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물자창고에 잡은 생선들을 집어넣고 나온 요한과 세리는 지혜가 운영하는 식당으로 향했다.
그녀가 관리하는 복지관은 일 층의 식당에서는 정해진 시간 동한 하루 두 번 음식을 배급해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했고, 식당에 커피숍, 주점까지 겸하는 명소기도 했다.
지금은 다소 늦은 시간이라 식당 안은 한산했다.
“오빠! 세리야!”
요한과 세리를 본 지혜가 활짝 웃으며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 수수한 옷차림이지만 특유의 해맑고 밝은 얼굴이 청초한 인상을 풍겼다.
“형, 오셨어요?”
뒤이어 주방의 발을 들어 올리며 정수가 등장했다. 뛰어난 활약을 보이진 않았지만, 체대 특유의 신체조건으로 항상 기본 기대치는 해주는 수색 조원. 그는 지혜와의 비밀 연애를 끝내고 아예 공개 연애로 전환한 상태였다.
“오 뭐야, 뭐야? 둘이 아예 살림 차렸어?”
세리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자 두 사람이 동시에 볼을 붉혔다.
요한이 세리를 툭 치자 그녀가 챙겨둔 배스 한 마리를 건넸다.
“회 쳐 드릴까요, 구워 드릴까요?”
“구운 거로.”
“네! 조금만 기다리세요!”
지혜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후다닥 주방으로 들어갔다. 언제 봐도 에너지가 밝은 아이였다.
“오빠, 머리가 좀 긴 것 같은데 온 김에 이발도 하고 갈까?”
세리가 요한의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복지관 2층과 3층에는 미용실과 수선실이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각오로 시작한 이발은 이제 제법 능숙한 티가 났다.
특히나 요한의 지금 다듬어진 머리는 앞선 수많은 남성 실험체들을 거쳐 만들어진 최상의 결과였다.
머리칼을 만지는 그녀의 손길이 점점 은근해지자 요한이 슬그머니 그녀의 손을 붙잡아 내렸다.
또 이런다, 또.
완전히 밀어내지 않고 적당히 받아줬더니 점점 접촉의 수위가 높아졌다. 약간 위험한 수준이라고 생각될 만큼.
“여기요오!-”
타이밍 좋게 지혜가 짜잔, 입으로 소리를 내며 간단한 밑반찬과 노릇하게 잘 익은 생선구이를 내 왔다. 나름대로 신경 쓴 게 티 나는 식단. 보기만 해도 군침이 절도 돌았다.
“항상 고마워.”
“고맙긴요.”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지혜가 타준 커피를 홀짝거리며 요한이 물었다.
“그래서, 둘은 같이 사는 거야?”
“네. 그렇게 됐어요. 형님.”
“그래. 보기 좋네. 다만…….”
요한이 말끝을 흐렸다. 우려하는 바는 있었다.
좀비 생존수칙 두 번째. 대기감염.
변종의 출현에 따라 대기감염 확률이 올라간다는 가설은 점점 힘을 받았다. 섬으로 들어온 이후 자잘한 상처 때문에 갑자기 좀비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사라진 것.
하지만 여전히 무리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요한이 우려하는 것은 임신과 출산.
산부인과 의사도, 수술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세계에서 출산은 곧 목숨을 거는 것과도 같았으니까.
하지만 요한으로서는 꺼내기 어려운 말이었다. 모든 것은 개인의 사생활이자 선택이 아닌가.
“형님, 편하게 말씀하셔요.”
“아니다. 알아서 잘하겠지.”
“……네?”
정수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되묻자 세리가 끼어들었다.
“피임 잘하라고. 아저씨, 콘돔은 끼고 하지?”
“…….”
세리를 제외한 세 명의 얼굴이 모두 붉어진 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요한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잡았다.
“대신 사과하지.”
“아, 아니에요. 형.”
“아니, 왜! 오빠들은 성교육도 안 받았어?”
“그런 건 성교육이 아니라 성희롱이라 하는 거란다.”
세리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어린애들도 아닌데 뭘 부끄러워하는 거야.”
“됐어 인마, 그만해. 참, 지혜야. 한창 바쁠 때 미안한데, 준비 좀 해줘야겠다.”
