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서바이벌-111화 (111/176)

<111화>

* * *

다행인지 불행인지 해군들은 한동안 잠잠했다. 그들은 부둣가에 자리를 잡고 함정 정비를 시작했다.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분주해 보였다. 이쪽을 경계하는 건지 이쪽과 거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거리를 두는 건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목적이 이곳의 물자나 사람이 아닌 상륙 그 자체였다면 굳이 척을 질 필요는 없었기 때문. 물론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한시도 눈을 뗄 수는 없었다.

요한은 쌍안경으로 해군의 임시 진지를 보며 생각했다. 진 대령이 우리 쪽 논밭을 보며 옆 장교와 떠들고 있었다. 아마도 이곳의 상황이 상당히 긍정적이라는 걸 깨달은 듯했다.

“오빠, 지혜가 언제까지 숨어 있어야 하냐는데?”

세리의 질문에 요한이 고민했다.

그들이 상륙한 지 한나절이 지나갔다. 언제까지 비전투요원들을 숨겨둘 수 없었던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원상 복귀하라고 해. 군인들이랑 접촉은 최대한 피하고.”

“응, 알겠어.”

“한동안은 전투 인원들이랑 비전투 인원들이랑 묶어서 다니라고 해.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응 그것도 전달할게.”

세리는 똑 부러지게 대답하고는 바이크 시동을 당겼다.

문제는 저녁 식사 시간이 되면서부터 시작됐다.

복지관 1층, 식당으로 해군 장교들이 찾아온 것이다.

“여기는 무슨 일로…….”

식사를 하던 생존자들의 시선이 장교들을 향해 날아가 꽂혔다.

“병사들에게 식량을 좀 공급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대답을 한 건 중사였다. 육군으로 따지면 소대장 정도 되는 계급이었다.

“식량이라 하시면…?”

“말 그대로입니다. 보니까 식량도 넉넉하신 듯한데 협조 부탁드립니다.”

“인원이 몇 명이나 되지요?”

“총 여든세 명입니다.”

악 소리가 절로 나오는 인원이다. 장정 여든세 명을 먹이려면 지금 비축해놓은 물자들로는 한 달도 버티기 힘들 터다. 게다가 후일을 대비해서 전투식량이나 통조림은 건드리지도 않고 있다. 향후 5~7년을 책임져 줄 비상식량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날그날 생산되는 식량들로는 90여 명의 추가 인원들을 먹일 수 없다. 기존 인원들로도 최대한 아껴 먹고 있었으니까.

요한이 머뭇거리자 중사가 닦달하듯 보챘다. 그사이 들어온 수병 한 명이 중사를 향해 거수경례하고는 물었다.

“갑판 선임하사님, 작전관님께서 식사 준비는 언제 되시냐고. 여쭈십니다. 함장님께서 기다리십니다.”

“한 삼십 분 후에 오시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다시 중사는 요한 쪽을 바라봤다.

“장교분들 총 네 명의 테이블은 따로 준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공간이 협소하니 다 드신 분들은 빨리 일어나 주시면 좋겠고요. 그럼 협조 부탁드립니다.”

요한을 포함한 몇몇 생존자들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근데 이 새끼가 지금… 어디다 대고 명령질이야?

* * *

“오빠답지 않은 결정인데. 다들 걱정하고 있어.”

시끌벅적하게 식당을 차지하고서 피 같은 식량을 축내는 군인들을 보며 세리가 구시렁거렸다.

선 자리에서 인상을 팍 쓰기는 했지만, 결국 요한은 80여 명의 군인에게 음식을 제공하기로 했다. 그도 모자라 그들의 요청대로 네 명의 장교에게는 특별상까지 차렸다.

“오빠 나름대로 다 생각이 있겠지만… 이건 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모은 건데.”

요한의 행동과 결정을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의 성향을 생각하면 저런 갑질을 시도한 순간부터 그들을 적과 위협으로 인식하고 그들을 처리할 수도 있었다.

응당, 그의 성향을 보면 그리해야 했다.

