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끄아아악!
아악!
이제는 겨우 손꼽을 만한 서생연 잔당들이 몸에 불이 붙은 채 괴로워하며 달려 나왔지만, 이어진 사격의 희생양이 될 뿐이었다.
몇몇은 옥상으로 나와 발버둥 치다가 쓰러지고, 몇몇은 창문에서 뛰어내린 채 온몸에 바람구멍이 났다.
완벽한 승리였다.
화공과 일익포위의 화려한 조화는 단 한 명의 생존자도 허락하지 않았다.
타오르는 불길 가운데 2층, 테라스 건너로 개백정이 서 있었다. 이미 불길이 몸을 녹이기 시작했는데도 개백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목젖이 보일 정도로 크게 웃어젖혔다.
그의 손에는 얼굴이 터진 지니가 기절한 채 붙잡혀 있었다. 놈이 터벅터벅 테라스 쪽으로 걸어 나왔다.
“사격중지.”
요한이 무전을 쳤다. 만약 놈을 생포할 수 있으면, 누구보다 끔찍하고 고통스럽게 죽여 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뭐라도 해 봐, 개백정.
발버둥 치고 발악해.
이름값은 해야지.
완벽한 외통수다. 이중 삼중으로 걸어놓은 함정에 걸려들었고, 퇴로는 없다.
전생에서는 네가 이겼지만, 이번에는 내가 이겼어.
요한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섬뜩하리만큼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미소는 금세 멎었다.
놈이 마지막에 선택한 것은 발악도, 발버둥도 아니었다.
개백정이 자신이 가진 흉기로 지니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제 몸을 태우는 화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제 연인을 반죽으로 만드는 데에만 여념이 없다.
놈이 선택한 것은 싸움에 진 개를 벌하는 거였다. 마지막까지 개백정답게.
수색 조원들이 그 기괴한 상황에 당황해서 그대로 몸이 얼어붙었다.
마침내 개백정은 난도질 된 지니에게서 머리를 떼어내더니 입꼬리를 귀까지 들어 올리고선 제 머리 위에 흘러내리는 피를 들이부었다.
실로, 광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놈의 모습은 얼마 못 가 완전히 염화에 휩쓸렸다.
* * *
불길은 꼬박 이틀을 타올랐다.
옆 건물까지 집어삼키고 나서야 더 이상 태울 게 없어진 불길의 움직임이 멈췄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사람들은 그저 넋이 나간 채 그 불길을 바라봤다. 누구도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누군가 자리를 뜨려 하면 수색 조원들의 위협사격이 이어졌다.
화장실 등 볼일을 볼 때도 반드시 수색 조원과 동행해야 했다. 사람들은 당황했고, 영문도 모른 채 붙잡혀 있었다.
전투는 끝났다.
서생연과의 짧지만, 그 어느 전투보다 길고 치열하게 느껴졌던 전투가 막을 내렸다.
전투는 막을 내렸지만, 생존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더 중요한 마무리가 남았다. 새롭게 시작하기 위한, 자격을 시험하는 시간은 끝났다.
다가오는 것은 수술대.
썩은 살을 도려낼 시간이다.
요한은 확인사살을 위해 수색조 캠프를 들어갔다가 나왔다. 개백정의 시신을 확인하고 부관참시하는 심정으로 시꺼멓게 변한 시신 위에 칼질이 더해졌다. 그제서야 요한은 승리를 실감했다.
요한이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생존자들을 향해 걸어왔다. 그를 보는 시선은 각양각색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원망을, 어떤 사람들은 존경과 감사를, 어떤 사람들은 두려움과 불안을 품고 있다.
원래는 수희와 진수의 사건을 두고 2차 쉘터로 이동할 인원을 걸러내려고 했다. 두 사람에게 각각 변론하게 한 뒤, 자신이 진수의 편을 들고 자신의 반대편에 서는 사람들을 솎아내려 했다.
하지만 그 방법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절반은 의도했고 절반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완벽한 시험대가 만들어졌기에.
평화로운 시절과 불행한 시절을 모두 겪어봐야 사람의 바닥을 알 수 있다. 평화로운 시절은 일부러 만들었고, 불행한 시절은 어쩔 수 없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결국 시험은 끝났고, 자신은 여전히 살아남았다.
요한이 그들의 앞에 서서 수술 도구를 들어 올렸다.
