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요한은 잠시 말을 잃어버렸다.
확실히 그가 선택한 단어 중 ‘부하’라는 말에서 약간의 위화감을 느껴지긴 했다. 그의 성향상 사용할 만한 단어는 아니었으니까.
그는 제 나름대로 자신의 동료들과 동료를 지키기 위해 이용하는 부하들을 구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본인의 사람들을 따로 챙기고 있었다는 것. 역시, 신노아는 신노아다.
그것까지는 요한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쉽다.
“대단하고 멍청하네.”
“그 화법 좀 어떻게 할 수 없어?”
“만약 내가 네 말을 듣고 너의 동료들을 모두 찾아 죽이면 어떻게 하려고 그런 정보들을 술술 부는 거야?”
요한의 지적에도 노아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뭐, 마포가 동네 운동장도 아니고, 꼭꼭 숨으면 무슨 수로 찾겠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낸다면?”
“쓸데없는 논쟁은 하지 말자고. 네가 처음부터 나한테 혼자라도 캠프에 들어오라고 하지 않았으면 나는 그냥 여기서 혼자 죽으려고 했어. 하지만 내가 연락이 끊기면, 어차피 내 친구들은 내 복수를 하겠다고 이곳으로 들어와 너희랑 싸우게 됐을 거야. 선택지가 없었어.”
“그렇군.”
요한은 긍정했다. 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만약 자신이었어도 동료들을 되돌려 보낸 뒤 혼자 죽는 쪽을 선택했겠지만, 그렇게 되면 제 동료들은 무조건 복수를 선택할 거였다. 분명히 시신이라도 수습하려고 하리라.
“놀랍네. 무능하다고 비난했던 건 정정하지. 사과도 같이.”
“아니. 인정할게. 처음부터 캠프를 키운 건 또 다른 개백정이 등장했을 때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어. 하지만 과욕이었고 자만이었지.”
“누구라도 너만큼 잘해내지는 못했을 거야.”
진심이 담긴 말에 노아는 환하게 웃었다. 마치 면죄부를 받은 듯한 그런 표정. 누군가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는 이들의, 일종의 동질감이었다.
“너와 함께 한다면… 이번에는 내 사람들을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이 드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다. 이번에도 그와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그를 제 손으로 죽여야 하는 최악의 상황까지도 각오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할 수 있다면 이번 원정의 수확은 목표했던 것을 훨씬 웃돈다.
요한은 빨리 그에게 확답을 받고 싶어 마음이 달았다.
“너와 함께했던 시절, 리더는 누구였지?”
“너였지.”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그래서 지난번에도 개백정에게 진 걸까. 이번의 너는 이겼는데 말이야.”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개백정의 존재와 놈의 습성을 몰랐다면 오히려 더 크게 당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객관적이네. 좋아. 그럼 이번에는 네 차례야.”
“그 말은…….”
“우리 캠프 사람들을 잘 부탁합니다. 대장.”
노아가 앉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떨궜다가 들어 올리는 표정이 방긋방긋 웃고 있다.
“노력하지. 내 새 동료들의 안전을 위해서.”
“와, 말투 오글거리네요.”
“존대하지 마라. 그게 더 오글거리니까.”
요한이 인상을 찡그리며 그의 두 손을 풀어주었다. 노아가 팔이 아픈지 팔목을 돌리며 주물럭거렸다.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카페에서 걸어 나왔다. 요한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그의 근처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시선에 노아에게로 향했다가, 그의 자유로운 두 손으로 이동했다.
요한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스위퍼에게 물었다.
“어르신은 출발하셨어?”
“응, 부랴부랴 달려갔어. 그쪽은…….”
“함께하기로 했어. 이제 우리의 새 동료야.”
요한의 부언에도 조원들의 안색이 어두웠다. 손에는 무기를 꽉 그러쥔 모양새가,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면 곧바로 달려들 것만 같았다.
“긴장들 풀어.”
“하지만 조금 전까지 싸우던 사람인데. 괜찮겠어?”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사람들은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노아는 멀뚱히 서 있다가 주변에 쓰러진 시신 근처로 다가가 피 묻은 무기를 들어 올려 어깨에 걸었다.
철컥, 몇몇 생존자들이 노리쇠를 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세리, 옹 상병. 무기 내려도 돼.”
요한이 무기를 견착한 두 남녀에게 말하자 두 사람이 여전히 마뜩잖아 하는 표정으로 무기를 내렸다.
“경계하는 건 좋아. 좋은 태도니까.”
“…….”
“하지만 녀석은 나랑 협상하러 나오면서 무기도 안 갖고 나온 녀석이야. 날 믿어. 녀석은 내 지난 생에서, 가장 든든했던 동료였으니까.”
정신없이 오가는 시선들. 가장 앞장서서 경계심을 푼 것은 스위퍼였다.
“그래 친구들, 어차피 우리가 머릿수도 훨씬 많으니까. 진정들 하라고.”
그가 조정간을 안전으로 바꾸고 등 뒤에 둘러메자 그제야 사람들도 하나둘 총기를 내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요한은 이해했다. 본인이 그렇게 가르친 사람들이었으니까. 정작 자신도 돌발상황을 계속해서 경계하고 있었는데 누굴 나무라겠는가.
“궁금한 게 있는데.”
뒤쪽에서 무기를 등에 진 채 빤한 시선을 보내고 있던 노아가 조원들을 향해 한마디 거들었다.
“여러분의 대장은 원래 저렇게 하드보일드함을 넘어 오글거립니까. 적응하기 꽤 힘들겠는데.”
그리고 그 한마디가 조원들에게 제법 호감을 산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었다.
