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전투는 요한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길어졌다. 전진하기는커녕 그 자리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뒤쪽에서 정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뒤쪽에도 좀비가 많아!”
“스위퍼, 뒤쪽에 진수랑 스위칭해.”
“라져.”
“전위는 무리해서라도 속도 올려야겠다. 이러다가 고립되겠어.”
요한의 말과 동시에 하진과 혁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슬슬 다른 조원들과 속도를 맞추는 게 답답하게 느껴지던 참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찌르고 베고, 휘둘렀다. 길가에는 좀비들의 시체가 쌓여가고 바닥에는 끈적끈적한 검붉은 썩은 피가 아스팔트를 물들였다.
“하, 하아…….”
여기저기서 가빠진 숨소리가 들렸다.
버텨라. 좀비들은 무한정하게 튀어나오는 게 아니고, 어차피 끝이 나게 되어 있다. 오로지 그 생각 하나뿐.
그들은 언젠가 이 휘두름이 끝날 때만을 기다리며 마치 무아지경에 빠진 사람들처럼 싸워나갔다.
팍! 요한의 마체테가 좀비 두 마리의 머리를 동시에 쳐낸 순간, 마침내 눈앞의 시야가 열렸다. 전위의 좀비들이 끝을 드러낸 것.
“끝이다. 마무리해.”
일행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총공세가 시작됐다. 만약을 위해 아끼던 화살이 퍼져 있던 좀비들을 향해 쏘아지고, 혁과 하진이 종횡무진 날뛰었다.
세리가 쓰러트린 좀비를 마지막으로, 거리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어느새 눈앞에 지하철의 입구가 아귀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후우…….”
누군가가 깊게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생했어. 전위는 주변 경계하고, 중위는 화살 회수해.”
요한이 마체테를 툭, 툭, 휘둘러 묻은 피를 털어냈다. 얼마나 많이 휘둘렀는지 날이 많이 상해 있었다. 그의 시선이 자신과 똑같이 피를 털어내는 조장들을 향했다.
“스위퍼, 하진, 체력 남아 있지?”
“그럼.”
“당연하지 형씨, 우릴 뭐로 보고.”
“그럼 우리끼리 지하철에서 후반전 따로 뛰자. 다들 너무 지쳤으니까.”
역시나 두 사람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팔팔한 모습으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이 어깨를 풀고 지하철로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 혁이 끼어들었다.
“형, 나도 갈게.”
“너도? 그냥 쉬지.”
요한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혁을 돌아보았다. 그도 전위에서 상당히 많은 좀비를 상대했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제 몫을 해줬다.
하지만 혁은 단호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전신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으나, 호흡은 가지런했다. 확실히 빡빡하게 체력을 단련한 게 효과를 발휘한 듯 보였다. 요한이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좋아. 가자… 재호는 뭐 해?”
요한이 고개를 갸웃하며 부지런히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재호를 향해 물었다.
“트랩 설치요. 이렇게 낚싯줄로 발목, 목 높이로 트랩을 설치해 두면 뒤에서 좀비들이 몰리는 걸 어느 정도는 막아줄 수 있거든요.”
그의 손에는 손바닥만 한 형광 낚싯줄 통이 들려 있었다.
“언제 챙겼대.”
“항상 가지고 다니죠. 제가 혼자 살아남을 때 들고 다니던 게 습관이 되어서.”
“음, 좋은 습관이야.”
요한은 짤막하게 재호를 칭찬한 뒤 손전등을 켜고 지하철 내부로 들어갔다. 네 사람은 또다시 어두컴컴한 지하철 내부에서 그들만의 후반전을 진행했다.
조장들이 지하철 내부의 좀비들을 정리하는 사이 중위였던 조원들은 화살을 회수하고 재호는 지하철 입구에 와이어 트랩을 꼼꼼하게 설치했다.
그냥 걸어서도 계단을 잘 내려오지 못하는 좀비들이다.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낚싯줄이지만, 발에 걸려 넘어져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기만 해도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머리가 박살 날 수 있었다.
“30분 정도만 휴식하고 가자.”
요한이 개폐문 수동 조작 버튼을 누른 뒤 셔터를 끌어 내렸다.
드르륵-
운행시간이 끝난 지하철이 된 것처럼, 어두운 지하철 홀에 쇠창살이 내려앉았다.