상당수의 사람이 동시다발적으로 문제를 일으켜 캠프 전체를 위험에 빠진 이 시점에서 썩은 살을 골라내는 가장 적절한 수술 도구.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자신의 지시를 지키려고 시도했을 사람, 모든 상황을 지켜본 사람, 그럼에도 살아남은 사람. 그리고 그 누구보다 냉정하게 살을 도려낼 사람.
“서준 아저씨.”
“어?”
“앞으로 나오세요.”
서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앞으로 걸어 나왔다.
“여기서 캠프에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을 전부 골라내세요.”
“뭐, 뭐라고?”
“제 지시에 반박한 사람, 협조하지 않은 사람, 잘못된 판단으로 캠프를 위험에 빠트린 사람, 제 일신을 위해 동료를 팔아넘긴 사람, 분탕을 치는 사람. 전부 다요.”
그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왜 자신에게 이런 걸 시키는지는 모르겠다는 표정.
말없이 요한의 무감정한 눈을 바라보던 서준은 문득, 소름 돋는 가설이 떠올랐다. 아마도 그는, 이 상황을 모두 아는 것도 모자라, 예측까지 했을지도 모른다고.
“···그게 설령 캠프의 리더더라도 상관없냐?”
“상관없습니다. 이 캠프는 버릴 거니까요. 앞으로 캠프 리더라는 직책은 없습니다.”
“후··· 그래.”
서준은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더니 홱 몸을 돌렸다. 그러고선 마르코와 수희를 가리켰다.
“일단 저 파크타운 캠프, 빌어먹을 두 연놈부터 어떻게 좀 하자.”
“사유는요?”
“동료를 팔아먹은 놈들이야.”
서준에게 지목당한 두 사람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들로서도 절대 바랐던 상황은 아닐 거다. 사실 그들의 행동은 어리석은 걸 떠나서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아무리 상황이 절망적이었다고 한들, 만약에라도 그들이 구조될 가능성을 감안했다면 그래서는 안 됐다.
눈앞의 위기를 어떻게든 넘기고 살아남고 싶었겠지, 이해를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계속하세요.”
요한의 말이 떨어지자, 서준은 갑수와 그의 호위, 그리고 지시에 조금이라도 불만을 가졌던 이들을 모두 골라냈다.
요한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도 모르면서 일말의 고민도 없이 쭉정이들을 색출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준이 가리킨 것은 정환이 뒤에 숨어 있던 아영이었다.
“자, 잠깐만요. 아저씨.”
“미안하지만, 저 친구 때문에 정환이나 다른 사람들이 위험해진 것은 사실이야.”
정환이 서준을 제지하려 하자, 정환을 요한이 가로막았다. 일단 한 번 권한을 준 이상 중간에 제지해서는 안 된다.
한 번 누군가 토를 달기 시작하면 또다시 가타부타 시끄러워질 터다.
이의를 제기하려던 정환이 요한의 손짓에 움직임을 멈췄다. 요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수색 조원들이 아영이를 골라낸 사람들의 무리에 합류시켰다. 정환을 붙잡고 있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골라내진 사람들은 장장 스무 명에 달했다. 서생연과의 전투 중 죽은 사람들을 포함해서 이제 남은 사람들은 칠십이 안 되는 수였다.
요한이 골라내진 사람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크게 말썽을 일으킨 사람부터 자잘하게 말썽을 일으킨 사람들까지, 간접적이든 요한이 한 번씩 주시했던 인원들은 대부분 섞여 있었다.
“이들과 가족, 연인, 친구 관계에 있는 분들도 모두 골라내세요.”
수술은 끝난 게 아니었다. 요한은 후환까지도 제거했다. 이들과 연결점이 있는 사람을 쉘터로 데려간다면, 정보가 유출될 소지가 있었다. 서준이 명부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여덟 명의 사람들을 더 골라냈다.
모든 색출 작업이 끝나자 요한은 그들 앞에 섰다. 그의 손에 그러쥐어 진 총의 기세가 흉흉했다. 사람들은 침을 삼키며 불안감에 떨었다.
당장에라도 그가 총기를 들고선 자신들을 향해 난사할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요한의 손을 정환이 붙잡았다.
“요한 형.”
“말해.”
“아영이는 어쩔 수 없었잖아요. 아직 학생인데 어떻게······.”
요한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모든 상황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결정만 하면 되는 문제였다. 요한이 그에게 되물었다.
“네가 책임질 수 있겠어?”
묻는 사람도 어떤 책임인지 말하지 않았고, 듣는 사람도 어떤 책임이냐고 되묻지 않았다. 그저 정환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이 턱짓하자 아영이 비척비척 걸어와 정환의 곁으로 옮겨 갔다.
