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서바이벌-95화 (95/176)

<95화>

만약, 좀비 아포칼립스가 터지지 않았고, 그저 모든 게 꿈일 뿐이었다면. 그랬다면 요한은 지금쯤 신용불량자가 되고 사채업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터다.

그럼에도 요한이 종말을 대비한 것은, 오롯하게 그 전 삶 때문이었다.

설령 아포칼립스가 일어나지 않아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어떤 삶도 종말이 주는 비참함을 이길 수 없었을 테니까.

삶에 대한 집착과 그를 위해 물자를 모으는 건 3년 동안 요한이 학습한, 이미 죽어버린 자신이 남긴 유일한 유산이었다.

“그러고 나서 꿈에서 깨어났는데, 이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거야. 꿈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어. 아니, 꿈이라고 해도 상관없다는 기분이었지. 삼 년 동안 하루하루를 그저 살아남는 것 외에는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다니던 회사도 때려치우고 전쟁 준비하듯이 아포칼립스를 맞을 준비를 했지. 너희가 본 까치울의 쉘터. 그리고 지금 가고 있는 영종도의 쉘터.”

살아남고 싶었다.

아니, 살아가고 싶었다.

3년 중, 마지막 동료였던 노아 일행을 만나기 전까지 요한은 혈혈단신으로 살아남았다.

필요하면 동료를 버리고 캠프가 위험에 빠지면 가장 먼저 도망쳤다.

하지만 요한의 마지막 1년. 믿을 만한 동료를 등 뒤에 두고, 그저 살아남는 것이 아닌 함께 살아갔던 그 시절이 가장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던 시기였다.

그들은 자신에게 살아남는 것이 아닌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준 이들이었다.

“그게 전부야. 너희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쉘터에 들어가면 내가 준비했던 것들은 모두 끝나. 준비했던 카드들도 모두 쓰고, 미리 알고 있던 적들도 물리쳤지. 이다음부터는 미지의 세계야. 지금 쉘터를 공개하는 것이 맞는 걸까, 우리가 가는 곳은 앞으로도 안전할까, 또 다른 강한 적들이 나타나진 않을까. 항상 고민되고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지. 그래서 너희가 가끔 신 바라보듯 볼 때는···”

요한의 목소리에는 조금은 자조가 섞여 있었다.

“···조금 부담스러워.”

요한이 더 말을 이으려다가 말을 뚝 멈췄다. 정면에서 세리가 닭똥 같은 눈물과 질질 흘러내리는 콧물을 양껏 쏟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옆에서 어느새 눈물을 그친 정은이 그녀를 다독여 주고 있다. 요한이 머쓱하게 맥주캔을 집어 던지고 다음 맥주를 집어 들었다.

“울 만한 이야기가 있었나.”

“그냥, 히끅, 슬프고, 끅, 안타깝, 히끅.”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다 울고 말해.”

청량한 탄산과 보리 향이 목젖을 타고 꿀떡꿀떡 넘어갔다. 한참을 질질 울며 눈물을 짜내던 세리가 울음을 멈추고서는 말했다.

“이렇게 힘든 삶을··· 두 번이나 겪고 있다는 게 안타깝고 안쓰러워······. 누구한테도 말도 못하고 혼자 힘들어했다는 것도······.”

“뭐, 덕분에 이렇게 살아남았으니까. 즐거운 시간에 너무 초를 쳐버렸네.”

묻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았으나, 누구도 먼저 나서서 물어볼 수 없었다. 그들은 그저 세리가 느낀 그 감정에 공감하고 있었다.

“어··· 그 심각한 이야기 중에 미안한데.”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든 것은 스위퍼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스위퍼에게 향했다.

“아니, 형씨들. 아무리 내가 잘생겼다고 해도 그렇게 쳐다보면 쑥스럽잖아? 그냥 저 앞에 있는 육포 안 먹을 거면 이쪽으로 좀 던져 달라고.”

“······.”

예상치도 못했던 대답에 다들 벙찐 채 눈만 끔뻑이고 있을 때 하진이 제 앞에 있던 육포를 휙 던졌다.

“오, 고마워. 외팔이 형씨.”

“황도.”

“응?”

“황도 달라고. 그거.”

아아, 스위퍼가 씩 웃으며 복숭아 통조림을 던졌고, 하진이 공중에서 복숭아 통조림을 받아 냈다. 살짝 개봉된 뚫린 통조림 단면에서 달짝지근한 국물이 하진의 얼굴로 튀었다.

“에이, 아깝게.”

하진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슥슥 문지른 뒤 혓바닥으로 손바닥을 핥았다. 옆자리에 있던 세리가 울던 것도 잊고 더럽다며 질색했다.

