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산에서 발견한 이상한 발자국들 기억나지? 섬을 샅샅이 뒤졌지만 비슷한 발자국을 가진 짐승은 없었어. 아마도.”
요한은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어나갔다.
“섬과 대륙을 오갈 수 있는 변종이 있는 모양이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났다.
“긴장 풀지 말고, 방심하지 말고, 경계 똑바로 해. 무전기 항상 소지하고.”
요한은 일반 좀비들에 대한 부분은 차치했다. 그가 아는 상식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다.
좀비들이 하늘에서 떨어질 리도 없고, 바다에서 솟아날 리도 없고, 떠내려오는 건 종종 있는 일이라 쳐도 그만한 수의 좀비가 동시다발적으로 떠내려온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무언가 더 힌트가 필요한데.
“일단 추수, 그리고 변종에 대한 대비를 중심으로 이번 겨울을 넘긴다.”
목표는 언제나 단순하고 명료했다.
생존.
생존만이 오롯하게 그들의 목표가 될 수 있다.
* * *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하더라도 모든 상황에는 변수가 존재하고, 찾아오기 마련이라지만… 이건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변수였다.
캠프 요한의 수색 조원들은 바닷가에서 들려오는 뱃소리에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군인들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다짐. 그 다짐은 불청객처럼 등장한 뱃소리와 함께 딱 사흘 만에 산산 조각났다.
연안부두에서부터 해군 군함이 모습을 드러낸 것.
8개월 동안 해상에서 살아남은 해군 군함이 정확하게 이곳, 신도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제법 규모가 큰 군함이다. 최소 백여 명은 타고 있을 법한.
주갑판 위에 달린 살벌한 공용화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용은 위풍당당했고 마치 전투 클래스 자체가 다름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천천히, 그러나 또렷하게 접근하고 있었다.
역시나 아포칼립스 시대에서 가장 껄끄러운 집단은 군대였다.
‘부딪히는 수밖에 없나.’
도망갈 곳도 숨을 곳도 없었다.
요한은 상륙을 준비하는 함정을 맞을 준비를 함과 동시에 혹시 모를 교전에 대비했다.
“막내야.”
“예.”
“지금 상황실 가서 비전투요원들 전부 대피소로 들어가라고 전달해.”
“네!”
“옹 상병은 일단 자리 잡고 존버해라.”
“예. 알겠습니다.”
“정수, 지원이는 무기탄약고 들어가서 지켜. 총성이 나면 접근하는 군인들 모두 죽여도 좋아.”
“예. 형.”
또다시 군인들과 부딪혀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걱정스러운지 혁이 주인 잃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었다.
“형…….”
“그렇게 쳐다보지 마. 나도 싸울 일이 없었으면 좋겠으니까.”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항상 틀린 적이 없었다.
인간은, 특히 군인이라는 인종은 참으로 독하고 끈질기기도 하다.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보급이 끊긴 마당에도 아직까지도 살아남아 체계가 유지되고 있는 걸 보면.
지금까지 살아 있는 부대라면 소대 단위로 움직이는 특수한 경우거나 좀비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환경이었을 거다.
그도 아니면 최소한 지휘관부터 병사들까지 세트로 유능해서 좀비 웨이브를 최소 한두 번 이상 막아낸 부대일 거다.
그런 부대들이 아직도 심심찮게 남아 있다는 건 요한으로서는 다행인 게 아니라 오히려 불행한 일이었다. 지휘체계를 잃어버린 무력집단.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았으니까.
요한은 잔잔하게 침잠한 표정으로 상륙을 준비하는 함정을 바라봤다.
“인천급 호위함이네요. 60명에서 최대 120명의 승조원을 태울 수 있는 군함이죠. 주로 연안, 대양에서 편대 방식으로 함대 해상작전을 하는 군함인데… 덜렁 호위함만 따로 움직인다는 게 좀 이상하네요. 특히 해군기지도 아니고 굳이 이쪽으로 올 이유가 없을 텐데.”
“뭐,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아무래도 해군도 육상 기지들은 전부 초토화가 됐을 테니까요. 조금 머리가 있는 지휘부라면 해군기지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섬들을 돌면서 물자를 보급하는 게 안전하다는 걸 깨달은 거겠죠?”
