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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턴 서바이벌-112화 (112/176)

<112화>

“활용하려고 합니다, 라니 저희의 의견은 왜 묻지도 않-”

순간적으로 울컥한 정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으나, 요한이 정환의 말을 막았다.

“계속 말씀하시죠.”

“뭐 갑작스럽게 나타났으니 불안하시기도 하시겠지만요. 가만 생각해보면 나쁘지 않은 상황일 겁니다. 저희의 군사력을 보세요. 얼마나 든든합니까. 안 그래요? 저희만 있다면 안전하고 평화로운 섬을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희가 안전하게 지켜드리겠습니다.”

“그 말은 저희에게 이 섬과 물자 및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가로 저희를 지켜주신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그렇지요! 역시 지도자라 그런지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습니다. 허허.”

제 뜻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했는지 대령이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요한은 마주 웃어 주며 대답했다.

물론, 섬 통째로 날로 먹겠다는 그들의 주둥이에 먹을거리를 순순히 넣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대령님.”

“예.”

“무엇으로부터 지켜주신다는 말씀이신지요?”

“아마추어같이 왜 이러십니까. 당연히 이 사태의 원흉. 좀비들이지요.”

“좀비들은 수영할 수 없습니다. 대령님. 이곳은 이미 좀비로부터 자유로운 곳인걸요. 저희의 적은 오로지 물자 부족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굶주림뿐입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요지는 그거다, 너희의 도움은 필요 없다. 너희는 우리에게 짐일 뿐이다.

여기저기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호의에는 감사드립니다. 진주하 대령님. 이 난리가 나기 전부터 당연히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나라를 위해 봉사하시는 국군 장병님들께 한 번쯤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장교들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마치 병 주고 약 주는 모양새.

요한은 그들이 끼어들 틈새도 없이 제 할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의 환대는 그 보답을 한다는 의미였지요. 하지만 이 섬은 현재 아슬아슬한 수준으로 자립이 가능한 상황입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상황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지요. 군사작전이 끝나는 대로 원래의 목적지로 향해주셨으면 합니다. 죄송하지만 그동안 수병들의 식량 문제도 저희가 해결해 드리기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보시다시피, 아직 추수가 시작되지도 않아서요.”

청산유수처럼 말이 쏟아져 나왔다. 대령은 한 마디도 끼어들 수 없었다.

“아까 들어보니까 해군에서부터 인류의 반격이 시작될 거라고 하시던데. 이런 외진 곳에서 안주하시면서 주민들에게 무거운 짐을 얹어 주시진 않을 거라 믿습니다. 역시 대령님 같은 훌륭한 군인이 계셔서 믿음직하고 든든하네요.”

놈은 명분도 실리도 모두 잃었다. 이 자리를 빌려 섬을 통째로 꿀꺽할 명분을 만들 속셈이었겠지만, 결국 이 자리에서 나온 말들이 제 발목을 붙잡은 셈이다.

슬쩍 눈을 돌려 보니 조원들이 하나같이 속 시원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절로 웃음이 샜다.

“아, 시간이 좀 늦은 것 같은데, 그만 일어날까요?”

요한이 제 할 말을 끝내고 일어서려 하자 대령이 황급히 두 손을 흔들었다.

“잠깐, 더 할 말이 있어요.”

“말씀하시죠.”

“딱히 저희가 도움 드린 것도 거의 없는데 이런 얘기 꺼내게 되어 대단히 계면쩍습니다만.”

거의 없는 게 아니라 아예 없지.

요한은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예비군법 시행령에 따르면 전시에는 모든 장병이 예비군에 편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군법에 따라 이 섬의 주민들을 부대의 예비군으로 편성하려 합니다.”

이게 뭔 개 짖는 소리람.

요한은 전에 없이 인상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갑자기요?”

“갑작스럽겠지만, 그게 군법이라서요.”

“공문이나 근거문서가 있습니까?”

“전시법에 나와 있습니다. 전시법 위반은 최대 즉결 처형까지도 될 수 있어요.”

어르는 것 같기도 협박하는 것 같기도 한 말투였다.

