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서바이벌-128화 (128/176)

<128화>

“그렇습니까…….”

재호는 말끝을 흐리며 사람들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되짚어 보면 절절히 공감 가는 말이었다. 요한의 말처럼 재호, 그리고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도 또한 요한을 만나기 전까지는 저런 분위기를 풍겼었으니까.

새삼스럽게 요한의 대단함이 느껴진다. 단지 개인의 무력으로 사람들을 지키는 것이 전부가 아닌, 살아가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나침반을 보여주는 것.

그의 강함은 그런 부분이었다.

재호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요한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또 그런 식으로 쳐다본다.”

“존경합니다. 대장님.”

“죽지나 마.”

요한의 말은 퉁명스러웠지만, 정말 그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었다. 죽지 마라. 살아남아라. 그보다 진심이 담긴 걱정이 또 있을까.

재호는 요한이 그만큼 많은 사람을 잃어왔구나, 하는 일면의 상처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전령이 도착해 요한을 교장실로 안내했다. 요한은 조원들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긴 후, 그를 따라갔다.

교장실에서는 캠프 춘향의 리더가 반가움을 담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어서 와, 할아범. 그리고 새 손님도. 이 캠프의 리더 연희야. 편하게 불러.”

“이요한입니다.”

“이름 특이하네. 기독교인?”

“아뇨, 어릴 때 교회가 운영하는 보육원에서 자라서요.”

“그렇구나.”

새삼스럽지 않다는 듯한 반응.

요한의 앞에 앉은 캠프 리더는 3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성이었다. 요한은 의외의 인선에 놀랍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전해 들은 캠프 춘향의 독특한 구성 때문이었다.

생산조나 기술조 없이 대부분 전투 요원들만 있는 캠프.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면서 전투능력이 달리는 생존자 대부분은 같은 생존자들에게 살해당하거나, 좀비에게 물어뜯겨 죽었다고 했다.

그런 생사고락을 넘겨 온 캠프이기에 온화해 보이는 여성 지도자가 다소 이색적으로 다가왔다.

‘강인한 여성.’

온화한 인상을 풍기곤 있었으나, 결코 만만하게 느껴지는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멋지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강인한 인상이 돋보이는 모습이었다.

“할배는 정정해 보이네.”

“어, 춘향맘, 오랜만이야.”

“참,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딸랑구는?”

“잘 지내지.”

“불러 봐. 눈 호강 좀 하게.”

“남의 딸내미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네.”

노인이 너스레를 떨자 그녀가 툴툴거렸다.

“내가 50년만 젊었어도 바로 작업 들어갔지.”

“진짜 몸을 반으로 갈라버린다, 할아범?”

“아이고 무서우셔라.”

분명 거래를 튼 지 얼마 안 되었다고 들었는데, 제법 두 사람의 관계는 가까워 보였다. 아마도 노인의 친화력이 한몫했으리라.

연희가 문밖에 서 있던 사람을 불렀다.

“효정이 오라고 해.”

잠시 후 효정, 노인이 춘향이라고 불리는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아이를 본 순간, 요한은 왜 노인이 어째서 눈 호강 같은 소리를 했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소녀의 미모는 눈부셨다. 마치 아역 배우처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우유 같은 피부에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져 있었다.

미모라고 표현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가 무색하긴 했지만.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듯한, 너무 예뻐서 꼭 깨물어주고 싶을 만한 그런 여자아이였다. 크면 사내께나 홀리겠네, 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의.

효정이 조르르 달려와 노인에게 폭 안겨들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오냐. 우리 춘향이, 날이 갈수록 예뻐지는구나. 할아버지 손녀 할래?”

“저 늙은이 또 주책이다.”

효정은 볼을 불그스레하게 붉히고서는 노인의 목에 두 팔을 꼭 감았다.

노인은 과할 효정이를 얼싸안고 비행기를 태우기도,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다. 마치 사랑스러운 손녀를 보는 듯한 모습에 요한이 헛웃음을 흘렸다.

저런 냉혈한 같은 얼굴 뒤에 손녀 바보 같은 내면을 갖고 있을 줄은.

“정말이지, 노인네가 주책은. 참, 젊은 대장아. 네가 그 개백정을 잡았다며?”

연희의 질문에 요한이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놀라운데……. 최근 할배를 만나서 얘기를 듣긴 했지만, 믿지 않았거든. 지금도 사실 안 믿겨.”

“굳이 믿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죽었다는 게 중요하죠.”

“혹시 개백정의 결말을 얘기해줄 수 있을까?”

개백정과 엮인 게 있군.

요한은 그녀의 표정을 스치듯 바라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개백정과의 첫 만남, 그리고 격돌, 양쪽의 피해를 거쳐 함정에 빠진 개백정과 마침내 불타 죽은 결과까지.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놀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그녀는, 마지막으로 개백정의 시체를 확인하고 부관참시했다는 요한의 말을 듣는 순간 힘이 풀렸는지 등받이에 등을 푹 기댔다.

