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여.”
하진과 노아가 반가운 듯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요한은 심드렁하게 그들에게 손을 슬쩍 들어 보이고서는 바닥으로 탁, 떨어지듯 뛰어내렸다.
요한이 검사라도 하듯 짐들을 둘러보다 제법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상했던 수치보다 수확량이 훨씬 웃돌았다.
“많네.”
“더 있다. 두세 번은 왔다 갔다 해야 해.”
호오, 요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축 목장이 있다는 사전보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가 가감 없이 감흥을 내뱉었다.
“훌륭해.”
“오, 칭찬받아쓰.”
노아가 호들갑을 떨며 하진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하진이 마지못해 그의 주먹을 제 주먹으로 툭 쳤다.
“새로운 생존자도 있다고 들었는데.”
“응, 저쪽 트럭에. 하진이 찾아냈어.”
요한이 고개를 끄덕이고선 노아의 손끝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두 명의 생존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어는?”
“영어밖에 못 해.”
충분하지.
요한이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곧바로 휠체어에 탄 노인의 상태를 알아보고선 그녀를 붙잡고 있는 젊은 생존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캠프 리더, 요한이다. 잘 부탁하지.>
<올리비아. 나도 잘 부탁해.>
맞잡은 손에서 굳은살이 느껴졌다.
단련된 전사군. 요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하진을 향해 말했다.
“바로 퀴진으로 보내서 주민등록이랑 신체검사 하고, 기본군사 훈련받게 해. 재호에게는 말해뒀어.”
“그러지.”
“두 사람의 관계는?”
“앉아있는 사람이 그녀의 모친이야. 치매인 것 같아.”
요한이 노인에게 다가가 그녀의 모습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올리비아가 불쾌한 듯 가로막자 하진이 그녀를 살짝 붙잡았다.
<뭐 하는 거야?>
그녀의 질문에 대답한 건 요한이었다.
<상태를 간단하게 확인하는 절차일 뿐이야. 그나저나, 용케 살아남았군.>
단 두 명이, 그것도 병자를 데리고.
요한은 순수한 감탄이었으나 그 뜻을 오해한 올리비아가 순간적으로 욱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하진을 향해 말할 뿐이었다.
“섬으로 보내서 요양할 수 있도록. 그녀가 모친의 몫까지 하려면 부지런히 일해야겠네.”
“매정한 녀석 같으니.”
“운전병들은 좀 쉬게 하고, 교대로 자. 복귀하자.”
올리비아가 뭐라 뭐라 말할 새도 없이, 그는 쌩하니 대형 트럭 운전석으로 걸어갔다. 그러고선 직접 트럭을 몰아 자리를 떠났다.
어안이 벙벙하게 서 있는 올리비아를 하진이 툭 쳤다.
<뭐 해? 우리도 출발하자.>
* * *
‘첫인상이 참 별로인걸.’
올리비아는 달려가는 트럭 위에서 바람을 맞으며 흩어지는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그들의 리더는 그녀의 상상과는 조금 달랐다. 카리스마가 더 있었거나, 부드러운 타입이었다면 이해했으리라. 하지만 그가 보인 것은 그저 무관심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아직 애송이로 보이는 리더의 태도가 조금은 못마땅했다.
올리비아가 자신을 바라보는 빤한 시선을 느끼고선 하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뭘 그렇게 열렬하게 바라보시나?>
<몰라. 보게 된다.>
직설적인 대답에 올리비아가 인상을 홱 찡그렸다.
순진한 건지 선수인 건지 모르겠다니까.
그녀가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아까 그 소년이 리더라고?>
옆자리에 앉아있던 제이슨이 하진에게 통역했다. 하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 소년은 아니지. 동안이긴 하지만.”
<어린데 건방진걸.>
악의보다는 투정이었다.
그도 그럴 법한 게, 누구나 제 모친을 무슨 가축 검사하듯 대한다면 기분이 나쁠 수밖에. 하지만 그녀의 말에 동의해 줄 줄 알았던 그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대장을 욕하는 건 좋지 않아. 날 포함해서 누구도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지, 제이슨?”
제이슨은 하진의 말을 통역해준 뒤 제 생각 또한 그렇다고 부설했다. 그러고 나서 자신들이 캠프 리더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사족에 사족을 덧붙였다.
올리비아는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뭐랄까…… 끝이 보이지 않는 신뢰 같은 감정이 엿보였다.
단 몇 마디뿐이었지만, 그들의 억양에서 느껴지는 감정들 때문인지 거부반응은 점점 호기심으로 변했다.
