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사실 지금이라도 죽일 수 있으니까.”
소희는 두 눈을 끔뻑거리더니 이내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예상외의 반응이었다.
“저건 완전히 반칙이군.”
스위퍼가 중얼거렸다. 저런 어린아이의 얼굴로 울고 있으면, 확실히 반칙이기는 하지.
“상대가 요한만 아니었으면 말이지.”
하진이 덧붙였다.
그의 말대로 요한은 ‘울면 어쩔 건데?’ 또는 ‘뭘 잘했다고 울어?’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도와줘.”
마침내 그가 원했던 대답이 튀어나올 때까지.
요한은 저벅저벅 걸어가 그녀의 얼굴에 그의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댔다.
“지금처럼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약속할 수 있어?”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죽일 수 있겠어?”
“죽여본 적, 있어.”
그렇겠지. 이 시대에 한 명의 사람도 죽여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니까.
“내가 원하는 건 어린아이인 척하고 방심한 사람들을 향해 일격에 목을 찔러넣는 거야.”
“너, 너네. 그렇게 무서운 사람들이었어?”
옆에서 스위퍼가 어흥, 하는 모션을 취해 보였다. 세리가 옆에서 그를 툭 쳤다.
“할 수 있어, 없어. 묻는 말에 대답해. 꼬마야.”
“꼬마 아니라니까.”
“대답.”
“할 수 있어. 나도 하나만 물을게.”
“뭔데?”
“너흰 착한 놈들이야, 나쁜 놈들이야?”
스무 살 어린이다운 귀여운 질문이었다. 물론 답도 정해져 있다.
“착한 놈도 나쁜 놈도 아니야.”
“……?”
“살고 싶은 놈들이지. 걱정하지 마라, 꼬마야. 우린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물지 않으니까. 물론 먼저 공격하면 살점 하나 남지 않을 때까지 물어뜯는 사람들이지.”
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합류가 얼마나 전력이 될지는 모르지만, 빈손으로 복귀해야 하는 이번 원정에서 유일한 수확이라고 치면, 나쁘지 않은 합류였다.
요한은 돌아서서 씩 웃었다.
마치 쓸 만한 카드를 한 장 손에 넣었다는 듯한 만족감.
주변 사람들이 질린다는 표정을 짓는 건 미처 보지 못했던 요한이었다.
* * *
요한은 소희의 합류가 결정되자마자 그녀에게 활을 쏴 보도록 지시했다. 이미 어느 정도 실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가 어느 수준인지 파악하는 건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다.
요한 일행은 그녀가 사냥을 준비하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그녀는 여러 가닥을 매듭지어놓은 실을 화살의 끝부분에 묶었다. 얼마나 많은 실을 묶어놓았는지, 조금만 잘못하면 실이 완전히 엉켜버릴 만한 길이였다.
아마도 화살을 안전하게 회수하기 위한 장치이리라.
그런 다음 화살이 엉키지 않게 U자 모양으로 베란다 밖으로 넘긴 후 목표물을 겨냥. 화살은 순식간에 날아가 좀비의 머리에 처박혔다.
사냥이 끝난 후에는 실이 끊어지지 않게 살살 움직여 화살을 회수하는 모습까지. 겨냥부터 발사까지의 시간이 짧고 발사된 화살의 회수까지 깔끔했다. 제법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다.
“됐어?”
“훌륭하네.”
“집어치워, 입에 발린 칭찬.”
요한의 가감 없는 감탄에 꼬마가 다시금 투덜거렸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기쁜 기색이 엿보였다. 요한은 이곳을 떠나기 전에, 한 가지만 더 묻기로 했다.
“어쩌다가 낙오됐지?”
“낙오라니…….”
“다른 사람들은 전부 대피소로 들어갔을 텐데, 왜 혼자 여기 남아 있었느냐고.”
“기다릴 사람이 있었어.”
있었어. 과거형이다.
소녀가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이곳을 벗어났다가 오빠가 나를 찾지 못할까 봐. 영영 못 만나게 될까 봐 이곳에서 기다렸던 거야.”
“오빠는 어디에 있는데?”
“……군대에.”
안타까운 일이었다. 설령 그녀의 오빠가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국가비상사태의 군인은 탈영하지 않는 한 국가의 구속을 피할 수 없는 몸이었으니까.
활 무기에 동안에 군인이라. 과거의 인연 중 한 명이 떠오르는 요한이었다. 녀석은 잘 있으려나.
