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이 앙증맞고 귀여운 놈을 봤나.”
노인은 뭐가 그리 웃긴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정신없이 웃어젖히던 노인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싫다.”
“싫으십니까.”
“그래. 이놈아.”
“왜 싫으십니까.”
“네놈이랑 나랑 먹은 끼니 차가 몇 갠데. 동료는 좀 그렇지 않냐. 양아들 해. 명령은 들어줄 테니 그걸로 합의하자.”
“양아들… 갑자기요?”
“내가 자식 농사를 잘못해서 말이지. 자식새끼들이 하나같이 애비보다 먼저 뒤지고 말이야. 어때, 손해 보는 기분은 아니지? 그럼 내가 뒤 정도는 닦아 주마. 어때, 아버지가 되어주세요, 해 봐.”
요한은 그를 멀뚱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없던 이야기로 하시지요.”
“아, 거 농담도 모르는 자식일세. 아메리칸 조크도 몰라?”
“유학 다녀오셨습니까?”
“그래. 전북 정읍으로 인마.”
노인이 저 혼자 웃으며 요한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제법 매운 손길에 요한이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꼭 하는 행동거지가 캠프의 누군가를 닮았다.
“혹시, 잃어버린 자식 없으십니까.”
“잃어버린 자식은 없는데? 뒈진 놈들이라면 모를까.”
“저기 스위퍼랑 유전자가 비슷하신 것 같은데.”
“일없다.”
“아니면 저기 침 흘리는 여자애랑도 비슷하신 것 같고요.”
이번에는 요한의 손가락이 남자들 사이에 뒤엉켜 기절하듯 잠들어 있는 세리를 향했다.
“계집애 같은 사내새끼랑 사내새끼 같은 계집아이 아니냐. 그런 거 안 키운다.”
“구시대적인 남녀차별입니다.”
“나는 옛날 사람이라 좀 구시대적이어도 괜찮아. 이 자식아.”
툭툭, 다시 한번 노인이 담배를 꼬나물었다. 담뱃불을 붙이려던 찰나, 요한이 담배를 살짝 내리눌렀다.
“많이 태우셨습니다.”
“벌써 애비 건강 챙기냐?”
요한은 대답이 없었고, 노인은 김 샜다는 표정으로 담배 개비를 담뱃갑에 다시 집어넣었다. 찌뿌둥한지 기지개를 쭉 켠 노인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요한에게 물었다.
“캠프 춘향에 복수할 생각이냐. 네놈 쪽도 한 명 죽었다고 했잖아.”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만약 제가 이곳에서 계속 머물 거라면 후환을 제거할 테지만… 지금은 추가적인 전투를 감수할 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네요.”
“그래? 의외인데.”
만약 이사를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고, 부천시청 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들을 죽여 후환을 제거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들을 또다시 마주칠 확률은 희박했고 한시가 급한 지금 복수를 이유로 또다시 무리하게 전투를 감행하고 싶지 않았다.
“네놈답지 않은데.”
“저는 원래 불필요한 살인을 좋아하는 타입은 아닙니다. 후환을 두는 것을 경계할 뿐이죠. 어르신이야말로 어르신답지 않으십니다. 동료의 죽음을 복수하지 않는 것이 어려운 결정이셨을 텐데.”
“그러게 말이다. 죽을 때가 되었나 보지.”
노인의 말에 요한은 어깨를 으쓱하고선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바로 준비하시죠. 저희 캠프로 이동하겠습니다.”
“준비랄 것도 없다. 빌어먹을 놈들이 싹 다 긁어갔으니까. 몸뚱어리만 챙기면 돼.”
“그럼, 출발하시죠.”
자리에서 일어선 요한은 곧장 쉬고 있는 일행에게 향했다. 캠프 한쪽 구석에는 동면하는 새끼 토끼들처럼 한데 뭉쳐 서로를 지지대 삼아 졸고 있는 조원들이 보였다. 요한과 노인은 각각 자신의 캠프 사람들을 깨운 뒤 일으켜 세웠다.
“새끼들아, 짐 싸라.”
“…할배, 어디 갑니까?”
“어, 해외여행.”
부하들의 질문에 노인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두루뭉술한 대답에 용병단 생존자들이 고개를 갸웃했으나, 별다른 질문 없이 남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들이 준비하는 것을 본 스위퍼가 요한에게 속닥거렸다.
“노인장도 같이 가는 거야?”
“그렇게 됐어.”
“뭐, 좋네. 괴팍하긴 하지만 든든한 노인네니까. 그나저나 한 번에 전투력이 확 올라갔는걸.”
요한도 동의했다. 전원이 전투 인원으로 구성된 캠프였다. 특히 용병단 캠프에는 철구라는 인재가 있다. 요한은 그와의 전투를 떠올렸다. 자신과도 거의 호각으로 싸우던 전사.
