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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갇혔다 (2/20)

2. 갇혔다

일기예보대로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다.

결항되면 좋았을 텐데, 태풍이든 안개든 뭐든. 진우가 나를 꼭 끌어안은 채로 중얼거렸다. 출국 날짜가 다가올수록 초조해하던 진우는 엊그제 기어이 날 제 집으로 끌고 들어가 몇 날 며칠을 물고 빨았다. 덕분에 개강 초부터 구멍 난 수업이 여럿이었다.

“형 내 주머니에 넣어서 데려가고 싶다…….”

“겨우 두 달이잖아. 금방 갈 거야.”

“형은 나 없어도 괜찮아? 난 지금 두 달을 어떻게 보내나 너무 걱정인데.”

어리광을 감추지 않고 표현하는 진우가 귀여웠다. 내게로 웅크린 등을 쓰다듬어 주자 더 어린 척을 하며 달라붙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덮쳐들어선 ‘조금만 더.’라고 조르며 다리 사이로 파고들던 남자답지 않았다. 내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진우를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이 예쁜 얼굴은 당분간 스마트폰 화면으로나 볼 수 있을 것이다. 뺨을 감싸 쥐고 입술을 내리눌렀다. 잠깐 하고 떨어지려 했지만 진우가 붙잡고 놓아주지 않아 결국 혀까지 얽게 되었다. 허리와 뒷목을 감싸 쥔 손에 몸을 맡기고 입술을 열었다. 몸을 달구는 열기가 어느덧 익숙해졌다. 놓치고 싶지 않아 진우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진우가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거침없이 애정을 표현하는 그 눈이 좋았다.

“보고 싶어서 어쩌지?”

겨우 두 달이라는 말은 내 입에서 다시 나오지 못했다. 나로서도 진우가 없는 두 달이 상상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내가 그런 티를 내면 진우는 가서도 맘이 편치 못할 것이다. 괜히 나 때문에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 그만큼 자주 연락하면 되잖아.”

“자주 해 줄 거야? 내가 전화 계속한다고 귀찮아하는 거는 아니지?”

“응.”

“전화 자주 하고, 사진도 많이 보내고, 문자도 자주 할게.”

“응, 나도.”

우리는 뉴욕과 서울의 시차 따위를 이야기하면서 보딩 타임 전 짧은 시간을 보냈다. 그때만 해도 잘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착각은 진우가 떠난 후 무참하게 부서졌다.

* * *

의식이 느릿하게 떠오른다.

더디게 잠에서 깨어나던 정서원은 어느 순간 온몸을 쑤시는 둔통을 느꼈다. 잠에 취한 이맛살이 팍삭 구겨진다. 왜 아프지? 나, 어제……. 의문을 마저 떠올리기도 전에 어젯밤의 잔상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사지에 붙어 있던 잠이 확 달아났다.

어제 그는 모텔 앞에서 덜미가 잡히고 그대로 끌려 들어가 날이 샐 때까지 서진우를 벗어나지 못했다. 서진우는 그야말로 오금이 저릴 만큼 혼을 냈다. 정신을 쏙 빼놓는 쾌락이 줄기차게 이어지며 잠깐잠깐 혼절했다가, 눈을 떠 보면 박히고 있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노팅까지 당하느라 펑펑 울었던 것도 같다. 그의 기억은 가물가물한 시야 속에 서진우가 젖은 수건으로 제 몸을 정성스레 닦아 주던 장면에서 끝이 났다. 서진우는 그 상황에서도 모질지 못했다. 미안하다고 용서를 빌고 싶었지만 내리 시달렸던 몸은 금세 잠이 들어 다행히 그 염치없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 흐윽…….”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정서원이 한 발짝도 못 가 고꾸라지고 만다. 바닥엔 부드러운 카펫이 깔려 있었으나 자빠진 충격은 허리에서 뒷골까지 찌르르 퍼졌다. 정서원은 일어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침대에 고개를 박았다. 그제야 신체 곳곳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쑤시고 아픈지 세심하게 느껴졌다. 커다란 걸로 밤새 쑤셔지느라 붓고 욱신거리는 뒤부터 붙잡혀서 박히느라 멍이 든 옆구리, 엉덩이, 팔뚝, 어깨. 모두 제각각 다른 종류의 통증이 줄지었다. 섹스 후에 한 번도 아파 본 적이 없어서 그 고통이 더욱 생소했다.

정서원이 끙끙 앓는 사이, 멀리서 철컥하는 소리가 여러 번 나더니 문이 열린다. 열린 문으로 서진우가 들어섰다.

“왜 벌써 일어났어, 더 자지 않고.”

“…….”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정서원은 숨을 얕게 헐떡이며 서진우를 올려다보았다. 진작부터 깨어 있었는지 정서원과는 달리 말끔한 차림새였다. 정서원이 그를 부르려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 대신 기침만 터진다. 그는 테이블에 놓여 있던 주전자로 물을 따라 정서원에게 건네주었다.

“마셔.”

정서원이 손을 뻗었으나 떨리는 손은 잔을 제대로 감아쥐지도 못했다. 좀처럼 잔을 받지 못하던 정서원이 결국 손을 거둔다. 혀를 차듯 웃는 소리가 났다.

“형은 혼자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네.”

