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전 세계가 원전 폭발로 난리가 날 거라는 건 어디까지나 리나의 예지와 재호의 의견을 듣고 판단한 가설일 뿐이었다.
가설을 무시하고 그저 이곳에서 변종 샤크만 대비하며 살아가도, 평생 큰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어느 순간 터져버린 원자력 발전소 때문에 모두 방사선 피폭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어떤 경우의 수도 요한에게는 불확실한 가능성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가 가장 신뢰하는 것 하나는 분명했다.
위기를 감지하는 신체 반응. 지금도 몸을 저며 오는 거대한 살기. 그 감이야말로 요한을 지금까지 살아남게 해준 것이었으니까.
노심 융해든 자동냉각장치든 요한이 알 바가 아니었다. 그저 위험을 느끼고 그것을 피하고 대비하는 것. 그것만이 그가 살아남았던 방향이었으니까.
결정을 마친 요한은 곧바로 수뇌부 회의를 소집했다.
“결정했나.”
“예.”
요한이 던지는 주사위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간. 모두가 숨죽인 채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요한은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터다. 그의 숙소는 항상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었고, 얼굴에 짙게 내린 눈그늘이 그가 고민한 흔적을 대변하고 있었다.
다들 그 고민의 깊이를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말없이 있을 뿐이었다.
“제 결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모릅니다. 제가 이런 결정을 할 자격이 있는지도.”
“요한.”
요한이 채 말을 전부 끝마치기도 전에 하진이 그의 말을 자르고 들어갔다.
“네가 무슨 결정을 하든 우리는, 아니 최소한 나는 따를 거다. 그게 설령 우리가 전부 죽는 결정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여러 번 목숨을 빚진 사람들이야. 그러니 힘들어하지 마라. 그저 결정하면 따를 뿐이니까.”
“이하 동문이야. 형씨.”
노아와 용 노인이 서로를 바라보다 한마디씩 거들었다.
“귀여운 애송이들 같으니.”
“뭐, 우리도 너희가 개백정을 잡아주지 않았으면 살아도 산 게 아니었을 테니. 목숨을 빚졌다고 해도 괜찮으려나.”
그들이 이렇게 말해줄 거란 것쯤은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하지만, 예상했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이 무척 고마웠다.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저희는 예정대로 이곳을 떠납니다. 목표는 뉴질랜드. 하지만 그곳이 무조건적인 최종 목표는 아닙니다. 꼭 그곳이 아니더라도 방사능으로부터 안전하다고 판단되고, 식량 자급자족이 가능한 지역이라 생각되면 그곳에 정착할 생각입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달하는 대신, 더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은 남아 있는 가축을 모두 도축해서 신도에서의 마지막 만찬을 열도록 하지요.”
그것이 요한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이었다.
요한은 사람들을 되돌려보낸 후 만찬을 준비했다. 박 노인이 가축들의 가죽을 벗기고 살을 다듬는 동안 손수 테이블을 내고 채소를 씻었다. 흰 쌀밥도 넉넉하게 준비했다. 중간중간 요한이 준비하는 걸 보고 사람들이 거들겠다고 달라붙긴 했지만.
한창 만찬을 준비하고 있으니 한쪽에서 세리의 손을 꼭 잡은 채 지혜가 걸어 나왔다.
안색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며칠 사이 안정을 되찾은 듯 한결 편안해진 모습이었다.
“그냥 쉬어도 돼.”
“아니에요. 오빠.”
지혜는 외투를 벗고 팔을 걷어붙이며 만찬 준비를 도왔다. 본인의 일이라는 자각 때문이었다.
그 의연한 모습에 다들 아무 말도 덧붙일 수 없었다.
사람들은 정수와 지혜의 임신에 대해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씩씩하게 밝은 티를 내려는 그녀를 보며 오히려 더 과장되게 밝은척할 뿐이었다.
특히나 그녀의 옆에서 한껏 오버액션하는 세리의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모닥불 위에 불판이 깔리고, 지글지글 고기 익는 소리와 기름기 가득한 냄새가 신도를 적셨다. 살 오른 돼지들과 닭, 염소들까지 다양한 고기들이 접시에 담겨 옮겨졌다.
주류와 신선한 채소들도, 쌀밥도 넉넉했다. 어차피 항해를 시작하면 선 내 냉장고 적재량 외의 신선식품은 전부 버려야 한다. 썩히거나 버리느니 먹는 게 남는 거였다.
“한 점도 남기지 마라. 땅에 떨어진 것도 싹싹 긁어먹어.”
“걱정 붙들어 매라고!”