“준비요?”
“그래.”
“맡겨주세요, 오빠! 무슨 준비를 할까요!”
“군장이랑 비상식량.”
“헙.”
요한의 말이 무슨 의미를 품고 있는지, 그와 오랫동안 함께한 두 사람이 모를 리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다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기술조이자 생산조인 지혜와 수색조인 정수. 본격적인 수색이 재개되면 정수는 사지로 내몰리고, 두 사람은 한동안 떨어져 지내야 할 테니까.
“신혼부부를 찢어놓을 만큼 나쁜 놈은 아니야. 정수는 이번 수색에선 빠질 거다.”
“아, 아니에요. 형. 신경 쓰지 마세요.”
“지혜 때문이 아니라, 이번 수색은 사수들만 데리고 갈 거라서.”
“아…….”
“누군가는 섬을 지켜야 하지 않겠니? 그럼, 부탁할게.”
“네!”
역시나 신경 쓰였는지 정수의 대답이 밝았다.
* * *
그날 밤. 요한은 해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묘하게 감성적인 밤이다.
아무리 강한 척을 해도 그 또한 평범한 인간. 아니라고 말해도 저도 모르게 평화에 젖어 가고 있었는가 보다. 내일부터 수색을 재개한다는 생각에 감상적이 될 정도로.
‘풍경이 워낙 명관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요한이 거처로 정한 건물은 원래부터 아예 작정하고 ‘오션뷰’를 강점으로 내세웠을 만큼 바다가 정면으로 보이는 펜션이었다.
산기슭에서 해변과 선착장이 바로 보이도록 지은 터라 시야가 확 트여 언제 보더라도 속이 뻥 뚫리는 듯한 풍경.
‘수색은 나가야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요한은 나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쩌면 사서 위험을 감수하는 행동일 수 있다. 하지만 수색을 재개해야 하는 분명한 근거가 있었다.
하나는 섬 내에서 생산하지 못하는 물자들을 수급, 속된 말로 파밍을 하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전투원들의 긴장감을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동안의 고생과 전투의 보상인 평화는 한 달이면 충분하다.
괜한 희생이 생길지도 모른다. 물자들은 없으면 없는 대로 살 수 있다. 주로 휴지, 콘돔, 생리대, 비누 같은 생필품들이니까.
다들 말은 안 하겠지만 내심 수색을 진행하는 걸 꺼릴 수도 있다. 부천에 있을 때와는 달리 이곳은 정말 안정감이 느껴지는 장소였으니까.
요한도 평화가 좋았다. 지금 같은 삶이 평온하다. 하지만 길어 봐야 이제 한 달. 벌써부터 평화에 젖은 사람들이 보인다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우리는 멸망한 세계에 살아남는 중이며 이제 막 9개월을 버텼을 뿐이다.
그 사실을 잊지 않아야 했다.
“오빠. 무슨 생각해?”
옆 펜션에서 세리가 양손에 맥주를 든 채 걸어왔다. 나오기 전에 먼저 한잔 마셨는지, 얼굴에 불그스레한 홍조가 띠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유리잔에 맥주를 따라 요한에게 건넸다.
“짠.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하고 있어?”
“내일부터 나갈 수색에 대한 시뮬레이션.”
“정말이지 대단하다니까.”
비아냥이 아닌 순수한 감탄이었다. 그녀의 시선에 비친 요한은 한시도 쉬는 법이 없는 자기 관리의 화신이었으니까.
그녀는 옆자리에 앉아 밤바다를 보며 맥주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요한이 그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매번 답 없는 워커홀릭이라고 타박을 주긴 하지만 그녀는 누구보다도 그의 훈련과 목표를 열심히 따라오고 있는 사람이었다. 발전하는 것도 눈에 띄어 어느덧 엄연히 한 사람 몫을 해주는.
솔직히 첫인상은 그렇게 좋다고 할 순 없었지만, 지금은 이 친구가 주는 의미가 상당히 남다르다.
남녀 간의 문제를 떠나서 인간적으로 가장 애착을 느끼고 있는 동료 중 하나였다.
활력.
그녀에게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활력이 뿜어져 나온다.
