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스위퍼는 면담을 마치고 체육관으로 내려왔다. 병사 두 명과 함께 내려오는 스위퍼를 본 사람들의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처음에는 호기심 있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사람들도 아무 일 없이 병사들이 떠나자 그냥 새로 온 사람인가 하고 관심을 거뒀다. 우수수 몰려들었던 시선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체육관 규모에 비해 생존자들이 많지는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존자들을 어림짐작해도 최대 오, 육백 명.
스위퍼는 대충 눈에 보이는 구석진 자리에 보급으로 받은 은박 돗자리를 깔아두고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았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인상을 크게 찌푸리더니 손을 털고 지나갔다.
“뭐야, 저 형씨는.”
인심 한번 각박하구만.
스위퍼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형씨, 여기 흡연실이 어딥니까?”
지나가는 인상 좋은 청년을 붙잡고 다시 한번 물었다. 그 순간 청년의 눈빛이 묘하게 바뀌더니 금세 환한 얼굴을 했다.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몇몇 사람들이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는 게 느껴졌다. 스위퍼는 따라 일어서는 사람들에게 힐끔 시선을 주고는 청년을 따라갔다.
그가 안내한 곳은 아래쪽으로 생존자들이 거주하는 운동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3층 게이트였다.
“오호, 전망 좋은 곳인데. 고마워, 형씨.”
스위퍼가 씩 웃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청년은 되돌아가지 않고 그의 주변에서 머뭇거렸다.
“저, 혹시…….”
“응? 볼일 있어?”
“저도 한 개비만 얻을 수 있을까요?”
“아, 그럼. 물론이지. 이거 피워.”
스위퍼가 호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내 청년에게 던졌다. 청년은 던져진 담뱃갑을 받아들고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주변에 시선들이 느껴지자, ‘그럼 이만.’이라는 말을 남기고 담배 한 갑을 보물단지처럼 감싸고선 사라졌다.
하긴, 이런 상황이니 담배가 귀할 만도 하지. 스위퍼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자리로 되돌아온 스위퍼는 벽에 기대듯 드러누워 팔짱을 꼈다. 가슴 한편이 답답하고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평생을 몸담았던 조직으로부터는 연락이 없다. 제법 많은 돈이 들어올 예정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그저 종이 쪼가리일 뿐이리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는지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다. 딱히 당장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건 아니었지만, 평소보다는 확실히 심력 소모가 컸다. 위험이 항상 근처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은 상당한 스트레스였으니까.
스위퍼는 느껴지는 시선에 상념에서 벗어나 제 근처에 선 사람을 바라봤다. 기껏해야 초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꾀죄죄한 여자아이가 그의 옆에 서 있었다.
“어, 꼬마 아가씨. 왜?”
소녀는 말없이 스위퍼 인근의 물병을 가리켰다.
“아, 네 자리야? 미안. 비켜줄게.”
“아니에요. 조금만 옆으로 가 주시면 그 옆에 앉을게요.”
어딘가 조숙해 보이는 꼬마 아이였다. 스위퍼가 빙긋 웃으며 자리를 옮기자 그녀는 그 옆에 쪼그리듯 앉았다.
‘부모가 없나.’
그러니까 이렇게 혼자 앉아 있겠지. 스위퍼는 약간의 안쓰러운 감정을 느끼며 시선을 거뒀다. 그래도 제 목숨이라도 건진 게 어디야, 하는 생각과 함께.
출출함을 느낀 스위퍼가 배낭에서 비스킷을 꺼내 먹었다. 달짝지근한 당이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
거 참, 부담스럽게도 쳐다보네.
스위퍼가 고개를 살레살레 저으며 소녀에게 비스킷 하나를 내밀었다.
“먹으렴.”
그가 비스킷을 나눠줄 줄 몰랐는지, 아이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먹어. 괜찮아.”
“감사합니다.”
꼬마는 허겁지겁 비스킷을 꺼내먹었다. 작은 비스킷 하나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쉽다는 듯 다시 눈치를 보며 봉지까지 핥아먹는 모습을 보자 어딘가 얹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
“더 줘?”
