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얼추 건물 안을 한 바퀴 돈 정환은 구시렁거리면서 물자들을 챙겼다. 낚시용품과 생활용품을 같이 취급하던 곳인 만큼 쓸 만한 물건들이 제법 남아 있었다.
‘파밍 1순위는 총과 탄약. 2순위는 식량. 3순위가 식량 보조품이다. 나머지는 여유 있을 때 해도 돼.’
“어디 보자…….”
형들이 좋아하는 담배도 챙기고 가장 먼저 통조림 식량부터 챙겼다. 어차피 목적지 근처이니만큼 당장 급한 것만 챙기면 충분했다.
정환이 마트를 들락날락하며 물자를 바깥으로 옮기자 아영이 거들겠다며 들어오려 했다.
“오지 마!”
정환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다가오다가 움찔하는 아영.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에 정환이 아차, 하고 식은땀을 흘렸다.
‘어차피 건물 안에 좀비도 없는데, 굳이 돕겠다는 애한테 소리 지를 것까진…….’
수색 중에는 항상 긴장과 경계심이 극도로 끌어올려 지다 보니, 저도 모르게 예민한 반응이 나왔다. 아영이 입장에서도 도움을 주려 한 건데. 확실히 심했다.
“아, 미안. 혹시 위험할까 봐. 그럼 조심히 들어올래? 이 지지대 좀 잡아주라.”
어차피 이 낚시가방만 옮기면 나갈 생각이었으니까. 섬으로 가는 만큼 좋은 낚싯대 세트가 있으면 유용할 거라는 판단이었다. 때마침 진열대 가장 위쪽에 있는지라 살짝 무게중심이 불안하던 찰나에 잘된 일이었다.
“꽉 잡아줘.”
“네.”
정환이 가장 큰 낚시가방 하나를 힘껏 내렸다.
그르르-
“……!”
그때, 순간적으로 들려온 짐승의 으르렁거림에 정환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작은 소리였지만 분명하게 들렸다. 일순 흐르는 정적과 동시에 피어나는 긴장감.
정환은 본능적으로 아영을 자신의 등 뒤로 숨기고 나이프를 쥐고 있는 손아귀에 힘을 꽉 주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오지 않았다.
일 분, 이 분, 오 분이 지나도 좀비는 나타나지 않았다.
정환은 천천히 움직였다.
이제 좀비 한두 마리 나타난다고 긴장하고 당황하는 시기는 지났다. 수많은 전투 경험과 승리 경험들은 어떤 위기에서도 자신의 생존을 도울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처리하고 간다. 후환은 남기면 안 된다고 배웠으니까.
정환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등 뒤에서 옷자락을 잡은 감각이 느껴진다.
뒤쪽으로 후퇴해서 안전한 곳에 아영이를 두고 다시 싸우는 방법도 있지만, 좀비를 앞에 두고 등을 돌리는 게 더 위험한 일이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러나 위기는 찾아오지 않았다. 정환은 으르렁거림의 범인을 찾아내고선 힘이 빠져 팔을 늘어트렸다. 하울링의 정체는 작은 새끼 강아지들이었다. 6개월도 안 되어 보이는 강아지들.
“…뭐야, 강아지네.”
등 뒤에서 빼꼼 머리를 내민 아영이 작은 탄성을 냈다.
자재를 보관하는 간이 창고처럼 보이는 공간. 창고는 지상에서 40cm 올라온 간이 철제 여닫이문으로 잠겨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죽은 어미 개와 그 어미 개의 젖을 물고 있는 강아지들이 보였다.
강아지들 주변으로는 낚시용 떡밥들을 담아 놓은 포대 자루가 터진 채 흐트러져 있었고 바닥에는 여기저기 이빨 흔적이 있는 생수통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정환이 붙잡고 있던 쇠창살에서 손을 떼자 검붉은 핏물이 쩍- 하고 달라붙었다가 떨어졌다.
상황은 명확하게 파악됐다.
아이를 밴 어미 개가 좀비들에게 물리면서 먹이를 찾아 저 안으로 들어갔고, 상처 입은 어미 개는 여기서 태어난 아이들을 돌보다 죽었다.
태어난 강아지들은 죽은 어미 개의 젖을 물거나 바닥에 흥건한 물과 물에 젖은 낚시용 떡밥들을 먹으며 생을 연명한 것이다.
