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 * *
좀비 아포칼립스가 터진 후 일주일이 지났다. 스위퍼는 거처로 삼은 모텔에서 챙겨 온 식량을 먹으며 천천히 사태를 관망했다.
혼란스러울 때는 우선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었으니까.
스위퍼는 사태가 진정될 거라 예상했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혼란은 점점 가중됐다.
거리는 소란스러웠다.
사이렌 소리와 비명, 고함이 물감처럼 뒤섞여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전기와 도시가스가 끊기고, 수도 공급이 정지됐다. 소탕 작전은 시행되지 않았고, 구조 작업 또한 초반 며칠 반짝하더니 쏙 자취를 감췄다.
사실상 국가의 전복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좀비들이 감염성을 지니고 있다 한들, 이렇게 국가가 무력하게 무너질 수 있는가.
단순한 좀비 사태가 아니다. 사태를 악화시킨 뭔가가 더 있다.
그것이 스위퍼의 판단이자 결론이었다. 그는 이 사태를 얕보지 않기로 했다.
정부는 마지막 발표를 이후로 움직임이 없었으며 군은 마치 오합지졸처럼 정돈이 안 된 느낌이었다. 마땅한 조치들이 취해지지 않고 있다.
라디오 방송에서는 긴급방송만 흘러나오고 있다. 대부분이 허접스러운 재난방송과 주변 대피소에 대한 정보를 흘리는 안내방송일뿐이었다. 그조차 어느 순간부터는 앵무새처럼 자동응답 방송만 진행되었다.
결국, 일주일이 지난 이후에 스위퍼는 두 번째 식량 조달을 해야 하는 순간이 닥쳤다.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장난스러운 상황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식량들과 식수 위주의 수급이 필요했다. 뒤늦게 깨달은 사태의 심각성이 뼈를 때렸다.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중개소와의 통신 불가.
“하, 돌아버리겠구만.”
스위퍼가 담배를 꼬나물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내 담뱃재가 툭,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그는 상념에 잠긴 듯 가만히 있다가 필터 부근까지 담뱃대가 까무룩 타 버린 뒤에야 투, 담배를 뱉어냈다.
그가 한 줌밖에 안 되는 짐을 배낭에 챙긴 후 창문을 열어 난간 위로 올라섰다. 그의 발아래 길거리에는 죽은 자들의 행렬이 떼를 이루고 있었다. 길거리에 발바닥을 디딘 순간 썩은 시체들의 피딩 현장이 될 게 불 보듯 뻔했다. 불과 며칠 만에 벌어진 일.
그가 능숙하게 미리 만들어놓은 커튼 밧줄을 타고 옥상으로 올라가 건물 사이를 넘었다.
모텔 주변의 편의점, 마트들은 대부분 깨끗하게 털린 뒤였다.
그게 아니라면 일반인들에겐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좀비 떼에게 점령당했거나.
스위퍼는 날다람쥐처럼 난간에 매달려 주변 도로를 살폈다.
온통 세상이 좀비뿐이다. 썩은 내가 진동했다. 그동안 간간이 생존자들이 거리로 뛰어나왔으나 이리저리 도망치다가 비명과 함께 산화됐다.
아무리 약한 좀비들이라고 해도 다수에게 길이 막히면 위협이 된다. 몇 분만 전력으로 뛰어도 체력이 달고, 호흡이 떨어지는 순간 좀비들의 우악스러운 손길은 생존자의 발길을 붙잡았다.
‘왜 총성이 들리지 않지?’
가장 의아한 점은 그것이었다.
왜 화기를 사용하지 않는 거야?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면 당연히 개인화기며 공용화기를 동원해서 안전 지역을 만들어야지. 봉쇄하든, 소탕하든.
마땅히 그래야 하는데.
상황이 터진 지 일주일이 지날 때까지 단 한 발의 총성도 들려오지 않았다.
상가 내 편의점으로 도착한 스위퍼는 일하지 않는 군인들을 속으로 타박하면서도 내심 눈앞의 문을 여는 것을 주저했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뛰지도 못하는 좀비들 따위, 그다지 위협적이지도 않다.