스위퍼와 하진은 시합이라도 하듯 고기를 욱여넣기 시작했다. 지휘부의 눈치를 보며 젓가락을 깨작거리던 주민들도 어느새 부지런히 손을 놀렸고, 새롭게 합류한 캠프 노아와 용병단 캠프 생존자들도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 고기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고기 앞에서 만인은 평등했다.
‘세상에, 고기라니.’
‘여기는 천국이야.’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등등, 각종 감탄사와 찬사가 흘러나온 것은 부수적인 일이었다.
주민들은 모처럼 축제 분위기를 즐겼다. 요한과 지혜는 먹성 좋은 생존자들을 위해 부지런히 고기를 구워야 했다.
“오빠, 아- 해.”
“구우면서 먹고 있으니 너 많이 먹어라.”
“그냥 입 좀 벌리면 안 될까?”
방긋방긋 웃으며 단호하게 말하는 세리를 보며 요한은 얌전히 입을 벌렸다. 고기와 채소의 비율은 훌륭했다.
한참을 먹어치우던 스위퍼와 하진이 요한에게 다가왔다.
“대장 형씨, 그만 굽고 교대하지? 가서 애들이랑 얘기도 좀 하고.”
“난 됐으니까. 너희 가서 많이 먹어.”
요한의 대답에 하진이 콧방귀를 꼈다.
“저놈은 인제 그만 먹어도 돼. 많이 먹었다.”
“왜 이러셔. 같이 처먹어놓고는.”
“흠.”
“음악이 없는 게 아쉬운걸. 왜 과거 항해하는 선원들이 육지에서 그렇게 탱자탱자 놀았는지 알 것만 같아.”
실없는 소리에 요한이 고기를 구우면서 피식 웃었다. 오늘만큼은,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싫지 않았다.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요한 일행을 본 용 노인이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어이, 거기 애송이들! 이쪽으로 와서 한잔 받아라.”
두 사람은 노인의 부름을 외면하려 했지만, 이미 그에게 붙잡혀 맥주를 들이켜고 있는 노아의 불쌍한 표정을 본 순간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그의 테이블에 걸어간 하진이 볼멘소리했다.
“아니, 사람들 하고많은데 왜 또 우리요?”
“나는 꼰대라서 다른 테이블에 가면 분위기 깨트린다 이놈아.”
결국, 노아와 스위퍼, 하진은 또다시 용 노인에게 붙잡혔다.
“그냥 술 먹이기 편한 사람 부른 거겠지, 망할 할아범.”
“알면 짠해. 이 자식아.”
짠, 네 사람의 잔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크, 시원타.”
용 노인이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요한에게 손짓했다.
“어이, 대장 애송이. 고기 그만 굽고 이리 와서 한잔 받아. 무슨 고깃집 알바 하러 왔어?”
“전 괜찮습니다.”
“괜찮은 개뿔, 내가 안 괜찮아.”
“모두가 취하면 한 사람은 말짱한 정신으로 있어야지요.”
“신병들이 멀쩡한 정신으로 경계 서고 있으니 걱정 붙들어 매시고, 꼰대질 그만하고 한잔 받아. 인마.”
“꼰대질이라니, 무슨 섭섭한 말씀이십니까.”
“대장이 분위기 잡고 있으면, 인마. 사람들이 눈치 보느라고 마음껏 못 놀잖아. 엉? 상사가 ‘다 퇴근 즐겁게 해, 난 야근할 거지만.’ 이라고 말하는 거랑 뭐가 다르냐.”
노인의 말에 취기가 살짝 오른 스위퍼가 옳소! 하고 덧붙였다. 요한이 난처한 얼굴을 하자, 용 노인이 신나서 덧붙였다.
“그리고 양주나 소주는 없냐? 영 간에 기별도 안 가는데.”
“절대 안 됩니다.”
“빡빡한 자식 같으니.”
적당히 취하는 건 좋으나 내일의 일정에 무리가 가서는 안 되었다. 소주나 양주 등은 조리에 필요한 부분과 처음 섬에 입주할 때 들여왔던 담금주를 제외하고는 캠프의 금지 물품 중 하나였다.
그나마도 해군 장교들이 와서 다 털어먹었지만.
‘해군이라.’
생각해보면 그 해군의 등장은 하나의 열쇠였다. 해군으로부터 군함과 무장들을 탈취한 이후에 변종 샤크의 공격이 이어졌고, 원전 폭발이 이슈로 떠올랐으니까.
문제 해결을 위해 안배된 열쇠 같은 느낌이랄까.
그들이 이곳에 정박하지 않았다면 변종 샤크를 상대할 때나 지금 군함이 없어 상당히 곤란한 지경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천운이었다.
“으악! 팔 떨어진다!”