“어느 부대?”
“강원도 춘천.”
“춘천에 부대가 얼마나 많은데. 춘천 어디?”
“자세히는 몰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스위퍼가 쩔쩔매는 요한을 보며 재밌는 걸 다 보겠다는 듯 깔깔 웃었다.
“근처에 다른 생존자들이 있던데, 만난 적 있어?”
“만나진 않았지만 본 적은 있어.”
동시에 조원들이 표정들이 싹 굳었다.
“좀 더 자세히.”
“이쪽으로 차 소리가 들렸었어. 머리를 내밀어 보니까 군인들 차가 지나갔어. 자세한 건 몰라. 이쪽으로 오지 않았으니까. 참 그리고 총소리가 들렸어. 되게 오랫동안.”
“좀비들과 전투가 있었나?”
“아닐 거야. 소리의 방향이 달랐거든.”
소희의 아리송한 말에 조원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말을 어렴풋이라도 이해한 것은 요한과 재호, 그리고 스위퍼뿐이었다.
“아, 그럼 세력 간 전투가 있었던 모양이네요. 군인들끼리 싸운 모양이에요.”
재호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덧붙이자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하기 좋아하는 재호가 설명을 덧붙였다.
“잘 보세요. 군인들이 좀비들이랑 싸운 거면 주로 한 곳에서만 총성이 들리겠지요. 근데 소리의 방향이 달랐다는 것은 양쪽에서 총성이 들렸다는 의미예요. 즉, 총기를 가진 두 그룹이 전투를 한 겁니다. 설마 총 든 군인들을 민간인들이 공격했을 리는 만무하니… 어쩌면 군인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났을지도 모르겠네요.”
“영종도에는 포대가 두 개 있지. 두 포대가 가깝지만, 포대 간 사이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야. 일리 있는 가설이지.”
한 부대 내에서도 세력다툼은 심심찮게 일어났다. 다른 부대가 한 지역에 들어서 있다면 갈등이 일어날 확률은 비약적으로 올라간다.
예상 가능한 원인은 물자. 영종도 내의 물자가 워낙 제한적이다 보니 물자 쟁탈 과정에서 심심찮게 충돌이 있었으리라.
“어떻게 할까?”
“일단 돌아가자.”
두 개로 찢어진 세력에 괜히 공통의 적을 만들어줄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되도록 군부대와의 접촉은 피할 수 있는 게 좋다.
* * *
요한은 복귀하자마자 신도의 중요 관리자들을 복지회관으로 불러모았다. 수색조 사수들, 그리고 각 생산라인의 헤드들이 그 대상이었다. 서준, 박 노인과 김 씨가 줄이어 들어오며 요한에게 인사를 건넸다.
“요한, 일찍 복귀했네.”
“예. 특이사항은 있었습니까?”
“기존 거주민들이 꽤나 살림을 알뜰살뜰하게 유지했던 편이라… 사실상 추수 기간만 지나면 겨울이 와도 끄떡없어 보여.”
“다행인 소식이네요. 박 노인께서는?”
“문제없네. 사람들도 열심히 해주고 있고.”
“든든합니다. 아저씨는요?”
“HAM 무전 설비 설치가 끝났어. 상황실에 가서 확인해 봐.”
“아, 드디어 끝났군요.”
기다렸던 소식 중 하나였다. 기존에 사용하던 휴대용 무전기나 군용 무전기로는 부평구청까지 무전 거리가 닿지 않았었다.
그래서 출발 전에 용병단 노인과 모종의 채널과 암호를 주고받았었다. 이제 슬슬 무전을 해 봐야 했다. 자리 잡으면 연락 주겠다던 사람이 한 달이나 감감무소식이니 노인이 성질을 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혁아 설명해.”
인근 섬에 있다는 생존자들의 정체. 그게 지금으로서는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요한이 혁을 바라보자 혁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직접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좋아. 안내해.”
혁은 삼형제섬 중 모도의 당산 정상으로 안내했다. 해발고도 100m 미만의 작은 봉우리였지만 워낙 탁 트인 만큼 주변 경치가 훤히 보이는 장소였다.
혁의 손가락이 서쪽 모도 옆에 자리 잡은 장봉도 해안가를 가리켰다.
“지금은 약간 시야가 어두워서 잘 안 보이는데, 저쪽 해안가, 민가가 있는 건물 근처에 보면 모닥불을 피운 흔적이 있어. 수소문하다 보니까 주민 중에 물안개처럼 올라오는 연기를 본 적이 있다고 증언이 나왔어.”
