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노인이 건넨 커다란 상자에는 방탄복이 들어 있었다. 대략 스무 개. 수색조 인원들을 전부 무장하고도 남을 개수였다.
대가 없는 선의와 호의는 부담스러웠지만, 요한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만큼 값어치 있는 선물이었기에.
“감사합니다.”
요한은 미련을 갖거나 고민하지 않았다. 비록 함께하지는 않더라도, 이들에게는 이들의 쓸모가 있다. 내륙의 우방.
혹시라도 육지에서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이들이 1차 저지선이 되어주고 자신들에게 내륙의 상황을 공유해줄 테니까.
요한은 진심을 담아 노인에게 인사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료분들을 죽이고 죽게 해 유감입니다.”
“아직도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었냐. 좀생이 같은 자식. 둘러 봐라. 여기 누가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이 있나.”
요한은 주변에서 대기 중인 용병단 사람들을 훑어봤다. 요한과 눈이 마주친 이들이 윙크를 하거나 피식 웃어 보였다. 며칠이라도 같이 싸웠다, 이건가.
쓸 만한 사람들이다. 언젠가 함께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
“무운을 빕니다. 또 뵙지요.”
“그래, 종종 보러 오라고.”
요한의 시선이 이번에는 김정미를 향했다. 정미는 아쉬움이 역력한 얼굴로 요한의 손을 두 손으로 포개듯이 맞잡았다. 슬그머니 손을 빼려던 요한은 옅은 숨을 내쉬고선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몸조심하세요, 정미 씨.”
“이번에도 함께하지는 못하게 되었네요.”
“피차 책임질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요.”
정미는 슥슥 마른세수하더니, 아쉬움을 벗어낸 얼굴로 해맑게 웃었다. 예쁜 사람이다.
자신으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오롯한 선의로 인간을 돕는 사람.
하지만 그렇기에 함께할 수 없는 사람.
부디, 이런 세상이지만 그 마음가짐은 잊지 않기를, 그녀의 선의가 파괴되는 재난이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직, 약속은 유효한 거예요. 다음에 또 만나면, 그때는 정말로 함께하기.”
요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들이라면 잘 살아남을 것이다.
* * *
국도로 한참을 이동한 뒤, 요한 일행은 해가 반쯤 지평선에 걸친 후에야 가까스로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피해는 없었지만 지속되는 긴장감 속 피로도가 상당했다. 대부분의 전투 조원들이 여기저기에 검붉은 좀비 피를 덕지덕지 묻힌 상태였고, 특히나 전위의 전투원들은 전투가 있을 때마다 피를 잔뜩 뒤집어썼다.
요한은 전위와 후위를 왔다가 갔다가 하며 그들을 백업하느라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였다.
특히나 조금 전처럼 전후위 동시에 좀비들이 나타나는 경우에는 더더욱.
-여기는 후위, 여섯 시 방향에서 접근하던 좀비 서른여섯 구 클리어.
“피해는?”
-없어.
“좋아.”
요한은 하진의 무전을 확인하고선 발걸음을 멈추고 중위로 되돌아간 뒤 탑차 위에서 쌍안경으로 주변을 꼼꼼하게 탐색했다. 전위에서 그르릉거리는 소음이 미세하게 들려왔다.
진행이 더디다. 생각보다 도로의 폐차들은 너저분했고, 좀비들은 끊임없이 달려들었다.
생존자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지 한참 되어 보이는 길들. 그만큼 좀비들도 온전하게 남아 있었고 그것들은 전부 일행의 발목을 잡는 장애물이었다.
일행은 좀비 무리가 나타날 때마다 쇠뇌나, 좀비작살, 새총 등을 이용해 최대한 조용히 놈들을 처리하느라 애썼다.
이러니 전진이 한참 늦어질 수밖에.
“천천히 해도 되니까, 사상자 없이 안전하게 이동해.”
-라져.
이 속도라면 목적지까지 약 일주일은 걸릴 터였다. 하지만 괜찮다. 쓸데없이 개죽음당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보다 느리더라도 조심스럽게 이동하는 게 중요했다.
일행은 전진하고 있었다. 느리지만, 분명하게 전진했다.
“으음······.”
삭막한 아스팔트가 뿜어내는 열기가 훅 올라온 탓에, 요한이 저도 모르게 숨이 턱 막혔다.
더위. 도로 위에서는 좀비보다 더위가 더 큰 적이었다.