강아지들의 영양 상태는 심각했다. 낑낑거리는 소리는 들릴 듯 말 듯했고, 갈비뼈는 앙상했으며 기력이 없는지 눈꺼풀이 자꾸만 감겼다.
낯선 이가 손잡이를 돌려 강아지들을 꺼내는데도 발버둥 한번 치지 못할 만큼.
“불쌍해라.”
아영이 강아지들에게 다가가려 했다.
꽈직!
그러나 그때, 천장이 내려앉았다.
아영이가 비명이 나오려는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천장에서 좀비가 떨어져 내렸다. 정확히는, 지금도 균열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꺄아악!”
좀비 한 마리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틀어막은 손 사이로 가녀린 비명이 새어 나왔다. 정환이 황급히 손을 쳐냈지만, 수많은 손이 허공에서 다가왔다.
정환이 반사적으로 좀비들을 손으로 밀며 아영이를 향해 달려드는 좀비들의 다리를 대검으로 후려쳤다.
“가! 나가! 빨리!”
정환은 필사적으로 아영에게 소리쳤다.
“아… 으… 으아아!”
“빨리!”
낯선 감각. 스미는 공포. 아영이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 * *
요한은 멀리서부터 뛰어오는 아영을 보며 짐을 싣고 있는 사람들을 멈추었다. 요한이 그녀에게 서늘한 시선을 보냈다.
“넌 왜 혼자 돌아다녀? 미자들 한데 모여 있으라는 말 못 들었어?”
“저, 정환 오빠가…….”
“무슨 일, 아니, 어디야.”
“저쪽 슈퍼마켓이요…….”
요한은 곧바로 내달렸다. 진작 정리를 끝내고 합류했던 스위퍼도 급하게 달려갔다.
순식간에 어시장 건물에 도착한 요한은 좀비 다섯 구에 둘러싸인 정환을 보았다.
좁은 공간 안에서 그저 물어뜯기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며 좀비들을 밀어내기에 급급한 상황.
요한이 나이프를 집어 던졌다.
쏜살같이 날아간 나이프가 뒤통수에 처박혔다. 이어 벼락같이 달려간 스위퍼가 좀비 두 마리를 정환에게서 떼어냈다.
“헉, 헉! 형…….”
요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를 일으켜 세운 후 밝은 곳으로 꺼내 몸을 점검했다.
“물린 곳은?”
“아까- 손을.”
욕지거리가 올라오는 것을 참으며 정환이의 장갑을 벗겼다. 이빨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뚫리지는 않았다. 두꺼운 가죽 장갑 덕분이었다.
“에라이, 인마. 네가 짬밥이 얼만데 좀비 다섯 마리를 못 죽여서 형들 수명을 깎아 먹어?”
스위퍼가 그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타박하자 정환이 고개를 푹 숙였다. 요한의 조용하지만 날카로운 일갈이 이어졌다.
“너, 왜 이 꼬마랑 같이 다녔지?”
“그게…….”
“연애질하다가 골로 가는 좋은 선례를 만들고 싶은 건가?”
“혀, 형.”
요한의 말이 심하다고 느꼈는지 옆에서 스위퍼가 말을 우물거리다가 멈칫했다. 요한이 그답지 않게 흥분하고 있었다.
“방심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물려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저 좁은 공간에서 무기를 들 여력도 없이 좀비들에게 덮쳐진 상황이라면 정말 조금만 늦었어도 그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좀비 웨이브를 두 번이나 넘기고, 서생연과의 세 번의 싸움을 넘길 동안 살아남은 전력이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요한으로서는 대체가 쉽지 않은 인재였다. 고작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마음이 들떠 이런 식으로 방심하고 마음이 풀어져서는 안 된다.
지금 죽으면 개죽음이다.
“정신 차려라. 경고야, 이건.”
“네, 형. 죄송합니다.”
그도 그런 마음을 아는지 고개를 숙이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형은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란 걸 안다. 그리고 자신이 경솔했다는 것도 안다.
“후, 가자.”
요한과 스위퍼가 나가고, 정환은 머리를 두어 번 치고 일어섰다. 그리고 걸음을 떼려는 찰나, 낑낑거리는 작은 소리가 그의 귓가로 들어왔다.
좀비들에게 물어 뜯겨 죽은 강아지들 사이, 한 마리의 강아지가 살아남아 자신을 향해 기어오고 있었다.
정환은 녀석을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뭐야, 그건?”