주변에서 두 사람을 어떻게 쳐다보든지 간에 두 사람은 맥주와 안줏거리들을 흡입해댔고 주변에는 다 먹은 맥주캔이 수북했다. 그 무던한 모습을 보며 요한이 실없이 웃음을 뱉어버렸다.

두 사람은 회귀 후 만난 새로운 인연이다. 요한에게는 천군만마와 같은 사람들. 강하고, 신뢰할 만하고, 친화적이다. 지금도 요한이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했던 말이 오히려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되자, 칙칙하게 내려앉은 분위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끌어올리는 두 사람이었다.

“형씨, 그 장조림 좀.”

스위퍼가 하진 앞에 있던 장조림을 가리켰고, 하진은 의수 칼날로 장조림의 뚜껑을 부숴버린 후 입안에 탈탈 털어 넣었다.

“아- 정말. 근육 돼지 형씨라고 불러줘?”

“너도 한쪽 팔 잘리고 싶으면 그래 보던가.”

“해 볼래?”

“얼마든지.”

두 사람의 으르렁거림을 만류한 건 요한이었다.

“뭔지 몰라도 할 거면 내려가서 해. 아래층에 침대 있어.”

두 사람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조금씩 회복되던 술자리 분위기는 어느덧 예전 같은 활기참을 되찾았다.

여전히 요한은 난간에 걸터앉아 경계선을 바라보며 자작을 하고 있었고, 조원들은 삼삼오오 모여 대화 맞는 사람들끼리 수다를 떨어 댔다.

아포칼립스 시대라곤 보기 어려울 만큼,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그중 가장 재미난 화두는 정환이와 아영이의 이야기였다. 이슈 거리를 좋아하는 기자 출신, 재호가 정환이에게 ‘썰을 풀어 보라’며 부추겼다.

“아영이랑은 무슨 관계냐니까. 정환이는 세리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아니, 형 무슨 소리예요!”

정환이가 순식간에 홍시 같은 얼굴색을 하며 세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세리도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무슨 재밌는 얘기해?’라며 해사하게 웃고선 맥주와 걸터앉고 있던 겉옷을 들고 와 그의 건너편에 앉았다.

“너만 빼고 다 알아, 바보야. 세리도 알걸? 저 여우 같은 아이가 설마 모르겠······.”

“오빠.”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음주로 인한 심신 미약 상태라서.”

세리의 살벌한 눈빛에 재호는 금세 두 손을 들었고 정환이는 혼자 고통에 울부짖었다.

“아니··· 으윽. 그럴 수가······.”

“그래, 세리는 그렇다고 치고. 아영이는 어떻게 된 거냐고. 썰 좀 풀어봐.”

재호가 정환을 재촉하자 육포를 질겅질겅 씹고 있던 스위퍼가 육포 힘줄을 투 뱉으며 끼어들었다.

“어떻게 되긴, 이게 바로 금사빠지. 아직 한 번도 안 쓴 새 고추를 헌 것으로 만들기 위한 정환이의 눈물겨운 노력!”

스위퍼의 말에 남자들은 박장대소했고, 여자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시커먼 남정네들은 유독 정환에게만 장난이 제법 지나쳤다. 아니나 다를까, 하진도 한마디 거들었다.

“금사빠가 아니라, 금수인 것 같은데. 이봐. 아무리 그래도 여고생은 아니지.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선을 넘은 거다, 그건.”

“그게요, 형님들······.”

이제 정환이는 거의 울기 직전의 표정이었다.

“저 봐, 아니라고는 안 하네. 그래도 형씨, 피임만 잘하면 됐지 뭐, 나라도 망한 마당에 아청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물론 조선 시대라면 저만한 나이에 애가 있어도 이상하진 않다만.”

“형님들 제발요······.”

짓궂은 괴롭힘이 계속되자 정은이가 한 마디 덧붙이고 세리가 거들었다.

“저질들.”

“내버려 둬, 원래 남자들이 모이면 세 가지 얘기밖에 안 해.”

“어······ 군대 얘기, 축구 얘기, 야한 얘기?”

“여자 얘기, 야한 얘기, 여자랑 야한 짓 한 얘기.”

세리의 말에 스위퍼가 반박했다.

“아가씨, 그거 성차별적 발언이야?”

“아저씨들이 먼저 시작했거든요!”

모처럼 편안한 분위기에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참을 먹고 마신 뒤에 재호가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들어 보였다.

“자자, 다들 모여서 여기 보세요.”

