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노아의 말에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요한이 이내 눈을 번쩍 뜨고서는 뭔가를 깨달은 듯 읊조렸다.
“피콜로는 전투능력이 없다… 면역자들의 면역체계도 작동하는 것 같고, 불행 중 다행이네.”
그의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노아가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여의도 캠프 사람들 전부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피콜로? 면역? 그게 무슨 소리야?”
“혹시 면역에 대해서 모르고 있나.”
“응. 전혀… 모르는데.”
개백정과의 싸움 중에 한 번쯤 면역자를 마주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요한은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하다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드물지만, 현 사태에 대해 면역을 가진 사람이 있어. 좀비에 물려도, 변종에 공격당하거나 해도 좀비화가 되지 않는 그런 인간이.”
“뭐?”
노아가 놀란 나머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란이 일었다.
지금까지 살아남으면서 일행 중에 면역자가 한 번도 없었다는 건 다시 한번 생각해도 의외였다. 캠프 요한에만 해도 세 명이나 면역자가 존재했으니까.
“그런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
“없었어. 아니, 있어도 알 수 없었겠지. 우리 캠프의 규칙은… 물린 순간 숨통을 끊어 주는 거니까. 괴롭지도 고통받지도 않게.”
“그렇군.”
노아는 표정에 죄책감이 담겼다. 물리고도 감염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노아에게는 누군가 억울하게 죽었을 수도 있다는 걸 뜻했으니까.
하지만 저 규칙 자체는 면역이라는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아주 훌륭한 규칙이다. 위험요소를 안전하고 완벽하게 제거할 수 있으니.
“너는 바른 판단을 한 거야. 죄책감 느끼지 마라.”
어지간한 배짱과 단호함이 없는 이상 좀비로 변하지 않은 희생자를 죽이기는 쉽지 않다. 그만한 각오가 필요했을 것이다.
물론 그 규칙 때문에 면역자라는 존재 자체를 알 수 없었다.
노아 본인도, 그 선물의 대상이었다. 요한의 머릿속에 또 한 가지 퍼즐이 들어맞았다.
“변종 피콜로는 뭐 우리가 붙인 이름이긴 하지만, 예의주시하고 있는 변종이야. 주변에만 가도 감염되어 버리는 끔찍한 변종이지. 아마 너희가 죽인 그놈이 합참과 네 동료를 순식간에 감염시킨 원흉일 거야.”
“미친…….”
요한의 설명에 노아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요한은 설핏 웃었다. 욕설을 입에 자주 담는 성격이 아닐 텐데.
노아와 새 동료에게 설명을 마친 요한은 생각을 정리했다. 몇 가지 의문들과 동시에 가설들이 뇌리를 휩쓸었다.
우선 확실한 것들부터 정리했다.
저 변종은 아포칼립스의 시발점이다.
세계 각지에 피콜로가 등장하고, 놈은 변종들을 만들어내면서 주변의 인간들을 곧바로 감염시켜 버린다. 흔히 말하는 근원지를 만들어내는 것.
다윗, 샤크, 골룸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세상을 멸망으로 밀어 넣고 강력한 군인들을 무력화시킨 건, 이 자비 없는 변종일 확률이 높았다.
등장과 동시에 주변을 좀비로 초토화하는 변종을 무슨 수로 막을 수 있겠는가.
이 까다로운 변종을 다시 만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미리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면역자의 존재.
지난 생에서는 면역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삼 년 동안 한 명도 보지 못했으니,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누구든지 물리고 할퀴어지면 여지없이 감염됐다. 그러니 요한을 포함해서 피콜로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없었을 거다. 접근만 해도 감염시켜 버리니 목격자가 있을 수가 없겠지.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 면역이라는 선물이 없었다면 상황이 얼마나 더 끔찍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노아는 죽었을 테고, 피콜로의 존재를 모르는 캠프 요한의 일원들도 전멸이라는 꼬리표를 달았을 터다. 그렇게 생각하니 요한은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왜 면역이라는 체계가 생겼고 어떤 조건에서 발현되는지는 알 수 없다.’
요한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의문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면역자가 많다. 과할 정도로.
‘스위퍼, 하진, 노아, 재원, 개백정, 메시아.’
그리고 자신까지. 일행 중에 또 다른 면역자들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면역자들에게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신체조건이든 생존력이든, 지능이든, 하물며 누군가의 뒤통수를 치는 능력이라 할지라도 뛰어난 인재들, 생존에 최적화된 인간들이었다.
실제로 자신과 노아 그리고 재원은 지난 생에서 거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사람들이기도 했다.
‘나, 개백정, 노아, 재원 형. 모두 회귀 전에 거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사람들이다. 스위퍼나 하진의 생존력을 봤을 때 그들도 꽤 오랫동안 살아남았을 확률이 커.’
요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하지만 그의 직감이 가설에 힘을 더하고 있었다.
첫 번째. 좀비들을 많이 상대하면 상대할수록 면역력이 강해진다.
