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비 오는 날의 대기처럼 공기가 무겁다. 노아는 그녀에게 사죄하고 싶은 기색이었으나 요한이 손을 들어 만류했다.
지나간 일은 묻어두는 게 맞다. 불가항력의 일이었고 이제는 함께해야 할 사람들. 언젠가 그녀가 감정을 추스를 수 있을 때, 그때 이야기해주는 게 나으리라.
‘부디, 이겨내기를.’
그녀 또한 종말 가운데 산전수전 다 겪고 꿋꿋하게 버텨온 인물이다. 그저 의연하게 견뎌내기를 바랄 뿐이었다.
‘임신, 출산이라…….’
지혜의 임신은 분명 축하할 만한 일이었으나, 동시에 비극적인 소식이었다.
조그마한 상처도 경계해야 하는 이 상황에서 출산이라는 산은 그녀가 넘기엔 너무도 큰 산으로 느껴졌다. 만에 하나 중절 수술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하지만 그녀가 선택한 길이다.
위험한 길이라는 건 몰랐을 리는 없다. 그녀는 모든 걸 무릅쓰고 위험한 길을 선택했다. 다만 그 길을 닦는 건 자신의 몫이었다.
“지혜는 친구들이 잘 챙겨주고, 조장급이랑 용병단 어르신, 노아, 루카는 상황실로 따라와. 진수는 가서 서준 아저씨, 김 아저씨, 박 의사님이랑 가방끈 긴 주민들 전부 모셔오고.”
요한은 곧바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넓은 상황실이 차례대로 들어온 사람들로 하나둘 채워졌다.
그가 분류된 서류를 탁자 위에 넓게 펼치며 캠프 내의 엘리트들을 향해 요청했다.
“일단 여러분은 서류들 먼저 숙지하시고 함선 운용에 필요한 인원들을 교육해 주세요, 특히 루카는 군경 쪽에 경험이 많으니까 전반적인 키를 잡아주고, 김 씨 아저씨가 기관실이랑 기타 시설 쪽 담당하시고요. 인력 고민하지 마시고 생산, 기술조 인원은 전부 투입하시면 됩니다. 필요한 인력을 필요한 곳에 배치하세요.”
“예썰, 어린 대장.”
루카가 거수경례하듯 손을 들어 보였다. 고개를 끄덕인 요한의 시선이 이번에는 용병단 노인을 향했다.
“어르신께서는 함정에 있는 해군 장비에 대한 이용법을 숙지해 주시고, 서준 아저씨는 함정에 적재 가능한 물자의 수를 파악해 주세요. 박 어르신께서도 농작물, 가축 종자 중에서 장기간 보관 가능한 것들 위주로 추려 주시고요.”
“야야, 호칭 헷갈린다. 그냥 할배라고 부르라니까.”
“용 어르신이라고 부르지요.”
“니-미, 맘대로 내 성을 갈고 있네?”
“성함을 안 가르쳐주셨지 않습니까.”
요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박하자 용 노인이 됐다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노인은 피식 웃고선 박 노인과의 말을 이어나갔다.
“가축들은 가져가기 어렵겠죠?”
“아무래도 어렵지 않겠나. 출항 전까지 식량으로 소비하고, 훈제해서 가져갈 수 있는 양만 챙겨가야지.”
“그렇게 하시지요, 오랜만에 고기로 배 채우겠네요.”
고기라는 말에 사람들의 눈빛이 반질거렸다. 벌써 기대감 가득해 눈과 귀를 반짝거리는 듯한 모양새였다.
“식량은 보존 기간이 긴 순서대로 채우세요. 식량과 연료가 우선입니다. 배는 최대한 가볍게요. 개인 물품은 무게를 정해서 제한하시고요.”
“알겠다.”
서준이 긴말 없이 깔끔하게 대답했다. 사람들은 크게 염려되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협조해 줄 것이었다.
진짜 걱정되는 부분은 식량이었다.
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다. 항해가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고, 설령 제때 도착한다고 하더라도 정박한 곳에 넉넉한 식량이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에서 식량이 떨어지는 일만큼은 없어야 했다.
그렇기에 최대한 있는 식량은 전부 챙겨가야 했고.
“노아랑 스위퍼는 내일부터 인천 북구 물류센터랑 인천항 물류센터로 마지막 물자 수색을 나간다. 목표는 둘. 하나는 혹시 사용 가능한 화물선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 두 번째로는 식량이다.”
최근 추수를 끝낸 만큼 쌀은 넉넉했다. 하지만 통조림이나 보존식품은 부족한 감이 있었다. 매일 20~30개씩만 소모해도 금세 바닥을 드러낼 터. 적재 가능한 양 내에서 최대한으로 물자를 쌓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군함에 더해 화물선까지 운용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리라.
