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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턴 서바이벌-156화 (156/176)

<156화>

이성에게도, 이성의 외모에도 별 관심이 없었던 그였던 만큼, 상대의 외모의 넋을 놓는 자신이 어색했다.

오래전부터 홀로 궂은일을 해 왔는지 전신에 탄탄하게 근육이 잡혀있었고, 금빛 띤 갈색 머리에, 웬만한 남성보다 큰 키가 인상적이었다. 하진은 난생처음으로 이성이 매력 있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느꼈다.

생경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처음 만난 사람이었으니까.

잠시간 넋을 놓았던 하진은 곧바로 머리를 휘저어 이성을 되찾았다. 넋 놓고 있다간 비명횡사해도 댈 핑계가 없다.

하진이 주변을 둘러보며 다른 생존자들이 없는지, 생존자들의 기척이나 흔적은 없는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그녀 또한 갑자기 올라온 신호탄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듯 보였다.

주변에 다른 거처는 없었고, 목조 건물의 규모를 봐서는 많아야 셋, 넷 정도의 생존자가 있을 법한 규모였다. 빨랫감이 널려있는 빨래터엔 남성 옷이 보이지 않았다.

‘창고 쪽에도 사람이 있다면 많으면 여섯 명까지도.’

위협적인 수는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무장도 없었다. 카고바지에 혹시 모를 권총이 없는지 물끄러미 봤으나 확인이 어려웠다.

하진은 고민했다. 지원을 부를 것이냐, 아니면 정체를 밝히고 설득해볼 것이냐.

‘괜히 경계심을 일으킬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신호탄은 올라갔고 만약 위태로워지면 곧바로 지원이 올 거다. 처음부터 숫자로 밀어붙이면 되레 겁박 받는다고 느껴 일을 그르칠 수 있었다.

특히나 이렇게 외진 곳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경우 대화가 잘 통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판단이었다.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야…….’

그러나 그때, 하진은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장작을 패던 여인이 땀 때문에 걸리적거렸는지 갑자기 상의를 벗기 시작했기 때문.

지금 나가면 괴한으로 의심받기에 안성맞춤인 타이밍이었다.

어느새 땀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매끈한 피부 위로 얇은 속옷 한 장만이 남아있었다.

하진은 순간적으로 당황해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주변에 사람이 없다지만, 지나치게 무방비하군.’

그가 난처한 듯 코끝을 긁었다. 이를 어찌해야 하나…….

만약 스위퍼였다면 좀 더 능글맞게 대처하며 구렁이 담 넘어가듯 모습을 드러냈겠지만, 자신에게 그런 뻔뻔함은 없었다.

애써 시선을 피하고 있던 하진이 문득, 이상함을 느껴 다시 시선을 돌렸다.

장작을 패던 자리에 여자가 사라졌다.

“…….”

<너, 뭐야?>

얇고 날카로운 음성이 들린 것과 뒤통수에 뭉툭한 촉감이 닿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괴물인 줄 알았네. 사람? 동양인?>

그녀는 유창한 영어로 쏼라쏼라 내뱉었다. 하진이 뭐라고 답변해야 하나 두뇌 풀 가동을 하는 사이, 여자의 말이 이어졌다.

<목적이 뭐야? 뭘 뒤집어쓰고 있는 거야?>

살벌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청량한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목소리나 감상하고 있다니, 어이가 없군.

그는 자신이 얼마나 풀어졌었는지를 자책하며 얼굴이 보일 만큼만 천천히 슈트를 들어 올리고 두 손을 올렸다.

물론 항복 표시를 했다고 해서 딱히 위협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두 손에 날붙이와 화기가 딸려 올라갔으니까. 양손의 무기를 본 순간 생존자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와, 무기 봐. 살벌하네.>

“제기랄 영어…….”

10개월간 열심히 배우기는 했으나, 의사소통이 원활한 정도는 아니었다. 딱 구조 활동에 필요한 수준의 미개한 실력이었을 뿐.

하진의 말이 영어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여자가 인상을 썼다.

<뭐라는 거지?>

<영어는 잘 못 해.>

하진이 되지도 않는 영어로 띄엄띄엄 말을 걸었다. 적의가 없음을 증명하는 게 먼저다.

<우리는 구조대다. 너를 구조하고 싶다.>

<우리?>

<사람들이 함께 있다.>

하진이 천천히 돌아섰다. 자신보다 십여 센티미터 정도 작아 보이는 체구가 시선에 잡혔다. 그녀는 여전히 반라의 상태였다. 하진의 얼굴이 홧홧하게 올라왔다. 그러고선 그녀의 옷 가짐을 명확하게 지적했다.

