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서바이벌-164화 (164/176)

<164화>

기이한 광경이다.

여기저기서 머리 위에 물음표가 둥둥 떠다녔다. 할 말을 잃은 사람들을 대표해 스위퍼가 질문했다.

“형씨, 숨겨둔 딸이 있었어?”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요한이 소녀를 밀어내며 대답했다. 소녀는 여전히 요한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였다.

“현신을 잘못된 위치에 해서, 한참을 헤맸단다. 방향을 잘 못 찾는 타입이라 말이지. 보고 싶었다. 요한. 너를 만나게 되는 날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른단다.”

사람들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괴리감이 느껴지는 말투와 분위기였다. 여자아이의 껍데기를 쓴 노인네 같은. 요한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말을 꺼냈다.

“이곳엔 어떻게 들어왔지? 나는 어떻게 알지?”

“그 전에 친구들을 내보내 주겠니. 다른 사람이 들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라서 말이야.”

곤란하다는 듯 요한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빠져나갔다.

둘만 남은 공간, 요한이 의자를 끌어와 그녀를 앉힌 뒤 자신도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마침 착한 척하는 것들도 나갔겠다, 경고하지. 난 어린애라고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아. 허튼수작 부리거나 개소리하면 몸에 총알구멍을 하나씩 내주마.”

살벌한 대사에도 소녀는 겁먹기는커녕 그저 해맑게 웃었다.

“알고 있단다. 네가 어떤 사람인지, 네 성격이 어떤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도.”

“하?”

요한은 이 뚱딴지같은 장단에 얼마나 맞춰줘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넌 누구지?”

“나는 스텔라. 위험과 재난을 관장하는 존재. 그리고 너의 후원인이기도 하지.”

요한의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꼬여 들었다. 분명 한국말인데도 단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정신 나간 아이인가.

그의 의문을 읽은 스텔라가 머리를 긁적였다.

“음… 어떻게 설명해주면 좋을까, 뉴질랜드에 네가 정착하고 일 년쯤 되었을 때, 기억하니? 그때 너는 우리를 불렀지.”

혼란스럽다.

“참, 열쇠는 아직 가지고 있지? 그걸로 설명하면 되겠구나.”

손가락을 딱, 튕긴 스텔라가 요한의 방 어딘가를 뒤적거렸다.

“이쯤인데……. 아, 찾았다.”

그녀가 꺼낸 것은 재호가 찾아온 문서, 요한과 그가 계시록이라 부르는 서적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꺼내 마지막 장을 펼친 후 종장에 그려진 수많은 괴물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 이게 나란다.”

“…….”

요한은 개소리라 일축하지도, 장난으로 치부할 수도 없었다.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뇌리가 얼얼하게 울렸다.

이게 무슨 장난질 같은 상황인지. 처음 회귀를 했을 때보다도 더 어리둥절한 상황이었다.

질문들이 휘몰아쳐 머릿속을 맴돌다가 결국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바보 머저리가 된 것만 같다.

“왜 말이 없니? 어딘가 안 좋아 보이는구나.”

스텔라가 걱정스럽다는 듯 물어 오자, 요한은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르고 내뱉었다.

“…네가 지금 이 사태를 만든 원흉이라고?”

“원흉이라는 표현은 조금 억울한 면도 있지마는…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구나.”

스텔라는 멋쩍은지 흰 볼을 긁적였다.

“증명은?”

“네가 원하는 모든 방식으로 가능하단다.”

“지금 네 목을 벨 거야. 네가 신적인 존재라면 목이 잘려 죽진 않겠지.”

스텔라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배알이 뒤틀린 요한이 곧바로 허리춤에서 마체테를 꺼내 전광석화처럼 휘둘렀다.

손속은 없었다.

설령 그녀가 정신병자라고 한들, 죽어 충분한 질 나쁜 장난이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차가운 날붙이가 소녀의 목을 파고들었다.

서걱-

생경한 감촉이다. 마치 이건, 고무를 베는 듯한.

“…….”

분명히 목을 잘랐는데, 피가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목 잘린 스텔라는 바닥을 데구루루 구른 제 목을 향해 더듬더듬 걸어가더니, 그 머리를 목 위에 얹었다.

기괴하고도 괴이쩍은 광경이었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부디 감정을 가라앉히렴.”

요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느끼고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감각.

“표정이 안 좋구나.”

“지금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 너는 이해할 수 없겠지.”

사람 목숨을 가지고 좋다고 놀아 젖히는 너로서는.

“아니, 어느 정도 공감했다. 정말로 유감이야. 그래도 참 잘해 주었다. 멋진 왕이 되었구나. 너의 노력과 수고에 경의를 표해.”

“개소리와 공치사는 집어치워.”

희미한 표정이었다.

깜빡이는 눈에 생기가 없다.

“궁금한 것이 많겠지. 너와 마주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테니 후회를 남기지 않는 것이 좋아.”