요한은 간략하게 내일부터의 임무를 하달한 뒤 루카와 군함 운용에 대해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눴다.
“어떤 것 같아?”
“정보는 충분하고, 운용 자체는 어렵지 않아. 똘똘한 사람 뽑아서 이틀, 사흘 정도 부지런히 외우고 교육하면 출항 자체는 가능할 거야. 문제는 GPS도 먹통일 지금 시기에 어떻게 내 위치를 확인하고 목표지점까지 정확하게 이동하느냐지.”
요는 항해술이다. 이 부분은 재호가 돌아와 줘야 해결되는 문제였다. 항해가 결정된 순간부터 끊임없이 항해에 대해 고민을 해 왔던 인물이었으니까.
돌아오겠지.
요한은 그를 믿기로 했다.
“기관장치 쪽은 어떤가요?”
“음.”
김 아저씨가 내연시설 부사관 교육자료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일단 대충 어떤 방식인지는 알겠고… 한 번 가서 보는 게 빠를 것 같은데.”
“네. 바로 확인하시면 될 것 같네요.”
“그런데 요한 군, 문제가 하나 있어.”
“무슨 문제요?”
김 아저씨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곤란하다는 듯 말을 머뭇거렸다.
“군함이 생각보다 연비도 별로고 연료통이 엄청 크네. 지금 드럼통 몇 개 가져다 놨지?”
“스무 개 정도요.”
“그럼 4천 리터 정도인데, 턱도 없을 것 같아. 이 군함, 연료 엄청 잡아먹거든. 우리가 거의 9천km를 가야 하는데, 연료를 만재하고 예비 연료까지 고려해야 아슬아슬한 거리거든. 그런데 만재 용량이 90만 리터야. 드럼통 4,500개가 필요하다는 소리지. 이만한 용량의 연료가 있는지는 둘째치고, 하루 이틀 안에 준비는 불가능해.”
드럼통 4,500개? 순간 요한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절로 인상이 찡그려지는 수치였으니까.
“루카, 정유공장에 연료 얼마나 있는지 확인해봤어?”
“정유 공장이 몇 갠데 연료야 차고 넘치지. 근데 기성품으로는 다 못 채울 것 같고… 급유차로 아예 배합하면서 급유를 해야겠는데.”
“가능할까?”
“지금 있는 연료면 인천항까지는 갈 수 있을 테니까, 인천항에 아예 배를 정박해서 급유해야 할 것 같아.”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에 정유공장은 얼마든지 있다. 시간의 문제지, 가능 여부를 따지면 불가능의 영역은 아니었다.
“거 참, 스케일도 크구만.”
루카와 요한의 이야기를 듣던 용 노인이 혀를 쯧쯧 차며 끼어들었다.
“차라리 그냥 화물선을 움직이는 게 어떠냐. 굳이 가성비 떨어지는 군함으로 가야 해?”
“근처 헬기로 쓸 만한 화물선이 있나 이미 뒤져봤어요. 눈에 보이는 화물선은 없거나 전복된 것뿐이에요. 그리고 설령 있다고 해도… 비상을 위한 헬기 운용도 할 수 있어야 하고, 해상에서 변종을 만났을 때, 군함에 있는 함 무장을 이용해야 조금이라도 생존확률을 높일 수 있을까 싶어서요.”
요한은 잠시 고민하다 덧붙였다.
“사실 제 생각일 뿐입니다. 어르신께서는 지금이라도 화물선을 구하는 게 낫다고 보십니까?”
“그거야 대장인 네가 결정해야지. 어디서 총대를 떠넘기려고. 함대함 무장들은 어차피 쓸모가 없을 거고……. 앞 대가리에 있는 5인치 함포나 팰렁스 정도만 좀 쓸만하겠구만.”
요한은 나오는 의견들을 모두 받아적었다.
“이봐 근데,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자.”
“예.”
“우리가 이렇게 준비하는 게, 전부 그 원자력인지 머시깽인지 때문이잖아.”
“예.”
“오히려 이렇게 해외로 나가는 게 더 위험해 보이는데, 해외까지 나가야 하는 게 확실해? 차라리 그냥 제주도나 그쯤에서 정착하는 게 안전하지 않을까? 하다못해 울릉도나 오키나와, 미야코 정도만 가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느냐 이 말이야.”
노인의 의견에 요한이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명확한 근거 없이 리나의 꿈, 그리고 재호의 판단만으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100%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어디까지나 가설. 그리고 추측. 하지만 무시하기에는 어딘가 불안한 구석이 있었다. 이건 이론이나 전략이라기보다는, 감에 가까웠다.
“일단… 모든 것을 준비해놓지요. 결정을 내리더라도, 미리 준비해놓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 다른 곳은 몰라도 이곳은 벗어나야 하는 건 확실하니까요.”