서진우는 정서원의 옆에 앉아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는 잔을 직접 입술에 갖다 대 주었다. 체온에 딸려 온 익숙한 체취는 정서원에게 때아닌 안도감마저 안겨 주었다. 정서원은 서진우의 품에 안긴 채로 얌전히 그가 넘겨주는 물을 삼켰다. 내내 울고 비느라 갑갑하던 목이 겨우 가라앉았다. 서진우가 정서원의 창백한 얼굴을 조심스럽게 쓸어 주었다. 

“몸은 괜찮아? 아프지는 않고?”

“……진우야.”

“응.”

지난 두 달, 정서원이 어떻게 놀아났는지 훤히 알고 있음에도 서진우는 예전과 다를 바 없는 다정한 태도로 그를 응시했다. 용서해 준 걸까? 그렇게 화를 냈으면서……. 좋으면서도 얼떨떨했다. 어젯밤의 서진우는 형형한 분노를 감추지 않고 드러냈었다. 정서원으로서도 이 다정함이 마냥 달콤하지는 않으리란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아마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을까. 두려웠지만, 그래도 좋아서 그는 서진우의 손에 고분고분하게 얼굴을 기댔다. 

“애교 떠는 거야? 귀엽네.”

서진우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더니 손끝으로 정서원의 목선을 살살 문지른다. 그 손길에서 묘하게 어그러진 다정함이 느껴진다. 평소 정서원을 대할 때마다 보였던 유난스럽고 극진한 정성은 없었다. 사람보다는 차라리 애완동물을 대하는 태도에 가까웠다. 순간 정서원은 서진우의 롤플레잉이 궤를 달리했음을 깨달았다. 불현듯 어젯밤 무섭게 을러대었던 서진우의 모습도 함께 떠올랐다. 서진우는 질투와 분노에 이글거리고 있었다. 불길처럼 타오르는 목소리로 집이나 지키는 개로 살아가라 말했다. 솜털이 바싹 곤두섰다.

“잠깐, 진우야…….”

정서원이 서진우를 밀어내며 몸을 튼다. 맥없는 몸짓은 가볍게 제압당해 다시금 서진우의 품속으로 빨려들었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동자가 품속의 정서원을 바라본다. 눈빛으로 찔러 맨다. 정서원은 촘촘히 꿰인 인형처럼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밭은 숨을 할딱이던 입이 간신히 열렸다.

“나, 나…… 집에 갈래.”

“집에 가고 싶어?”

정서원은 작지만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우는 정서원이 소름 끼쳐 하는 다정한 손길로 떨리는 어깨를 달래 주었다.

“아직 몸 안 좋잖아. 나중에 가, 내가 태워다 줄게.”

“지금, 가고 싶어.”

“집에서 가져오고 싶은 거라도 있어?”

어디까지나 돌아올 곳을 이곳으로 상정한 질문이었다. 정서원은 제 말을 들어주지 않는 서진우에게서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다. 스스로 걷어찬 신뢰가 벌써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주제 파악 못하는 눈물이 또 섧게 차오른다.

“아…… 형이 왜 울까, 또. 응?”

서진우는 다정히 눈물을 닦아 주었지만 수려한 얼굴에는 웃음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정서원은 순종적으로 손길을 받으면서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잘못했어, 진우야……. 다신, 안 그럴게. 그러니까, 이러지 마…….”

“난 아직 아무것도 안 했어, 형. 벌써 그러면 어떡해. 나 마음 약해지게.”

“진우야, 너, 이런 애 아니잖아…….”

서진우의 입매가 비틀린다. 그는 품 안에 인형처럼 모셔 놓았던 정서원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겁에 질린 몸이 자꾸만 무너지려 했으나 서진우는 그때마다 더한 힘으로 잡아 세웠다. 벌벌 떨리는 몸에는 목욕 가운 한 장이 달랑 묶여 있었다. 그마저도 앞섶은 제 역할을 못하고 속살에 새겨진 흔적을 고스란히 내보였다. 서진우는 상품 가치를 확인하는 듯 무심한 눈으로 정서원의 몸을 샅샅이 훑어 내렸다.

“난 늘 이러고 싶었어. 형과는 달리 인내심이 있어서 참아 왔던 거지.”

차갑게 일소한 그가 정서원의 목욕 가운 매듭을 풀어 헤친다. 정서원이 흠칫 떨었으나 전복된 관계에서 동의란 새삼 필요치 않았다. 서진우는 마땅한 제 것을 다루듯 거침없는 손길로 가운을 벗겨 냈다. 이윽고 드러난 나신에는 밤 동안 그가 남긴 울긋불긋한 흔적이 가득하다. 머뭇머뭇 속살을 가리려드는 손길을 매섭게 떼어 낸 서진우는 정서원의 사타구니에 시선을 꽂았다. 

“억울해서 안 되겠네. 뭐 하나는 해 놔야 형이 질질 짜는 것도 덜 억울하지.”

“뭐, 뭐……?”

서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정서원을 이끌려다 비틀대는 꼴을 보고는 두 팔로 안아 올렸다.

“어, 어디 가. 진우야.”

두려움에 질린 목소리가 서진우를 애타게 불렀으나 시선 한 조각 떨어지지 않는다. 정서원은 그가 화가 난 상태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게만은 늘 다정하던 서진우의 냉대가 낯설고 두려워 견딜 수가 없었다.