잠시 머뭇거리던 소녀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스위퍼가 히죽 웃었다.
“싫은데.”
그러나 칼 같은 답변이 떨어지자 소녀는 그대로 고개를 푹 숙였다. 스위퍼가 피식 웃고선 비스킷 한 뭉텅이를 툭 던졌다. 어차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구할 거였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꼭 갚을게요.”
“됐어, 인마. 조그만 게.”
“아니에요. 신세 지는 건 참기 힘들어서… 필요한 게 있으면 얘기하세요.”
“얼씨구.”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스위퍼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선 비스킷을 먹어치우는 소녀를 보며 혀를 찼다.
은혜를 갚겠다는 소녀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몇 시간 후 어디선가 작은 생수병을 들고 와 그에게 내밀었다.
“뭐야?”
“물이요. 받으세요.”
고사리 같은 손에 들린 물병에는 물이 200mL도 채 담겨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식수조차 부족한 상황인 듯했다. 그런 그의 의문을 깨달았는지 소녀가 덧붙였다.
“하루에 배급되는 물은 이게 전부예요. 아저씨는 늦게 오셔서 물을 못 받으셨을 테니까……․”
흐릿한 걸 보니 생수라기보다는 수돗물로 보였다. 마시고 배탈이 나는 사람들도 있겠네. 스위퍼는 생수병에 담겨 있는 물을 찰랑거리며 그녀에게 빤한 시선을 보냈다.
“고마워.”
“별말씀을요.”
소녀는 꾸벅 인사했다.
* * *
“왜 따라다니냐.”
스위퍼는 똥개처럼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는 소녀를 보며 툭 내뱉었다.
뭐, 대부분 시간을 구석에서 누워있는데 보내서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담배 피울 때는 떨어지는 게 좋을 텐데. 청소년에게 간접흡연이 안 좋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그였으니까.
옆에 붙어있으면 최소한 먹을 것 한두 개씩 떨어지니 그 마음을 이해는 한다만.
“폐암 걸린다. 그러다.”
“아저씨보다는 오래 살지 않을까요?”
“그거 잔망스러운 녀석일세.”
아이는 배시시 웃었다. 스위퍼도 덩달아 피식 웃었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마침 생각도 많고 무료하기도 했으니까.
스위퍼는 난간 아래에 시선을 던졌다. 아래쪽 운동장 구석에서는 웬 남녀가 옥신각신하며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낯익은 자였다. 자신에게 담배를 얻어갔던 그 청년.
두 사람은 옥신각신하더니 이윽고 함께 남자 화장실 방향으로 사라졌다.
다소 이상한 모습에 스위퍼가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밥은 언제부터 굶은 거야?”
“여기 들어온 지 사흘째부터예요.”
“하, 제법 오래됐네?”
“……네.”
“그동안 쫄쫄 굶으면서 여기에 있느니 차라리 다른 피난처를 찾아보는 게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맞아요. 그래서 몇 명 나가기도 했어요. 돌아오질 않아서 그렇지.”
“흐음.”
“바로 코앞에서 좀비가 되어서 헤매는 사람들도 있어서 그런지, 그 뒤로는 사람들이 나가길 무서워하더라고요.”
“그렇군. 나약해 빠져서 그래.”
“재난 앞에서는 누구나 약하죠.”
“현자 납셨군.”
그녀가 소소하게 그의 말동무가 되어 주는 사이, 화장실에 들어갔던 두 남녀가 다시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담배 네 개비가 들려 있었다. 스위퍼가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저건.”
“한쪽은 인간의 삼대 욕구 중 하나를 충족하고 한 쪽은 흡연욕을 충족시키는 거겠죠. 참, 아무리 그래도 화장실에서 더럽게.”
“몰라서 물어본 게 아니란다. 이 애늙은이야.”