안전이 확보되자마자 사람들은 저마다 자리를 잡고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요한은 그사이 손전등의 배터리 잔량을 확인했다. 예상보다 지하도 이동 거리가 늘어난 만큼 장기간 조명 확보할 수 있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재호야, 여분 배터리는 얼마나 있어?”
“50개 정도요. 넉넉해요.”
“넉넉하게 챙겼네.”
역시 서준은 꼼꼼했다. 따로 부탁하지도 않았건만, 장기 외출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 기간만큼 넉넉하게 리튬-이온 배터리를 챙겨넣었다.
“야시경 배터리는?”
“네 개씩 있어요.”
리튬-카드뮴 배터리도 여유가 있다. 역시나 꼼꼼한 안방마님이었다.
“좋아 다들 쉬면서 들어.”
그의 말에 사람들이 앉은 채로 고개만 요한에게 돌렸다.
“지금부터 꼭 숙지해 둬야 할 게 있어. 이 지역은 여의도 캠프의 구역이고, 리더는 신노아라는 녀석이야.”
혹시라도 불필요한 행동으로 그들과 부딪히는 일을 예방해야 했다. 그가 기억하는 노아라면 분명히 말이 통할 터였다.
그와 부딪혀 싸운다는 것은 사실,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계속해서 신경이 쓰이는 이유는… 리나의 꿈.
‘사람들과 싸우는 장면을 봤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싸우는 내내 요한 님께서 굉장히 슬퍼하셨어요.’
누군가와의 전투, 그리고 슬퍼하는 자신. 요한은 본능적으로 그 꿈이 가리키는 상대가 여의도 캠프라고 확신했다.
타이밍과 정황이 딱 들어맞는다.
문제는 이 미래가 뒤바뀌었는지, 아니면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지를 모른다는 점이었다.
미래는 바꿀 수 있다. 변종 샤크와의 싸움처럼.
녀석과 싸우게 된다면 그 원인이 분명히 있을 것. 그 원인 자체를 제공하지 않고 싸움을 피하면 된다.
사실 그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물자를 구하는 것도, 사람을 납치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노아의 성격은 누구보다 잘 안다. 그는 선제공격을 당하지 않으면 공격하지 않는다.
‘하지만 확신해서는 안 돼.’
지금의 노아가 자신이 기억하던 그때의 신노아가 아닐 수도 있다. 변수는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요한은 말을 이어나갔다.
“그는 내 전 동료야.”
“…….”
사람들의 머릿속에 느낌표와 물음표가 동시에 떴다. 요한의 과거를 얼추 들어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회귀 전’의 동료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제법 강하고, 호전적인 친구지. 될 수 있으면 이들과의 싸움은 피하고 싶어. 우리의 목표는 자료를 찾는 거니까.”
“하지만 혹시라도 마주치게 되면 어떡하죠?”
“협상을 해야지. 그러니 지금부터 만나는 사람들은 함부로 죽이거나 공격하면 안 돼. 되도록 피하고, 피할 수 없으면 대화를 시도한다. 만약 싸워야 하는 상황이 오면 생포해. 혹시라도 우발적으로 총기를 쏘거나 하지 않도록. 놈은 말이 통하는 녀석이니까.”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하진이 물었다.
“만약 낯선 생존자가 먼저 공격하고 상황상 생포가 어렵다면? 그리고 공격한 사람들이 여의도 캠프가 아닐 수도 있잖나. 여의도 캠프라는 걸 확실히 알 수 있는 표식 같은 건 있나?”
“음…….”
요한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변수가 너무 많다. 그가 확실하지 못한 태도를 보이자 드문 모습에 사람들이 불안함을 드러냈다. 하진이 단호하게 덧붙였다.
“태도를 확실히 밝히고 각오를 다져. 위험한 상황이잖아.”
백번 맞는 말이었다.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전해. 가만히 앉아서 죽어줄 순 없지.”
“좋아.”
하진이 만족스럽다는 듯 대답했다.
마치 전 친구와 현 친구 중 선택이라도 받은 듯 사뭇 뿌듯한 표정이다.
‘신길이나 용산에 도착해서 따로 노아를 찾아가야 할까.’
