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번거롭겠는데.”
“번거롭지. 진짜 번거로운 일인데 왜 굳이 그렇게까지 했을까 싶었단 말이야.”
“그래서, 이유는 찾았어?”
“조금은?”
“말해줘.”
“질려버린 게 아닐까.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들어오는 여러 요구와 의문이. 결국, 버티고 버티다가 완벽한 통제를 위해 서열화라는 제도를 만든 게 아닐까. 서열화야말로 완벽한 상명하복이니까. 군인들처럼.”
요한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스위퍼가 그를 향해 안쓰럽다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지쳤구나. 하긴, 형씨가 안타까울 정도로 독박을 쓰고 있긴 하지.”
요한이라고 악역을 자처하고 싶은 생각은 없을 터다. 하지만 그게 캠프를 위한 일이라는 것만큼은 누구보다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더 매정해지고 더 단호해져야 했다.
“…도착했다. 마무리하지.”
요한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권총을 꺼내 들었으나, 스위퍼가 그를 제지하고선 소음기가 달린 제 글록을 꺼내 들었다.
“뭐야?”
“우리 대장 형씨가 맨날 독박 쓰는 게 미안해서 말이지. 원래 말이야. 이런 지저분한 일은 오른팔이 처리하는 거거든.”
요한의 빤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스위퍼는 그저 히죽 웃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군인들을 향해 격발기를 당겼다.
탕, 탕! 소음기에 잡힌 격발음이 퍼져나갔다. 읍읍거리던 군인들이 쓰러졌다.
잠시 후 시체를 불태우는 불길이 영종도 하늘로 솟아올랐다.
“고생했다.”
“고생은.”
사실 명백하게 따지고 들면 억울하게 살해당한 병사들이다. 잘못은 장교와 부사관들이 했지만 그 대가는 모든 병사가 져야 했다.
그러나 죄책감은 없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다는 생각뿐.
스스로가 점점 더 잔혹해지고 괴물이 되어 간다는 느낌이다.
지금의 나는 개백정과 다를 바가 없는 게 아닐까.
이런 시답잖은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다. 처음부터 선악이 아닌 피아로 사람을 구분하기는 했지만, 만약 누군가가 선악을 따진다면 누가 봐도 이쪽이 악이었다.
격전지에서 보았던 세 사람의 시선이 비수처럼 마음에 날아와 꽂혔다.
13. 꼬인 실타래
* * *
‘또 꿈.’
리나는 본인이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자각함과 동시에, 이게 미래의 한 장면이라는 걸 단번에 눈치챘다.
매번 그래왔듯 똑같은 색감, 똑같은 느낌. 점차 흐릿했던 시야가 선명해졌다.
제법 오랜만에 꾸는 꿈이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화면이 휙휙 돌아갔다.
그런데 이상하다.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화면이 마치 순간 이동하는 것처럼 빠르게 휙 돌아가는 내내 사람 그림자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헉.’
리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절, 바로 앞에 변종이라 불리는 괴물 한 마리가 앉아있었다. 아니, 사실상 앉아있는 건지, 서 있는 건지 구별이 안 되는 모습이었다.
마치 TV 매체에서나 보던 몸무게 기네스 세계신기록을 보유하고 있을 법한 커다란 몸체를 가진 변종. 놈은 제 몸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지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그저 앉아있었다.
리나는 예지몽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요한의 말을 떠올렸다.
‘혹시라도 다시 예지몽을 꾸게 된다면 두 가지만큼은 확인하려고 노력해봐. 장소, 그리고 시기.’
리나는 요한의 말을 기억하며 좀 더 상황을 뚜렷하게 보려고 노력했다. 장소는 절. 바닷가 근처의 절이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지만, ‘ㄷ’자 모양의 작은 절이었다. 리나는 목판 위에 쓰여있는 한자의 모양을 기억하려 애썼다.
시기도 불명확했다. 봄은 아니다. 아직 새싹이 피기 전. 눈이 녹거나 얼어 있는 모습은 없으니 겨울도 아니다. 아마도 가을. 머지않은 미래.
“우웨에엑!”
들려오는 역한 소리에 리나의 생각이 멈췄다.
변종은 마치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 토사물을 내뱉기 전의 개나 고양이가 꿀렁거리듯 목울대와 배를 움직였다.
그리고 그 움직임 다음에 무언가를 토해냈다. 동그랗고, 점액에 둘러싸인, 마치…….
알?