그리고 더위와 싸우는 것은 일반인이나 기술자들이 아니라 전부 전투 조의 몫이라는 것도 문제였다. 차에서 에어컨을 쐴 수 있는 사람들과 달리, 길을 뚫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밖에 나와 좀비와 혈투를 벌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일사병이나 열사병으로 쓰러지는 건 곤란했다.
-요한!
무전기가 울렸다. 스위퍼의 다급한 목소리에 요한이 곧장 무전기를 들어 올렸다.
“어, 무슨 일이야.”
-나쁜 소식 하나랑 개 엿 같은 소식이 하나 있는데.
“둘 다 빨리 말해.”
-일단 나쁜 소식은, 지게차 하나가 퍼졌어. 얼간이 형씨가 보고는 있는데, 속도가 더 늦어질 것 같아.
얼간이 형씨는 공사장 출신 건설기계 차량 책임자의 별명이었다.
-그리고 개 엿 같은 소식은, 전위 남쪽에서 북쪽 방향으로··· 좀비 떼가 오고 있어.
요한이 이맛살을 조프렸다.
“좀비 떼가 오고 있다고? 규모는?”
-모르겠는데. 젠장, 천 마리? 이천 마리?
“속도는?”
-좀비 웨이브는 아니야. 그냥 평소랑 똑같아.
타이밍 한 번 쌀쌀맞군.
안 좋은 일이 하나씩 오면 안 좋은 일이 아니지. 요한은 불만을 삭이며 스위퍼에게 지시했다. 이 정도 변수도 예측 못 한 건 아니었다.
“스위퍼, 부탁 좀 하지.”
-어, 알겠어.
척하면 척이었다.
힘든 여정이 될 거라는 것, 적잖은 변수가 있을 거라는 정도는 예상했다. 고가도로였다면 덜했을 텐데, 하필 지나가는 곳이 평지였다는 건 문제였다.
될 수 있으면 전투는 피하고 싶었고 아직 늦지 않았다. 요한이 무전기를 통해 상황을 전파했다.
“전원 주목, 전위 남에서 북 방향 좀비 이천 마리 출현. 스위퍼가 좀비들 방향 바꾸는 사이에 빠르게 지나간다. 전위, 속도 좀 내줘야겠어.”
어차피 지능이라곤 없는 좀비들이다. 웨이브도 아닌데 한 곳으로 좀비들이 움직이는 건 의외였지만, 이동하는 좀비 떼를 본 것은 사실, 처음은 아니었으니까.
잠시 후, 몇 발의 총성이 들렸다. 뒤이어 스위퍼에게서 난감한 내용의 무전이 도착했다.
-요한, 큰일 났는데? 놈들이 방향을 틀지 않아. 몇 명은 따라붙는데, 그것뿐이야. 방향이 안 틀어져. 귀머거린가?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요한은 당혹감을 드러내며 스위퍼에게 무전을 쳤다.
“좀비들이 소리에 따라가지 않는다고?”
-그렇다니까! 일단 지금 빨리 대책을······.
좀비 웨이브는 아니다. 그런데 좀비들이 한 곳을 향해 주변의 먹잇감도 무시한 채 몰려간다?
이런 현상은 요한도 겪은 바가 없었다. 하지만 일단 변수에 대한 고민보다는 당장 눈앞에 닥친 위기에 신경 써야 했다.
“예상 도착 시각은?”
-10분!
최대한 안전을 고려해서 빡빡하게 말했을 테니, 12~13분은 여유가 있다고 보면 된다. 요한이 빠르게 전파했다.
“전원 간격 유지한 채 뒤쪽으로 천천히 이동한다. 차량, 짐 모두 놓고 몸만 뒤로 빠져, 톨게이트까지 쭉. 스위퍼는 좀비들 떼어놓고 전위로 합류해, 내가 직접 확인할 테니까.”
요한이 곧바로 탑차에서 내려 대각선으로 내달렸다. 오는 내내 좀비들에게 시달렸지만, 특히 이 근방에서는 유독 좀비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리고서 나타난 좀비 떼가 이놈들이다. 기괴한 행동을 보이는 좀비 떼. 뭔가 불길했다.
요한은 적당히 높은 건물로 들어갔다.
끼에에엑!
불시에 튀어나온 좀비 한 마리가 요한의 얼굴을 덮쳐왔다.
요한은 홱 고개를 숙여 좀비를 등 뒤로 넘기고선 구둣발로 놈의 얼굴을 깨부순 다음 퉁퉁 튀듯이 뛰어 올라가 좀비 떼를 바라봤다.
옥상에서 좀비들의 행렬을 확인한 요한이 미간을 좁혔다. 확실히 이천은 넘어 보이는 수다. 아니, 그보다 더 많을지도.