어쨌든 그 말에는 충분히 동의하는 바였다. 자신이었다면 물도 제대로 내려가지 않아 완전히 똥 바다가 된 화장실에서 그 짓을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을 테니까.
“체력도 좋네요. 먹은 것도 없을 텐데.”
“뭐래. 어린애는 신경 꺼라.”
애늙은이처럼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기가 질려버렸다. 그런 스위퍼의 눈빛에 소녀가 심드렁하니 덧붙였다.
“저도 알 건 다 안다고요.”
“난리 며칠 만에 변해버린 거냐, 원래부터 그런 애늙은이였던 거냐?”
“성숙한 거라고 해줘요.”
“그래. 요즘 초등학생들은 성숙하기도 하지. 참,”
“……?”
“네 이름은 뭐야?”
“…보라요.”
“그래. 보라야. 부모님은 죽은 거야?”
“질문이 너무 무심하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어, 별로. 어차피 난 날 때부터 부모가 없었거든.”
“그렇군요.”
말끝을 흐렸던 보라는 잠시 뒤 덧붙였다.
“다른 대피소에 계셔요. 저는 학원이 이 근처라서 선생님들이 이쪽으로 데려온 거고, 부모님은 직장 근처 대피소에 계실 거예요.”
“음, 그럼 다시 만날 수도 있겠네.”
보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은 생라면을 잘게 부순 후 분말수프를 뿌려 먹었다. 맵고 짜긴 했지만 나름대로 먹을 만했다.
“나트륨을 너무 많이 섭취하면 수분이 모자라요. 스프는 조금만 찍어 드세요.”
“신경 꺼. 그리고 똑똑한 척하지 마. 내가 알아서 먹을 거야.”
“에휴.”
스위퍼는 고개를 젓는 애늙은이의 손에서 라면 봉지를 낚아챘다. 당연히 그녀는 순순히 머리를 조아렸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물주님.”
“그래, 이 자식아. 어디 건방지게.”
“충성충성. 다시는 물주님의 건강을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그거 약간 비꼬는 것 같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투닥거리는 두 사람의 앞에 그늘이 졌다. 스위퍼가 고개를 드니 웬 남자들 여섯 명이 다가와 있었다.
“무슨 일인가, 형씨들?”
“여보세요.”
“예. 듣고 있어요.”
“외부에서 들어왔다는 건 알겠는데, 여기 사람들이 다 굶고 있는데 당당하게 혼자 먹는 건 무슨 심보요?”
“무슨 심보라니, 내 먹을 걸 내가 먹겠다는데?”
스위퍼가 고개를 기울이자 여섯 명의 사내가 거의 동시에 인상을 찡그렸다.
“쭉 보니까 먹을 것도 많던데 좀 나눠 먹읍시다. 같이 신세 지고 있는 처지에.”
“내가 신세 지고 있는 건 당신들이 아닌데. 그리고 관음증은 위험해 형씨. 난 남자엔 관심 없거든.”
“지금 우리가 농담하는 것처럼 보입니까?”
“아니? 형씨는 내가 지금 농담하는 것처럼 보여?”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앉아 있을 때와 달리 제법 체격이 있는 모습에 가장 앞에 있던 사내가 움찔 뒤로 물러섰다.
스위퍼의 얼굴은 웃고 있었으나 목소리는 상당히 싸늘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보라가 일어나서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스위퍼가 괜찮다는 듯 그녀의 손을 두드렸다.
“내가 먹을 걸 주면, 형씨들은 나한테 뭘 줄 수 있는데?”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조금씩 그를 둘러싸듯 반원을 그리며 움직였다. 배고픔에 정신이 팔려 이곳에서 소란을 일으키면 안 된다는 자각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보라를 향해 스위퍼가 씩 웃으며 내뱉었다.
“잘 봐 꼬맹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배울 교훈이라는 게 있다고. 특히 이번 같은 경우는,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펴랬다는 교훈이지.”
스위퍼가 손을 풀며 덧붙였다.
“덧붙이자면 목숨은 소중하다. 정도?”
그가 씩 이를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