<너는 누드다.>

<뭐라는 거야, 얼빠진 원숭이가.>

저놈의 원숭이 타령은 어딜 가나 있군.

하진이 구시렁거리며 총을 어깨에 메고 그녀가 들고 있는 옷을 빼앗아 앞섬을 가려주었다. 그녀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여전히 총구는 그의 슈트 위 머리에 들이댄 채였다.

이 정도 거리에서 총 맞아본 적은 없는데, 죽진 않겠지.

<구조대라 했지?>

<그래.>

<혹시… 치료제를 갖고 있나?>

<약?>

<그래.>

<무슨 약? 감기에 걸렸나?>

<뭔 소리야, 바이러스 치료제 말이야.>

아아, 하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그가 부정하자 그녀의 눈이 실망감을 담았다.

<주변에 좀비가 있나?>

<아니, 절대.>

여인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고선 말을 이어나갔다.

<동양인치곤 크네. 이름은? 난 올리비아야.>

<내 이름은 하진이다.>

<하진. 좋아. 성적 취향은 존중하니까, 여기서 날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는 건 용서할게. 네 꼴을 보니 구조대라는 것도 일단은 우리 집 개도 믿지 못할 모양새긴 하지만, 믿어주지.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어? 도시는 어떻지?>

<다시 말하지만, 영어를 못해.>

<답답하네.>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못한다는 데 별수 있나. 일단은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땀이 여기저기에 흘러 몸이 꾸덕꾸덕했다.

<일단 좀 씻고 와서 다시 이야기하자. 무기 내려놔.>

하진이 눈을 멀뚱히 뜨고 있자, 올리비아가 총과 칼을 가리켰다.

하진이 그제야 아, 하고 총을 풀어 그녀에게 건네고 칼날을 집어넣었다. 그녀의 시선이 하진의 잘린 팔에 닿았다.

<팔이, 음… 유감이야.>

<괜찮다.>

<일단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올리비아는 걸치고 있던 옷을 흔들며 목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하진은 슈트 안쪽에 넣어둔 권총을 위쪽으로 끌어올렸다.

“흐음…….”

처음부터 외부와 왕래 자체가 적었던 사람들인가. 집 상태를 보아하니 피난을 온 느낌은 아니었다. 그저 목장 근처에 자리 잡고 근근이 살아가다 우연히 아포칼립스의 칼날을 피해간 듯한 모습이었다.

한국에서라면 상당히 운 좋은 케이스겠지만, 뉴질랜드에서는 상당히 많은 케이스였다.

잠시 후 올리비아가 머리를 털며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맹물 한 잔이 들려있었다.

하진이 물잔을 받아들고선 그녀에게 꾸벅 인사했다.

<미안하지만, 먹을 건 없어. 우리도 굶은 지 꽤 됐거든.>

<배고프다고?>

<응. 상당히.>

하진이 고개를 끄덕이고선 배낭에서 식량을 꺼냈다. 이틀 치 비상식량들이 탁자 위로 쏟아졌다. 통조림과 비스킷, 육포 등등을 본 올리비아의 눈동자가 터질 듯 커졌다.

<나 주는 거야?>

<그래. 일단 먹어라.>

<구조대라는 말이 진짠가 보네. 감사의 키스해줄까?>

<아니.>

하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는 혼전순결주의자였다.

올리비아는 배시시 웃더니 비스킷 몇 개를 입에 집어넣고 음미하듯 오물거렸다. 행동 하나하나가 시선을 사로잡는 묘한 느낌이 있었다.

<눈빛이 화끈하네. 호의에 보답은 해야지. 고마워. 안에 들어오는 걸 허락할게.>

“뭐라는 거야 대체.”

<뭐야, 뭐라고?>

답답한 두 사람이었다.

* * *

영어 실력은 비루했고 보디랭귀지는 위대했다. 하진은 짤막한 영어와 손짓 발짓 몸짓을 더해 마침내 모든 설명을 끝마쳤다.

반쯤은 답답해하는 얼굴, 반쯤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하진을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이윽고 탁자에 턱을 괸 채 실망한 얼굴로 후우, 바람 소리를 냈다.

<치료제가 없다니… 말도 안 돼….>

그녀는 병든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던 생존자였다. 근처 목장과는 이웃 관계였으나 어머니의 병치레 이후부터는 거의 집 근처를 벗어날 일이 없었다고 했다.

하진이 직접 확인해보니 아마도 그녀의 어머니는 치매 증상인 듯했다. 좀비 사태가 터진 것은 라디오와 스마트폰으로 알고 있었다고. 그러니 더더욱 불안해져서 주변을 나갈 생각도 못했다고 했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 대단하네.”

요한은 살아남는 자는 저마다 그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 거라고 역설했었다. 하진은 그 말에 동의했다. 그녀는 어머니를 간호할 정도로 상냥했고, 강했고, 품위가 있었다.