좀 아저씨 같은 구석이 있긴 하지만. 확실히 세리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파티 구성원 분위기는 차이가 크게 난다.
여러모로 독특한, 매력적인 캐릭터다.
물론, 그와 별개로 저 눈빛은 좀 위험하다.
요한은 세리의 시선을 피했다. 굳은 다짐이 깃든 표정, 요구가 확실한 시선.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삐질 흐르는 느낌을 받았다.
맥주를 마시는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저건 명백한 고의다.
은연중에 대작을 강요하기까지 했다.
‘작정했네.’
요한은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밀어내든, 받아들이든 한 가지를 선택할 때가 되었다고.
세리가 몸을 밀착해왔다. 잘 관리된 피부에서부터 달큰한 체향이 풍겨 들어왔다.
살갗과 살갗이 닿는 느낌.
오랜만에 느끼는 성적 긴장감.
몸이 반응하는 것은 통제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요한이 그녀를 살짝 밀어냈다.
“취했네. 가서 자라.”
“내가 취한 것처럼 보여?”
“왜 이래, 갑자기.”
“오빠야말로 왜 이래? 바보도 아닐 테고, 지금 느껴지는 걸 봐선 고자도 아닐 텐데. 내가 싫어? 싫으면 거부해. 안 매달릴 테니까.”
묵직하게 정중앙으로 꽂히는 돌직구에 말문이 닫힌다.
“싫지 않잖아.”
요한의 무릎 위로 올라탄 그녀의 새하얀 두 손이 목 뒤로 넘어와 감겼다.
“애들 동거하는 거 어른들이 말렸을 때, 욕구를 해소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던 건 오빠잖아?”
확실히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동안은 위험한 상황이라는 걸 아니까 참았어. 확 덮쳐버릴까 생각도 들었는데 뭔가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은? 지금도 위험한가?”
숨결이 달다.
의문형의 문장이었으나 대답을 요구하지는 않는 질문이었다. 곧바로 그녀가 입술을 삼켜왔기 때문.
요한은 밀어내지 않았다.
“오빠를 원해.”
새로운 사건은 관계의 변화를 낳는다. 그리고 관계의 변화는 변수를 낳는다.
변화한 관계가, 소유가, 집착이 어떤 결말을 가져올지 알고 요한은 그 결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 자신도 욕망에 충실한 한 명의 인간이고. 남자다.
수 개월간 묵묵히 제 옆을 지켜준 이의 달콤한 유혹을 거부할 근거가 부족하다.
“너랑 하고 싶다고, 이 자식아….”
요한이 거칠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짤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얼굴에서 제 얼굴을 떨어트리자 붉은 입술 새로 가느다란 타액이 실처럼 늘어진다.
“오늘 이후로 내 태도가 달라질 거라고 기대하지는 마.”
“진짜 무드 없어.”
“새삼스럽지도 않잖아.”
사랑은 없다. 연애는 사치다. 잊었어? 요한이 그녀의 귓가에 속살거렸다. 간질간질한 느낌에 세리가 짤막한 신음을 흘렸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숨결이 뭉근하게 달아올랐다. 이제는 정말로 무를 수 없는 수준의 열기.
세리가 몸을 더 밀착시켜 왔다. 굴곡진 그녀의 몸이 착 달라붙어 살갗에 생생하게 느껴졌다.
최근 운동과 훈련으로 단련되었다고는 하나 여체. 닿는 순간 녹아내릴 것 같은 부드러움은 첨예하게 느껴진다. 옷가지가 사르륵 내려가고, 그 위로 부드러운 입맞춤이 내려앉는다.
“여기서 해?”
“원한다면.”
“좀… 부끄러운데. 누가 보면 어쩌지.”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부지런한 손길은 어느새 그녀의 바지와 속옷을 벗기고 있었다.
“오빠, 천천히, 나 사실, 그, 경험이 별로 없어서.”
“알고 있어.”
숙맥이라는 사실은 요망한 연기력으로는 감출 수 없지. 정환이만 봐도 알잖아.
요한의 목 뒤로 감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세리는 내내 요한의 목을 꽉 끌어안은 채 쉽사리 놓지 못했다.
두 사람의 호흡이 가쁘게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