용 노인이 맥주를 들고선 되도 않는 엄살을 부리자 요한은 마지못해 그들의 옆자리로 걸어갔다. 요한이 도착하자마자 그의 잔에 맥주가 꼴꼴 따라졌다.
“짠-”
네 잔의 유리잔이 부딪쳤다. 톡 쏘는 탄산과 보리 맛이 목 뒤로 넘어가 흐릿했던 정신을 깨운다. 속까지 시원해지는 청량감이다.
“아저씨들, 나도 끼워 줄래?”
“친구들이랑 놀지 왜 이쪽으로 왔어?”
요한이 어느새 자리를 비집고 앉은 세리를 보며 툭 내던졌다. 세리는 방긋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가 더 재밌어 보여서. 뭐야아, 새 사람이 왔는데 다들 잔 비워 두실 거예요? 나는 여기 잘생긴 할아버지가 한잔 따라주셨으면 좋겠네.”
“뭐야, 애송이. 주도를 아는구나? 좋아, 한잔 받아라!”
어느새 짝짜꿍이 맞았는지 세리와 용 노인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을 따라 마셨다. 그 모습을 보던 요한은 슬그머니 웃음을 냈다.
“건방진 애송아. 네가 그렇게 쓸 만하다며?”
“그럼. 당연하지. 요한 오빠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뭐라든?”
“큼, ‘네가 웬만한 고추 달린 것보다 낫다.’ 이랬다니까?”
세리가 요한의 억양을 따라 하며 젠체하자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요한은 미간을 살짝 좁혔으나 노인은 뭐가 그리 좋은지 박장대소를 했다.
“오 완전 똑같은데?”
“실제로 내가 고추바사삭 만든 놈들이 몇 돼.”
“으하하! 으하! 훌륭해!”
손뼉을 짝짝 치며 한참을 웃어젖히던 노인이 눈을 빛냈다.
“너, 시원시원하니 마음에 드네. 어때, 내 양딸 할 테냐.”
“싫은걸. 난 요한 오빠랑 결혼할 거라서. 며느리라면 좋아.”
“그래? 그것도 좋지!”
“거, 적당히 좀 하지. 유치하고 오그라드니까. 윤세리. 쫓겨나고 싶어?”
점점 정도가 심해지자 요한이 두 사람의 떠드는 걸 끊고 들어갔다. 요한의 말에 세리가 움찔했다.
“어르신도 장난이 지나치십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쳇, 하고 혀를 찼다. 요한의 시선이 세 사내를 향했다. 스위퍼, 하진, 노아는 경쟁이라도 하듯 식량들을 입에 욱여넣고 있었다.
“거기 세 사람도 적당히 먹어. 너희가 다 먹을 거냐.”
“어에으 마이 어으아여.”
“뭐?”
“‘언제는 많이 먹으라며.’래.”
도토리를 잔뜩 입에 문 다람쥐처럼 웅얼거리던 스위퍼의 말을 번역한 것은 세리였다.
그래, 많이 먹어라.
요한이 시선을 돌렸다.
바로 옆 테이블에서 혁이가 제 또래 친구들과 가벼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고기를 굽는 불이 타닥 타오르고 시커먼 하늘 위에 불기 머금은 잿가루가 튀어 올랐다.
평화로운 밤이었다. 마치 폭풍 전 고요처럼.
자정이 되기 전에 자리는 파했다. 사람들은 아쉬워하는 기색이었지만 요한은 단호하게 테이블을 모두 뒤집어버렸다.
모두가 배불리 먹었고, 모두가 적당히 취했다. 당장 내일부터 고된 항해가 시작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침소로 들어갔다.
오늘 밤, 수많은 사람이 불안함을 베갯머리에 품은 채 잠들리라.
몇 날 며칠이 될지 모르는 항해는 고될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고될 거다.
이 짤막한 어선을 타고 몇십 분을 왔다 갔다 하는 데도 뱃멀미를 하던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요한은 마지막까지 남아 뒷정리하던 지혜도 멈춰 세웠다.
“지혜야. 들어가서 쉬어라. 오늘 너무 수고 많았어.”
“오빠도 고생하셨어요. 이거 마저 정리하고 갈게요.”
“아니. 내가 마무리할 테니 들어가 쉬어.”
요한의 말에 지혜가 머뭇거리다가 그의 단호한 시선을 마주하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앞치마와 장갑을 벗는 그녀에게 요한이 어렵사리 한 마디 내뱉었다.
“지혜야.”
“네?”
“네 아이, 무사히 낳을 수 있게 해줄게.”
한 줄밖에 안 되는 짤막한 문장이었으나, 그 말의 무게가 상당했는지 입안 여기저기서 턱턱 걸리는 느낌이었다.
“내가, 반드시. 어떻게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