“그렇다면 상당히 유능한 지휘관이겠군.”
“네. 그렇지 않고서는 군함이 이쪽으로 올 일은 거의 없을 테니까요.”
해군의 체계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지만, 옆에서 조잘거리는 재호 덕분에 대략적인 함정의 정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혹시 있을지도 모를 전투 시나리오를 그리고 있었다. 최대 백여 명의 군인이라면 사실상 승산은 희박했다. 게다가 저런 무식한 공용화기라면 상륙을 막는 것 또한 불가능에 가깝다.
상황이 좋지만은 않았다. 현 상황에서 군인들이 나타나 구조해주리라는 기대를 하는 것은 쓸데없는 희망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군 체계는 무너진 지 오래다. 아래서부터가 아닌 위에서부터 무너진 체계.
저들은 그저 막강한 무력을 지닌, 중앙 집권형의 무력집단에 불과하다. 선의를 가진 지원군인지 악의를 가진 폭력집단인지는 지켜봐야 알겠지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대부분의 캠프 인원들도 낯빛이 제법 어둡다.
“표정들 풀어. 혹시라도 적대적으로 보이려 하지 말고.”
“형씨, 어쩌게?”
“일단 상황을 좀 더 지켜본다. 웬만하면 무력 충돌은 피하는 게 좋겠지.”
정말 최악의 상황에서 이곳을 버려야 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중요한 건 사람을 잃지 않는 거였다. 물론 추수를 앞둔 마당에서 이런 변수가 달갑지만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배가 아파 얼얼한 통증이 일 지경이다.
땅! 땅땅!
어느새 해안에 함정이 닿고, 쩌렁쩌렁하게 함 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땅땅땅!
시끄러운 타종 소리에 사람들이 귀를 틀어막았다.
-총 상륙 15분 전! 20분 후 함장 진주하 하함!
함정에서 함장의 상륙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아직까지도 저런 의전이 지켜지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저 함정의 지휘부가 해상군기를 중요시하는 고지식한 사람들이라는 것 정도였다.
이런 와중에도 수병들의 군 생활이 빡빡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우스웠다.
수병들이 줄줄이 상륙해 오와 열을 맞춰 대열을 맞춰 섰다. 그리고 정확히 방송으로부터 20분 후, 장교 복장을 한 사내가 함정에서 내렸다.
“우리도 가자.”
요한은 사람들과 함께 해군 부대가 상륙한 해안으로 걸어갔다. 어차피 맞아야 할 매다.
그들을 발견한 장교들이 그들의 지휘관, 진주하 대령에게 속닥거렸다.
불편한 만남, 기묘한 대치가 시작됐다.
영관 해군 함장 진주하 대령.
아마도 지금 시대에 얼마 남지 않은 함장급 장교이리라. 육군으로 따지면 대대장급의 직책이었다. 요한으로서는 회귀 이후 처음 만나는 제대로 된 지휘관.
가장 높았던 직책이 고작해야 중대장급인 안준영 중위였으니.
요한이 가장 먼저 확인한 건 무장상태였다. 살벌하게 무장한 함정과는 달리 수병들의 개인화기 무장상태는 생각보다는 부실했다.
허리춤에 권총을 하나씩 차고 있는 장교들과 달리 경계병과 해상헌병으로 보이는 수병들만 K-2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대부분 병사는 사실상 비무장 상태였다.
요한이 진 대령을 향해 인사하듯 고개를 숙이고서는 힐끗 주갑판 위로 시선을 던졌다.
아직 모든 병사가 내리지 않았다. 괜한 저항을 했다가. 여차하면 갑판 위에서 공용화기의 화력이 육지 위를 타격할 수 있었다.
요한 일행을 발견한 진 대령이 마치 상품을 훑듯이 빠른 시선으로 아래위로 사람들을 훑어봤다.
얕은 긴장감이 흘렀다. 가장 중요한 건 그의 첫 마디다. 첫 마디를 어떻게 던지느냐에 따라 그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그냥 편하게 관등성명을 대고 인사하는 정도만 되어도. 상식이 통하는 사람이리다.
부디 그 정도만 돼도.
“흐음…….”
마침내 대령이 입을 열었다.
“민간인들이 어째서 총기 무장을 하고 있는 거지?”