그러나 요한은 대응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이상함을 느꼈다.

‘왜 저런 갑질을 놔두는 거지.’

라는 생각은 곧,

‘군인들이 전력상 우위에 있다.’

라는 판단을 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요한은 지는 싸움을 한 적이 없으니까.

누구도 요한의 생각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추측할 뿐.

요한은 상황실에 틀어박혔다. 누구보다 그를 가까이서 지켜보던 세리는 그의 기분이 상당히 바닥을 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냥 뒤집어엎으면 되잖아,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를 즈음, 상황실에 불청객이 들이닥쳤다.

네 명의 해군 장교였다.

“여기는 무슨 작전 통제실 같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함장님. 허허.”

장교들은 방송 장비와 라디오 장비, 각종 지도와 전술판 등이 있는 상황실을 보며 허허로운 웃음을 흘렸다.

“여기가 요한 씨 사무실인가 봅니다?”

대령의 질문에 요한이 돌아앉았다.

“상황실입니다.”

“호오.”

“누가 들으면 마치 군사작전이라도 하는 줄 알겠어요.”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세리의 인상이 다시 한번 와락 구겨졌다.

“보급창고에 무기와 탄약까지 갖고 있고… 이런 장비들이라니. 민간인들이 소유하기엔 너무 위험한 상황들 아닙니까?”

대령의 질문은 요한에게 향했으나, 그 답변은 옆에 있던 장교들이 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희 대한민국 군인들의 관리와 도움이 필요해 보입니다.”

요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긍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도대체 해군이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세리의 말은 요한의 손짓에 가로막혔다. 장교들이 큼큼, 헛기침했다.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의도인지 대령이 화제를 돌렸다.

“1층에 보니 담금주가 있던데.”

섬에 처음 정착한 날, 무사를 기념하며 담은 술이었다. 대령이 탐욕스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앞으로 민군 협업체계를 위해 여러 가지 논의를 하면 좋을 듯한데. 간단한 술자리를 만드는 건 어떻겠소?”

술상이나 차려라, 라는 의미겠지.

요한은 터지는 실소를 애써 억누르며 대령의 눈을 빤하게 바라봤다. 그러고선 보일 듯 말 듯 숨을 내쉬었다.

“세리야. 지혜에게 부탁해서 식당에 술이랑 안줏거리 좀 준비해줘. 그리고 사수급 수색 조원들 모이라고 해. 아, 재호랑 리나도.”

“…….”

세리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요한을 노려보다 휙 나가버렸다. 태도는 저래도 확실하게 할 일은 할 터다. 제 지시를 무시한 적은 없었으니까.

“거참, 고분고분한 맛이 없는 여자로군요. 여자는 모름지기 조신하고…….”

“내려가시죠.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요한은 네 꼰대가 지껄이는 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 그들의 말을 끊어버렸다.

자신의 말이 끊겼다고 생각한 장교 하나가 인상을 찌푸렸으나, 그들도 개미 눈곱만한 양심에 찔리는 무언가는 있는지 길게 토를 달지는 않았다.

요한은 묵묵히 장교들이 자리 잡은 술상에 앉아 있었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스위퍼와 옹 상병을 제외한 모든 사수가 한자리에 모였다.

“스위퍼랑 옹이는?”

하진이 묻자 세리가 대신 대답했다.

“두 사람은 오빠가 시킨 일이 있다고 자기는 빼 달래.”

스위퍼는 무기탄약고를 지켜야 했고 옹 상병은 은신 중이다. 우선 군인이라는 신분을 들켜서 좋을 게 없었고, 가장 중요한 순간에 여차하면 함정을 점령할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으니까.

생각보다 술자리의 규모가 커졌다. 이쪽에서 7명이 모이자 선임하사들 세 명을 추가로 부른 것이다.

놈들은 이 자리가 무슨 기선제압이라도 하는 자리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 섬이 거의 서해 라인의 마지막 섬이지요?”