알은 아니었다. 동그랗게 뭉쳐 있는 찐득거리는 무언가였다.
꿈틀, 무언가가 꿈틀거리면서 점막 안에서 발버둥 쳤다. 여지없는 괴물이다. 아직은 작은 크기의, 괴물 새끼.
마치 입으로 새끼를 낳는다면 그런 느낌일 듯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전혀 상상도 못 했던 방식의 탄생.
마치 완자처럼 뭉쳐 있던 괴물이 꿈틀거리더니 얇고 끈적끈적한 막을 뚫고 손과 발을 꺼냈다. 그러고 나서 으득으득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변종 괴물을 낳는 괴물.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지금부터였다.
‘으악? 이게 뭐야!?’
누군가가 변종을 발견한 것이다. 리나가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 섬에서 살고 있는 주민이 아닌 다른 생존자.
지저분한 행색에 피로한 기색으로 봐서는 그간 어렵사리 이 난리 통에 살아남은 사람인 걸 알 수 있었다.
의문의 사내는 뒷걸음질 치며 알과 괴물 변종으로부터 도망치려 했으나 얼마 걷지 않아 쓰러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냥 쓰러졌다.
그리고 쓰러진 사내는 금세 다시 일어났다. 붉은 눈동자 그리고 회백색 피부색을 가진 채로.
선득거리는 눈빛이 마치 자신을 바라보는 듯 시선을 던졌다.
“헉!”
리나는 잠에서 깼다. 온몸이 소름과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소름 돋는 꿈이었다.
매번 충격적인 꿈과 미래 예지의 반복이었지만 이번만큼 섬뜩하고 끔찍한 적이 없었다.
변종을 낳는 변종이라니.
‘빨리 사람들에게 전해야 돼.’
리나는 재빨리 침소에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어? 아가씨, 일찍 일어나셨네요?”
“요한 님께 가야 해요.”
“네?”
“빨리. 빨리요.”
베르다가 리나를 보며 되묻자 리나가 베르다를 재촉했다.
베르다는 금세 상황을 깨닫고 복지관으로 달려갔고, 리나의 부름에 요한을 포함한 수색조 사수들이 속속들이 상황실에 도착했다.
“꿈을 꿨다고?”
“네…….”
리나는 여전히 긴장감을 감추지 못한 채 자신의 꿈을 차근차근하게 설명했다. 그녀의 말이 이어질수록 생존자들의 안색에는 수심이 드리웠다.
“변종을 낳는 변종이라…….”
요한이 탁자를 툭툭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던진 열쇠 덕분에, 한 가지 의문점은 풀렸다.
변종은 좀비가 아니다.
이전까지의 가설은 변종이 좀비들이 시간이 지나 섭식을 거쳐 진화하거나, 혹은 좀비가 되는 과정에서 돌연변이 변종이 된다는 가설뿐이었다. 다만 한 번도 변종이 되는 과정을 목격한 적이 없기에 어디까지나 가설로 남아있었던 것.
지금 그녀의 설명은 완전히 그 가설을 뒤집는 것이었다.
변종과 좀비는 다른 개체다.
놈들이 외계에서 온 외계 생명체든, 판타지 소설에서 나올 법한 싱크홀에서 등장한 괴수든 간에, 인간이 변종으로 변한 것은 아니었다.
인간이 변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변종이 인간을 좀비로 만든다.
그렇다면 그 특유의 인간 같지 않은 신체조건이 이해가 된다.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저 변종이 전 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하면서 이 사태를 만들어 낸 것이다. 변종이 변종을 낳고, 변종들은 돌아다니며 인류를 좀비로 만든다.
“그리고 호흡기 감염.”
더 중요한 것은 그다음 이어진 상황이다. 좀비와 접촉하지도, 상처를 입지도 않았는데 감염이 되어버렸다. 완전히 또 다른 패턴의 감염 경로. 그저 그 좀비의 근처에 가는 것만으로도 감염되어버리는, 일종의 호흡기 감염.
“그게 무슨 미친…….”
“그럼 그냥 마주치면 다 죽는다는 소린가.”
“아니 무슨 입으로 새끼를 낳아, 무슨 피콜로야?”
충격적인 소식에 사람들이 한 마디씩 중얼거렸다.
만약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요한과 같은 면역체계를 가진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예 그 좀비와 전투조차 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변종이 나타난 순간, 몰살이다.
1회차 아포칼립스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수녀님.”
한참의 침묵을 깨고 재호가 리나를 불렀다.