방에는 문이 두 개 달려 있다. 하나는 복도로 통하는 문이었고 하나는 욕실로 향하는 문이다. 서진우는 욕실 문을 열어젖히고 정서원을 욕조에 내려놓았다. 정서원의 손이 소심하게 그를 붙잡았다가 떨어졌다. 눈물을 머금은 눈은 정서원을 평소보다 더 순진해 보이게 만들곤 했다. 아무 남자나 내키는 대로 침대로 끌어들이는 문란함과는 달랐다. 서진우는 초조하게 깨물리는 입술을 엄지로 쓸어 주다가 아무 전조 없이 대뜸 다정함을 거둬들였다. 정서원이 제게서 멀어지는 뒷모습을 애타게 바라본다.

“진우야, 그게 뭐야…?”

멀어졌던 서진우는 금세 선반에서 무언가를 가져왔다. 면도날이 날카롭게 반짝이는 칼과 쉐이빙폼이었다. 서진우는 대수롭지 않은 듯 소매 단추를 풀어 걷어붙이며 대답했다.

“형 제모할 거.”

“나…… 수염, 안 나는데…….”

“알아.”

서진우가 그제야 지웠던 웃음을 다시 띤다. 그는 넓은 욕조 안에서 굳이 꼭 맞붙어 있는 정서원의 무릎을 잡아 펼쳤다. 손자국이며 입술 자국이 얼룩덜룩 남은 가랑이가 밝은 조명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정서원은 급하게 손으로 제 다리 사이를 가렸다. 덜컥 겁이 밀려들었다. 새삼 속살을 보이는 것이 쑥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면도날이 제 다리 사이를 누빌 것이 무서웠다. 곤란을 가뿐히 뛰어넘은 거부감이 결국 눈물로 떠올랐다. 

“지, 진우야아……. 흐윽.”

안 하면 안 돼? 같은 가증스러운 말은 스스로도 차마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물론 서진우가 들어줄 리도 없었다.

“손 치워. 내가 형 자지 털쯤은 깎아 줘야 형이 울어도 억울하지가 않지.”

“안, 안 울게…. 흑.”

“울어도 돼. 형이 울든 말든 할 거거든.”

서진우는 겁을 집어먹은 눈을 보며 화사하게 웃었다. 동시에 가랑이를 가리고 있던 손을 면도날 뒷등으로 툭툭 건드린다. 가장 민감한 곳 근처에 면도날이 다가오니 겁 많은 몸이 움츠러들려다가도 의식적으로 열렸다. 서진우는 제가 열어 놓은 것보다 더 활짝 열린 다리를 보며 조소를 흘렸다. 그러나 가랑이를 가린 손등은 치워지지 않았다. 어르고 달래서 풀어 주는 것은 이제 그의 몫이 아니었다. 서진우가 차갑게 일축한다.

“알아서 치울래, 아니면 묶일래?”

“……흐윽.”

결국 다리가 완전히 열렸다. 색이 옅고 깨끗한 성기는 힘을 잃고 축 늘어진 상태였다. 서진우는 쉐이빙폼을 짜내고는 음모에다 천천히 펴 바르기 시작했다. 많지 않은 음모가 끈적한 소리와 함께 하얀 크림에 적셔진다. 은근한 손길이 찐득한 거품을 성기에다 묻힐 때마다 자연스럽게 피가 쏠렸다. 초조함에 손이 말려든다. 이런 상황에서도 발기가 되는 몸이 우스웠다. 정서원은 점점 힘을 받는 성기를 차마 볼 수 없는지 주사 맞기 싫은 어린애처럼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그래 봤자 서진우의 눈을 가릴 수 있는 건 아니라 조롱받는 걸 피할 순 없었다. 서진우가 반쯤 일어선 성기를 가볍게 퉁긴다. 참고 싶던 짜릿함이 솟았다.

“아……!”

“기대되나 봐, 그치? 형 자지가 벌써 찔끔찔끔 우는데.”

“싫, 하지 마……. 그런 말은…….” 

“그냥 자지 털이나 깎아 줘? 응?”

“응. 으응…….”

또다시 성기에 짜릿한 자극이 스친다. 서진우는 이제 노골적으로 기둥부터 귀두까지 차근차근 쓸어 올리고 있었다. 정서원이 숨을 크게 삼켰다가 흐느끼며 토했다. 사정감이 드는 건지 요의가 드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질끈 감은 눈에 번쩍번쩍 전율이 튈 뿐이었다. 움츠러들려는 무릎을 붙잡은 서진우가 귀두를 살살 어루만진다.

“하으, 진우야아. 싫어…….”

“자지 만져 주는 건 싫어? 그럼 뒷구멍 쑤셔지는 걸 좋아하나, 형은?”

“아, 아니이. 흑. 아아, 싫어어…….”

쉐이빙폼이 묻은 성기가 떨어지려는 손가락을 찐득찐득하게 쫓았다. 애써 세워 놓은 무릎이 파들파들 떨린다. 아예 쾌감을 쏟아 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멈춰 주는 것도 아니다. 정서원은 유독 짓궂게 구는 서진우가 제게 바라는 것이 있음을 직감했다. 그가 감았던 눈을 뜨며 어렴풋한 초점을 서진우에게 맞춘다. 깨물고 참느라 빨개진 입술이 머뭇머뭇 열렸다.