“그렇지. 위로 백령도 라인을 제외하면 웬만한 섬은 전부 탈환했다고 봐야지.”

“이것 참, 임진년에도 조선 수군이 반격의 시발점이 되었는데, 이번에도 우리 대한민국 해군으로부터 인류의 역전이 시작되는 건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하하.”

“그렇게 되게 만들어야지. 그게 국군의 의무 아니겠나.”

이야기는 지지부진했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이 시대의 마지막 희망이라도 되는 양 떠들어댔다.

군대가 거의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시점에서 특유의 지도력으로 대부분 승조원을 살려냈으니 그들의 자부심이 높은 것도 이해는 됐다.

개인적으로도 훌륭하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훌륭할 정도로 두꺼운 상판대기라고.

“…….”

표정 관리들 해라.

요한은 한껏 입이 튀어나온 조원들을 보며 피식 웃으며 의도를 전했다.

하진이나 혁이야 워낙 고지식한 고집덩어리였고 정환과 세리는 이 상황이 영 마뜩잖은 데다가, 리나나 요한은 원래 말이 많은 타입이 아니었기에 대부분 대화는 해군 지휘부에서만 이루어졌다. 마치 주객이 전도된 모습이었다.

그나마 이런 자리에 익숙한 재호가 그들의 말을 종종 받아주는 정도였다.

그 때문에 해군의 질문은 재호에게 집중됐다. 물론 그도 캠프에서 먹은 짬밥이 있었기에 캠프 내 정보에 대해서는 능구렁이처럼 웃으며 넘어갈 뿐이었다.

“아무튼, 여기 사람들은 다들 과묵하군요. 최 기자가 아니었으면 무슨 문전박대라도 시키는 줄 알겠어. 응? 불청객이라도 맞는 줄 알았다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대한민국 해군인데요.”

요한이 옆자리에 앉은 정환을 툭 쳤다. 세리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는지, 한껏 벌레 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표정 좀 풀으라니까.’

안 그래 보였는데 제법 성깔 있다니까. 워낙 괄괄한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세리 씨라고 하셨죠. 캬, 이것 참 이런 섬 촌구석에 이런 미인이 있다니. 놀랍습니다. 술 한잔 따라 주시지요. 자고로 미인이 따라주는 술맛이 또 일품 아니겠습니까.”

한 장교가 능구렁이처럼 웃으며 세리를 향해 잔을 내밀었다. 위아래로 훑어보는 듯한 시선이 마치 벌레가 기어가듯 불쾌했다.

세리는 인상을 찡그리는 대신 해사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제가 술 따르는 여자로 보이시나 봐요, 군인 아저씨. 옹이구멍에 총알이라도 한 발 박아드릴까요?”

“……뭐, 뭐요?”

‘맙소사.’

식당 안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한 분위기.

요한이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그러나 금세 웃으며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접는 세리였다.

“농담이에요. 한 잔 받으세요.”

“이것 참 놀랐… 습니다.”

장난을 가장한 고품격의 찬물 뿌리기였다. 일순 간담이 서늘해지기는 했지만, 확실히 사이다 한잔을 마신 것처럼 청량한 느낌이 드는 건 별수 없었다.

아 이거, 종종 써먹어야겠는데.

한차례 사람들의 가슴을 철렁이게 만든 뒤, 세리는 속이 안 좋다는 핑계로 자리를 비웠다.

늙은 꼰대들은 고루했고 이야기는 지지부진했다.

한참을 취기가 오르자 대령이 본론을 꺼냈다.

“솔직히 놀랐습니다.”

요한이 살짝 고개를 들어 그에게 눈을 맞췄다. 그가 말을 이어나갔다.

“저희가 많은 섬을 돌아다녔지만 말이에요. 이 정도로 깔끔하게 좀비를 정리한 데다가 정비를 마쳐서 미래까지 대비하고 있는 지역은 처음이다, 이 말입니다.”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말인데.”

뜸을 잔뜩 들이는 게 영 불안하다.

“이곳을 저희의 병참기지로 활용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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