그것도 너무 위험한 방법이다. 아무리 백전노장인 그라도, 서울 한복판에서 혼자 돌아다닐 정도로 무모하진 않았다.
위험을 최소화하고 그와 접촉해서 동맹을 맺을 방법, 그런 방법을 찾아야 했다.
요한의 고민이 길어지자 사람들은 우선 그에게서 신경을 돌렸다. 그가 골똘히 생각할 때는 오히려 방해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걸 알기 때문.
‘신노아, 신노아…….’
분명히 그와의 전투는 선택의 결과물이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이어지는 갈래 중 하나일 터다. 원래의 자신이라면 했을 선택, 그것을 조심해야 한다.
‘원래대로라면 여기서 선제공격하면 응전해. 라고 지시하겠지만.’
요한은 떠오르는 선택지와 그 선택지에 따른 결과를 시뮬레이션했다.
선제공격해서 응전했더니 알고 보니 그게 신노아의 부하들이다. 뻔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는?
공격이 들어오는데 응전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도 희생자가 얼마나 나올지 모른다. 멍청한 선택이다.
또 다른 선택은, 따로 신노아를 만나는 것.
이 또한 멍청한 선택이다.
만약 신노아가 제가 아는 그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홀로 범 아가리에 찾아가는 꼴이 된다.
자신이 죽거나 납치라도 된다면 분명 수색 조원들은 생사전을 결사할 거다.
인질로 잡히면 버리라고 그렇게 누누이 강조했지만, 저들은 자신만은 절대 버리지 못할 터다. 확신할 수 있었다.
‘마지막 선택지는 아예 피하는 것.’
용산 합참을 포기하면 여의도 캠프와의 접점은 완전히 사라진다.
가장 가깝지만, 동시에 가장 위험한 곳. 여기를 포기하면 편하다. 요한의 고민이 깊어졌다.
그리고 끝내 결론에 도달했다.
‘퇴각은 없다.’
이미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
자료 유무 자체가 불확실한 서초나 화성. 확실하지만 거리상 문제가 있는 진해, 계룡. 어느 쪽을 가더라도 지금보다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간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급함은 점점 치고 올라오고 있었으니까.
재호에게 뒤를 돌아보지 말자고 말한 것은 자신이 아니던가.
인제 와서 전 동료들과 부딪힐 것 같으니 원자로 폭발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지만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이해할 리가 없다.
자신조차 납득되지 않는데.
‘너를 좋아하지만, 가로막는다면 짓밟고서라도 지나간다.’
생존에 걸리적거리는 게 있다면 전부 치워버린다. 회귀한 순간부터 그런 각오로 살아왔다.
개백정이든 신노아든. 쓰러트리고 간다. 어차피 개백정에게도 대항하지 못했던 전력. 전력상은 우위에 있을 터다.
그들과 싸우기 싫다는 그 거부감만 이겨내면 된다.
“지금부터 수색 중단까지는 생존자를 발견하더라도 선제공격을 당하기 전까지는 살해하거나 위협하지 않는다. 최대한 생존자들을 피해 다닐 수 있도록 은폐 엄폐에 신경 써. 만약 생존자와 불가피하게 맞부딪칠 경우.”
요한은 살짝 뜸을 들인 후 단호하게 지시했다.
“절대로 생존자를 남겨두지 말고 전원 사살을 목표로 싸운다.”
증거를 인멸하면 된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총기는 써도 되나.”
“그쪽에서 먼저 쓰면.”
“역대급으로 난도가 높은 작전이네.”
요한도 그 말에 백번 동의했다. 차라리 변종이나 개백정이 낫지, 하필이면 적이 될 수도 있는 게 신노아라니. 이게 무슨 장난질 같은 상황인지.
가장 피하고 싶었던 사람과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은 계속해서 요한의 머릿속을 바늘처럼 쿡쿡 찔러왔다.
“푹 쉬었으면 출발하지.”
요한이 조원들을 일으켜 세웠다.
불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지하철은 단지 걸음을 걷는 것만으로도 심력을 갉아먹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무대 위 핀 조명처럼 손전등의 불빛만이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요한 님. 이거…….”
지하철 선로로 들어가기 직전의 승차장 정중앙. 쇠파이프에 꽂혀 소리를 빽빽 지르는 좀비 한 마리가 유령도시의 지하철을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