공권력을 행사하시겠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희가 편성된 예비군은 해군도 아니고 대령님의 부대도 아닙니다만. 군법에 타 예비군으로 소속된 장병들을 강제로 편입시키는 사례도 있습니까?”

“그건……. 비슷한 사례는 있을 수 있지요.”

“그렇습니까, 저는 처음 들어봅니다. 그럼 법 위반으로 재판에 부치시지요. 저는 변호사를 선임하겠습니다. 아까 즉결 처형이라고 하셨는데 아직 군 편성도 되지 않은 민간인을 군법을 들어 처형하지는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나라와 국민을 지킬 의무가 있는 해군 장교분께서 그 정도 자각은 있으시겠지요.”

“이익!-”

처음에는 조곤조곤한 토론으로 시작됐으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비아냥과 날 선 비판을 한다는 사실은 이 자리의 누구나 알고 있었다.

핏줄이 터져 나갈 듯한 표정으로 씩씩대는 대령의 표정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아마도 당장에라도 총을 빼 들고 제 머리통에 겨누고 싶은 걸 참고 있으리라.

하지만 군인이란, 체면과 명분을 중시하는 집단이다. 지금 상황에서 섣불리 움직일 만큼 멍청하지 않기도 하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섬을 꿀꺽하고자 하는 시도는 좋았으나, 이쪽도 호락호락하게 당할 생각은 없었다.

“오빠!”

그때, 세리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그, 스위퍼 오빠가… 해군이 스위퍼 오빠를 폭행했어.”

“…….”

요한은 귀를 의심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동시에 장교들의 표정이 샛노랗게 변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으아아! 나 죽네! 죽어! 군인 형씨가 사람 잡네!!”

멀리서부터 엄살 가득한 스위퍼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죽는다는 사람치고는 목청이 너무 크잖아.

세리를 따라 십여 명의 사람들이 도착한 곳은 무기탄약고였다. 중사 한 명이 동료들의 손에 붙잡혀 발버둥 치고 있었고, 스위퍼는 전력으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뺨을 부여잡고선 가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대령이 중사를 붙잡고 있는 수병들을 향해 묻자 한 수병이 끙끙대며 대답했다.

“하, 함장님. 그게…….”

“이 개자식, 또 말해 봐. 응? 또 말해보라고!”

중사는 눈에 뵈는 게 없는지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사람이 저 정도로 화가 난 걸까. 요한은 문득 궁금해졌다.

“이 중사!”

진 대령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발광을 멈췄다. 그러나 여전히 분이 안 풀리는지 진 대령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가만 보니, 약간 취한 것 같기도 했다.

“함장님! 저 자식이 저희 해군과 저희 함정을 무시했습니다. 건방진 작자입니다!”

치밀한 대령의 성격이라면 분명히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일렀을 텐데, 어째서 저렇게 감정적으로 행동한 거지.

요한은 궁금증을 참지 못해 스위퍼를 바라봤다. 스위퍼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있었다.

“왜 이러십니까, 해군 양반. 저는 그저 무기탄약고는 들어가실 수 없다고 한 것뿐인데.”

“뭐, 뭣!”

묘하게 비아냥거리는 듯한 뉘앙스.

‘이 새끼 이거.’

100%다.

‘설계했네.’

스위퍼가 저런 둔해 터진 인간의 뺨 후리기를 피하지 못할 리가 없을 테니까.

분명히 고의로 저 부사관을 도발했다. 뭐라고 도발했길래 다짜고짜 주먹질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명백하게 사고를 친 셈인데도 스위퍼는 조금도 요한의 눈치를 보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만 전전긍긍하고 있을 뿐.

‘영악한 녀석.’

스위퍼만이 제 생각을 읽고 있었던 거다.

명분.

요한이 명분을 찾고 있었다는 걸.

스위퍼는 요한이 안 중위의 캠프를 합류시킬 때의 태도를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군과 경에 대해 반(反)하는 데에 묘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 군 권력에 학습된 충성심, 학습된 두려움이다.