“……진우야, 그거 말고… 그, 그냥…… 깎, 아줘…… 흐끅.”

“뭐를.”

알면서 짓궂게 되묻는다. 정서원은 수치심을 참고 대답했다.

“……자, 자지…… 털…….”

“응. 알았어.”

웃음을 터뜨린 서진우가 수그러드는 머리에다 입을 맞췄다. 다정함과 얄궂음을 넘나드는 기준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다른 사람 같은 서진우가 무섭고 두려웠다. 정서원은 울렁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꾹 눈을 감았다. 그 가엾은 바람을 서진우가 기꺼이 받아 준다.

그는 말라 가던 크림에 다시금 크림을 덧씌우고는 한 손으로 면도칼을 집어 들었다. 조명 아래 희번덕거리는 칼날은 잠시나마 멎었던 두려움에 불을 댕겼다. 정서원이 다리를 움찔 움츠리자 서진우가 매섭게 잡아 벌린다. 

“얌전히 좀 있어. 다치면 어쩌려고.”

“하지만 칼이…….”

“형 자지가 너무 발딱거려서 난 그거 잡아 줘야 되거든? 쓸 일도 없는 좆이지만 형도 잘못 썰려서 고자 되긴 싫잖아. 응?”

“으응…… 알았어. 얌전히 있을게…….”

“착하네.”

나직한 웃음과 함께 면도날이 사타구니로 다가왔다. 잔뜩 겁에 질린 정서원이 눈을 질끈 내리감는다. 서진우는 꺼덕거리는 성기를 붙든 채 면도날로 천천히 크림을 밀어내고 있다. 날 선 면도칼이 아래로 미끄러지며 털을 깎아 내는 것이 가장 민감한 부위에서 느껴졌다. 이상한 감각이다. 긴장 때문에 숨을 죽였는데도 숨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나는 것처럼 고막을 때렸다. 보이지 않으니 오감이 더욱 팽팽하게 돌아갔다. 정서원은 감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 흑. 흐읏.”

“서원아, 무서워?”

서진우는 겁에 질린 정서원이 퍽 재미난지 웃음을 참지 않았다. 그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매끈한 은색 날에 하얀 크림이 켜켜이 쌓여 갔다. 정서원은 무어라 토를 달지 못한 채 제 사타구니만 바라보았다. 해소되지 못한 성욕과 요의 때문에 아랫배가 움츠러드는 느낌이었다. 서러움에 눈물이 다 고인다. 그는 당장에라도 배배 꼬일 것 같은 다리를 제 손으로 꾹 잡아 고정시켰다. 새하얀 허벅다리에 말린 손은 간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형은 벌리기도 참 잘 벌려. 이름도 모르는 놈 앞에서도 벌리려고 하더니.”

“흐윽, 진우야아……. 빨리, 나 그만…….”

“참을성도 없고, 응? 이건 왜 계속 세우고 있는 거야. 이런 거 좋아해?”

서진우가 쥐고 있던 성기를 의도적으로 문지른다. 칼은 여전히 사타구니에서 머무르고 있다. 정서원은 파득 튀어 오르는 쾌감을 참으며 헐떡였다.

“하으으. 싫, 그러지 마…….”

“싫어? 형이 질질 싸 놓은 게 내 손까지 적시고 있는데. 따로 물 안 틀어도 될 정도야. 홍수 나서.”

정서원은 커다랗고 하얀 손이 제 성기를 쓰다듬는 것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손짓 한 번에 저릿저릿한 쾌감이 흘렀다. 선단에 몽글몽글 맺히는 물방울이 연이어 서진우의 손을 적셔댄다. 해소 욕구로 가득 찬 아랫배가 뜨겁게 타올랐다.

“하으읏…….”

진우 손에 대고 움직이고 싶다. 저 큰 손을 붙잡고 허리를 움직여 대고 싶었다. 그러면 이 간질간질한 욕구가 단번에 해결될 텐데……. 축축한 눈으로 서진우의 손을 바라보던 정서원이 겨우 충동을 억누른다. 물이 많다고 조롱하는 서진우를 탓할 주제가 못 됐다. 가랑이에 칼을 댄 순간에도 무서움보다 해소 욕구부터 앞서니 어떻게 변명을 할 수 있을까.

서진우가 빨갛게 열이 오른 성기를 길게 쓰다듬으며 수치에 젖은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의 손에서 질척대는 소리가 터진다. 정서원은 그의 엄지손가락이 귀두 끝을 눌러댈 때마다 신음을 참느라 쩔쩔맸다. 정서원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재차 애원하기 시작했다.

“아으응……. 진우야아 하지 마, 제발…….”

“싫다면서 왜 이리 질질 싸는 건데. 응?”

“그건…… 네가 자꾸, 만지니까……. 하윽, 싫어……. 나올 것 같아. 그만…….”

