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서바이벌-92화 (92/176)

<92화>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싸움을 끝내는 것. 그것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었다.

몇 시간 동안이나 길고 지루한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여인의 목을 자른 이후에 한동안 잠잠했던 놈들은 시체를 토막 내 던지는 만행을 저지른 이후부터는 더 이상 자신들을 도발하지 않았다.

저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모르긴 몰라도 언제 습격당할지 모를 상황에서 여자를 겁탈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다. 오히려 사격하기 좋은 장소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겠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석양이 지고 푸르스름한 어스름이 내려앉은 뒤, 어둠이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무전이 들려왔다.

-애송이, 나다. 여기 상동역 근처까지 도착했다. 이거 넘어가도 되냐?

“기다렸습니다. 네. 넘어서 S존 주차장으로 오세요.”

잠시 후 용병단 노인과 용병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노인이 요한에게 손을 내밀자 요한이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물건은 구하셨습니까?”

“그럼 인마, 우리가 괜히 용병이겠냐?”

“몇 개나 구하셨습니까?”

노인이 손가락을 세 개 들어 보였다.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적군요.”

“구하긴 더 구했는데. 배터리가 없어. 충전기라도 있으면 좋겠구만. 철구야, 그거 줘라.”

노인이 턱짓하자 철구가 노란 이삿짐 박스를 내려놓았다. 상자를 열자 그 안에 야시경과 수류탄이 세 개씩 들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다른 물건은요?”

“그건 아직 못 구했어. 이것부터 구해 달라며?”

“네.”

“좋아. 약속 지켜라.”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생각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물건이 도착했다. 근처의 모든 지리를 꿰고 있고, 원하는 물건이 있으면 뭐든지 구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그 캠프가 여기군. 널찍하니 좋구만.”

“예. 지금 가족재단에도 사람이 넘치니 이곳으로 옮겨오시면 될 겁니다.”

“근데, 영 방벽이 부실해서. 참, 사람은 몇 명이라고 했지?”

“정확하진 않습니다. 아마 못해도 열 명은 넘지 않을까요.”

“그렇군. 알았다. 매정한 놈.”

“그런데 사람들은 어디다 쓰시려고요?”

“어디다 쓰긴, 용병으로 만들고 일 부려먹는 거지. 얼빠진 놈들 정신교육은 내가 잘하거든.”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큰 상관은 없었다. 도축해서 잡아먹는 것만 아니라면야. 이미 버리기로 결심한 사람들이야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었으니까.

“말했지만, 우린 참전 안 한다.”

“괜찮습니다.”

이건 자신의 싸움이고, 이들은 앞으로 쭉 함께할지 아닐지 결정된 사람들이 아니다. 필요 이상으로 빚지는 것은 곤란했다. 요한이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하고 수색 조원들에게 무전을 쳤다.

“스위퍼, 하진, 혁, 옹 상병 주차장으로. 스위퍼 자리엔 세리가, 옹 상병 자리엔 정환이 들어간다.”

요한의 부름에 네 사람이 금방 도착했다. 요한이 그들을 모은 이유를 설명했다.

“오늘 밤, 기습한다.”

“응? 이렇게 다섯 명이?”

“그래. 지금부터 작전 설명할 테니 잘 들어.”

스위퍼의 물음에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브리핑을 시작하자 네 명이 숨을 죽였다. 노인과 용병단은 재밌는 구경이 났다는 듯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요한의 손끝이 수색조 캠프 창가를 향했다.

“저 안에 불 켜져 있는 것 보이지? 보다시피 수색조 캠프는 자체적으로 전기가 공급되지. 시야가 밝으니 굳이 해가 져도 야시경이나 손전등을 쓰고 있지 않을 거라는 뜻이야.”

수색조 캠프는 독립형 태양광 시스템이 있어서 전기가 들어간다. 자동차 배터리가 열 개 분량 충전되어 있으니 어두운 밤에도 불을 켜기엔 충분하고도 넘칠 거다.

게다가 놈들은 지형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 저렇게 시야가 밝은 상태가 지속되면 어둠에 대한 대비는 취약할 수밖에 없다.

요한의 손가락이 점점 위로 올라가 옥상의 태양광 발전판 옆 구석을 가리켰다.

“저 박스. 배전반 박스 안에 배터리, 컨트롤러, 퓨즈, 인버터가 다 들어 있어. 저 선만 끊으면 순간적으로 전기를 끊을 수 있어. 밤이 돼서 시야가 완전히 어두워지면 화염병과 수류탄으로 배전반 박스를 타격하고 놈들의 시야가 끊기면 순간적으로 급습한다.”