“질문이 많다.”

“응. 얼마든지 하렴. 음,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대답해 줄 테니.”

요한은 평정을 되찾았다.

아직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현실감이 없는 것이 더욱 현실 같았다. 거의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첫 좀비가 나타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현실처럼 느껴진 적이 없었다.

“해줄 수 없는 대답이 뭔데.”

“나 외에 다른 존재들은 후원자와 피후원자가 만나는 것을 내켜 하지 않거든. 그래도 괜찮을 거야. 끝난 경기에는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으니까.”

“그러면 너는?”

“나는 다르지. 왜냐하면, 나는 너를 사랑하거든. 경기가 끝난 뒤에도 너를 향한 내 관심은 사라지지 않을 거야.”

요한이 인상을 썼다.

“1경기에도, 지난 경기에도 그리고 이번에도. 너를 지켜주었던 위기를 감지하고 위험으로부터 너를 보호할 수 있었던 그 능력 또한 나의 일부란다. 다른 치들은 명예를 위해 널 선택했지만 나는 달라. 난 널 사랑한단다.”

“사랑한다고?”

“그래. 물론 인간들의 기준과는 조금 다를 수도 있겠지. 육체적인 관계, 정신적인 교감. 그런 개념은 아니란다. 그보다는 조금 더 포괄적이지.”

“…….”

“네 존재를 사랑한다고 생각해주면 좋겠구나. 그런데… 아까 너를 껴안았을 때의 감정은 존재 이후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지. 기뻤단다. 너만 괜찮다면 육체적 관계와 정신적 교감도 경험해보고 싶은데, 어떠니?”

“꺼져.”

요한의 대답은 간결하고 명료했다.

“인간들의 사랑을 경험해보고 싶었는데.”

“잠깐, 차근차근 질문할 테니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묻는 말에 대답해. 이 세계를 멸망시킨 이유는 뭐지?”

“그 전에 한 가지 당부할 게 있어. 흥분하지 말고, 감정을 폭발시키지 말렴. 이제 다 끝난 일이니까. 알겠지?”

“묻는 말에나 대답해.”

요한의 반응은 싸늘했다. 스텔라는 먼 산을 바라보듯 시선을 허공으로 던졌다가 천천히 읊조렸다.

“우리는 우리가 탄생한 원인도 시기도 몰라. 언젠가부터 존재하고 있었지. 인과를 거스르지 않으며 각자의 영역을 주관하며 살아가고 있었으나, 우리의 존재는 무료 그 자체란다.”

스텔라가 천천히 말했다.

“그러던 언젠가 시작된 두 개체의 시답잖은 장난이 시작이었지. 처음에는 단순한 내기였어. 그러다 열 개체가, 나중에는 대부분 개체가 그들의 내기에 함께했지. 그저… 무료했거든. 판이 커지자 승부를 관장하던 존재는 아예 거대한 게임장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선택된 것이, 이곳이야. B-147, 지구. 우리는 이곳의 특정 시점을 계속해서 복사한 뒤 경기를 진행하다가 결국 지금에 이르렀다.”

“…고작 무료했다.”

스텔라가 요한의 눈치를 봤다. 몇 개월 전의 그때처럼 화를 내리라 생각했지만, 요한의 표정은 평온했다. 기실, 평온이라기보다는 침잠이었다.

“화를 내지 않는구나.”

“화를 낼 기력도 없어. 그리고 처음부터, 그럴싸한 이유가 있을 거라곤 기대도 안 했다. 다음 질문. 나의 행동이 너희에게 방해가 됐나.”

두루뭉술한 질문이었으나 그녀는 그의 질문을 정확하게 이해했다. 한순간도 빠지지 않고 그를 지켜봐 왔던 그녀였기에.

“…솔직히 말하면 아니란다. 오히려 네 덕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살아남았지. 이번 경기는, 잘못 설계되었거든. 그러나 네가 어떤 행동을 하던,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을 거야.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모든 인류가 사라졌어도, 반대로 사도들이 모두 진압되어 문명에 타격이 없었어도 말이지.”

질문할 게 너무나 많다. 차근차근 정리하는 걸 포기하고 떠오르는 질문들을 그대로 내던졌다. 요한이 계시록을 가리켰다.

“이 책은 뭐지?”

“우리는 이것을 열쇠라고 부른다. 예언하기를 좋아하는 존재가 만들어둔 안배지. 경기가 끝난 시점에 열쇠의 주인이 후원을 받고 있다면 자신의 후원자를 만날 수 있도록 만들어 둔. 내가 네 앞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도 네가 열쇠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만들어둔 이유는 뭔데?”

“…글쎄. 열쇠는 스스로 주인을 찾는다고 하더라. 아마 이 경기의 주연에게 진실을 알게 할 자격 정도는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닐까.”

요한이 차곡차곡 설명을 주워 담았다.