허벅다리를 꽉 쥐고 있는 손에 하얗게 마디가 도드라진다. 정서원은 울음을 지으면서도 몸이 달뜨는지 허리를 움찔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서진우의 눈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핥아 내린다. 모른 척할 수도 없을 만큼 집요한 성욕이었다. 정서원은 서진우가 저를 그렇게 쳐다볼 때마다 배 속이 욱신거려 미칠 것만 같았다. 수려한 얼굴이 성욕으로 일그러지는 게 좋았다. 그게 저로 인한 욕심이란 것도 황홀했다. 정서원은 서진우가 제 다리를 벌리고 안으로 짓쳐들 때면 묵직한 끝이 푹푹 찔리는 어디쯤이 절실해져 눈물이 났다. 훌쩍훌쩍 울음을 흐느끼는 얼굴에 빨갛게 열기가 돌았다.

서진우가 한숨을 짓씹더니 면도칼을 내던지듯 선반에 놓는다.

“씨발, 미치겠네.”

그러고는 성기를 붙잡은 손을 사납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서원이 그대로 고개를 젖히며 신음을 터뜨렸다. 서진우의 큰 손에 잡힌 성기에서 물이 흘러내려 찌걱찌걱 음란한 소리가 났다. 

“흐으읏! 진우야아, 안 돼. 흑! 아아……!”

지금까지 성기를 건드리던 손길이 장난이었음을 보여 주는 아주 노골적인 애무가 잇따랐다. 흥분한 성기가 울컥울컥 물을 쏟아댔다. 사정감이 박차 올랐지만 정서원은 입술을 깨물며 악착같이 참았다. 끈을 놓는 순간 내내 참았던 요의마저 터질 것 같았다. 

서진우는 눈물을 매단 채로 흐느끼는 정서원을 노려보며 예민한 끝을 공 굴리듯 문질렀다.

“하으……! 아, 하으응. 싫어, 제발. 나올 것 같단 말야. 그만……!”

“괜찮아. 싸도 돼.”

“싫어, 싫……! 흐앗! 아, 진우야. 흐윽. 넣지 마아…….”

허벅지를 붙잡았던 손가락이 이미 함빡 젖은 구멍으로 들어선다. 길쭉한 손가락은 하나둘 안쪽에 자리 잡더니 능숙하게 극점을 찾아 찔러댔다. 그러잖아도 요의를 참느라 궁지에 몰린 정서원에게는 정신을 쏙 빼놓을 만한 자극이었다. 정서원은 눈물을 떨궈대며 흐느꼈다. 스스로 다리를 붙잡고 있던 손으로는 서진우의 팔뚝을 밀어내려 애를 써댔다.

“싫어, 진우야. 제발. 히끅. 하지 마, 싫어어.”

“울지 마. 형 기분 좋게 해 주려고 그래. 이거 좋아하잖아.”

서진우는 제 팔뚝을 긁어대는 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서원의 성감을 집요하게 공략해 나갔다. ‘싫어’, ‘안 돼’, ‘하지 마’ 따위를 읊어대는 정서원은 이미 반쯤 혼이 빠진 상태였다. 앞뒤로 계속되는 자극이 그러잖아도 짤막한 인내심을 뭉텅 도려냈다. 기다란 허벅지가 오므라들며 서진우의 팔뚝을 조였다. 정서원이 다리 끝을 배배 문질러대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쾌감에 취한 얼굴로 저를 애타게 보는 것이 귀여워서 서진우는 여러 번 입술을 포개었다. 정서원이 고분고분하게 입술을 열어 서진우를 받아들였다.

“음, 흐응. 으으응……!”

키스를 하는 도중에도 사정감이 몇 번이나 치솟았다. 어제 서진우에게 붙잡힌 채 셀 수 없이 절정에 달했음에도 또 절정을 원하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정서원은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서진우가 욕망이 득실거리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다. 정서원은 또 한 번 넋을 놓았고, 쾌감은 틈을 놓치지 않고 그를 몰아붙였다.

“하윽! 진우야, 하아. 흐으으. 아, 안 돼……. 너무 좋아, 흑.”

“기분 좋아?”

“응, 으응! 좋아, 진우야아…….”

이제 그는 숫제 서진우의 어깨에 매달려 솔직하게 헐떡이고 있었다. 좋은 곳만 노려 문질러대는 손길이 너무 황홀했다. 인내가 무너지자 나름 견고히 쌓아 둔 둑이 무너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정서원은 서진우의 품에 안긴 채로 길게 사정했다. 어제 잔뜩 싸 놓는 바람에 묽어진 정액이 여러 차례 욕조 바닥에 쏟아졌다. 긴장과 인내가 길었던 만큼 해방감이 주는 짜릿함도 길었다. 

“하아, 하아아…….”

서진우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정서원을 가만 바라보다가 안을 쑤시던 손을 빼내었다. 사타구니를 살짝 쓸어 보자 성기에서 흐른 물로 이미 축축했다. 하얗게 남아 있던 쉐이빙폼이 손짓마다 쓸려 가고, 털 하나 없이 매끈해진 맨살이 드러난다. 아직 여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정서원은 그 손짓에도 다리를 배배 꼬아댔으나 그래 봤자 털 하나 없이 깨끗해진 가랑이만 더 적나라해 보일 뿐이었다. 물기 어린 샅이 조명을 받아 더 하얗게 빛났다.

“형 자지, 더 예뻐졌네.”

“보지 마…….”

“창피해?”