환하게 들어오던 빛이 사라진 순간, 찰나의 시간 동안 시야는 완전히 암흑이 된다. 그사이 준비된 야시경으로 암전에 적응된 수색조가 침투한다. 생각지도 못했던 작전에 스위퍼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도대체 이 녀석의 머릿속엔 뭐가 들은 거지?

“하··· 저걸 또 저런 식으로 이용할 줄은 몰랐네. 근데 괜찮을까? 놈들이 손전등 찾고 어쩌고 하는 시간에 안에 있는 놈들을 다 처리하기엔 무리일 것 같은데.”

“다 처리할 필요도 없어. 입구 쪽이 가장 경계가 삼엄할 거다. 불이 꺼지고 시야를 확보할 때까지 1분. 딱 1분이면 눈에 보이는 적들은 전부 제압할 수 있으니까. 입구에 자리를 잡고 외곽의 조원들이 동시 사격으로 혼란을 준다. 그사이에 직진 거리로 지하실까지 가서 사람들만 빼 오면 돼.”

“그다음은?”

“싹 다 태워 죽이는 거지.”

그의 이어지는 질문에 요한이 살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빠지면 이번엔 놈들이 불타 죽을 걸 걱정해야 할 거야.”

순간적으로 작전을 듣던 사람들의 등골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하진, 지금부터 저기 옥상에 던져 넣는 연습 해. 첫 번째로 화염병을 던지고, 화염병으로 전기가 안 끊기면 이 수류탄으로 아예 배전반 박스째로 날려버려. 옹 상병, 너는 하진을 엄호하고 외곽에서 대기하는 조원들이 작전이 시작되면 일제사격을 할 수 있게 통제해. 혁, 스위퍼는 나랑 함께 적 입구 근처까지 가서 대기하다가 전기 끊어지자마자 진입한다.”

“오, 또 이렇게 셋이네?”

스위퍼가 기쁜 듯 중얼거렸고 호명된 사람들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도저히 실패할 것 같지 않은 작전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 * *

어둠이 내려앉았다. 달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태양이 떠오르기 위해 막 기지개를 켠 시간. 하루 중 가장 어두운 시간. 오로지 수색조 캠프만이 빛을 밝히고 있었다.

졸졸졸.

요한 일행은 그늘을 이용해 시야의 사각에서 천천히 건물 주변을 돌며 휘발유를 뿌렸다. 금방 날아가 버리겠지만, 시간은 충분했다.

충분히 건물 주변을 적신 이후에 사각지대 중에서 가장 입구에 가까운 곳에 한 통의 휘발유를 세웠다. 뚜껑은 열어둔 채였다.

요한과 혁, 그리고 스위퍼는 야시경을 낀 채 천천히 벽에 바짝 붙었다. 시큼한 기름 냄새가 코끝을 찔러 왔다. 신호가 오르길 기다리는 시간이 마치 억겁의 시간과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야시경으로 보이는 세상은 황색 빛이었다. 황색 빛 사이에 붉은색 인영이 선명하게 비쳤다. 이미 야시경을 쓰고 사격하는 연습도 충분히 했다. 남은 것은 실전뿐이었다.

한 시간 같은 일 초, 일 초가 흘러갔다. 그리고 마침내,

휙, 쨍그랑.

하진이 화염병을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의 심장박동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수류탄은 폭발 효과는 확실하지만, 그 소리 때문에 적들이 낌새를 눈치챌 수도 있었다. 웬만하면 지금. 한 번에 성공하기를.

팟!

불이 꺼졌다. 타오른 화염병의 불길이 배전반에서 나온 전선을 집어삼켰다.

전기 공급이 중단되자마자 요한이 쏜살같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입구에 가장 많은 적이 몰려 있었다. 둘, 셋··· 여덟 명. 여덟 명의 침입자는 갑자기 꺼진 불에 당황하며 몇몇은 야시경을 장착하기 위해, 몇 명은 배낭에 넣어 놓은 손전등을 꺼내기 위해 허둥지둥하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벼락같은 탄환들이 쏟아져 나갔다.

두두두두!

반자동 연발 사격이 이어졌다. 총소리, 비명, 침입자를 알리기 위해 소리 지르는 소리가 시끄럽다. 여덟 명이 쓰러지는 데는 일 분은커녕 삼십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스위퍼!”

“라저!”

