. 꺼져.”
“걱정 마, 진우야. 서원 씨한테 어려운 거 요구 안 해.”
정서원은 눈치를 보며 서진우의 품에서 조금 물러났다. 애인을 두고 놀아난 주제였지만 잘못을 저질렀다는 자각은 있었다. 돌변한 애인이 내키는 대로 던져 주는 다정함과 냉담함을 고분고분 받아먹었던 태도도 거기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정서원은, 이상현을 보며 상처받은 기색이 역력했던 서진우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묘하게 닮은 분위기가 죄책감을 더욱 부추긴다. 속셈을 뻔히 아는 서진우만 답답할 노릇이었다.
이상현은 자신에게 꽂히는 불길 같은 눈빛과 어수룩한 눈빛을 느끼며 눈꼬리를 접었다. 순식간에 다감한 얼굴이 완성됐다.
“서원 씨, 우리 만나요. 정식으로. 저 진심입니다.”
“……?”
“하, 이상현, 입만 산 개새끼가 또 개소리 지껄이네. 형 저 새끼 말 믿지 마. 응? 지금 형 앞이라고 가식 떠는 거야. 모르기는 씨발, 나랑 형 사이 다 알면서도 좆질 하고 싶어서 모른 척한 거겠지.”
“진우야, 그렇게 말하면 형이 많이 섭섭하다. 나 서원 씨한테 정말 진심이야.”
“좆까. 씨발.”
두 남자 간에 기묘한 열기가 오간다. 정서원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서진우와 이상현을 번갈아 쳐다보며 눈치를 봤다. 내숭을 벗어던진 서진우를 보았음에도 아직 ‘순하고 귀여운 서진우’의 콩깍지를 못 벗은 탓에 강짜를 부리는 그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생각보다 이상현과도 가까워 보이는 것도 놀라웠다. 하필 이런 인연이라니, 세상 참 좁았다. 그래도 일단은 말리고 봐야 한다.
“진우야, 화내지 마……. 상현 씨도 괜히 진우 놀리지 마세요.”
“형, 지금 저 새끼 편드는 거야? 친하게 이름까지 부르네, 응? 언제 그런 사이가 됐어?”
“그, 그럼 이름으로 부르지 뭐라고 불러…….”
“진우야, 괜히 서원 씨한테 화내지 마. 우리 서원 씨 겁먹었잖아.”
어느덧 성큼 다가온 이상현이 어정쩡하게 서 있던 정서원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서진우는 솔직히 인정했다. 두 사람이 붙어선 꼴은 상상 이상으로 좆같았다. 뱃속을 까맣게 뒤집는 질투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서진우의 눈에 시뻘건 불씨가 튀었다.
“그 손 놔.”
“나한테 놓으라 마라 할 게 아니라 서원 씨 의견을 물어야지. 서원 씨, 어때요. 지금 저렇게 눈 뻘개져서 앞뒤 분간 못하는 놈한테 갈래요?”
“…….”
“형.”
서진우의 저런 표정은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날을 떠올린 정서원이 곤란한 얼굴로 입을 다문다. 당연히, 이상현을 뿌리치고 제게로 안길 줄 알았던 서진우는 들끓던 질투가 임계점을 넘어 차갑게 식어 가는 걸 느꼈다. 새까맣게 가라앉은 눈빛이 꼭 붙어선 둘을 바라본다. 정확히는, 이상현을. 자신이 없을 때 정서원의 옆자리를 꿰차고 앉아 수없이 밤을 새웠던 놈을 말이다.
정서원에게 이상현이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플에서 만난 놈들은 한 번 보고 말았다면 이상현과는 주기적으로 연락하며 드라이브 데이트까지 즐겼다. 저 새끼가 뭔가 특별한 걸까? 정서원에게? 대체 어떤 점이. 서진우는 단순히 섹스나 바람이라 뭉뚱그렸던 것을 하나하나 세심히 쪼개며 새삼스럽게 질투에 시달렸다. 그럴수록 명치가 뜨거워 미칠 지경이었다.
정서원 앞에서는 상냥한 척이라도 하는 이상현이 서진우의 흉흉한 눈빛을 모른 척 능청스럽게 받아넘겼다.
“아무래도 진우가 삐쳤나 봐요. 다 큰 척해도 아직 애라니까. 그렇죠?”
“하지 마세요. 진우가 싫어하잖아요. ……아!”
대뜸 다가선 서진우가 정서원을 끌어당겼다. 정서원은 흘러내리려는 시트를 꼭 끌어당기며 엉거주춤 서진우를 보았다. 표정이 싹 사라진 얼굴은 질투로 이글거리던 때보다 더 무서웠다. 정서원이 순식간에 기가 죽었다.
“형. 저 새끼, 어디가 맘에 들어.”
“응? 아, 그게…….”
사실 어디랄 것도 없다. 정서원이 그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라고는 섹스 취향뿐이다. 그것도 세련된 외견과는 달리 꽤 고상하지 못한 것들. 물론 하나같이 서진우에게는 말 못 할 것들뿐이었다.