왜 저렇게까지 반응하는지가 신기하고 궁금했다.
‘뭐, 겪어보면 알게 되겠지.’
기대 반 불안 반을 품고 있던 올리비아는 퀴진에 도착한 순간, 모든 감정이 경악에 잡아먹혀 버렸다.
오클랜드에 어릴 적 한두 번쯤 와본 기억은 있었다. 그때의 오클랜드는 뉴질랜드의 대표적인 도시인 만큼 활기 넘치는 멋진 도시였던 거로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의 도시는 그저 황량했다. 시커멓게 죽은 도시였다. 사막처럼 여기저기에 터럭들과 먼지 더미가 휘날렸고 핏자국들과 부서진 도시의 잔재들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안에 생존자들의 도시만 홀로 고고히 빛나고 있었다.
오클랜드항 일부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철벽들. 보기엔 조악해 보일지 몰라도, 마치 그것들은 바깥세상과 안쪽 세상을 단절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끼이익-!
그들이 문 앞까지 도착하자 철벽이 마치 도르래가 달린 성문처럼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눈 앞에 펼쳐진 생존자 캠프는 바깥쪽과 다르게 색이 깃들어 있었다. 생기가 있었다. 경악으로 물들었던 감정은 점점 흥분으로 변했다. 올리비아가 약간은 들뜬 어조로 하진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가 너희 기지야?>
“여기는 검문소다. 캠프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이지. 여기서 하루에 몇 번씩 배가 드나드는데 아마 너는 하루 정도 있다가 제1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다.”
고작 검문소가 이렇게 으리으리하단 말이야? 놀람의 연속이었다. 마치 처음 도시에 놀러 나온 촌사람처럼 두리번거리는 사이, 멀리서부터 마르고 안경 쓴 동양인 남성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는 캠프 리더를 향해 꾸벅 인사했다.
“재호야, 여기 두 사람 주민등록 절차 진행해. 한 명은 병자고, 젊은 쪽이 보호자야.”
“예. 수고하셨습니다.”
재호는 그녀들을 보고선 손짓했다. 그녀가 다가가자 재호가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펼쳐 보였다. 각종 나라의 국기와 언어들이 쓰여 있는 종이였다. 올리비아가 멀뚱히 있자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시늉을 했다.
‘해당하는 걸 알려달라는 뜻인가?’
올리비아는 잉글랜드 국기와 ‘English’라고 쓰인 글자를 가리켰다. 재호가 고개를 끄덕인 후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국적과 언어를 가진 생존자들이 많아서요. 이쪽으로 오시죠.>
<다국어가 되나 봐요?>
<간단한 의사소통 정도라면요. 전문가들은 따로 있죠.>
그는 사람 좋은 인상을 보여주고선 그들을 안내했다. 그를 따라가 도착한 곳은 선착장이었다. 선착장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세워져 있었고 그 앞에 군용 막사처럼 간이 건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들어가시면 안내인이 있을 거예요. 모든 게 끝나면 통로를 따라 가장 안쪽에 있는 주황색 건물로 오시면 됩니다.>
사내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꾸벅 인사하고는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인사성이 좋은 사람이네.
올리비아가 중얼거리며 모친의 휠체어를 끌고 들어갔다. 건물 안에 들어가자 한 여자가 빈 플라스틱 바구니를 건넸다.
<입고 있는 옷과 소지품은 이쪽에 담으시고요, 샤워장에서 깨끗하게 씻고 다음 칸으로 가시면 되어요.>
올리비아는 순순히 바구니에 옷과 물건을 넣고 욕실로 들어갔다. 깨끗하게 청소된 욕실은 열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고 쾌적했다. 올리비아가 수도꼭지를 틀자 얼마 지나지 않아 따듯한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오, 하나님. 맙소사.>
너무 놀라워서, 순간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온수가 나오다니. 올리비아는 설마 자신이 했던 것처럼 땔감을 피워 물을 데우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실없는 상상을 했다.
올리비아는 오랜만에 편안한 샤워를 한껏 즐기며 모친과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씻었다. 온수부터 바디워시까지, 마치 아포칼립스가 터지기 전의 현대문명으로 되돌아온 듯한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상쾌하게 씻고 나온 올리비아가 옷을 담아둔 바구니를 찾았으나, 바구니는 온데간데없었다.
<…어?>
그리고 그 대신 낯선 여자가 한 명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올리비아가 수건으로 나신을 가리고선 불쾌감을 담은 얼굴로 물었다.
<제 옷은 어디에 있죠?>
<따로 지급해 드릴 거예요. 우선 다음 칸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녀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고선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블록에서 그녀는 왜 이들이 옷을 가져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다음 차례가 신체검사였다.