지랄 맞은 상황이군.
전형적인 보수 꼴통 지휘관이었다.
요한은 보이지 않게 입술 안쪽을 깨물며 최대한 환한 표정을 지었다.
“안녕하십니까. 신도 생존자 대표 이요한이라고 합니다.”
“백령함 함장 진주하 대령이오. 연안 특수작전을 진행 중에 변수가 생겨 불가피하게 상륙하게 되었소.”
“네. 진주하 대령님.”
“다시 묻지요. 어째서 민간인들이 총기를 소지하고 있는 거지요?”
그걸 몰라서 묻냐 이 빡대가리야.
속내와 달리 요한의 가면은 완벽했다. 오히려 요한은 공을 능숙하게 대령에게 넘겨버렸다.
“대령님께서는 혹시 현 시국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지요?”
안다고 대답하면 아는 사람이 그딴 질문을 하느냐는 대답이 돌아갈 테고, 모른다고 대답하면 장교가 그런 것도 모르냐는 질문이 들어갈 수 있는 반문.
요한의 속뜻을 알았는지 진 대령의 표정이 다소 경직됐다.
“무장해제를 요청하는 바이요. 국군 소속 화기들은 저희가 이관받겠소.”
“무장은 해제하겠습니다. 대령님. 하지만 무기 이관은 불가합니다.”
의구심 가득했던 표정은 이내 완전한 불쾌감으로 변질했다.
슬그머니 허리춤의 권총집에 손을 가져다 대는 장교들도 있었고, 양 진영 사이로 뭔가 불편한 기류가 흘렀다.
진 대령이 진정들 하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요한은 그가 뭐라 말을 꺼내기 전에 선수를 쳤다.
“알고 계시다시피 대한민국 군경은 그 힘을 상실했고, 대한민국 국민을 지켜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희는 저희의 힘으로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살아가야 하지요. 이 섬을 떠나셔야 하는 해군 여러분께 저희를 지킬 수 있는 생명줄을 넘길 수는 없습니다.”
무기는 넘길 수 없다. 그리고 너희는 빨리 나가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담은 말이었다.
역시 지금까지 함대원들을 생존시킨 지휘관인 만큼, 요한의 속뜻을 금세 파악하고선 표정 관리를 했다. 나름대로 관리한다고는 하는데, 붉으락푸르락 한 얼굴로 억지로 얼굴 근육을 씰룩거리는 게 가관이었다.
‘건들면 문다.’
요한의 기세에서는 그런 아우라가 풍기고 있었으니까. 강압적으로 나와 무기를 빼앗으면 결사 항전이라도 각오하겠다는 태도. 진 대령은 한발 물러섰다.
올바른 판단이다. 그저 한 번 지켜보겠다는 심산일지는 몰라도.
“실례지만 이 섬에 상륙하신 이유를 여쭈어도 될까요.”
“군사기밀을 아무렇지 않게 물어보시는군.”
대령은 짐짓 불쾌한 티를 내고선 홱 등을 돌린 채로 부사관들을 향해 이것저것 명령하기 시작했다. 지휘명령 체계가 잘 잡힌 걸 보아 확실히 통솔력은 있는 자였다.
‘식량이 떨어졌군.’
하지만 상륙 의도쯤은 수병들의 안색만 봐도 알 수 있는 문제였다. 어떻게 버텨왔는지는 몰라도 제법 오래 버텼다만은, 식량이든 식수든 연료든 뭐든 간에 한계점에 도달했으리라.
“아무튼, 작전이 끝날 때까지 이곳을 군사기지로 활용할 예정이니 협조 부탁드리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무기나 물자를 빼앗거나 폭력을 행사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스위퍼.”
요한의 부름에 스위퍼가 다가왔다. 요한이 목소리를 낮추고 그에게 귓속말했다.
“애들 소총은 다 무장해제 시키고 옷 안쪽에 단총으로만 무장시켜. 무기탄약고랑 보급창고 경계 강화하고. 한동안은 네가 직접 지켜.”
“불가피한 상황에는?”
“응전해.”
“라져.”
조용히 머물다 가는 건 건드리지 않겠다. 하지만 건드리면 문다. 살점 하나 남지 않을 만큼 갈기갈기 물어뜯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