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올리비아는 그 이후로도 주민등록을 관리하는 사내의 불필요한 과잉 친절을 한껏 경험하고 나서야 건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옆에서는 자스민이라고 불리는 뉴질랜드인이 조잘조잘 떠들었고, 앞서가는 휠체어에서는 오랜만의 외출에 신이 난 모친이 방방 뛰듯이 주변을 구경하고 있었다.
감각적이고 생경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나아이크에서의 삶은 삶이라기보다는 그저 숨 쉬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무감각했던 종말은 구조되고 나서야 비소로 그 무게가 실감됐다.
자신을 구조해준 그에게 감사했다.
하진. 이 정도로 넓은 캠프라면, 아마도 앞으로는 그와 보기 힘들겠지. 그는 이 캠프 내에서도 중요한 인물처럼 보였으니까.
<저기가 운동장이에요. 혹시 다칠까 봐 몸을 부딪치는 운동은 금지되어 있지만, 테니스나 탁구 같은 건 가볍게 즐기고들 있죠.>
친절하게 설명하는 자스민의 음성이 잘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오직 그에게 빚진 생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지금이 아니어도 기회는 있을 거다.’
그의 말은 자신에게 위안을 주었다. 끝내 부친의 좀비는 끝맺지 못했지만, 최소한 죄책감으로 남지는 않았다.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정도로 재건을 이뤄낸 사람들이라면, 좀비에 관한 연구도 상당수 진행되었을 거다. 가망이 없다고 한 것도 이해는 되었다. 안되는 것을 안된다고 말한 것뿐이리라.
사실 포기하고 있었다. 그저 미련이었다.
“여, 새로 들어온 주민인가 봐?”
종종 지나가는 총 든 생존자들이 반갑게 인사를 걸어왔다. 은연중 몸을 훑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으나 불쾌할 정도는 아니었다. 흑심이라기보다는 호기심에 가까운 시선이었다. 무엇보다 그런 걸 신경 쓸 만한 정신이 아니었다.
십여 분쯤 걸어 도착한 곳은 생각보다 높은 신식 건물이었다. 휙 둘러봐도 제법 신경 써서 고른, 주변 어느 건물보다 깨끗한 새 건물이었다.
<건물 안에서는 자유롭게 돌아다니셔도 되어요. 저는 1층 로비에 있을 거고 식사는 숙소로 가져다드릴 거예요. 참, 숙소 바깥쪽에서 돌아다니실 땐 저를 불러주셔요.>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또 주의해야 할 게 있나요?>
<아니에요. 그저 캠프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시면 돼요. 캠프 밖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에 대해선 상당히 예민하거든요.>
<알았어요.>
올리비아는 고분고분히 대답하면서도 드는 의문을 지우지 못했다. 명색이 구조를 한다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캠프 밖 생존자들을 경계하는 걸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혹시… 캠프 밖에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데에 예민한 이유가 있나요?>
자스민은 잠시 고민하는 듯 보였으나 의외로 흔쾌히 대답해주었다.
<우선 신분이 증명되지 않는 떠돌이 생존자들은 위험하기도 하고, 문제를 일으켜서 캠프 밖으로 추방된 사람들이 종종 몰래 침입하기도 하거든요. 오클랜드 전역에는 대부분 좀비가 깨끗하게 처리되었으니 다른 지역으로 도망치기보다는 근처에서 몰래 사는 걸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요.>
<아…… 추방되는 사람들이 있군요. 혹시 그게 어떤 문제가 있나요?>
올리비아는 내심 짐작 가는 바는 있었지만, 확인차 되물었다.
<좀비로부터 얻어낸 명백하게 저희의 영역인걸요. 누군가는 주인 없는 땅이라고 주장할지 모르겠지만, 영 보스는 이곳을 캠프 요한의 영역으로 공표했고 지키기 위해 싸워왔어요. 그러니 이곳에서 생존하려면 셋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해요. 합류하거나, 떠나거나, 싸우거나.>
<아…….>
그녀가 생각했던 이유와는 조금 다른 내용이었다. 자스민은 올리비아의 표정에 드러난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쫓겨난 대부분이 폭행 살인 강간 등 중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에요. 위협이죠. 실제로 그들이 길거리를 전전하다 식량이 떨어지면 수색조를 급습한 적도 있고요.>
그녀는 완벽하게 이해했다.
위협에 대한 부분보다 영역에 대한 권리 주장을 먼저 말한 것은 의외였으나, 그녀의 생각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잘못을 저지르고 쫓겨난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운 캠프다.
캠프 유지를 위해 함께했던 사람들을 추방하기까지 하는 데다가, 외부의 위협까지도 완벽하게 차단하는 체계. 대체 얼마나 철저하고 냉정해야만 이런 체계가 유지되는 걸까.
상상조차 쉽게 되질 않는다.