흰 의사복을 입은 여자가 자신과 모친의 몸을 구석구석 검사하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열은 없는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영양 상태는 어떤지 등을 캐물었다.
수치심이 확 올라와 참기 어렵다고 느껴질 때쯤,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생했어요. 이제 이 옷으로 갈아입으시면 됩니다.>
여자가 건넨 옷은 간편하게 만들어진 긴 목티와 긴바지, 그리고 장갑과 스판 양말이었다. 착용하고 보니 얼굴을 제외한 모든 몸을 빈틈없이 가리면서도 제법 편안한 복장이었다.
‘왠지 다들 비슷비슷한 옷을 입고 있더라니.’
살짝 무너졌던 기분도 씻고 난 뒤의 상쾌함 덕분에 솔솔 사라졌다. 외부인을 받을 때 이 정도로 신중하고 깔끔하게 확인한다는 사실이 거부감을 신뢰로 둔갑시켰다.
<어서 와요.>
마지막 칸에는 처음 봤던 인상 좋은 동양인이 앉아있었다. 그가 의자를 친절하게 의자를 꺼내 주며 시원한 물을 건넸다.
<앉으세요. 약간 언짢으셨을 수도 있긴 한데, 워낙 외부 감염자들이 상처를 숨기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아서요.>
<괜찮아요.>
<우선 하루 동안은 휴식을 취하시면서 캠프에 대해 알아갈 시간을 드릴 거예요. 그러고 나서 거주를 결정하시게 되면 주민등록 절차를 하게 되죠. 주민등록 이후에는 퀴진 섬으로 이동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기본군사훈련 세 가지 과정을 수료하게 됩니다.>
<기본군사훈련이요?>
생소한 단어에 올리비아는 마치 입대라도 한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재호가 이해한다는 듯 그녀에게 소책자 같은 걸 건넸다. 가장 앞에는 단정한 글씨로 목차가 쓰여 있었다. 캠프의 규칙, 보직의 종류, 물자 분배 등등의 단어가 보였다. 그것만 보더라도 얼마나 체계적으로 캠프가 운영되는지 느껴질 정도였다.
올리비아가 소책자를 물끄러미 보고 있자 재호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내용은 쉬시면서 천천히 보시고, 궁금한 부분들을 질문하면 됩니다.>
재호의 말에 올리비아가 뒤적거리던 소책자를 덮었다.
<13세 이상, 70세 미만의 신체 건강한 생존자가 캠프 요한의 주민이 되기 위해서는, 기본군사훈련을 반드시 거쳐야 해요. 장애인, 노약자, 부상자의 경우에는 보호자가 있어야 하고, 그 보호자에게 피보호인의 책임까지도 동반합니다.>
<만약… 보호자가 없으면요?>
<합류는 불가능합니다. 저희가 자원봉사자는 아니니까요. 하지만 보호자가 없는 노약자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경우는 본 적이 없네요.>
재호는 재미없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 덧붙였다.
<기본군사훈련은 이론훈련, 전투 훈련, 실전 훈련으로 진행됩니다. 캠프 내에서 어떤 보직으로 생활하시든, 제 한 몸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세 과정은 거쳐야 하기에 합류하기로 하신다면 절대 빠질 수 없어요. 훈련 일정은 가이드북 안에 적혀있으니 숙지하시고,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시고요. 일단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오셔서 주민등록을 하실지 아닌지 결정해서 알려주시면 돼요. 그 전까지는 동행인이 함께할 테니, 양해해 주시고요.>
재호가 밖에 서 있는 사람을 불렀다.
<자스민.>
<예, 조장님?>
<안내 부탁해>
<예에.>
동글동글한 얼굴의 여자가 생글생글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재호가 깜빡했다는 듯 덧붙였다.
<참, 만약 거주하지 않으시기로 하신 후 오클랜드 내 저희의 영역으로 들어오시게 되면, 침입으로 간주하니 주의해 주세요. 최대한 빠르게 인근 지역을 벗어나시는 걸 추천합니다.>
<침입… 만약 침입하면 어떻게 되죠?>
<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살되죠.>
올리비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 왜 그렇게까지?>
눈앞의 사내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가 내뱉은 말은 웃음기와는 거리가 먼 대사였다.
<캠프 요한은, 후환을 남기지 않으니까요.>
이곳은 단순한 생존자들의 조직이 아니구나, 올리비아는 직감했다.
그들이 당당하게 사용한 ‘구조’라는 단어가 이렇게 낯설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