“아까 ‘다른 치들은’이라고 했는데. 그건 무슨 의미지?”

“너를 후원했던 사람은 나뿐이 아니야. 너에게 전 경기의 기억을 주었던 존재나, 너의 오감을 발달시켜주었던 존재도 있지.”

“전 경기의 기억… 회귀가 아니었군.”

“아니야. 그 경기의 요한은 죽었고, 네가 그 기억을 계승한 것뿐이지.”

“지난 경기 때에는 그들이 날 후원하지 않았던 건가.”

“그렇지. 경기마다 널 후원하는 건 오로지 나뿐이야.”

“설마 리나나 스위퍼도?”

“맞아. 그들도 우리의 후원을 받는 사람들이지.”

머릿속에 꼬여졌던 실타래가 조금씩 풀려나갔다.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분명 날아오는 화살을 피할 정도로 기감이 발달한 것은 이전 생에서는 없던 능력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전 생에서도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은 있었다. 3년 동안이나 자신을 살아남을 수 있게 해주었던 그 감각.

그저 운이라고 치부했던.

“아까 경기가 끝났다고 했었나.”

“맞아. 경기의 시간은 3년이란다. 3년이 지나면 사도들은, 아 사도들은 너희가 말하는 변종 피콜로와 그 자식들이야. 사도들은 사라지고 그들이 일으켰던 감염 또한 점차 사라지지. 좀비들도 점차 썩게 될 거란다. 그래도 한 달 정도는 조심하는 게 좋아. 잔흔이 남았을 수 있거든.”

지난 경기의 자신은, 그 한 달을 버티지 못해 죽었던 걸까. 아니, 달리 생각하면 지난 경기의 자신에게 타격을 주었던 것은 좀비가 아니었다. 지금보다도 더 강력했던 서생연의 개백정. 종말이 끝났다고 해서 놈과의 전투가 끝나는 건 아닐 테니, 의미는 없었다.

“이제,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지?”

“모든 것은 끝났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렴. 음…… 그런데 부디 바라는 것이 하나 있다면.”

스텔라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네가 행복하길 바란다. 항상 바라왔어. 이렇게 말로 전하려니 쑥스럽구나.”

그녀는 소녀의 얼굴로 해사하게 웃었다. 요한은 더 이상 그녀를 미워하기 어려웠다.

비호감이 호감으로 바뀌지는 않았으나, 최소한. 모든 것이 끝났으니 행복해지라고 자신을 축복하는 이에게 침을 뱉을 수는 없었다.

“참, 그리고 전해줄 말이 있다.”

“전해줄 말?”

“개체들 사이에서 자정작용이 생겨나고 있단다. 나와 몇몇 존재들은 이 사태를 끝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 너에게 약속하마. 너를 대신해서 이 작태를 책임지고 끝내주겠다고.”

그녀에게 빤한 시선을 보냈다. 그런 뒤 한숨 쉬듯 내뱉었다.

“상관없어.”

“상관이 없다니?”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나는 결국 살아남았고 게임은 끝났다. 다른 게임의 ‘나’는 그놈들이 알아서 하겠지. 모든 게 끝났다는 게 내게는 가장 중요할 뿐. 다만 네게 양심이란 게 있고 죄책감이라는 게 있으면, 놈들이 다시 이곳을 가지고 장난치는 걸 막아.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사죄니까.”

“맹세하마.”

스텔라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요한의 손을 꽉 쥐었다.

손에서는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 * *

2019년 12월.

종말 3년째. 그리고 이튿날.

요한은 공식적으로 종말의 종식, 그리고 인류의 승리를 선언했다.

바야흐로, 새 시대의 개막이었다.

Credit Cookie.

어느 날, 자신을 향해 커피잔을 들고 걸어오는 세리를 향해 요한은 툭 던지듯 내뱉었다.

“세리야.”

특유의 건조함은 그대로였지만, 언제부턴가 목소리에 다정함이 묻어났다. 요즈음의 그는 정말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사소한 거로도 심장을 멎게 만들었다. 여전히 관계는 수평선이었으나, 욕심내지 않았다.

함께하는 시간만으로도 행복했으므로.

세리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응?”

“번식하자.”

“……? 갑자기?”

“싫으면 말고.”

“아니, 잠깐만!”

그녀는 말을 멈추고선 자괴감 가득한 얼굴을 했다.

“이렇게 무드 없는 남자한테 싫다고 말하지 못하는 내가 싫다, 정말.”

요한은 씩 웃으며 다짜고짜 상의를 벗었다. 흔적만 남아 아물어진 어깨의 상처와 잘 다부진 근육이 시선을 확 사로잡았다.

“뭐 해?”

무드는 정말 한 개도 없는데, 얼굴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그의 단단한 팔이 그녀의 어깨를 휘감았다.

심장이 뛰었다.

<리턴 서바이벌> 完.

외전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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