요한이 호명하자 스위퍼가 계단을 잽싸게 반 층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준비하고 내려오는 사람들을 타격해 일정 시간을 벌어줄 거다.

혁과 요한은 동시에 지하실로 뛰어 내려갔다. 지하실에는 다섯 명이 서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전부 엎드려 있었다.

다섯 명의 적이 있으나 손전등은 하나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손전등 하나로 날쌘 두 사람을 막을 순 없었다.

요한이 침착하게 손전등을 들고 있는 놈의 머리에 총알구멍을 박아넣었다.

연이어 혁의 지원사격이 쏟아졌다. 다섯 명의 사람들을 처리하는 데, 15초.

뒤늦게 꺄아악대는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요한과 혁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며 외쳤다.

“전부 나가요! 건너편 건물로 뛰어!”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빠져나갔다. 질서정연하지 않아 밟히고 쓰러지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상관없다. 그들이 모두 빠져나갈 시간은 충분했다.

요한과 혁은 곧바로 스위퍼의 자리로 돌아가 스위퍼를 지원했다. 꺾인 계단 위쪽으로는 벌써 몇 구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

이 층과 삼 층에서도 지원사격이 이어졌다. 일 층으로 모든 적이 몰리지 않게끔 수색 조원들이 사격을 시작한 것.

몇 분 동안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마지막으로 박 노인이 서준을 부축한 채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이제 안에 아무도 없네.”

박 노인은 그 와중에도 상황이 끝났다는 걸 똑바로 전파했다. 역시나 제 몸 하나 간수하기 바쁜 사람들과는 확연히 두드러지는 노련함이다.

위에서 사격전을 벌이던 두 사람을 더 쓰러트린 후, 요한은 철수 지시를 내렸다.

“철수!”

순조롭다.

그러나 그때, 계단 콘크리트 위쪽으로 한 명의 사람이 손전등도 없이 빠르게 접근했다. 야시경으로 보기에도 확연히 짧아 보이는 단신의 사내.

‘난쟁이다.’

사격은 불가능한 위치. 난쟁이의 손에는 검은색으로 비치는 동그란 물체가 들려 있었다.

수류탄이다. 순간적으로 요한의 시간이 멈췄다. 또 그 감각이다. 자신에게만 시간이 느리게 느껴지는, 그 기묘한 감각.

요한이 순간적으로 혁의 손을 붙잡았다. 스위퍼가 반대쪽 손을 붙잡은 건 거의 동시였다.

세 사람은 동시에 계단 난간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들이 있던 자리에 곧바로 수류탄이 낙하됐다.

데구르르······.

쾅!

폭음이 지나가고 세 사람이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누가 먼저랄 새도 없이 건물 밖으로 뛰쳐나간 뒤, 스위퍼가 지포 라이터를 켜 휘발유 통을 발로 걷어차고 그 위로 지포 라이터를 집어 던졌다.

화르륵-!

불길이 솟는다. 마치 불꽃이 도화선을 따라가듯, 넓고 흰 도화지에 붉은색을 붓칠하듯, 우아하게 곡선을 그려나갔다.

이제 끝났다, 라고 안심하는 순간 다시 한번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위험신호다.

“엎드려!”

텅!

온몸에 불길을 달고 걸어 나온 난쟁이가 유탄발사기를 쏘아냈다. 난쟁이는 새빨간 화염에 온몸이 녹아내리면서도 여기저기에 유탄을 발사해댔다.

녹아내린 안구 때문인지 목표를 정확하게 타격하지도 못했지만, 그가 쏘아대는 눈먼 유탄들은 그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유탄이 불꽃처럼 비산한다.

목표물도 잃은 채.

흡-

요한이 강한 통증에 절로 새어 나오는 신음을 억눌렀다. 유탄이 등을 스쳐 지나갔다. 방탄복 안쪽으로 화끈거릴 만큼 큰 통증이 느껴졌다.

이윽고 불붙은 발사기가 펑! 소리와 함께 터져나갔다. 쏘아져나간 유탄이 난쟁이의 전신을 난도질했다. 마침내 놈의 발광과도 같은 사격이 멈췄다.

엎드려 있던 세 사람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시선이 불붙은 수색조 캠프를 향했다.

염화의 주인이 포효한다. 이윽고 지옥에서 올라온 듯한 불길이 건물의 주변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하진이 계속해서 던져 대는 화염병에 건물 안 여기저기서 화마가 솟구쳤다. 수색조의 상징이었던 캠프가 이제는 지독한 열화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말 그대로 아비규환, 불지옥이었다.

0