정서원이 제 사타구니를 소심하게 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우는 예쁘게 웃어 주고는 감싸 쥔 성기를 위아래로 문질러 달래 주었다. 이제 막 절정에 달한 몸에는 아주 민감한 자극이었다.

“아……!”

정서원이 허리를 틀었으나 그래 봤자 서진우의 품 안이었다. 서진우는 부질없는 도망을 여유롭게 관찰하며 끊임없이 손을 움직였다. 그의 손이 민감한 귀두를 자극하며 선단을 꾹꾹 눌러댈수록 정서원은 크게 헐떡거렸다. 사정감이 해소된 직후 배 속에 남은 것은 요의 하나뿐이었다. 이러다간 정말로 쌀 것 같았다. 정서원은 서진우를 붙잡고 눈물로 호소했다.

“힉. 싫어, 그만. 나 이미 쌌잖아. 응? 진우야아…….”

“예뻐서 그래, 형. 기분 좋게 해 줄게. 겁먹지 마.”

“흣……. 진우야, 제발……. 하으. 싫, 아으응…!”

이제 와 그만하라는 부탁을 들어줄 리가 없다. 서진우는 성기를 주물러 가며 정서원의 성감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도망갈 곳을 잃은 정서원이 그에게 매달린 채로 밭은 숨을 몰아쉰다. 애절한 눈이 서진우를 향했다가, 우물쭈물 내려앉는다. 집요하고도 야릇한 눈과 마주할 용기가 안 났다. 정서원은 이대로 서진우의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일까 몹시 두려워졌다. 두려움에 배 속이 조여들었다. 요의는 그 긴장을 먹고 몸집을 불렸다.

서진우는 엄지로 성기 끄트머리를 살살 쓸어대며 내리깐 눈꺼풀을 바라보았다. 질리지도 않고 물이 찔끔 새어 나오고 있었다. 위아래, 둘 다.

“벌써 싸고 싶어?”

“아, 아니이……. 흑!”

“왜, 내가 도와줄게. 울지 말고. 응?”

“하으으. 진우야아…….”

커다란 손이 기둥을 타고 올라오더니, 또다시 예민한 부분을 괴롭힌다. 다른 손은 아랫배를 슬금슬금 간지럽히고 있다. 정서원은 온몸에 바짝 긴장이 어리는 걸 느꼈다. 만류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정서원의 얼굴에 만연한 곤란을 들여다보던 서진우가 아랫배를 살짝 짓눌렀다. 

“흐읏……!”

정서원이 맞붙인 무릎을 비벼 가며 헐떡인다. 선단을 만지는 손길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제 아랫배를 누르고 있는 팔뚝을 정서원이 애처롭게 붙잡았다. 뭐가 자꾸 나오고 싶다고 성화인데 그게 성감에 의한 것인지 요의에 의한 것인지도 분간이 안 되었다. 그 와중에도 배출을 부추기는 자극은 끊이질 않는다. 덕분에 눈물만 원 없이 쏟아졌다.

“싫, 하으. 제발…. 진우야, 나, 쌀 것 같다니까……. 흑, 흐윽…….”

“싸면 되잖아.”

“하아, 하아아……! 안, 안 돼……. 하으, 싫어. 아, 아으으……!”

이미 사정을 하며 뭉텅 잘려 나간 인내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계속되는 자극에 정서원은 결국 오줌보를 터뜨렸다. 발기해서 꺼덕거리는 성기가 오줌 줄기를 힘없이 쏘아냈다. 해방감과 수치심이 맹렬하게 맞부딪쳤다. 하얀 손에 잡혀서는 질질 싸대는 제 성기를 보던 정서원이 왈칵 울음을 토한다. 그는 얼굴을 가리며 애처럼 울었다.

“흑, 흐끅. 내가, 싫다고 했, 잖아…….”

“괜찮아. 귀엽다니까, 응? 부끄러워하지 마.”

서진우가 다정하게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그래 봤자 흡족한 말투에 서린 웃음기는 감춰지지 않았다. 정서원은 눈물에 흠뻑 젖은 손으로 저를 끌어안는 서진우를 열심히 거부했다. 때리고, 밀어내고, 반항했지만 서진우는 그것마저 애교를 보듯 웃어넘겼다. 그러자 결국 제 풀에 지친 정서원이 얌전히 안겨 든다.

“흐끅…. 진우야…. 흑.”

의지할 곳이라곤 서진우밖에 없는 정서원이 얌전히 안긴 채로 눈물을 훌쩍거린다. 밀어낼 땐 언제고 도로 안겨드는 모습이 퍽 짠하다. 서진우는 그에게 몇 번이고 키스하며 다정하게 달래 주었다. 내 정서원. 계속 이렇게 예쁘게만 굴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씻겨 줄게. 울지 말고. 털도 예쁘게 깎았는데 왜 울고 그래.”

“으응…….”

“예쁘다, 우리 형.”

정서원은 주눅이 든 채 서진우의 키스를 받았다. 학교와 집, 핸드폰 등이 잠깐 떠올랐지만 제모에다 사정, 뒤이은 실금으로 기진맥진하여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바라는 게 있다면 진우의 화풀이가 하루빨리 끝나는 것이었다. 정서원은 샤워기로 몸을 닦아 주고 거품을 묻혀 주는 손길에 얌전히 몸을 맡겼다. 무기력감이 물밀듯 몰려왔다.