서로 캠프를 이끌던 사람들이 셋이나 되어 불안한 부분도 있었으나, 요한은 우려를 우선 접어두었다. 노아나 용병단 노인이나 전사에 가깝지 정치인은 아니다. 정치인들은 그가 중간에서 쏙쏙 골라내 주면 된다.
부천시청에 있을 때처럼, 일부러 내버려 둘 생각도 없다. 그가 중간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한, 캠프는 문제없을 터였다.
어느 정도 준비가 끝났다고 판단한 요한은 이동을 지시했다.
“그럼, 이동하겠습니다.”
사람들의 움직임은 일사불란했다.
* * *
인천여객터미널.
요한과 생존자들은 선착장에 도착했다. 이곳은 신도와 내륙을 잇는 거점으로, 수색조가 합참으로 향할 때 정박했던 곳이기도 했다.
“상황실, 여기는 요한.”
선착장에 도착한 요한이 리나를 불렀다. 특별한 사안이 없는 한 원거리 무전은 자제하게 되어 있었던 만큼, 제법 오랜만의 무전이었다.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 무전기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요한 님, 오셨나요?
“그래. 별일 없었어?”
-예, 여기는 별일 없었어요.
“다행이네. 여기 영종대교 쪽 선착장에 나와 있으니, 배 보내줘.”
-예.
리나의 목소리는 약간은 기쁜 듯 들렸다. 무전기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피오와 베르다의 얼굴에서도 화색이 돌았다.
말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신도와 거리가 멀어질수록 리나에 대한 걱정으로 그들의 안색에 불안함이 더해졌었기 때문. 요한은 합류하자마자 리나와 떨어져 강행군해야 했던 그들에게 고맙기도, 미안하기도 했다.
리나와 무전을 끝내고, 요한은 두 사람을 향해 말을 건넸다.
“이번 임무가 끝나면 리나를 경호하는 전담팀으로 활동하게 해줄게. 고생했어.”
“우와. 정말? 고마워!”
요한의 말에 두 사람은 뛸 것처럼 기뻐했다.
꼭 두 사람을 배려한 조치는 아니었다. 리나는 주요한 인력이었고, 손 하나가 아쉬웠던 출발 당시와 달리 지금은 캠프 전체 인원 중 절반 이상이 전투 요원이다.
전력에 빈틈이 없다.
용병단의 저력이야 익히 아는 바였다. 게다가 노아를 따라온 동료들도 만만치 않은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최수현이야 뛰어난 사격수인 만큼 검증이 필요 없었고, 다른 사람들의 실력은 알 수 없었지만 노아가 제 동료들이라고 챙겨온 만큼 실력은 보장되어 있을 터다.
그룹별로 뭉쳐서 있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한동안 살을 부대끼며 섞이다 보면 금세 친해지리라.
‘사교성 좋은 친구들이 많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겠지.’
내륙에서처럼 물자가 부족한 게 아니니 결핍에서 유발되는 갈등도 적을 거다.
‘노아가 본인의 동료들은 잘 통제하고 있으니.’
그의 동료들을 챙기는 노아의 모습은, 회귀 전 요한이 지켜봤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쪽도 걱정할 필요 없었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신도 방향에서부터 어선 한 척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선의 끄트머리엔 서준이 서 있었다. 어선에서 서준이 내리고 요한이 걸어갔다.
“직접 나오셨어요?”
“어, 모시러 왔다. 그나저나, 사람들이… 많아졌네.”
서준은 그 말을 하면서 새로운 동료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는 사람들도 있었고,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다 갑수를 알아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요한, 저 사람은…….”
오랜 시간 함께했기에 미운 정이 든 것도 있었지만, 본인이 직접 골라내서 캠프 추방에 일조했던 인물이었다. 분명 서준 본인에게 악감정을 가질 수 있었다. 서준의 입장에서, 갑수의 합류는 불화의 씨앗으로 느껴질 터다.
요한은 노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 이 친구? 걱정하지 말라고. 반듯하게 교육해 놨으니까. 그렇지?”
노인이 갑수를 툭 치자 갑수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군기가 바짝 든 얼굴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예. 같은 실수를 두 번 하진 않을 겁니다.”
그러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서준이었다. 불과 몇 달 새에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가 있나. 갑수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존감이 세고 약간은 고압적인 태도를 지닌 인물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갓 입대한 신병 같았다.
심지어 본연의 하오체 말투도 온데간데없었다. 요한이 그의 반응을 보고선 씩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호랑이 훈련 교관이 있으니까. 그나저나 박 선생님이 좋아하시겠네요. 갑수 씨 떠날 때 많이 아쉬워했는데.”
“저도 오랜만에 뵐 걸 생각하니 좋습니다.”
“큼, 그래, 요한이 네가 생각이 있어서 했겠지.”
서준은 더 이상 토 달지 않았다. 몇 번이고 그에게 목숨을 구제받으면서 이제 그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는 그였으니까. 그가 결정해서 데려왔다면 토를 달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가자고, 어서. 사람들이 기다려. 인원이 많으니까 두 번 왔다 갔다 해야겠네.”