“혹시, 그 뚱뚱이 변종 말인데요. 두부가 약간 뱀처럼 생겼었나요?”
“아! 네 맞아요.”
재호의 물음에 순간적으로 시선이 그를 향해 집중됐다. 요한이 황급히 되물었다.
“뭔가 아는 게 있어?”
“확실한 건 아닌데, 예전부터 좀 의심하던 게 있었어요. 오늘 얘기를 들으니 조금 더 확신에 가까워지네요.”
“더 자세히.”
“그게… 남미 서인도제도의 아이티라는 곳에 모두교라는 종교가 있어요.”
재호의 차분한 설명이 이어졌다.
모두교.
부두교의 한 갈래로. 우리나라로 따지면 부두교의 이단이다. 악마, 주물을 숭배하고 주술과 흑마술을 다루는 일종의 애니미즘 적 민간신앙.
부두교는 사이비나 흑마술처럼 왜곡되고는 있었으나 사실 도교나 유교처럼 지역 안에 널리 퍼진 민간신앙이자, 풍습에 가까웠다.
반면 모두교는 부두교의 오컬트적인 부분만 극단적으로 발달시켜 전래된 주술이었다.
리나의 꿈에 등장한 저 괴물은 모두교 유일신의 사자(使者)와 모습이 일치한다고.
“거의 알려지지도 연구되지도 않은 워낙 소수의 내용이라서요. 그 섬 자체도 식인 원주민들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 리스트에 오른 적도 있고, 민간인 출입금지로 지정된 지 수십 년이 지났어요.”
“그건 어떻게 알았는데?”
“이십오 년 전에 그 섬을 탐방한 박사가 집필한 논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관련 서적이 딱 한 권 남아있어요. 2011년에 세계의 소수 종교라는 키워드로 칼럼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정말 스쳐 지나가듯이 본 기억이 나요.”
요한의 머릿속이 꼬인 실타래처럼 복잡해졌다. 워낙 현실성이 없고 뜬구름 잡는 소리라 요한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방향의 접근이었다.
미신조차도 쉽게 믿지 않는 자신이다. 차라리 과학 쪽이 신뢰가 가지, 종교니. 오컬트니.
“일단은 참고해 두지. 배경은 신경 쓰지 마. 일어난 팩트만 보자고. 장소를 모르는 한,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없어. 우린 우리 생존만 신경 쓴다. 더 중요한 건 지금 영종도에 있는 군부대들을 처리하는 거야.”
“저, 요한 님. 그 부분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어요.”
해군의 침략이 있었던 이후, 요한 캠프의 가장 큰 화두는 인근의 군부대였다. 두 개의 공군 포대를 공격할까 말까에 대한 논의.
섬을 꿀꺽하려는 악랄한 심보를 가진 해군의 습격을 한 번 당하고 나니, 인근의 부대를 좌시할 수 없다는 의견이 나온 탓이었다.
찬반은 정확하게 절반으로 갈렸다.
고작 그런 이유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병사들을 습격할 수 없다는 주장.
그리고 아무런 관계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잠재적 위협요소라는 주장.
두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했고, 요한은 우선 상황을 보고 제거할 수 있는 타이밍에 제거하는 것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인류를 향한 적의를 멈춰 주세요.”
“누가 들으면 내가 인류를 멸종시키는 슈퍼 빌런이라도 되는 줄 알겠는데. 관련 논쟁은 지난주에 실컷 하지 않았어?”
“누군지도 모르는, 선한 사람일지도, 악한 사람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기습해서 전부 죽이겠다는 여러분의 생각은 잘못됐어요.”
“이봐, 아가씨. 같이 죽여달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발목이나 붙잡지 말라고. 우린 대장 형씨가 죽이자고 하면 죽일 뿐이야.”
스위퍼가 요한의 편을 들고 나섰으나 요한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그러고선 계속 말해보라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지난주 논의 때는 가만히 있더니, 굳이 지금 얘기하는 이유는?”
“오늘 꾼 꿈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인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류는 공통의 적과 싸워야 합니다. 어떤 미지의 힘이 인류를 멸종시키려 하고, 제 신은 그걸 막으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를 선택했다고 생각해요.”
요한이 인상을 찡그렸다. 너무나 추상적이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였다.
“요한 님은 그렇게 느끼신 적이 없으신가요? 마치 누군가가 작위적으로 인류를 멸종시키려 한다는 생각이 든 적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