이내 표정이 점점 밝아지더니 속 시원하다는 듯 긴 숨을 내쉬었다.

“아…… 정말 속이 시원하네. 놈이 정말 갔구나, 놈이 갔어.”

“놈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얘기할 만한 것도 없어. 그저, 강한 놈이 약한 놈을 괴롭히는 전형적인 전개일 뿐이지.”

연희는 덤덤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캠프 춘향은 용산역 근처에서 단단한 쉘터를 구축하고 근처 대형 할인점들을 뒤지며 생을 연명하던 캠프였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등장한 집단은 캠프 밖으로 나가는 자신의 사람들을 보이는 족족 죽이거나 납치해갔다. 참다못한 연희가 그들에게 대적하기 위해 정예 구성원을 모아 개백정과 전투를 벌였지만, 일방적으로 패했고, 결과는 전멸.

개백정은 제 부하들의 눈앞에서 그녀를 강간했다.

그날 이후 캠프 춘향의 전력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서생연은 한 주 간격으로 물자를 보내지 않으면 초등학생 딸을 납치해 창녀로 쓰겠다는 협박까지 일삼았다.

“그땐, 정말… 차라리 효정이와 함께 자살하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지. 차마 죽을 용기도 없었지만 말이야.”

당시 연희의 오른팔 격이었던 사람과 그의 일행을 희생양 삼아 남은 사람들은 짐을 싸 도망쳤지만, 그 과정에서 개백정의 추격을 받아 절반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영등포 쪽으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영등포까지는 놈들이 쫓아오지 않았어. 바로 옆에 신노아의 캠프가 있었거든.”

“여의도 캠프는 놈들이 건드리지 않았습니까?”

“아니, 우리가 숨어든 다음, 놈들이 여의도를 뒤지다 신노아와 부딪혔지. 그 싸움에서 여의도 쪽은 절반 이상의 피해를, 개백정 쪽에서도 제법 많은 사람이 죽었어. 그 뒤로는 이상하게 개백정이 여의도는 건드리지 않았어.”

아마 개백정은 ‘캠프 깨기’를 준비하고 있었을 거다. 여의도 캠프는 I몰을 거점으로 해서 수비에 총력을 기하고 있었고, 전면전으로는 개백정조차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을 테니까.

요한은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리며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러다가 개백정이 홀린 듯이 장거리 출타를 나간 거야.”

“…여의도 캠프를 방치하고요?”

“그래. 너를 잡으러 간 거지. 여의도 캠프야 캠프 밖으로 움직이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않겠지만, 사실 멍청한 실수였달까.”

“원래 그런 놈이니까요. 제 것을 뺏기고서는 참지 못하는.”

특히 제 첩을 뺏기고서는 말이지.

“놈의 공포에 지배당하던 사람들은 도망칠 엄두도 못 내고 벌벌 떨고만 있었는데… 개백정이 돌아오지 않는 거야. 몇 주가 지나도 말이야. 그리고 조금씩 놈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

“노아가 움직였겠군요.”

“맞아. 그때부터 신노아가 움직이기 시작했어. 각 캠프를 감시하던 남은 서생연의 잔당들을 모두 처리한 다음에, 자신의 캠프가 공격당할 때 방관했던 캠프에 보복했지. 대부분 캠프가 전멸하거나 밀려났어. 우리를 포함해서.”

“…그렇게 된 거였군요.”

요한의 머릿속으로 상황이 그려졌다. 달라진 과거였기에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겠지만, 그의 성격이라면 분명히 개백정에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을 터다.

개백정을 잡기 위해 여러 캠프를 돌아다니며 연합을 시도했겠지. 하지만 돌아온 건 냉정한 거절.

특히나 자신 때문에 살아남은 캠프 춘향이 그들을 모른척한 건, 노아로서는 참을 수 없는 배신감을 느꼈을 거다.

정권이 바뀌고 난 후 피의 숙청이 이어지는 건 기정사실. 신노아는 그런 사람이다. 의리. 동료애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받은 것은 반드시 갚아줘야 하는 사람.

만약 그때 캠프 춘향이 신노아의 손을 붙잡았다면 그들은 지금보다는 좀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강자들의 비호를 받으며 서생연이 누리던 것들을 누렸을 테니까.

어쨌든 이들이 노아와 척을 지고 있다는 것은 요한에게는 비보였다.

다른 누구도 두렵지 않지만, 그들과의 싸움만큼은 자신이 없었으니까.

질 것 같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싸우는 대상 자체가 단단히 잘못됐다. 지금의 동료들과 가장 오랫동안 함께했던 게 5개월이다. 신노아와는 거의 1년을 함께 싸웠다. 아직도 그의 말투, 표정, 음성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저는 여의도 캠프와의 싸움은 무조건 피하고 싶습니다.”