어색한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서진우가 입꼬리를 매섭게 비틀었다.
“이상현이 그렇게 잘 박아 줘? 나 대신 딜도로 써먹을 만큼?”
“아아니. 진우야, 그게 아니라.”
“아니에요? 서원 씨 내가 박아 줄 때마다 더 해 달라고 울었잖아요. 그게 다 연기였어요? 모를 뻔했네.”
“아, 상현 씨, 제발…….”
울먹이는 눈이 이상현에게 애원한다. 물론 그는 부탁을 쉽게 들어주는 타입이 아니었다. 이상현이 드러난 목덜미와 귓바퀴 따위를 손끝으로 건드리자, 서진우가 사납게 쳐냈다. 그가 즐겁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서원 씨가 입으로 빨아서 세우고 올라타서 직접 허리도 흔들었는데 기억 안 나요? 우리 서원 씨, 그렇게 좋아하더니…… 진우 만났다고 그새 잊어버리셨나.”
“상현 씨이…….”
“하. 그랬어, 형? 응? ……왜, 대답을 안 해. 묻잖아.”
“진, 진우야아…….”
어물어물 말꼬리를 늘이는 정서원을 서진우가 매섭게 추궁한다. 정서원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다시금 서진우와 이상현 사이를 오갔다. 이상현은 도와줄 생각 따위 없어 보였고 서진우는 멈출 생각 따위 없어 보였다. 결국 무엇이든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랬어….”
“아, 그랬어? 그래서 형이 처음 빠는 내 좆도 그렇게 잘 빨았구나?”
“…으응. 흑….”
“그럼, 씨발, 형은 누구든 좆질만 해 주면 다 좋아? 저 새끼랑도 해 보고 나랑도 해 봤으니까 알겠네. 둘 중 누가 더 나아. 응?”
“제발, 진우야아…….”
정서원이 울먹이며 애원했지만 이미 질투로 눈이 뒤집힌 상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서진우는 “대답 안 해?” 한마디로 결국 정서원이 눈물을 쏟아 내게 만들었다.
“……모, 모르겠어…….”
“그렇게 붙어먹어 놓고도 몰라?”
“미안, 해애…….”
내리깐 속눈썹이 삼박거릴 때마다 매달린 눈물이 바쁘게 떨어졌다. 서럽게 우는 얼굴을 말없이 지켜보던 이상현이 그제야 달래 주기 시작했다. 곱고 섬세한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눈물을 거둬들였다. 그 꼬락서니가 퍽 익숙해 보여서 서진우는 바닥을 치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서원 씨, 울지 마요. 내가 서진우 혼내 줄까요? 응?”
“씨발, 정서원을 왜 네가 달래고 지랄이야.”
“네가 울려 놓고 네가 달래겠다고? 하하. 그런다고 서원 씨가 좋아하겠어?”
“입 닥쳐, 씨발.”
우는 정서원을 사이에 둔 남자 둘이 서로 노려보고 있다. 사이에 낀 정서원만 아니었으면 진작 주먹질이라도 오갔을 분위기다. 정서원은 시트를 끌어당겨 눈가에 짓누르고는 어떻게든 울음을 삼키려 애를 썼다. 한 번 터진 눈물은 잠재우기가 어려웠다. 제 허물이나 다름없는 이상현과 서진우를 한 번에 두고 상대하자니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제일 무서운 것은 제게 냉랭하게 구는 서진우였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서진우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어째서 갑작스레 화를 내는 것인지도 모르는 정서원에게는 어려운 문제였다.
“흡. ……흐끅.”
울음기가 잦아들자 딸꾹질이 기승이다. 정서원은 딸꾹질을 하며 꾸물꾸물 손끝을 움직였다. 더 화를 부를까 걱정되었지만, 애초에 죄를 지은 당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좁은 선택지 안에서 뭐라도 해야만 했다.
망설이던 손이 힘을 풀자, 시트가 바닥으로 쏟아지며 지난밤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나신이 드러난다. 정서원을 사이에 두고 신경전을 벌이던 남자 둘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동시에 열었다.
“뭐하는 거야?!”
“왜 그래요, 서원 씨?”
서진우가 재빨리 시트로 몸을 가려 주는 사이, 이상현은 울음으로 발그스름해진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동시다발적으로 부담스러운 시선이 내리꽂힌다. 움찔한 정서원이 한마디 말도 못하고 얌전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직 흉흉한 기세가 감도는 둘이 무서웠다. 그가 다시 울고 싶은 걸 참으며 조각난 말을 열심히 이어 붙인다.
“둘, 다…… 해 보고, 말하면 안 될까……? 잘, 잘 모르겠어서. 흑. 그러니까, 싸우지 말고……. 흐끅.”
울음과 딸꾹질로 길게 이어진 말은 정적을 이끌어 내기 충분했다. 서진우와 이상현 사이에 흉흉하게 오가던 공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