서준이 어선에 시동을 걸자 사람들이 상선했다.
신도의 모습을 처음 본 생존자들은 절로 새어 나오는 감탄사를 막을 수 없었다.
그들이 여태까지 보던 회색 도시가 아닌, 자연과 터전과 사람들과 가축들이 저마다의 색깔을 지닌 섬.
섬 여기저기에 말리고 있는 곡물이나 채소, 어포 들이 널려 있었고, 거리에 강아지들이 뛰어놀고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그들이 살던 곳과 다른 세계처럼.
그들의 감탄사는 점점 고조되다가 각자의 일을 막 끝내고 요한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을 볼 때 최고조에 달았다.
아포칼립스 시대를 살아가는 중이라곤 상상할 수 없는 밝은 표정의 주민들이 환하게 그들을 맞고 있었다.
“와…….”
월월!
한쪽에서 흑구가 달려와 세리에게 안겨들어 그녀의 얼굴을 혀로 잔뜩 침 범벅으로 만들었다. 세리가 녀석을 떨어트리기 위해 안간힘 썼다.
“수고했어, 요한.”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았지만, 다들 무사히 돌아온 사람들을 보며 안심한 표정이었다.
요한은 가장 먼저 리나를 찾았다. 리나는 양쪽에 피오와 베르다, 두 껌딱지를 딱 붙인 채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해 왔다.
“별일 없었고?”
“예. 수고하셨어요. 요한 님.”
“혹시, 내게 말해줄 다른 소식은?”
리나는 고개를 저었고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예지는 없었다. 기쁜 일이었다. 그녀가 꿈을 꿀 때면 한바탕 사달이 터지곤 했으니까.
“저기, 요한. 정수랑 재호가 안 보이네?”
서준이 뒤늦게 부재자를 찾자 수색 조원들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 동시에 향한 곳은 지혜였다.
“오빠, 정수 오빠는요?”
지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 남편을 찾아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으나, 그의 모습을 찾지 못하고 헤맸다. 갈 곳 잃은 시선이 허공에서 배회했다.
“…….”
수색조는 침묵을 지켰다. 누군가 말을 꺼내야 했으나, 쉽사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요한이 옅은 숨을 내쉰 뒤 세리를 불렀다.
“세리야. 그거 가져다줘.”
세리가 어두운 표정으로 군장에서 꺼낸 것은 무언가를 감싸고 있는 피로 얼룩진 천이었다.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의 지혜에게 가져간 세리는 천천히 그것을 그녀에게 건넸다. 지혜가 천을 풀자, 드러난 것은 반지였다.
정수가 선물한 결혼반지.
수색 중에 얻은 반지로, 지혜와 짝을 맞춘 것이었다. 지혜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오빠……?”
“정수의 물건이야. 시신은 수습했지만 챙겨올 순 없었어.”
“네? 시, 시신… 이요?”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끔뻑거리는 지혜. 순식간에 눈앞이 샛노랗게 변하고 빙글빙글 돌았다. 털썩, 지혜의 몸이 정신을 잃은 듯 무너져내렸다. 황급히 주변의 사람들이 그녀를 부축했다.
사람들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차마 지켜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비틀거리며 바로 선 지혜가 요한에게 비척비척 걸어왔다. 그리고선 그의 앞에서 매달리듯 그의 옷깃을 잡았다.
“…거짓말.”
“정수는 전투 중 죽었어. 미안하다.”
“거짓말!!”
그녀의 눈에서 작은 구슬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매달리듯 그의 옷깃을 잡고 바닥으로 아스러졌고 박재범 의사가 천천히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지혜 양, 몸, 조심해야지요.”
울음을 그치지 않는 지혜를 거의 연행하다시피 세 사람이 끌어당겼다. 그녀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익숙하고도 낯선 광경이었다.
누군가 동료를 잃는 것은 너무도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유독 무거웠다. 섬 주민들과 수색조 모두 안타까워하는 표정이었으나, 섬 주민들의 표정에는 안타까움에 비통함이 더해져 있었다. 동료를 잃은 것 때문만이 아니다. 이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반응이었다.
요한이 서준에게 물었다.
“혹시 지혜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 그게 말이지…….”
서준이 곤란하다는 듯 머뭇거리다 한숨을 푹 내쉬곤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실은, 지혜가… 임신했어.”
“…….”
“얼마 안 됐어.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고. 사실 이 시대에서 아이를 갖는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지만, 그래도 세상이 망하고 처음 태어나는 아이잖냐. 태명까지 ‘희망이’로 짓고 다들 새 시대의 첫 아이라고 기뻐했다고. 지혜도 정수 군에게 알려주기 위해 많이 너희가 오는 걸 기대하고 있었고.”
아,
사람들의 입에서 안타까움을 담은 탄성이 내뱉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