이론상으로는 더없이 훌륭하게 느껴진다. ‘선 밖 사람’이 된 존재들을 철저하게 배제해야만 ‘선 안 사람’들이 안심하고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
‘외부에 적을 만들고 그들에게 공포정치를 보여줘서 내부의 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인가.’
대학생 때 배웠던 교양과목의 한 수업이 떠올랐다. 이야기만 들었는데도 캠프 지도자에게 절로 존중이 생기는 듯한 기분이었다.
<신입 주민 연수원이에요. 하루만 있는 곳이지만 불편하진 않으실 거예요. 오히려 이곳이 실제 거주하는 섬들보다 여러모로 좋죠. 생존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효과가 크거든요. 그러니 깨끗하고 조심히 사용해 주세요.>
<솔직하네요. 알겠어요.>
<원래는 가장 높은 층을 드리는데, 휠체어로 왔다 갔다 하시기가 불편하실 듯해서 낮은 층을 드렸어요. 전기는 사용하시는 곳에만 들어가니, 혹시 방을 옮기고 싶으시면 말씀하시고요. 옥상의 경관이 멋지니 꼭 옥상 정원에 올라가 보세요.>
해맑게 웃으며 인사하는 자스민을 향해 올리비아는 감사의 키스를 한 뒤 숙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간 숙소 안은 한 번에 많은 사람이 사용하도록 설계된 건지 널찍하고 깨끗했다. 마치 호화 호텔의 스위트룸처럼.
침구류도, 개인용품들도 하나같이 새것 같았다. 작은 냉장고가 있어 슬쩍 열어보니 캔 음료와 함께 서늘한 냉기가 서려 있다. 심지어 전등불까지 들어왔다.
더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전기는 어디서 공급하는 걸까. 발전소까지 살렸나? 까면 깔수록 속을 알 수 없는 양파 같은 장소였다.
올리비아는 잠든 모친을 침대에 옮기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가 벌떡 일어나 천천히 옥상을 향해 걸어 올라갔다. 높은 곳을 좋아하기도 했고, 역시 높은 곳에서 새 거처를 내려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후, 높구나…….>
욱신거리는 허벅지를 붙잡으며 마침내 옥상에 발을 디딘 올리비아의 앞에 예쁘게 꾸며진 옥상 정원이 펼쳐졌다.
난간 너머로는 오클랜드항이 보였다. 앞쪽으로는 지옥이, 뒤쪽으로는 대자연이 펼쳐져 있었다.
생각보다 캠프는 넓지 않았다. 캠프를 반원 모양으로 둘러싼 철벽 중간중간 설치된 망루에는 잘 무장된 보초들이 곳곳이 지키고 있었다.
‘저기가 퀴진인가.’
올리비아는 트럭 안에서 하진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반추하다가 항구와 2차선 교량으로 연결된 인공 섬을 찾아냈다.
섬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다시 한번 성문처럼 벽이 세워져 있었다.
항구와 인공섬이 이어져 있고, 인공섬에서 헬기나 배를 타고 주변의 섬들로 이동하는 모양인 듯했다.
<대단해. 마치…….>
절로 솔직한 감상이 흘러나왔다. 마치 뭐랄까, 한편의 중세 전쟁 영화에서 볼 법한 전투기지를 보는 느낌이었다. 올리비아의 머릿속에 반원 모양의 철벽에서 좀비 떼와 싸우다가 상황이 어려워지자 퀴진 쪽으로 후퇴해서 다시 한번 결사의 항전을 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들을 넘어야지만 섬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 마치 한 폭의 방파제 그림 같았다. 섬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안정감을 느낄지는 안 봐도 훤했다.
24시간 후에 거주할지 아닐지를 결정지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이미 오기 전부터 새로운 곳에 적응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솔직한 감상은 24시간이라는 시간조차 무색할 만큼 훌륭한 캠프라는 느낌이었다.
흠잡을 곳이 하나 없다. 아무리 부정적인 사람들도 이곳에 발을 디딘 순간 캠프에 몸담고 싶어 안달복달할 만큼.
24시간이라는 유예시간은 캠프에 살지 말지 고민하라는 게 아니라, 바로 자신이 손에 쥔 이것 때문일 거다.
[Camp Regulation Guide Book]
캠프 규칙. 이 좋은 곳에 살기 위해 규칙들을 지킬 자신이 있느냐고 되레 생존자들에게 묻는 것이다.
‘주민등록을 한 순간 모든 규정과 처벌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한다고 했지.’
올리비아가 선베드에 앉아 소책자를 펼친 후 긴장된 마음으로 한 장 한 장 읽어 넘겼다.
첫 면에는 약 두 달간 진행되는 기본군사 훈련에 대한 안내가 있었다.
사흘 동안 이론교육을 받고, 50일간 체력 및 기술훈련, 그리고 마지막으로 실제 수색조에 참여해서 좀비와 싸우고 물자를 구하는 실전 훈련까지. 모든 군사훈련이 끝나면 특기 적성검사를 한 후 보직을 배치받는다.