* * *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차에 올랐다.

이상현은 조수석 문을 손수 열어 주는 매너를 보이더니 차에 올라서는 안전벨트까지 매 주었다. 이런 걸 챙겨 줄 매너가 있었다면 식사 전에 입으로 빨게 하지나 말 것이지. 입 안이 아파서 뭘 먹을 수가 없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네. 근처에서 자고 갈래요? 방 잡아 줄게요.”

그가 운전대를 부드럽게 돌리며 물었다. 그럴싸한 말에 속아 넘어가는 것도 한두 번이다. 그는 내 눈빛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잘생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애타게 봐도 오늘은 안 돼요, 서원 씨. 일찍부터 일이 있거든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래요?”

그가 놀리듯 웃는다. 대꾸하기 지쳐서 입을 다물었다. 창밖에 줄지어선 가로등이 서로 꼬리를 물며 지나간다. 이상현은 요즘 들어 나를 데리고 내키는 대로 쏘다니곤 했다. 애인 사이도 아닌데 그와 영화도 보고 뮤지컬 공연도 봤으며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칼질도 했다. 물론 섹스는 진작 했고.

“역에서 내려 주세요.”

“오늘도 집이 어디인지 안 알려 주실 거예요?”

“그게 꼭 필요한 정보인가요?”

“서원 씨, 너무하네요. 우리가 보낸 밤이 얼만데.”

이상현은 전혀 유감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오히려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때마침 신호 대기가 걸렸다. 우아한 손가락으로 운전대를 두드리던 그가 불쑥 나를 바라본다. 연하게 쌍꺼풀 진 부드러운 눈매가 나를 세심하게 관찰했다.

“경계심은 많은 건 좋은데 이상한 데서 맹탕이란 말이야.”

“네?”

“서원 씨요. 이름도 모르는 남자랑은 밀폐된 공간에 제 발로 들어가면서, 이름도 몸도 튼 나한테는 주소 하나 안 알려 주네요.”

“…그쪽도 ‘이름도 모르는 남자’였는데요.”

“전 처음부터 통성명했습니다. 서원 씨가 안 불러 줘서 그렇지.”

“…….”

다시 파란불이 걸린다. 이상현은 내게서 시선을 돌리고는 다시 차를 몰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 감이 오지 않아 옆얼굴을 한참 쳐다보았다. 어렴풋하게, 어플로 남자를 만나는 건 그만두라는 설교의 연장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현은 속삭이듯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왕 경계할 거면 제대로 하는 게 좋아요, 서원 씨. 어설프게, 내가 가자는 대로 따라가지 말구요. 서원 씨 납치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러실 거예요?”

“그거야 모르는 일이죠.”

이상현이 곁눈질로 나를 보더니, 웃었다. 어째 놀림을 당한 기분이었다.

“서원 씨 같은 사람은 남자 잘못 만나고 신세 망치는 경우가 많아서 참 걱정스럽네요.”

“…지금 저 놀리는 거 맞죠?”

“아뇨, 정말 걱정하는 거예요. 진지하게.”

이상현은 결백을 믿어 달라는 듯 웃음을 지우며 대답했다. 물론 설득력은 없었다.

* * *

정서원은 서진우의 극진한 감금 아래서 몇 밤을 보냈다.

시계조차 주어지지 않아 정확히 며칠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출석도 못 한 강의들이 걱정되었으나 그래 봤자 갇힌 저만큼 걱정스럽진 못하다. 정서원은 창밖에 뜨고 지는 해 따위로 시간을 가늠하며 종일 서진우를 기다렸다. 서진우는 그를 이렇게 가둬 놓고는 곁에 있어 주지도 않았다. 아침에 식사를 함께하고, 점심을 미리 가져다준 뒤, 해가 질 무렵에야 겨우 얼굴을 비쳤다. 

기약 없는 기다림과 그로 인한 외로움은 정서원을 절박하게 만들었다. 서진우가 의도한 결과일지는 모르나 정서원을 더욱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계기도 되었다.

“진우야!”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기다리던 정서원이 문이 열리자마자 곧장 서진우에게 안겨들었다. 그는 외출용 정장을 맵시 있게 차려입고 있었다. 품에서 그와 잘 어울리는 향기가 났다.

“나 기다렸어?”

“응. 보고 싶었어…….”

“더 빨리 못 와서 미안해.”

서진우가 앞머리를 멋스럽게 넘긴 이마를 맞대자 정서원이 자연스럽게 어깨로 팔을 두른다. 순종의 의미를 담은 키스가 느긋하게 이어졌다. 정서원은 입술이 살짝 떨어지는 그 잠깐도 못 견디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깊숙이 파고들었다. 까치발까지 들고 적극적으로 안겨드는 모양새가 귀여워서 서진우는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아 주었다.

“형이 이렇게 반겨 주니까 진짜 좋다. 결혼한 것 같아.”

“으응. 나도…….”

서진우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정서원은 못내 불안한 듯 꼭 붙어선 채 입술만 달싹거렸다. 자물쇠가 걸린 문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게 안 된다면 서진우를 이 방으로 끌어들여 몇날 며칠을 함께하며 지겨운 기다림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더는 혼자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혼자 남아 긴 시간을 보내는 건 너무도 외롭고 쓸쓸했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다른 남자와 밤을 지새웠던 정서원이 감당할 수 있는 처벌이 아니었다. 