사진기가 들이 밀어지자, 사람들은 언제 티격태격했냐는 듯 사진기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재호가 난간에서 저 혼자 분위기를 잡고 있던 요한까지 끄트머리에 걸리게끔 두고, 셔터 버튼을 눌렀다.

조명이 밝진 않은 탓에 사진은 흐리게 나왔지만, 다들 표정은 밝아 보였다.

생존자들이 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 장의 사진 아래쪽에는 정갈한 글씨체로,

2017년. 9월.

부천 연합 캠프에서의 마지막 밤.

이라고 쓰여 있었다.

밤바람은 따듯했다.

* * *

캠프 생존자들은 오전부터 분주했다.

약속된 시간에 맞춰 모여든 사람들은 저마다 한 보따리의 짐을 챙긴 채였고, 요한은 천천히 사람들의 개인장비와 공용 물자들을 점검했다.

캠프 내 생존자 중 대부분이 처음 겪을 장거리 여정이다. 불필요한 것을 너무 많이 챙기지는 않았는지, 꼭 필요한 물품들을 놓치진 않았는지 확인하는 것은 요한의 몫이었다.

물자 체크를 완료한 요한은 그다음으로 이동 방침과 인원 배치를 설명했다.

“인원을 삼분해서 이동할 거야. 전위, 중위, 후위 각각 최소 15분 거리씩 떨어져서 이동한다. 스위퍼가 전위, 하진이 후위. 전위에는 대형 건설기계. 중위가 화기와 탄약. 후위에서 물자를 운반한다.”

이동 중에도 좀비 웨이브는 최우선적으로 고려 대상이었다.

거기에 더해 경로 뚫기를 방해할 수 있는 물자들은 건설기계들과 떨어트려 놓아야 했고, 자신을 포함한 화기와 탄약은 전방이든 후방이든 언제든지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

대부분 전력을 전위에 배치했다. 차량 소음으로 분명히 가장 많은 좀비가 몰릴 곳.

그다음 힘준 곳은 중위. 사실 후방보다는 안전한 포지션이었지만, 둘 중 어느 방향이든 순간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이만한 인원으로 장거리를 이동한 적은 처음이었다. 경로 하나하나, 배치 하나하나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여차하면 몸만 빼내면 되던 수색 임무가 아니다. 이건 무리가 전멸할 수도 있는 거점 이동이었다.

꼭두새벽부터 시작했던 준비는 해가 중천에 떠서야 마무리되었다. 요한은 몇 번이나 확인을 마친 뒤에 완료 신호를 보냈다.

-여기는 전위, 그럼 출발할게?

“그래.”

쌓아뒀던 폐차 방벽이 구르릉,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이곳을 수리하는 것은 남겨진 사람들의 몫. 캠프 안에 남겨진 건설기계들도 충분하니, 아마 어려운 일은 아닐 터다.

고속도로를 타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한 요한 일행은 부평구청역 근처에서 잠시 전진을 멈춰 세웠다.

떠나기 전, 반드시 들르라는 용병단 노인의 신신당부 때문이었다. 어차피 가는 경로에 포함되어 있었기에, 요한은 중간에 일행을 멈춰 세웠다.

말끔하게 치워진 거리 위에 노인이 그를 배웅나와 있었다. 여전히 호쾌하고, 시원시원한 표정으로.

노인은 요한을 보며 손을 내밀었고, 요한은 기꺼이 그 손을 붙잡았다.

“즐거웠습니다.”

“그래도 같이 가자는 말 한 번쯤은 권할 줄 알았는데.”

노인의 볼멘소리에도 요한은 그저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한 달 넘게 같이 지냈던 사람들도 믿지 못해 거르고 걸렀다. 고작 며칠 함께 싸우고 도움을 받았다고 최종 쉘터에 데려갈 정도로 요한은 무르지 않았다.

물론 아쉽기는 했다. 전투원들이 많이 상한 만큼, 용병단의 전투력은 자신들에게는 아주 든든할 터였다.

그들은 용맹했고, 의리를 알았고, 신용을 아는 이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들과 별개로 그 캠프 안에는, 미지의 변수가 너무 많았다.

가령,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는 사이비 종교 캠프 출신 생존자들 같은.

“노인분 혼자라면 고려해 보지요.”

“네 똥이다, 인마.”

노인이 주먹 감자를 선보이며 요한에게 구깃구깃한 종이를 건넸다.

“어디로 가는지 물어도 대답해줄 리가 없고, 혹시 무슨 일이 있어서 FM 무전기 채널을 바꾸게 되면 저 순서로 바꿀 테니까, 거래할 일 있으면 연락해라.”

“예.”

“그리고 이거.”

노인이 상자 하나를 건넸다.

“작별선물이다. 애송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