<네가 준 음식이지만, 맛있게 먹어.>

그녀는 통조림 음식을 간단하게 조리해서 접시에 내 왔다. 하진은 천천히 스푼을 떴다. 어떻게 조리했는지 기존에 먹던 통조림의 투박한 맛과는 조금 색달랐다.

“맛있는데.”

<맛있어?>

하진이 흠칫 놀랐다. 한국말을 할 줄 아는 건가.

<놀라긴. 표정으로 말하고 있잖아. 한국인이야? 중국인? 팔은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그 괴물 껍데기는 뭐고?>

올리비아가 팔을 가리키며 물었다.

하진은 픽 웃으며 대답했다.

<한국인이다. 그리고 이거, 레이저빔 나간다.>

그러고선 입으로 피융, 소리를 냈다. 되돌아온 건 싸늘한 반응이었다. 하진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선 괜히 노아와 용 상병을 욕한 뒤, 다시 조용히 먹기 시작했다.

<적당히 먹지? 구조하러 온 사람이 다 먹을 생각이야?>

하진은 입안에 음식을 잔뜩 넣고 우물거렸다. 뭐라고 하는지도 몰랐지만, 깔깔거리며 웃는 모습을 보면 뭐, 재밌는 이야기를 하나 보다 싶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저 음식이 따듯해서 좋았다.

<젊은 남자는 오랜만이라. 뭔가 반가운데.>

<가자, 캠프로.>

<단도직입적인 박력이 있구나? 그런데 미안. 못 가.>

<못 간다니?>

<엄마가 아프잖아.>

음. 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치매 걸린 노인의 병시중을 들고 있으니, 낯선 사람을 따라가기에 껄끄럽기도 하겠지.

그때, 무전이 울렸다.

-조장님, 연락이 없으십니까. 괜찮으시죠?

“어, 이상 없어. 생존자들이랑 이야기 중이다.”

-아하, 예. 확인했습니다.

무전은 짤막했다. 올리비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친구들?>

<맞아. 동료들. 너, 같이 가자.>

<의외로 터프하고 옹고집이네. 하지만 안 된다니까.>

<의사를 가졌어.>

<게이처럼 말하지 마, ‘의사가 있어.’겠지.>

장난스럽게 받아쳤지만, 올리비아는 내심 마음이 흔들리는 중이었다.

의사가 있다고?

믿어도 될까. 궁핍하긴 하지만, 굶어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괜히 더 위험한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닐는지.

<생각을 좀… 해볼게. 엄마랑 상의도 하고.>

하진이 그녀의 모친을 힐끗 바라보았다. 상의를 할 만한 상태는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하던 수색도 마저 해야 했고, 내용도 공유해줘야 했으니까. 요한에게 생존자 보고도 해야 했고. 굳이 그녀의 구조를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마음속에 드는 아쉬움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정이었다.

<그럼, 다시 찾아오지. 이걸 주마. 위험해지면 이걸 써.>

<오, 고마워.>

하진이 찌뿌둥한 어깨를 펴며 나왔다. 캠프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기묘한 감각이 끼어들었다.

불쾌하고, 찝찝한 느낌.

시취(屍臭)였다.

뭐지?

설마?

하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올리비아를 힐끗 바라보았다.

해맑게 손이 흔들리며 머리칼이 바람에 날린다.

설마, 아니겠지.

하진은 고개를 살짝 움직이며 일부러 창고 쪽으로 가깝게 걸어갔다. 머릿속과 속마음은 아닐 거라고 계속해서 되뇌었지만 발달한 오감을 속일 수 없었다.

창고 안에 좀비가 있다. 분명했다.

하진이 표정을 굳히며 홱 돌아섰다.

<…왜?>

<혹시 이 안에, 좀비를 가둬 놨나?>

하진의 말과 동시에 올리비아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하진이 창고 문의 문짝을 두드렸다. 미세했지만, 분명하게 소리가 들렸다.

올리비아가 황급히 뛰어와 하진을 막아섰다.

<미쳤어?>

<장애인처럼 말하더니, 미쳤냐는 발음만 아주 정확하네! 말 함부로 하지 마!>

<좀비, 왜?>

<아버지야. 신경 쓰지 말고 꺼져.>

아버지. 하진은 그 뜻을 정확하게 이해했다.

오지랖일 수 있었지만, 썩어가는 시체를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심지어 이곳에는 병자까지 있지 않은가. 자칫 전염병에 노출될 수도 있다.

<비켜, 그를 죽일 거야.>

하진은 또박또박 발음했다. 여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를 건들면 죽는 건 네가 될 거야, 망할 동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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