“피해야지. 동생. 동생이 얼마나 강한지는 알겠지만, 거기는 웬만하면 피하는 게 좋아. 변종조차 겁내지 않는 진짜, 쌈닭들이거든.”

요한은 그들과의 싸움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걱정했다. 여의도 캠프 안에는 개백정이 심어 놓은 간자가 있다.

개백정과의 싸움에서 결국 패배의 원인을 제공했던 간자가.

‘개백정이 무너졌으니 그냥 그쪽에 정착하려 할지도 모르지만.’

원래는 김설화와 함께 간자로 심어지는 사내인데, 김설화가 없으니 단독으로 침투했을 공산이 컸다. 놈을 솎아내지 않으면, 그 캠프도 결국 힘들어지겠지.

‘여의도 캠프와 접선해봐야 하나.’

적이 되면 공포의 존재가, 동료가 되면 누구보다 든든한 우방이 될 거다. 만약 그들과 동맹을 맺으려면 무조건 혼자 가야 했다. 개인에는 호의적이고 집단은 배척하는 게 그의 습성.

조심성이 많고 신중한 타입이다. 생존 수칙 형성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 어떤 의미로서는 요한의 스승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춘향아, 이제 할아버지는 엄마랑 이야기 좀 할게. 가서 놀아.”

“네!”

효정이와 한참을 놀아주던 노인이 그녀를 내려놓았다. 효정이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서는 문을 열고 총총 걸어나갔다.

“그런데 효정이는 왜 춘향이라 부르는 건가요?”

“몰라. 저 할아범이 그렇게 부르더라고.”

연희가 푸흐흐 웃었다. 딸아이를 보자마자 ‘춘향이처럼 곱네!’ 라고 하더니 그다음부터는 그게 입에 붙었는지 춘향아 춘향아 하고 있다고.

“지내시기엔 어려움이 없으십니까?”

“어머, 젊은 대장이 걱정해주니 기분이 좋네. 우리는 괜찮아. 식량은 좀 부족하지만, 그런대로 버틸 만하고 저기 호수랑 119안전센터에서 물도 구할 수 있지.”

“그럼 이곳에 자리 잡으시려고요?”

“일단 최대한 몸들 사린 다음에 좀 더 빠지려고. 할배 있는 부평 쪽으로 들어갈까 하는데, 거기도 요새 물자 구하기가 힘들다고 해서 괜히 폐를 끼칠까 봐 고민 중이야.”

턱을 괴고 요한을 바라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재밌는 물건을 보는 것 같기도 연심 품은 여인 같기도 한, 호기심 가득한 표정.

“할배가 하도 칭찬을 하길래 어떤 녀석인지 궁금했는데, 확실히 난 녀석이긴 하네. 첫인상부터 아주 마음에 들어.”

그때, 노인이 인상을 쓰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이, 연애질하러 왔어?”

“그러게. 내가 20년만 젊었어도, 벌써 침대에 눕혔을 텐데.”

“주책이다, 이년아.”

“사돈 남 말은.”

그러잖아도 주름 자글자글한 노인의 이마에 한결 더 두꺼운 주름이 잡혔다. 노인은 요한을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야 애송아.”

“예. 어르신.”

“여기저기 꼬리 치지 마. 넌 내가 침 발라놨으니까.”

“예?”

“어멋.”

요한은 저도 모르게 반문했고 연희가 두 손으로 볼을 감싸 쥐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당혹감을 드러내자 노인이 껄껄 웃어젖혔다.

“농담이다 애송아. 설레긴. 시간 없다며, 잡담하고 있어도 되냐.”

“그러잖아도 슬슬 이야기하려 했습니다만.”

“뭐야, 좀 쉬었다 가지. 가려고?”

“예. 지금 바로 갈 생각입니다.”

“서두르네. 좋지 않은데.”

“우리 애송이가 성격이 좀 급하단다. 그래서 말인데, 킥보드좀 빌리자.”

연희가 아쉬움과 걱정을 동시에 드러내며 그들을 만류했다.

“고 패드를 빌려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 그런데, 서울은 안 들어가는 게 좋을 텐데. 꼭 들어가야 해?”

“가야 합니다.”

단호한 대답에 연희가 노인을 힐끔 바라봤다. 두 사람은 무언의 의미를 담은 눈빛을 교환했다. 이내 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듣던 대로 역시 똥고집이네.”

“거봐, 내 말 맞지? 뭔 재앙이 오고 있다나 뭐라나. 이 세상 자체가 재앙인데 또 무슨 재앙이 온다고.”

“좋아. 대신, 근처에서 노들길로 가기 전에 한 번은 좀비들 시선을 끌어줄게. 이건, 개백정에게 복수해 준 보답이야.”

“예. 감사합니다.”

“밑에 내려가면 충전소가 있어. 예쁘고 잘생긴 대장, 꼭 살아서 다시 만나.”

요한은 미소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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