두 번째. 이전 생의 생존 기간과 관련이 있다.
세 번째. 그저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첫 번째라면 어떻게든 좀비들을 많이 상대하고 겪어보도록 해야 했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증명할 길이 없었다.
두 번째나 세 번째는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은 아니었다. 그저 요한의 의문에 답을 주는 것일 뿐.
‘무의미한 고민인가.’
근원에 대한 호기심은 자꾸만 빠끔히 고개를 디밀었지만, 결국 이 생존 게임의 최종 보스는 종말 그 자체였고, 요한의 목표는 뒤돌아보지 않고 이 싸움의 끝을 보는 것, 그뿐이었다.
* * *
동이 텄다.
희미한 빛이 여명을 밝히고 새카맣게 잠들었던 세상이 일어났다.
요한 일행은 시계가 밝아지자마자 합참의 내부가 보인다는 용산 감동교회로 이동했다.
요한은 실제 본부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브리핑했다.
합참 내부에 대한 정보는 전무했다. 직접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었다.
“조는 다시 짤 거야. 대좀비전 진형으로. 첫 번째 잠입은 선발조가 한다. 선발조가 우선 내부를 훑으면서 목적지까지의 길을 틀 거야.”
“보급창고랑 복지관 위치는 알아.”
노아의 첨언에 요한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쪽은 됐어. 물자는 차고 넘치니까.”
“와우.”
“우리는 신청사로 간다. 선발대는 스위퍼, 하진 그리고 노아.”
대인전과 달리 대좀비전에서는 가장 강력하고 안전이 보장된 인원이 선발대로 가는 게 맞다. 이들은 최선이자 최고의 선택지였다.
“네 명만 들어간다고? 선발대가 너무 위험해 보이는데.”
“네 명이 들어가서 피콜로나 다른 변종이 없는지 먼저 확인할 거야. 그래야 다른 피해를 막을 수 있으니까.”
노아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작전이었다. 아무리 개개인이 강하다 한들, 우글거리는 좀비들의 소굴이다.
어차피 한번 경험했던 지옥, 목숨 걸고 들어가라면 못할 것도 없는 자신은 둘째 치더라도 다른 이들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역할일 터였다.
노아가 호명된 두 사람을 힐끗 바라봤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두 사람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의 지시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의연한 수준을 넘어 아예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모습.
‘대체 어떻게 돼먹은 놈들이지, 이거?’
이런 생각이 드는 건 당연했다.
무신경한 건 요한도 마찬가지였는지 그저 제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본대는 외부 라인의 좀비들을 정리하고 깊숙이 들어오지 말고 그사이 후문 위병소 쪽에 새어 들어오는 좀비들을 처리해줘. 수가 아무리 많아도 이 정도 인원이 정리를 시작하면 어느 정도 정리가 가능할 테니까. 그러다 내부의 안전이 확인되면 신청사로 이동해서 목표했던 물건을 찾는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아가 되물었다.
“그 설계도인지 뭔지?”
“설계도라는 말은 대충 둘러댄 거야. 그때까지는 우리의 정확한 목적을 밝힐 수 없었으니까.”
“저런. 철석같이 믿고 있었네.”
“우리의 목적은 군함을 타고 해상으로 이동하는 거야. 키워드는 백령함. 백령함과 관련된 문서정보는 싹 다 긁어온다고 생각해. 항해술부터 급유, 정비, 제반 시설 관련 자료까지 눈에 보이는 건 전부다.”
사람들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노아를 따라온 동료들도 어느새 그의 말을 경청하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후발대의 리더는 혁이.”
“응.”
“신청사 쪽 뒤지기 시작하면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까 본대가 합류하기는 한다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부분은 안전이야. 한 명도 죽지 않는 선에서 네가 알아서 리드해. 만약 누군가 공기 중 감염이 되면 상황 전파하고 곧바로 전원 용산역까지 빠져나가.”
“알겠어.”
“신청사까지 들어오면 일부는 입구를 방어하고, 나머지는 적당히 분배해서 내부 수색을 돕고.”
“응.”
“좋아.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이다. 명심해.”
요한은 앵무새처럼 안전을 여러 번 반복하고서는 일행을 출발시켰다.
네 명의 선발대.
좌우의 스위퍼와 하진, 뒤쪽의 노아. 요한은 그 어느 때보다 뒤가 든든한 느낌을 받았다.
이들은 어떤 적이 등장해도 머리를 깨부술 기세로 아우라를 풍겨대고 있었다.
“전진하자.”
네 사람이 후문의 위병소 장벽을 넘었다.
요한은 등 뒤로 K-2 소총을 단단히 조여 매고 허리춤에는 마체테를, 손에는 조원 중 한 명에게 건네받은 쇠뇌를 들었다. 오랜만에 드는 쇠뇌의 감촉이 생소했다.
본부 안에는 정리되지 않은 시체가 썩어가며 악취를 풍겨대고 있었다. 코가 찌르르 따가울 정도에 악취다.