* * *
“그렇게 된 거였군. 미남 형씨, 제법인데.”
요한은 여의도 캠프가 확장하게 된 계기, 노아의 통제를 벗어나 캠프 요한을 공격한 경위, 그리고 진짜 동료들이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까지 모두 듣고 나서야 노아의 결정을 이해했다. 이해한 걸 넘어서 노아에게 감탄을 보냈다.
“그만 추켜세워요. 캠프 사람들을 모두 죽게 내버려 둔 무능한 리더였으니까.”
노아는 손사래 쳤다. 그 뒤로 심각한 질문들부터 점점 가볍고 짓궂은 질문들까지, 새 동료에게 여기저기서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대부분 조원이 겪었던 환영 인사였다.
“여자친구는 있어요?”
“네?”
“여친.”
“없어요. 입후보 받습니다.”
“이상형은요?”
“예쁜 여자요.”
“여기 세 분 중 고르면?”
재호가 너스레를 떨자 세 여자가 동시에 인상을 썼다.
“어… 예쁜 여자요.”
퉤퉤, 누군가가 침 뱉는 시늉을 했다. 분위기가 점점 들뜨자 요한이 제지했다.
“환영 인사는 그만하지. 동료들은 데리러 가야 해, 아니면 이쪽으로 부를 거야?”
“볼일이 용산에 있다고 했으니까, 짐 챙겨서 용산으로 오라고 할게.”
“그래. 그럼.”
요한의 허락이 떨어지자 노아가 곧바로 무전을 쳐서 동료들을 불렀다.
“나야.”
-어, 노아야! 어떻게 됐어? 괜찮아?
“설명하자면 긴데. 모두 용산역으로 와 거기서 만나자.”
-전부다?
“그래. 전부. 한 명도 빠짐없이.”
-…알겠어.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럼 바로 이동할까.”
“잠깐만, 요한.”
발걸음을 옮기려는 요한을 노아가 붙잡았다. 요한이 몸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잠시 시간을 줄 수 있겠어? 이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싶은데.”
“돕지.”
“아니. 아니야. 내 손으로 직접 수습해야 해.”
그의 단호한 말에 요한이 잠시 그를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들 안으로 들어와서 정리해. 휴식한다.”
요한의 지시에 사람들이 긴장을 풀고 카페 의자와 바닥에 주저앉았다. 노아는 어느새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멀리서부터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중얼거리듯 사과하는 소리와 자박거리며 시신 수습하는 소리만 들려왔다.
15. 삶과 죽음의 경계
노아의 시신 수습이 끝나고 용산역으로 이동했을 때, 정은과 에디는 한결 나아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루카와 세리가 그들의 붕대를 갈아 주고 생존자들은 번갈아 가면서 경계를 섰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었으나, 요한은 휴식을 지시했다. 합참에서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모르니 최대한 체력 안배가 필요했다. 하루 두 번의 전투는 심리적으로든 체력적으로든 큰 부담이었으니까.
노아의 동료 중 요한이 기억하는 인물은 최수현, 단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최수현의 합류는 또 다른 기적 같은 장면을 연출했다.
“……오빠?”
“소희야? 진짜 소희야?!”
마치 남북정상회담에서 진행되는 이산가족 상봉을 보는 듯한 장면에 사람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노아의 동료 중 수현을 보자마자 소희가 달려들어 울고불고 난리를 쳤기 때문이었다.
“저 사람이 소희 오빠라고?”
눈으로 보고서도 믿지 못할 기적이었다.
서로가 죽음을 확신했던 이들.
“…기다렸어.”
“미안, 미안해.”
두 사람의 만남에는 무언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동반됐다. 가족, 친구. 이제는 슬픔과 그리움마저 무뎌진 이름들. 지금 이 순간, 누군가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떠올리고 있으리라.
요한은 팔짱을 끼고 있다가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노아를 툭 쳤다.
“어떻게 된 거야?”
“나도 몰라. 수현이가 동생 얘기를 하긴 했지만, 사실 포기하고 있었거든.”
시작은 그가 속해 있던 부대가 군사작전으로 서울 시내까지 진입한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부대는 지시에 따라 쉘터 여기저기를 전전하다 이내 변종의 습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다수의 탈영병이 발생했고 그 과정에서 일부 병사들이 부사관 한 명을 따라 노아의 캠프에 합류했다.
가족들이 있는 영종도에 연락을 시도한 건 그 이후의 일. 수현은 중간중간 가족들의 생사를 알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가족들을 찾는다는 것은 기실,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생존자들이 같은 상황이었기에.
기적 같은 상봉 이후에 분위기는 다소 편안해졌다. 사람들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상황에 할 말을 잃었고 이로써 두 캠프 간에 말로 표현하기 힘든 유대감이 생겨났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다 있지.”
요한의 옆에 있던 혁이 중얼거렸다.
“우연이라기보다는 필연이겠지 참, 혁아.”
“응, 형.”
“노아랑은 친하게 지내라. 배울 게 많을 거야.”
혁이 올바르게 성장한다면 저런 모습이 완성형일 가능성이 컸다. 정의감 넘치지만 제 사람들을 위해 일부 자신의 신념을 내려놓을 줄 알고, 호전적이지만 동시에 평화적이며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냉철한 인간상.
요한의 롤모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혁이 가장 따라가야 할 길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건이 지금까지 살아서 함께했다면 그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줬을지도 모른다.
“응. 알겠어.”
“좋아. 다들 고생했어.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일찍 합참으로 출발하자.”
“잠깐, 요한. 합참으로 간다고?”
“어, 그쪽으로 갈 건데. 왜, 문제 있어?”
“문제라기보다는…….”
이제, 마지막 관문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