애초에 국제범죄자들을 대상으로 한 살인청부업이 본업이다. 걸음마를 뗀 순간부터 지옥 같은 훈련을 해 왔다. 놈들에게 위협을 느끼거나, 사람을 죽이는 걸 두려워하는 코흘리개도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건 저들이 민간인이라는 것 정도. 그는 한 번도 민간인을 허가 없이 죽여본 적은 없었다.
흐음, 스위퍼가 비음을 내며 손아귀에 꽉 힘을 주었다.
이제는 결단이 필요했다.
이게 그 자신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좀비가 맞는다면 순순히 물려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사태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손속을 둘 순 없었다. 스위퍼가 손도끼를 빙글빙글 돌렸다.
일단 여기를 정리하고, 대피소로 가자. 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정확한 정보가 필요했다.
* * *
가까운 대피소로 도착한 스위퍼는 눈을 한번 비볐다. 대피소로 정해진 실내경기장 입구에는 간이로 막아둔 꿀벌 무늬의 스틸 바리케이드가 길게 일렬로 쭉 늘어서 있었고, 그 주변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서성거리던 좀비들은 바리케이드에 찍혀 꿈틀거리거나 아니면 그 주변을 꼭두각시 인형처럼 배회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경비병이 없다.
대피소 바로 인근에서 돌아다니는 좀비들조차 처리하지 않으면서, 무슨 생존자들을 대피시키겠다는 건지.
‘흠…….’
스위퍼의 시선이 대피소 위쪽 난간을 향했다. 난간 위에는 국군 군복을 입은 군인 두 명이 총기를 어깨에 걸고 경계를 서고 있었다.
‘무장하고 있잖아?’
알수록 미스터리한 상황이었다.
스위퍼가 주변의 좀비 머리를 박살 내며 잽싸게 탁, 탁 뛰어 깔끔한 파쿠르로 종합운동장 외벽을 넘었다.
그러고선 천천히 좀비들이 없는 공간으로 난간 가까이에 도착하자, 그를 발견한 사병들이 기겁하며 총구를 들이댔다. 아마도 그의 옷에 묻은 좀비 피와 피 묻은 손도끼 때문인 듯.
“정지!”
여전히 내려올 생각은 없어 보였다. 스위퍼는 도끼를 바지춤에 쓱쓱 닦은 뒤 허리춤에 고정하고 두 손을 들어 저항 의사가 없음을 표시했다.
“…누구십니까.”
“안녕, 형씨들. 보다시피 구조를 필요로 하는 생존자인데.”
스위퍼가 활짝 웃으며 적의가 없다는 걸 비추어 보였으나, 그들은 여전히 당황한 채 서로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대피소라고 들어서 왔는데, 이렇게 위험하게 세워둘 거야?”
스위퍼의 말에 고참으로 보이는 상병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인 뒤 손가락으로 반대편 철 사다리를 가리켰다. 계단은 부서져 있었다.
“일단 이쪽으로 넘어오십시오.”
스위퍼가 천천히 철 사다리를 타고 운동장 난간 쪽으로 올라갔다. 그들에게 다가가자 상병이 손바닥을 펴 보이며 정지 신호를 했다. 스위퍼가 멈칫했다.
“물린 곳은 없으십니까? 피가 많이 묻어 있습니다.”
“아, 이건 좀비들 피야. 물린 곳은 없어. 보다시피 멀쩡하잖아.”
“한 시간만 그러고 계십쇼. 절차입니다.”
“그래. 뭐.”
두 사람은 여전히 총구를 들이댄 채로 스위퍼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스위퍼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계단은 왜 다 박살 났어?”
“대대장님이 끊어 놓으셨습니다. 좀비들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호오.”
“어디서 오신 분입니까?”
“보다시피. 선량한 시민이라고.”
“저 길거리 좀비 밭을 뚫고 오신 겁니까?”
“그럼.”
“어떻게요?”
“어떻게, 라니? 그래 봤자 느려 터진 굼벵이들인걸.”
일병이 입을 어버버 벌리고선 중얼거렸다. 이제 갓 스무 살이 넘은 어린아이에게는 조금 가혹할 수 있지. 스위퍼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왜 저 좀비들을 처리하지 않고 가만히 놔두는 거야?”
“…그건 저희도 알지 못합니다. 부사관이나 장교분들께 여쭤보십시오.”