올리비아는 훈련 내용을 한 글자 한 글자 정독하며 때론 감탄하고, 때론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는 챕터는 주민 생활에 대한 부분이었다.
‘모든 주민은 2인 또는 3인 1조로 생활하며, 파트너는 서로의 보호 및 감염 시 처치 및 보고의 의무를 지닌다.’
하나같이 경험에서 우러나온 한편의 생존서 같은 느낌이었다. 빠져들듯 책장을 넘기던 올리비아는 그만 웃어버렸다.
[어떤 보직이든 주 50시간 근무를 준수한다.]
저 문구 때문이었다. 근로 환경이 좋은 직장인걸. 이 규칙을 만든 사람은 회사를 차렸어도 좋은 CEO가 됐을 거야. 그러나 그 밑에 ‘조장들은 열외다.’라는 문구에 올리비아는 다시 한번 실없이 웃었다.
다음 장은 죄와 처벌에 관한 장이었다. 캠프 내 갈등이 벌어지는 경우를 대비한 규칙들.
챕터가 두툼했다. 역시나 생활규칙과 송사 거리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별수 없나 보다. 올리비아가 책장을 넘겼다.
[생산 또는 노획한 모든 물자(사치품, 식료품, 공산품)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든 것을 보급조에 이관한다. 차후 필요한 물건의 경우 생산한 자, 노획한 자가 1순위의 분배 권한을 가진다.]
다시 한번 책장을 넘겼다.
[물자의 배급은 대상의 직책, 보직, 성과에 따라 차등 지급한다.]
<공산주의인걸.>
올리비아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푸흐흐 웃었다. 책장이 주르륵 넘어갔다. 가이드북이 규제하는 내용은 일반적인 법 도덕과 유사했다.
살인, 폭행, 강간, 추행, 절도 금지에 명령 불이행, 하극상, 근무지 무단이탈, 근무 태만, 물자 횡령 및 배임 등등. 그리고 그 아래쪽에는 일반적인 처벌 기준이 쓰여 있었다.
[규정 위반에 대한 처벌은 죄질에 따라 네 가지로 구분된다. 처형, 추방, 보급품 삭감, 경고.]
눈길을 끈 것은 그 밑의 구절이었다.
[일신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 증명할 수 있는 모든 행위는 정당방위로 친다.]
이건 조금 위험해 보이는 규칙인데.
[같은 죄로 두 번 이상 처벌받거나 세 번 이상 송사에 오르면 죄질 및 처벌 여하를 막론하고 캠프에서 추방된다.]
오 빡세다. 될 수 있으면 범죄를 저지르지도 범죄를 당하지도 말라고, 아예 엮이지 말라는 이야기다.
[살인, 강간의 경우 죄가 입증되면 심신미약 및 과실 여하를 막론하고 처형한다. 죄가 입증되지 않는 경우 피의자의 무죄가 입증될 때까지 피의자는 캠프에서 잠정 추방되며 피해자는 보호 격리 조치한다. 무고죄가 성립되는 경우 피해자 사칭자는 해당 죄와 같이 처벌한다.]
살인과 강간죄를 동일 선상에 넣은 것도 제법 마음에 들었다. 입증되면 처형, 입증이 불가한 경우 추방과 피해자 격리.
범죄를 시도하기도, 범죄자로 억울하게 몰아가기도 쉽지 않게 하는 칼 같은 내용이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머리 써서 만들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음주 후의 모든 범죄는 가중처벌된다.]
이건 정말이지 마음에 드네.
사실상 의도를 보아하니, 처벌이 목적이라기보다는 예방이 목적일 게 뻔히 보일 정도로 굵직한 범죄에 대해서만 강력하게 처벌하고 있었다.
그의 인상이 겹쳐 보였다. 인상을 보아하니 선처나 참작 따위를 해줄 만한 성격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범죄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크게 문제 될 것들은 없어 보였다.
[기타 분쟁은 모두 송사를 통해 결정되며 송사는 캠프 리더(리더 부재 시 대리)와 피고 원고 측 증인 겸 변호인 3명으로 이루어 진행한다.]
쭉쭉 읽어내려가던 올리비아의 눈을 사로잡는 한 문구가 있었다. 굵은 글씨로 별 표시까지 쳐진 문구였다. 그것을 본 올리비아가 당황해서 눈을 비볐다.
[모든 규칙보다 캠프 리더의 명령을 우선한다. 내 말이 법이고 내 결정이 곧 규정이자 처벌임.]
그리고 그 밑에는 주석으로 ‘대장님이 직접 쓰신 문장입니다. 저는 말렸어요.’라고 쓰여 있었다.
<이런 독재자!>
그야말로 1인 천하 독재정권이었다.
이런 문장을 대놓고 가이드북에 넣어 놓다니. 뭐가 이렇게 뻔뻔해?
하나 그 뻔뻔함이 싫지 않다.
캠프가 점점 마음에 드는 자신이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