요한이 쌍안경으로 해안가를 훑었다. 그의 말처럼 불을 피운 흔적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판단할 수 없지만, 그 보존상태로 봐서는 최근에 불을 피운 흔적이 분명했다.
“그 뒤로 특이한 사항은?”
“아직, 생존자도 지금은 보이지 않고.”
“흐음.”
해안가에 사람이 산다면 진작에 감시망에 걸렸을 터다. 하지만 이제야 발견되었다는 건 저 주변에서 사는 사람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산 안쪽에 사는 사람들이거나, 최근에 섬으로 들어온 사람들이거나.
구조신호일까.
생존자들이 일부러 불을 피웠다면 그게 가장 확률이 높은 가설이었다.
“가보자.”
부딪혀 보는 게 가장 좋겠지.
본진의 바로 옆에 의문의 생존자들을 내버려 둔 채로는 어떤 경우에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행동력에 제약이 생기는 것.
무턱대고 접근하는 게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방치하는 게 더 위험한 일이다.
마트 캠프에 있을 때 H백화점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던 것처럼. 후환을 제거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작업 중 하나니까.
요한은 곧바로 모든 전투 인원을 무장시키고 끌어모았다.
배가 출항했다. 이번 출항에는 사수급 전투조를 포함해서 캠프 경계조였던 이들까지도 모두 참여했다.
비상시인 만큼 생산조와 운영조도 전부 경계상태로 돌리고 전투 가능 인원을 전부 배에 태웠다.
본진 바로 앞에서 일어나는 상황인 만큼 전투가 벌어지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각오였다.
해안가부터는 조금씩 조금씩 전진하던 요한이 선착장에 배를 댔다.
“2조는 배 지켜. 1조, 따라와.”
요한의 지시에 열 명의 사람들이 요한의 뒤를 따랐다. 은폐 엄폐를 반복하며 열심히 전진했으나, 섬 내부는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약간은 탈력감이 들 정도로.
단순한 생존자들이라는 생각이 기울어질 즈음, 산 중턱의 몇 채 민가에서 밥 짓는 연기가 올라왔다.
요한이 수신호 하자 천천히 사람들이 퍼졌다. 그리고 둘러싸듯이 원 모양으로 점점 포위망을 좁혀 나갔다.
대기 신호.
연기가 올라오고 있는 곳은 한 채의 성당이었다.
요한은 침착하게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튀어나왔다. 비무장 상태의 혁이 또래로 보이는 남자 대학생이었다. 대학생이 문을 열고 기지개를 켜는 모습이 보였다.
‘제압할까?’
‘대기해.’
건물 앞에 세워진 짐차가 정확한 조준을 방해하고 있었다. 사격에 실패하면 오히려 경각심만 심어주는 상황.
요한이 고민하는 사이 대학생이 몸을 흠칫거리더니 주변을 휘휘 둘러보고는 딱딱한 표정으로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눈치챘나?’
놀라운 기감이다. 은폐는 완벽했고 주변에는 쥐죽은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단지 감각으로만 위험을 깨달은 거다. 반대편에서 옹 상병이 자리를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시야를 확보하는 모습.
다시 한번 성당의 문이 열리고 이번엔 방금 전의 대학생을 포함해서 다섯 명의 남녀가 걸어 나왔다. 하녀복에 어울리지 않는 나무 봉을 든 여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비무장인 모습이었다.
그중 수녀복을 입은 혼혈인 여자가 입을 열었다.
“아무도 없는데요, 피오.”
“분명히 있다니까. 불러 봐.”
“혹시, 거기 계신가요?”
몇몇 조원들이 움찔하는 모습이 보였다. 요한의 지시는 여전히 대기. 대답이 없자 수녀가 다시 한번 허공을 향해 외쳤다.
“아무도 안 계세요?”
스위퍼가 요한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무장도 안 하고 있는데, 한번 얘기해볼까?’라고 말하는 듯했다.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호하자 열 명의 수색 조원들이 사격 자세를 취한 채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
이 정도로 많은 사람이 있는지는 몰랐는지, 다섯 명의 남녀에게서 당황한 기색이 비쳤다. 그러다가 요한을 발견한 수녀가 그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바울리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요한 님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철컥,
의문의 여자가 요한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여기저기서 총기를 장전하는 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