그나마 짬 좀 더 먹었다고 상병이 빠릿빠릿하고 영특했다. 쓸데없는 말도 없고 경계도 철저하다. 어린 나이치고는 제법이었다.
스위퍼는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피웠다. 오늘만 벌써 한 갑을 채웠다. 그런 스위퍼를 보고 병사들이 입맛을 다셨다.
“흡연자? 한 대씩 줄까?”
침을 꿀꺽 삼키는 병사들에게 스위퍼는 씩 웃으며 담배를 건넸다.
“자꾸 담배 생각이 나는 세상이 되어버렸지 뭐야.”
“그러게 말입니다.”
“아직도 실감이…….”
딱 일주일이 지났을 뿐이다. 명령에 따라서 이곳을 지키고는 있겠지만, 그들은 그저 어안이 벙벙하겠지. 산전수전 다 겪은 자신조차도 어리둥절한 상황이니까. 아마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미쳐버리거나 망아지처럼 날뛰는 군인들도 속출할지도.
한 시간쯤 지나자 병사들이 총구를 내렸다.
“그거, 실탄 들어 있어?”
“공포탄입니다.”
스위퍼는 씩 웃었다.
“우선 소지품을 제출하시고 이곳에 사인 부탁드립니다. 소지품 중 도끼 같은 흉기는 반입할 수 없습니다. 작성하고 계시면 소지품 확인 후 돌려드리겠습니다.”
“이게 뭐지?”
스위퍼가 두 개의 종이를 흔들며 물었다.
[예비군 소집 동의서]
[부대 통제 동의서]
“대피소 입소 시에 반드시 받아야 하는 동의 서류입니다. 비상시에 선배님들께서도 전투에 참전할 수 있도록…….”
스위퍼가 인상을 찡그리며 예비군 소집 동의서를 밀어냈다.
“이건 사인 못 하겠는데.”
“선배님, 대피소 들어오시려면 무조건 사인하셔야 합니다. 여기가 아니라도 어차피 지금 전 예비군 소집령이 떨어졌습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상병은 단호하게 설명했다. 스위퍼가 고개를 까닥거리며 자신의 배낭을 가리켰다.
“거기, 내 배낭 왼쪽 주머니 봐봐.”
상병이 턱짓하자 일병이 배낭 옆 주머니를 열었다. 그 안에는 지갑이 들어 있었다. 스위퍼가 두 손을 모아 공간을 만들자 지갑을 건넸다. 스위퍼는 그 안에서 신분증 하나를 꺼냈다.
“이게 무엇입니까?”
“장교신분증. 이미 소속이 있어서 말이야. 이중 소속은 불가하거든.”
상병이 놀란 표정을 하며 신분증을 확인했다. 그 안에는 UN군 소속을 증명하는 사진과 군번, 부대명이 적혀 있었다.
“유엔군이십니까? 유엔군이 여기엔 왜…….”
경례해야 하는지 아닌지 고민하면서 엉거주춤 서 있는 그들을 보며 스위퍼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아, 같은 소속도 아닌데 경례는 필요 없어. 임무 차 나와 있는데 이 상황이 터져서 말이야. 왜 사인할 수 없는지 알겠지? 이중 소속이라고.”
“그, 대대장님께 보고하고 오겠습니다.”
스위퍼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병은 빛의 속도로 튀어 나갔다.
역시 효과가 좋긴 좋다.
당연하지만, 위조된 신분이었다.
임무를 위해 몇 개의 위조 신분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었고, 특히 군사시설을 이용할 때는 국내 조직보다는 해외 군사조직이 여러모로 편리한 감이 있었다.
증명을 요청해도 대부분 가능하지만, 특히 지금처럼 신분 증명이 불가할 때는 더더욱 좋았다. 붓질을 하는 대로 그림이 그려질 테니.
그나저나 재입대라니. 그건 곤란하지.
그런 끔찍한 소리는 듣기조차 싫었다.
애초에 조직 방침상 소속을 만들어놓으면 안 될뿐더러 이런 위기상황에서는 몸이 조직에 묶이는 것만큼 위험한 상황도 없으니까. 어디까지나 역마살 낀 방랑자처럼 내가 오고 싶을 때 오고,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