정서원은 빳빳하게 다림질 된 칼라를 괜스레 만지작거리며 초조함을 달랬다. 서진우의 핀잔을 최소화하면서 원하는 걸 얻어 낼 재간이 없었다. 애초에 그는 제대로 조르는 법을 모른다. 서진우는 늘 그를 살뜰히 보살피던 애인이었고, 그는 헌신적인 애인에게 먼저 바라는 걸 늘어놓지 못하는 숙맥이었다. 섹스를 조르는 방식조차 근래 들어 배운 것에 불과했다.

“왜 그래, 형?”

서진우는 말없이 선 정서원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언뜻 다정했으나 속내에 빼곡히 선 서릿발이 선하다. 정서원은 시무룩하게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저었다. 서진우는 더 묻지 않고 달래 주듯 가볍게 입을 맞춘다.

“배고프지, 밥부터 먹자.”

서진우는 정서원을 테이블로 이끌었다. 고급 한정식집의 로고가 새겨진 종이 가방에서 정갈하게 포장된 음식들이 줄지어 나온다. 하나같이 서원이 좋아할 만한 메뉴들로 채워져 있었지만, 어차피 갇혀서 먹는 처지였다. 새삼 식욕이 들 리 없었다. 정서원은 젓가락질을 몇 번 하다가 내려놓았다. 서진우가 걱정스럽게 묻는다.

“맛없어? 아님 먹고 싶은 거 있어? 만들어 줄까?”

“아니……. 그냥, 입맛이 좀 없어서. 괜찮아, 진우야. 맛있어.”

“깨작거리면서 뭐가 괜찮아.”

“…….”

편식을 한다고 서진우의 무릎에 앉혀진 채 밥 한 그릇을 다 비워야 했던 것이 바로 얼마 전 일이다. 정서원이 괜히 반찬을 하나 더 집어먹으며 눈치를 살핀다. 또다시 서진우가 제 무릎으로 부를까 봐 불안한 눈치였으나, 물론 서진우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형, 이리 와.”

“아, 나, 나 정말 괜찮아, 진우야…. 맛있어.”

“얼른.”

단호한 말투가 결국 정서원을 자리에서 일으킨다. 정서원은 서진우와 그 옆에 놓인 의자를 바라보며 갈등하다, “여기로 와야지.”하고 부르는 소리에 순순히 그에게 다가갔다. 애처럼, 때로는 애견처럼 다뤄지는 것이 기이하고도 서늘했다. 불편하고 민망스러운 자리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멀뚱히 앉은 정서원과는 달리 서진우는 기분 좋게 웃는다.

“형이 잘 못 먹으면 내가 걱정되잖아. 가뜩이나 말랐는데.”

“으응……. 미안.”

“미안할 게 뭐 있어. 천천히 먹으면 되지, 응?”

“응…….”

무기력증이든, 줄어든 식욕이든, 일단 밖으로 나가기만 한다면 금방 해결될 문제였다. 정서원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해결법을 서진우라고 모르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아직 화가 덜 풀려서 모른 척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정서원도 그런 일을 벌여 놓고 금방 용서받길 원하는 건 아니었다. 진우가 화를 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진우가 점점 모르는 사람처럼 변하는 것 같아 조금 무서울 뿐이다. 정서원은 서진우가 하루빨리 화를 풀고 전처럼 다정해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다시 다정해져서, 예전처럼 상냥하고, 자상하게……. 하지만 그런다고, 앞으로 진우의 다정함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정서원이 제게 물까지 떠먹여 주는 서진우를 곁눈질로 훔쳐본다. 그는 눈이 마주치자 예쁘게 웃으며 정서원의 입술을 문질러 주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나한테 숨기는 거라도 있어?”

“그런 거, 없어…….”

“정말? 나 형 믿어도 돼?”

나직한 목소리가 부드러운 말투로 채근한다. 그 속에 숨겨진 은근한 뉘앙스는 정서원을 바싹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정서원은 아랫입술을 말아 물며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날을 보이는 서진우를 어찌 달래야 할지 모르겠다. 다정하게도, 매섭게도 구는 그를 대할 때마다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정서원은 방치당한 시간 속 숱한 외로움을 되새기다가 머뭇머뭇 시선을 맞추었다. 십 년을 넘게 봐 온 익숙한 얼굴이 그를 가늠하듯 바라보고 있다.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용서를 빌고 싶었다. 그 바람이 불시에 입술 밖으로 비죽 새었다.

“진우야…….”

“응. 말해.”

정서원의 손이 서진우의 어깨를 짚었다가, 천천히 밑으로 내려온다. 정서원은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앉으며 서진우의 허벅다리를 매만졌다. 그나마 배운 것이라고는 이런 것밖에 없었다.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시선이 불안하게 맞물린다. 정서원은 눈물이 핑그르르 도는 눈으로 간절하게 혹은 절박하게 서진우를 보았다.

“안 한 지 오래됐잖아, 진우야…….”

“…….”

그리고 정서원은 다시금 서진우의 분노를 당긴다.

“입으로, 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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