좁은 곳에서 자리를 잡고 싸운다면 모를까, 이렇게 넓은 개활지에서 상대할 수 있는 수가 아니다. 지금이야 이천이지, 만약 화기를 사용해서 맞붙는다면 그 이후부터는 주변의 모든 좀비를 다 때려잡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정도 규모의 전투라면 최소 열 명에서. 최대 절반의 희생은 감수해야 했다.
요한이 신호탄을 켰다.
칙- 소리를 내며 올라간 불꽃이 휙 날아가 떨어졌다. 소리는 멀어서 못 듣는다고 할지라도, 연기는 보일 테니 좀비들이 다가올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하지만 근처의 두세 놈 정도만 관심을 보였을 뿐, 여전히 대규모 행렬은 유지된 채였다. 스위퍼에게 미리 들었지만, 보고도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요한은 단 하나의 변수도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놈들의 행렬을 처음부터 끝까지 눈에 담았다.
고배율 쌍안경으로 무리의 시작부터 끝까지 훑었으나 변종으로 보이는 좀비도 없었다.
뭘까, 이 행렬이 주는 의미는. 느닷없이 등장한 새로운 법칙은.
‘단순히 변종과 좀비 웨이브를 제외하고도 뭔가 추가적인 패턴이 있다는 건가.’
확실히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차 쉘터를 육지가 아닌 섬에 준비해두었다는 점 정도이리라.
쉘터로 이동해서 이동 경로인 영종대교만 끊으면, 아무리 많은 좀비가 몰려 들어와도 놈들을 전부 바다에 수장시킬 수 있다.
요한의 눈이 흡사 아메리칸 물소 떼처럼, 물자와 차량이 세워진 곳을 지나가는 좀비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만약 이런 좀비 무리가 부천의 연합 캠프에 있을 때 들이닥쳤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가정이었다.
-요한, 모두 톨게이트 뒤로 이동했어.
“수고했어.”
요한은 일행이 무사히 퇴각한 것을 확인하고선 좀비 떼와의 간격을 적당히 유지한 채 놈들의 행로를 뒤따랐다. 일단 급한 불을 끄는 덴 성공했지만, 노심초사하는 심정을 가라앉히기는 쉽지 않았다.
놈들이 혹시라도 방향을 틀어 일행을 향하지 않을지. 갑자기 좀비 웨이브가 일어나지는 않을지.
이천. 이천 마리라.
적의 수는 분명하게 전달했고, 일행들은 톨게이트에 자리 잡고 전투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지형적으로 서 있는 차량도 많은 데다 요금소 자체가 하나의 엄폐물이 되어줄 수 있어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설령 부딪힌다고 해도······.
아니다. 요한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 규모의 적이라면 분명히 적잖은 피해가 생길 것. 차라리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한이 있더라도 피하는 게 옳다.
요한은 부디 이 변수가 아무 탈 없이 사라지기를 바라며 기다렸다.
째깍, 째깍.
마치 머릿속에서 괘종시계의 시침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뙤약볕 아래 숨죽여 기다리는 요한의 얼굴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좀비 떼가 내뿜는 악취는 정말로 상상을 초월했다.
똥을 퍼먹어도 이 정도로 불쾌하지는 않겠다고 생각될 정도로.
얼마나 행렬이 긴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동안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생각의 원인은 이 좀비 행렬이 주는 의미에서 시작해 행렬이 가져다주는 결과를 거쳐 놈들의 ‘근원’에 대한 의심에까지 다다랐다.
햇수로는 거의 4년 가까이 좀비들을 봐 왔으니 이제는 희석될 대로 희석된 물음들.
놈들은 무엇이고, 놈들을 생겨난 원인은 무엇이고, 만약 놈들을 만들어낸 존재가 있다면 그들의 정체와 의도는 무엇인지.
사실 여태까지는 생존하기 급급해 그 물음들을 외면해 왔다. ‘근원’에 대한 문제를 파악한다고 해서 해결책이 나오거나 해결에 대한 의무가 생겨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 상황을 심도 있게 고민한다고 목숨이 두 개로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다만 문제는 위화감이다.
마치 누군가 설정해 놓은 듯한 작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상황에 대한 위화감.
변종 좀비든, 좀비 웨이브든, 심지어 지금의 좀비 떼 행렬이든. 과학적이거나 상식적으로 접근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는 점이었다.
좀비부터가 비상식인데 무슨 상식을 따지느냐고 답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개연성. 그래 개연성이 맞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