어쩌면 이런 와중에서도 정부가 재설립되고 인류가 문명을 되찾았을 때 찾아올 불이익을 걱정하는 것일 수도 있다.

결국, 정당한 명분 없이 그냥 군인들을 공격하는 건 위험부담이 크다. 폭력배들, 무뢰배들과 싸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정부에 반기를 들다니, 우리가 폭력조직이 되어 버린 게 아닐까’ 하는 마음들. 의구심은 균열을 낳고 균열은 균형을 깨트린다.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건 같이 목숨을 걸고 싸운 전투 조원들에게나 바랄 수 있는 부분이지 모든 생존자에게는 강요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특히나 새로 합류한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들의 마음속으로부터 ‘이거 너무 한 것 아니야?’라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게 먼저였다.

명분을 뺏어와야 한다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정환이나 세리의 행동은 마이너스. 스위퍼의 행동은 플러스다.

요한은 스위퍼가 만들어준 하나의 명분을 그냥 지나칠 생각이 없었다. 곤란한 표정 연기를 하며 대령을 향해 말을 걸었다.

“대령님.”

“저, 이건…….”

“조금 전까지 저희를 지켜주신다고 말씀하시던 게 조금은 무색해지는군요. 부하들에 대한 관리를 부탁드립니다. 대령님.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셔도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조금.”

이쯤에서 다시 한번 눈을 마주쳐주고.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대령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동안 자신의 통제에 잘 따라주던 부대원들이다. 이런 돌발상황이 생긴 게 낯설겠지.

“전후 사정을 먼저 파악하고. 다시 한번…….”

“무슨 잘잘못이요? 뺨을 맞은 저희 주민이 잘못하기라도 했다는 뜻입니까?”

“그게 아니요.”

다급한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금도 이럴진대, 만약 저희의 안전을 지켜준답시고 통제를 시작하면 과연 어떻게 될지 의문스럽습니다. 또 압니까, 저희를 마치 노예 부리듯 부리실지.”

“거, 말씀이 심하지 않습니까!”

다른 장교 한 명이 끼어들었다. 마치 폭발 직전의 탄약고처럼 일촉즉발의 긴장감이었다.

요한은 더 몰아붙였다. 아직은 명분이 약하다. 마음 같아서는 눈깔이라도 돌아가 총이라도 꺼내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역시 능구렁이 같은 지휘관은 그저 허허 웃으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이번으로는 부족하겠군.’

요한은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시간은 많고 사건은 터지게 되어 있다.

당장 그들을 살해하는 것은 주민들에게도 충격적인 일이겠지만, 이와는 별개로 적개심이라는 이름의 감정은 점점 끓어오를 테니까. 요한은 확신했다. 분명히 무언가 터진다. 보다 확실한 무언가가.

“다들 오늘 수고 많았어. 정리하고 들어가 쉬어. 스위퍼도. 오늘 무기탄약고 근무는 내가 직접 볼 테니까. 해군 여러분께서는 최대한 빨리 떠나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물론 곱게 보내줄 생각은 없지만.

요한은 홱 돌아서서 조원들을 향해 해산을 지시하고선 탄약고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 * *

“놈들의 움직임은?”

“특별한 건 없어. 조금 짜증 나긴 하지만.”

세리는 여전히 툴툴거렸다.

“그냥 확 다 쓸어버렸으면 좋겠어.”

스위퍼 폭행(?) 사건이 있었던 다음날부터 해군과 신도 주민들 사이엔 묘한 신경전이 생겨났다. 아무래도 동료를 폭행했다는 사실이 그들을 향한 거부감에 기름을 부었다.

스위퍼가 누군가에게 폭행당하고 있을 실력이 아니라는 건, 이미 그들의 안중에는 없는 듯했다.

해군은 잠잠했다. 아무래도 내부적인 징계와 회의가 이어지는 듯. 장교와 부사관들은 정해진 해안가에서 자리 잡은 채 농성하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 대신 병사들의 움직임이 심상찮았다.

그렇게 불편한 동거 사흘째. 결국, 사건이 터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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