“그래. 딴지 거는 건 아니야. 의견 내는 거지.”
“감사합니다.”
요한은 이외에도 자잘한 사항들을 확인하고 하나하나 지시했다. 슬슬 마무리해야겠다 싶어 상황실을 한번 쓱 둘러보니 스위퍼가 주변 동료들에게 영어로 된 무언가를 해석해주고 있는 게 보였다.
혀를 꼬부랑대며 멋들어지게 발음하는 모양새가, 제법 솜씨 있어 보였다. 요한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스위퍼, 영어 잘하네?”
“그럼. 이래 봬도 유학파 출신이지.”
“유학파 출신 보험판매상이라니, 글로벌한 직종인걸.”
스위퍼는 히죽 웃으며 검지를 든 채 살짝살짝 흔들었다.
“무한경쟁과 평생 교육 시대란 말씀.”
“그래. 훌륭하네. 다들 해산하시고, 푹 쉬시죠. 내일부터는 바쁘게 일하겠습니다.”
일 중독자다운 마무리였다.
그리고 요한이 경고했던 대로, 다음날부터 신도 주민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가장 먼저 새벽을 깨운 것은 두 개의 수색조. 스위퍼와 신노아가 각각 조장을 맡은 수색조는 새벽이 깨자마자 조원들을 불러모아 수색을 개시했다.
“식량과 화물선 중에 굳이 고르자면 화물선이 우선순위야. 군함이랑 화물선을 동시에 운용할 수 있으면 항해가 길어졌을 때 큰 도움이 될 거니까.”
“라져.”
“알겠어.”
“그래. 몸조심하고.”
요청은 했으나, 큰 기대는 할 수 없었다. 이미 인근 연안은 모두 뒤져본 뒤였으니까.
두 사람이 동시에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 용 노인의 질문이 이어졌다.
“이야, 두 개 조면은 이거 완전 자존심 싸움인데? 어느 조가 더 일 잘하는지 내기해 볼 테냐?”
툭 던지듯 요한에게 묻는 용 노인의 말에, 두 사람의 눈이 반짝하고 귓바퀴가 슬쩍 흔들린 듯 보였다.
부리나케 두 개의 수색조가 떠나고, 용병단 캠프 출신 전투원들은 함선의 무장들을 확인했다.
지금 당장 실사격에 들어가라 하면 무리였지만, 군인 부사관 출신의 조원들이 많았던 만큼 무장의 방식에 적응하는 것은 상당히 빨랐다.
다만, 대변종용에 적합한지에 대한 용 노인의 평가는 제법 부정적이었다.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팰렁스나 미스트랄 정도를 제외하고는 변종을 대상으로 쓸 수 있는 무기는 없다고 봐야 해.”
“그렇습니까.”
“그렇지. 대부분 대공이나 대함 미사일이 대부분이니까. 파리 잡는 데는 파리채를 써야지 소 잡는 칼을 쓸 순 없잖아.”
“예. 그렇지요.”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무장을 버리고 화물선으로만 가는 건 아깝다고 생각한다. 해외로 간다고 했잖아. 만약 가는 길에 강력한 무력을 가진 생존자들이 있을 수도 있고, 뭐 해적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럼, 그때 쏴버리면 돼. 무력은 무조건 갖고 있는 게 맞다.”
“예.”
쓸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써야 한다면 쓰는 것. 바다로 나가기 위해서 현대 무장이 필요하다는 것은 두 사람 모두 동의하는 바였다.
한쪽에서는 루카, 박재범 의사, 라모스가 중심이 되어서 자료 분석을 시작했다. 농업 쪽을 보조하던 인원들도 이제는 선원이 되어서 함선 운용하는 법을 배웠다.
이러다가 만능 엔터테인먼트가 되겠다며 몇몇 기술자들이 우스갯소리 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들에게 요한이 다가갔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사실상 그렇게 어렵진 않거든. 정비 쪽도 김 씨 아저씨가 워낙 능통해서. 이분, 그냥 철물점 사장님이 아니던데?”
“오픈 하드웨어 전문 기술자라고 하더라고요.”
제 이야기가 나오자 김 아저씨는 계면쩍은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오픈 하드웨어? 그게 뭐야?”
“인터넷이나 전화선 같은 전자통신망이 되지 않을 때를 대비한 비통신 기술이라고 하던가… 저는 사실, 기계치라서요.”
“그래? 아무튼, 대단한걸. 시범 운행까지 하루 이틀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급유랑 짐 싣고 이것저것 하다 보면 출항 준비까지는 나흘?”
“좋네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모든 준비가 순탄했다.
마음에 걸리는 점은 단 한 가지.
길 떠난 재호만 무사히 돌아오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