“저, 저기······.”
예상했던 대로, 누군가 한 명이 다시금 요한을 불렀다. 병원 캠프에 초창기부터 있었던 사내였다.
요한도 이름과 얼굴을 명확히 기억할 정도로 오랜 기간 함께한 사내. 그는 요한이 인정을 베푼다고 판단했는지 자리를 이탈해 요한에게 다가왔다.
“갑수 형님이 그래도 캠프에 한 기여도가 있는데 어떻게 안 되겠어? 내가 책임질 테니······.”
하지만 되돌아온 요한의 대답은 싸늘했다. 그보다 훨씬 윗배의 사내였지만, 요한은 존댓말조차 하지 않았다.
“당신이 뭔데?”
“응?”
“당신이 뭔데 책임을 진다 만다 하느냐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사람이 있네. 끌어내.”
정환을 대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온도 차였다. 그가 뭐라고 변명할 새도 없이 그는 수색 조원들에게 끌려 나왔고, 아영이가 있던 자리로 옮겨졌다. 그는 자신을 향해 들이대는 총구를 보며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우, 우리를 어떻게 할 셈이오?”
갑수의 눈동자는 불안감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그동안 캠프의 리더라는 이유로 힘주고 다니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눈빛이다.
“어떻게도 하지 않을 겁니다. 다만 함께하지 않을 뿐이죠. 저희는 이제 캠프를 더 안전하고 견고한 곳으로 옮길 겁니다. 여러분도 그냥 갈길 알아서 살아가시면 됩니다. 대신 캠프는 다른 분에게 넘길 겁니다. 이 캠프에서 살려면 새로운 리더를 받아들이셔야겠죠. 어차피 남은 물자도 없을 거니 순순히 받아들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잠깐만, 물자를 전부 가져간다고?”
요한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가져갈 생각인데, 문제가 있습니까?”
“남아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라고. 요한 군.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시오. 이건··· 너무 하지 않소.”
“이상하네요. 목숨을 구해 드린 것만으로도 감사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요한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질문은 요한으로서는 아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요청이었다.
“저희의 약속은 이제 끝났습니다. 저는 물자를 제공하는 대신 여러분은 제 통제에 따르기로 약속했죠. 여러분이 제 통제에 따르지 않았으니 제가 물자를 제공할 의무도 없습니다. 다만, 여러분을 구한 것은 아직 약속이 깨졌다는 통보를 하지 않아서 구한 것일 뿐이고요. 저는 마지막까지 제 약속을 지켰습니다.”
거래에는 신용이 생명이니까요.
요한이 덧붙인 마지막 말에 조금씩 웅성거리던 쭉정이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그 와중에 뒤에서 구경하던 노인이 호탕하게 웃으며 훌륭하다고 손뼉을 짝짝 쳤다.
“다시 말하지만, 저와의 약속은 여기서 끝입니다. 그동안 즐거웠고, 앞으론 보지 맙시다.”
“자, 잠깐······.”
“노인분, 이 사람들 다 데려가셔도 됩니다.”
노인이 껄껄 웃으며 사람들 앞으로 다가왔다. 나이는 제법 들어 보였지만, 특유의 체격이나 험악한 분위기 때문에 다들 긴장감이 역력한 표정으로 빳빳하게 몸을 굳혔다.
노인은 마치 가축을 고르는 듯한 표정으로 생존자들의 턱을 들어 보이기도 하고 여기저기 만져보기도 하다가 뒤를 돌았다.
“그나저나, 쭉정이들만 보내는 건 너무하지 않아? 이거 원 손해 보는 기분인데.”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 이 사람들은 거래의 대가가 아닙니다.”
“어? 그래?”
“거래의 대가는 캠프와 드리기로 한 좀비의 모든 정보까지고요, 두 종류의 물건과 이 사람들을 처리해 주시는 게 그 조건입니다. 변종들에 대한 정보는 그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귀한 정보니까요.”
용병단 노인이 이해했다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과연 그런가.
“그럼 모두 데려가시죠.”
“잠깐, 요한.”
요한이 사람들을 인수하려 하자, 서준이 끼어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둘째 치더라도, 저 두 사람은 저대로 보내기엔 위험하지 않냐? 동료를 팔아넘긴 자들인데.”
서준의 말을 들은 요한이 부하들을 움직이려던 노인을 제지했다.
“저들을 죽이고 싶으십니까?”
“죽여야 한다고 생각해.”
서준의 말에 두 사람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