정환이 강아지를 데리고 나오자 요한이 미간을 좁혔다.
“안에 있던 강아진데… 어미 개가 죽었어요.”
“그걸 키우겠다고?”
“이대로 놔두면 무조건 죽을 것 같고…….”
지은 죄가 있기에 점점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보지만 무언가 마뜩잖다는 표정.
애완동물을 키우는 건 장단점이 있지만, 요한으로서는 내키지 않아 하는 일 중 하나였다. 소음을 통제하기가 어렵고 일단 교육하기가 쉽지 않았으니까.
결정적으로 사람 먹을 식량도 부족하다. 사료 따위를 들고 다닐 생각도 없었고.
요한이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자 정환이 의견을 덧붙였다.
“지난번 서생연이랑 싸울 때 사냥개를 키우던 사람을 봤어요. 귀신같이 인기척을 찾아내더라고요. 분명 한 마리쯤 키워 두면 좋을 거예요.”
서생연 개코.
분명 정환이 그와 격돌하고 승리했었지. 서생연 간부와의 매치에서 승리했던 그를 떠올리자 다시금 마음이 약해졌다.
‘예쁘게 성장하는 동생들한테 약해지는 버릇은 좀 고쳐야겠는데.’
요한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정환은 활짝 웃으며 아영에게 강아지를 건넸다. 그러나 요한은 다시 아영으로부터 강아지를 뺏어 들고 정환에게 건넸다.
“네가 키워라. 꼬마한테 맡기지 말고. 그리고 훈련이 잘 안 될 것 같으면 네 손으로 처리해. 애완동물이 아니라 사냥개다.”
“네, 형.”
요한이 뒤돌아섰다. 스위퍼가 요한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답지 않게 너그러운데?”
“비상식량이야.”
스위퍼가 푸흐흐 웃었다.
“어차피 한곳에 정착해서 어느 정도 자리 잡게 되면 가축은 키울 생각이었어.”
특히나 잘 훈련된 사냥개는 안전한 지역에서 많은 일을 해줄 거다.
“어련하시겠습니까, 대장님.”
요한은 뭔가 기분 나쁜 스위퍼의 반응을 보며 걸음을 옮겼다. 분명 정환이나 혁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자신을 아는 거다.
주변 정리를 하러 나갔던 사람들이 속속들이 돌아오자 요한은 사람들을 어선 앞으로 모이게 했다.
어선은 낡았지만 작지 않은 크기였다. 애초에 물자들을 옮길 걸 가정하고 제법 많은 돈을 투자해 구한 이동수단이었다.
어선을 보는 사람들 눈에 오만가지 생각이 깃들었다. 대부분 감탄이었다.
“작은 어선이라 여러 번 왔다 갔다 해야 할 거야. 일단 선발대를 목적지에 내려줄 테니까 먼저 가서 좀비들 정리하고 있어. 나머지 사람들은 왔다 갔다 하면서 짐 나르고.”
요한이 한번 휙 둘러보고 말했다.
“섬 청소 선발대는 스위퍼, 하진, 정환, 혁, 세리, 옹 상병.”
“형씨는 우리를 너무 부려먹는다니까.”
“난 개인적으로 짐 나르는 것보다는 전투가 좋다.”
“하긴, 그렇긴 하지?”
“사수급 위주로 보냈으니 가서 농땡이 피우지 말고 운송 작업 끝나기 전까지 정리 마무리해라.”
“시간은?”
“다섯 시간.”
“넉넉하네.”
스위퍼가 세리와 하진을 번갈아 바라보며 눙을 쳤다.
“그나저나 세리가 사수급이라니, 정말 놀라운 발전이라니까. 그렇지?”
“뭐, 저 정도면 웬만한 사람보단 낫지.”
“당연하지. 나도 이제 일 인분이라고. 그치 오빠?”
두 사람의 농담 섞인 말을 받으며 세리가 요한에게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요한의 대답은 무심했다.
“0.8인분 정도는 쳐주지.”
퉤퉤, 세리가 침 뱉는 시늉을 했다.
“선발대 리더는 스위퍼. 안에 들어가서 모든 좀비 다 쓸어버려.”
“예썰. 아, 만약 안에 사람들이 있으면? 죽일까?”
“위협이 될 것 같으면 죽여도 좋아.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우선 무장해제 시켜놓고 대기해.”
“라져.”
스위퍼의 간결한 대답과 함께 어선이 출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