여전히 내부에는 좀비들이 빽빽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돌파.’
수신호와 동시에 그의 손에서 발사된 쇠뇌가 튀어 나갔고 정확하게 좀비의 머리통에 명중했다.
철컥, 쇠뇌를 재장전하는 사이 양쪽에서 접근하는 좀비들을 사정없이 깨부쉈다.
네 사람의 스쿼드는 흡사 분쇄기처럼 강력했다. 여기저기서 좀비 머리가 허공으로 튀어 오르고 좀비들의 시체가 그들의 경로에 레드카펫처럼 깔렸다.
세 사람의 전력을 모르던 노아에게는 어안이 벙벙할 정도의 전투력이었다.
탁 트인 곳에서 접근하는 좀비들에 익숙해지면 위협적이지 않다곤 해도, 이 정도의 좀비들이 동시에 접근하면 누구나 움찔하기 마련인데 이들은 두 마리든 세 마리든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하진은 한 손으로 쿠크리 대검을 붕붕 휘두르며 한 번에 두세 마리의 좀비 머리를 쳐내고 있었고, 스위퍼의 움직임은 종종 시야에서 놓칠 정도로 빨랐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저 정도 능력치의 괴물이 세 명이나 있다면 캠프 내에서도 에이스로 평가받던 재원이 당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니 필연이었다.
그리고 효율적인 전투의 집대성을 보여주는 듯한 요한의 움직임.
‘제 한 몸 지킬 수 있을 정도라더니 구라도 정도껏… 이건 인간들이 아니잖아.’
원정 전 세 사람을 걱정했던 노아는 힘이 빠졌다.
신체 능력으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던 그였다. 동료들을 마포에 모두 대피시키고도 자신이 세력을 이끄는 리더로 있을 수 있던 이유도 바로 그 전투력에 기반했던 거였으니까.
그런 자신이 좀비 처리 속도와 전진 속도를 따라가기 벅차 뒤처지는 것은 살다 살다 처음이었다.
물론 그의 생각이 어떻든 간에, 요한은 이 스쿼드의 만족도가 더할 나위 없었다.
너무도 든든하다.
전생과 현생을 합쳐서도 이렇게 뒤가 신경 쓰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오로지 눈앞의 좀비만 신경 쓰면 되는 상황.
새로 합류한 노아도 기대 이상이다.
가장 위험한 후방에서도 한 번의 불안한 모습도 없이 바짝 붙어 쫓아온다.
국군 최고 특수부대원 출신답게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다.
물론 노아의 가치는 이게 끝이 아니다. 정확한 판단력, 냉철하면서도 다정한 리더십, 훌륭한 대인 전투력, 잠입, 침투, 상륙, 파쿠르, 클라이밍 등등 다재다능한 그의 능력치는 캠프에 날개를 활짝 달아줄 터였다.
요한은 가장 먼저 노아와 부딪혔다는 변종 피콜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과연 그가 말한 대로 변종 피콜로의 시체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시체가 아니었다. 놈의 몸은 갈가리 찢겨 있었지만, 그럼에도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놈이군.”
하지만 얼마나 갈가리 찢어 놓았는지 도저히 재생이나 재기는 불가능한 수준으로 보였다.
“터프하게도 끝장냈네.”
“어쩔 수 없었어. 놈이 죽질 않았거든.”
“불태우는 게 좋겠다.”
숨통이 끊어졌는지, 아닌지 몰라도 꿈틀거리는 변종을 두고서 움직이는 건 역시 불쾌했다.
요한이 근처에 탈 만한 것들을 끌어모은 뒤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매캐한 탄내와 살 타는 썩은 오징어 굽는 냄새가 올라왔다.
“일단 이동.”
분명 연기가 눈에 띄었을 것이다. 인근의 좀비들이 몰리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선발대는 침착하게 이동했다. 마치 여유 부리는 것 같다고 느껴질 정도로.
신청사를 끼고 크게 주변을 돌다가 휴식 겸 잠시 실내로 들어오자 노아가 땀을 닦으며 요한에게 물었다.
“너무 여유 부리는 거 아니야? 좀비들이 끝도 없어 보이는데.”
“왜, 벌써 지치나.”
“그런 건 아니지만.”
체력적인 부담은 적었지만, 긴장감을 유지하고 오랫동안 전투하다 보니 점점 피로도가 쌓이고 있었다.
노아의 우려에도 요한은 숨 한번 고를 시간 뒤에 선발대를 움직였다. 이런 하드코어한 일정도 익숙한지 그의 좌우를 보좌하는 두 사람도 숨 한번 벅찬 기색 없이 묵묵히 좀비들을 처리할 뿐이었다.
노아는 혀를 내둘렀다. 물론 그들의 뒤를 받쳐주는 데 집중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눈앞에 거대한 거인들이 있는 느낌이다. 약간의 자격지심이 들기도.
‘기분 탓이겠지.’
하지만 약간, 신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